역사는흐는다

[스크랩] 4부 11화 고려시대와 후3국

오늘행복스마일 2018. 12. 27. 12:46

 

4부 11화 고려시대와 후3국

 

◎ 묘상苗床의 각축角逐

 

 

                 

                     후 3국 강역도                                  백제 부흥운동도

                                                                     * Daum Blog 인용

 

* 후 3국은 대한역사의 과도기다. 역사학자는 이런 시대를 ‘묘상苗床의 시기’ 라고 하기도 한다. 한 나라 또는 한 시대가 스러지고 새로운 시대를 준비하는, 묘판에서 싹이 트는 시대라는 뜻이다. 백제와 고구려가 나당연합군에 의해 멸망하고 그 유민들은 강력한 저항운동을 벌인다. 고구려를 이어받은 대조영의 대진국, 견훤의 후백제, 궁예의 후고구려가 일어난다. 신라왕조 말기에는 국정이 문란하여 통치력을 잃었으므로 4방에서 도적들이 횡행하고 사회가 혼란하였다. 이에 고구려와 백제 부흥의 명분을 세워 영웅들이 일어선다.

이 시대의 특징은 우리 고유의 신앙이 그 어느 때 보다도 더 활발하게 정치적으로 발현되는 일이다. 왕조가 멸망하자 현실적인 사회의 구심점이나 이상이 사라졌으므로 사회는 미륵신앙과 풍수지리의 등 신앙으로 염원을 승화한다. 이에 도참설은 왕조말기의 도탄에 빠진 백성들을 구한다는 명분 아래 민간신앙과 결합하여 또 새로운 하나의 정치적 기반을 일궈낸다. 궁예는 스스로 미륵부처라고 했다. 신앙은 대물린 가난과 왕실을 비롯한 관리들의 횡포 그리고 착취에 시달린 백성과 민중의 바램을 등에 업고 이상국가 실현을 꾀한다.

 

* 견훤의 탄생과 왕건과 도선국사의 이야기는 설화說話다. 특히 도선국사는 나이 들어 전남 광양의 옥룡사에서 거의 두문불출杜門不出(문 밖을 나가지 않음)하였고, 도선국사의 스승이었다는 중국의 일행스님은 당나라 중기中期의 스님으로 도선국사의 출생 100여 년 전에 입적入寂(돌아가심)하였으므로 도선국사를 직접 지도하기는 불가능하다. 또 왕건이 태어난 해가 한기 8074년(AD. 877년)이므로 왕건이 16세 때 도선국사가 스승이 되어 가르쳤다는 한기 8090년(AD. 893년)은 도선국사가 입적하기 불과 4년 전이다. 게다가 스님은 한기 8093년(AD. 866년)에 지리산 자락 옥룡사에서 산문山門(불경강의)을 열고 입적할 때까지 산문을 벗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두 사람이 만났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의상대사의 수행길                  의상대사와 선묘낭자            의상대사의 귀국길

 

* 원효대사와 의상대사

 서유기 소설로 잘 알려진 삼장법사(당나라 태종이 구도의 길을 따라 인도에 가는 현장법사에게 내린 칭호)는 13세에 출가해 여러 이론에 통달하였으나 원전原典을 접하려 AD. 629년 인도로 유학길을 떠난다. 서유기는 삼장법사가 구도의 길을 떠난 일을 소재로 한 소설이다.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고 인도에 도착한 삼장법사는 인도의 여러 성지를 참배하고 대덕大德들을 찾아 불교와 학문· 예술을 익혀 한기 7842년(AD. 645년) 당나라 수도 장안으로 돌아오면서 불교사는 일대 전환기(예전 경전을 구역舊譯, 삼장법사 이후를 신역新譯이라고 함)를 맞는다. 이 전환기에서 신라의 원효와 의상은 삼장법사를 만나기 위해 한기 7847년(AD. 650년, 진덕여왕 4년) 당나라 유학길에 올랐는데, 중도에 고구려 순찰대에 붙잡혀 3개월 감금당했다가 겨우 탈출하였는데 고구려 병사들은 의상과 원효를 신라에서 파견한 간첩으로 오해했다. 백제가 멸망(한기 7857년, AD. 660년)하고 난 다음해인 한기 7858년(AD. 661년)에 원효와 의상은 다시 유학길을 떠나 현재 화성시에 있는 남양반도 당항성에 이르러 무덤가에서古塚 잠을 자게 된다. 원효가 잠결에 목이 말라 물을 찾다가 무덤 속 바가지에 든 물을 달게 마셨는데, 날이 새자 간밤에 마신 물이 해골에 괸 물이었음을 알고는 기겁을 하며 토해내고 만다. 이 때 원효는, 사물 자체에는 정淨도 부정不淨도 없는데 모든 것은 마음에 달렸음을 크게 깨달아 유학을 포기하고 그냥 서라벌로 돌아간다. 이후 원효는 통불교를 제창하고 불교의 대중화에 앞장섰으며 서라벌 거리에서 이렇게 노래하였다.

“누가 내게 자루 없는 도끼를 주겠는가? 내 하늘을 받칠 기둥을 찍으리라!”

요석공주瑤石公主가 원효의 노래를 새겨듣고 원효를 요석궁으로 초대하여 동침한 바, 이두문자를 창제한 설총이 태어났다. 원효는 이를 두고 스스로 파계破戒로 단정하여 승복을 벗고 소성거사小性居士 혹은 복성거사卜性居士라 자칭하며 무애가無㝵歌를 지어 그 노래를 거리에 퍼뜨렸으며 이를 통해 불교가 민중 속으로 파고 들었다. 원효는 불교사상의 융합과 그 실천에 힘쓴 선구자며, 우리나라 불교 역사상 큰 발자취를 남긴 위대한 큰스님이다.

의상대사와 부석사 전설 그리고 선묘일화, 한편 혼자서 배를 타고 신라를 떠난 의상은 중국 당나라 산동반도의 신라방 법화원 인근 주막에 머물렀는데, 주막의 딸 선묘낭자가 의상의 귀골선풍貴骨仙風의 모습에 취해 청혼을 하였다. 목숨을 버리려는 의지로 청혼을 하였으나, 원효는 이미 출가한 몸으로써 결혼할 수 없다는 간절한 설득에 오히려 선묘낭자를 감화시켰고, 선묘낭자는 불교에 귀의하여 의상이 뜻을 펼치는데 그녀 자신이 도움이 되어야 되겠다고 스스로 결심하여 의상이 수도에 전념할 수 있도록 후견인 역할을 할 수 있게 해달라고 간청하였다. 의상은 삼장을 만나기 위하여 당나라의 수도 장안으로 머나먼 길을 떠나게 되면서 선묘낭자와는 헤어지지만 선묘낭자는 의상의 주위에서 의상의 수도생활을 돕는다.

의상은 장안에 당도해서는 그토록 염원했던 삼장법사의 문하생을 포기하고 지엄智儼의 문하에서 새로운 학문(화엄華嚴)을 공부하게 된다. 의상은 구법승 현수賢首와 더불어 지엄스님의 수제자가 되지만, 나당연합을 만들어 백제를 멸망시키고 이어 고구려까지 멸망시킨 당나라가 연합의 약속을 깨고 신라를 쳐서 속국으로 만들려한다는 정보를 알고 10년 만에 조국인 신라를 위하여 서둘러 돌아갈 것을 결심한다.

의상은 귀국하는 길에 선묘낭자의 집을 찾아 그동안 베풀어준 후의에 감사를 드리고 곧바로 배에 올랐다. 선묘낭자가 의상이 귀국한다는 걸 알고 급히 밤 새워 만든 가사장삼袈裟長衫을 전해주지도 못했는데 의상이 배를 타고 떠났다는 걸 알았다. 선묘낭자는 의상이 떠난 부두에 닿아 이미 멀리 사라져가는 배를 향해 의상대사에게 전해지기를 축수하며 가사를 던졌으며, 이어 자신도 의상대사가 무사히 귀국할 수 있도록 해룡이 되어 의산대사가 탄 배를 호위하기를 축원하며 바다 속으로 뛰어들었다. 귀국하여 부석사를 창건한 의상대사는 선묘낭자의 원혼을 위로하기 위하여 선묘각을 지었고, 도둑의 침입을 막기 위해 거대한 바위가 공중에 들려올라가는 이적을 배풀어서 부석사라 했다.

의상(원효는 6두품 출신)은 성골인 왕가 출신이라 기본적으로 왕실과 가까운 신분이었다. 고국 신라에 돌아와서 당나라의 침공 정보를 알려주고 화엄종을 보급하려고 양양 낙산사에서 첫 도량을 짓고 포교활동에 전념하는데 당시 화엄사상은 새로운 사상이었다. 화엄사상은 인도문화와 중국문화의 장점을 접목한 것이고, 부처님이 21일 동안 깨달음을 얻을 때 느끼는 그 순간이 화엄, 화엄종은 비로자나불을 모시는 종파로 일체 천지만물을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의 현현顯現으로 보며, 불타의 깨달음의 경지에서 전 우주를 절대적으로 긍정하는 통일적 입장에 있다.

하나 안에 일체一切요/ 많음 안에 하나이며/ 하나가 곧 일체요/ 음陰이 곧 하나이다/ 한 띠끌 속에 시방十方을 머금고/ 체體의 티끌 속 또한 이와 같다

해동 화엄종 종조 의상은 신라 문무왕 16년(한기 7873년, AD. 676년) 화엄종의 본산을 삼기 위하여 부석사를 창건한다. 부석사는 화엄종 도량이지만 아미타불이 주불이다. 파격적으로 아미타불에 항마촉진降魔促進하는 자세를 취하려 했고 무량수전 앞에 안양문을 세워 극락세계를 보여 주고자 했다.

 

                    

 

 무량수전을 바라보며 그 앞 뜰에 누워있는 석룡(해룡, 선묘낭자의 화신化身), 일본의 국보급 문화재로 지정된 의상대사의 그림, 또 다른 이야기는 의상이 화엄사상을 전파하려고 그 곳에 부석사를 지으려하자 토착세력이 극력 반대 그러자 용으로 변한 선묘낭자의 도움으로 커다란 바위가 공중에 떠서 그들을 진압하여 무사히 창건 할 수 있었다 하여 부석(浮石)사라고 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최근, 부석사의 석룡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최첨단 레이다 탐사 결과 실제 길이가 무려 13m에 이르는 거대한 석룡을 발견, 자연 암반 형상으로 용의 등줄기가 솟아있었고, 밑으로 내려가며 좁아지는 꼬리의 형상, 전체적으로는 조금 휘어있는 석룡의 형태다. 영원히 묻혀버릴 수도 있었던 용의 실체가 드러난 것. 꼬리는 땅을 향하고 머리는 부처가 있는 본존불로 향하고 마치 하늘로 승천하려는 형상을 한 부석사 수호신 석룡

  

 

                           부석사 선묘각                                           원효대사

 

속성 설薛, 법명 원효. 경산시 압량(押梁, 경산군慶山郡)에서 태어난 원효는 어릴 때 이름은 서당誓幢이며, 스님이 되어 원효라는 이름을 받기 전에는 휼륭한 화랑이었다. 당시에 화랑의 신분은 장차 장군이 되거나 높은 벼슬에 오를 수 있는 선택된 젊은이들의 무리였다. 원효대사는 한글 이전에 사용한 이두문 창제학자 설총薛聰의 아버지다. 나이 32세 되던 해 한기 7845년(AD. 648년, 진덕여왕 2년) 황룡사皇龍寺에서 승려가 되어 수도에 정진하였다.  

한기 7858년(AD. 661년) 원효대사와 의상대사는 당시 불교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고 있는 당나라로 유학을 가기로 결심을 하고 배를 타기 위하여 백제로 가다가 밤이 늦어서 이슬을 피할 수 있는 굴 속에서 자고 가기로 했다. 밤에 잠에서 깬 원효대사는 너무나 목이 말라서 물을 찾다가 옆의 그릇에 담긴 물을 아주 달게 먹었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에 깨어난 원효대사가 다시 물을 찾다 해골에 담긴 썩은 물을 발견하게 되었다. 해골에 담긴 물이라는 것을 아는 순간 구역질을 하고 말았다. 세상에 이럴 수가! 순간, 진리를 깨우친 원효는 당나라 유학을 포기하고 발걸음을 되돌렸다.

 마음이 일어난 즉 여러가지 법이 생겨나고/ 마음이 없어지니 해골과 바가지가 둘이 아니로구나/ 3계가 오직 마음뿐인데/ 당나라에 가나 신라에 있으니 항상 그 마음인 것을 …

 원효대사는 당나라에 유학할 생각을 버리고 곧장 서라벌로 돌아와 깨달은 바를 책으로 썼다. 그것이 '화엄경소', ' 대승신기론', '십문화정론' 이다. 그 후 원효는 절에서 나와 전국을 돌며 부처님의 가름침을 폈고, '무내가' 라는 노래를 만들어 모든 대중이 쉽게 염불을 할 수 있도록 하였다. 귀족만이 차지하던 불교를 온 백성이 누리도록 하자는 것이 원효의 취지였다. 겉치례를 배제하고 일반 백성들과 더불어 생활하였으며, 무열왕의 딸 요석공주와 인연을 맺어 설총(이두문자 완성자)을 낳기도 하였다. 귀족과 승려들은 그를 파계승이라 백안시하였으나 왕과 고승들에게‘금강삼매경’에 대한 강의를 하였다. 일반 백성들로부터는 ‘살아있는 부처(생불生佛)’라 칭송을 받았다. 한기 7883년(AD. 686년), 70세의 나이로 입적하자 신라인들은 통곡하며 그의 죽음을 애도 했다.

 

* 후3국 역사연대표

 

     시대

      후백제

              후고구려

      통일신라

 * AD. 867

  * 견훤, 상주

    가은현 출생

 * 870

  * 궁예 출생

 * 876

  * 도선, 왕륭에게 명년에

    3한 통일 인물 출현 예언

 * 877

  * 왕건 출생

 * 889

   * 아자개, 상주

     장악, 장군 호칭,

     수군 견훤 독립

  * 상주

    원종,

    애노의 난

 * 891

  * 궁예, 죽주 도둑 기훤 투신

 * 892

  * 견훤, 무진주

   (전남 광주) 장악

  * 궁예, 북원(원주) 양길 투신

 * 893

    왕 호칭

  * 도선, 왕건 교육

 * 894.2

  * 최치원

    시무10조

    진상

         10

  * 궁예, 명주(강릉)에서 장군 호칭

 * 896

  * 왕륭 왕건 부자 귀순

 * 897.6

  * 진성여왕

     선위

 * 898

  * 궁예, 송악성 천도, 팔관회 개최

 * 899.7

  * 양길, 궁예 공격 대패

         11

  * 최치원 면직

     해인사 은둔

 * 900.10

  * 견훤 완산 도읍,

    (후)백제 건국

  * 궁예 경기 남부 충북 장악

 * 901.8

  * 견훤,금성군 남쪽  10여개 성 공격,

   대야성 공격 실패

  * 궁예 왕 호칭, 후고구려 건국,

     영주 부석사 신라왕 화상

     칼로 벰

 * 904

  * 궁예, 백관 설치,

    국호 마진, 연호 무태

 * 905.2

  * 별이 비오듯

     쏟아짐

 * 905.7

  * 궁예, 철원 천도 연호 성책

 * 908.2

  * 동방에서 혜성 출현

 * 909

  * 궁예, 왕건 해군대장 나주출전

 * 911

  * 궁예, 국호 태봉, 연호 수덕만세

  * 효공왕 정사문란,

     대신 후궁 척살

 * 913

  * 궁예, 왕건 파진찬 겸 시중 임명,

    수군 통솔 좌천

 * 914

  * 왕건 역모죄, 한림랑 최응 구함

 

 

   

           부여 백화정과         평양 대동문             고구려  성산산성         일본 교토 정교사

           고란사          * Daum Blog 인용             안내비석              백제 아미타 8대보살도

 

 # 후백제 견훤(진훤)의 출생설화(이야기 한국사, 교양국사연수회 인용)

 

옛날 광주(광역시)의 북촌에 한 부자가 살았다. 그에게는 딸이 있었는데 용모가 곱고 자태가 뛰어났으며 행실이 바르고 단정했다. 딸이 성숙한 나이에 접어들었는데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밤이면 전혀 모르는 사내가 딸의 침실로 찾아드는 일이었다. 용모가 빼어나게 준수하고 보랏빛 옷을 잘 차려 입은 사내는 날마다 밤에 찾아왔다. 그리고 새벽이면 사라졌다. 딸은 이러한 일이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일임을 잘 알고 있었으나 사내를 거절하지 못했다. 너무나 준수하고 빼어났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루 이틀이 아니고 많은 날들이 계속되자 딸은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내에게 고민을 이야기 하고 신분을 밝혀주면 부모에게 말씀드려서 혼인을 하겠다고 했으나 여전히 사내는 이렇다 저렇다 단 한 마디도 말이 없었다. 만나면서 지금까지 전혀 한 마디도 말을 하지 않은 것이다. 딸은 사내에게 자기는 이미 마음을 허락하였으므로 어떤 일이 있어도 사내를 따르겠다는 약속을 하고 남몰래 저지르는 이러한 일이 계속될 수 없음을 몇 번이나 정성들여 말했다. 딸의 간곡한 호소에도 사내는 묵묵부답黙黙不答(말이 없음)이었다. 딸은 마음을 졸이다가 병이 되었다. 딸의 행동이 예전 같지 않고 날이 갈수록 병색이 짙어가는 딸의 정황을 안타깝게 여긴 아버지가 딸에게 캐물었으나 딸은 쉽게 대답하지 않았다.

“아가, 어디가 아픈 거냐?”

“아니예요.”

“어디 아픈 데가 있거든 얘기하려무나. 얼굴빛도 좋지 않고 …. ”

“실은 …. ”

딸은 끝까지 비밀을 혼자 지키려고 했으나 자기 힘으로는 풀 길도 없고 언제까지 감출 수도 없는 일이라 머뭇거리다가 하는 수 없이 아버지에게 자초지종自初至終(처음과 끝)을 말씀드렸다. 딸의 말을 들은 아버지는 깜짝 놀랐다.

(이상한 일도 다 있지. 귀신의 조화란 말인가?)

곰곰이 생각한 끝에 아버지가 딸에게 일렀다.

“오늘 밤에는 몰래 바늘에 실을 꿰어 옷섶에 꽂아두거라.”

딸은 아버지의 말대로 사내가 잠든 사이에 옷깃에 바늘을 꽂았다. 다음 날 아침 아버지와 딸은 실이 풀려가는 길을 따라갔다. 실은 꼬불꼬불 골목길을 지나 어느 집 담장 밑으로 들어갔다. 담장 밑에는 작은 구멍이 있었는데 실이 그 구멍으로 이어져 있었다.

(이게 무슨 조화인가?)

구멍을 파 보았더니 깊은 구멍 속에 커다란 자주색 지렁이가 몸에 바늘이 꽂힌 체 죽어 있었다. 처녀는 열 달 뒤에 아들을 낳았다. 후백제를 건국한 견훤이다.

견훤은, 상주에서 원종과 애노가 반란을 일으키자 아버지 아자개가 군사를 일으켜 난을 수습하고 장군이라고 스스로 부르며 무진주(전남 광주) 일대를 장악하였는데, 나주지방 수군의 비장(고을 수령 다음의 제 2인자)이었던 아들 견훤이 아자개의 기반을 토대로 후백제를 건국하였다. 그 후 견훤은 신라와 전쟁에서 승승장구乘勝長驅(싸울 때마다 이김)하여 전라도와 충청도 일대에 강력한 기반을 구축하고 백제를 계승한 ‘후백제’ 라 이름하고 스스로 왕위에 올라 통치하였다. 그러나 견훤이 둘째 부인에게서 태어난 금강을 총애하여 후계자로 결정하자 첫째 부인의 장자인 신검이 반발하여 양검, 용검 형제와 함께 금강을 죽이고 아버지 견훤을 금산사(전라북도)에 가두었다. 견훤은 3개월 뒤 딸과 사위와 더불어 서해안으로 탈출하였는데 은밀히 견훤의 탈출을 도운 고려는 상부尙父(아버지)의 지위를 주고, 남궁을 견훤의 살림집으로 내주었으며, 양주를 식읍(다스리는 땅)으로 주어 부족함이 없이 살도록 배려하였다. 신검은 이후에 신라의 여러 성을 공격하여 영토를 넓혔으나 아버지 견훤과 왕건이 앞장 선 일선군(선산)싸움에서 무참하게 진 뒤 고려에 항복하였다.

 

# 후고구려 궁예의 출생설화(이야기 한국사, 교양국사연수회 인용)

 

* 궁예는 신라 왕가의 후궁에서 태어난 왕자였다. 신라 말기에 정국이 매우 혼란스러워 정권싸움이 자심하였으므로 궁예는 정쟁을 벗어나기 위해 도망갔는데 탈출할 때 알려져 쫒기다가 성벽에서 내던져졌다. 그러나 밑에서 받는 사람의 실수로 왼쪽 눈이 찔려 애꾸가 되었다. 궁예는 궁중에서 도망한 다음 절에서 이름 없는 불목하니(부엌에서 불을 지피는 머슴)로 자랐다. 선배와 동료들에게 온갖 시달림을 당하였으므로 어려서부터 매우 반항적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절의 법도와 스님의 계율을 지켜 수도하는 것 보다는 칼 쓰기, 활쏘기를 즐기고 밖으로 나돌아다니며 사냥을 하고 무술을 익히며 스님으로써는 망나니에 가까웠다. 그래서 스승에게도 늘 꾸중을 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스승이 궁예를 불렀다.

“궁예야, 너는 아무래도 산을 내려가는 것이 옳을듯하구나.”

“스승님, 잘못했습니다. 용서하여주십시오.”

“아니다. 네 잘못을 꾸중하려는 게 아니다. 오늘은 너에게 네 출생의 비밀을 알려주마.”

스승은 뜻밖의 비밀을 들려주었다. 궁예가 신라왕의 왕자라는 것과 궁예가 궁중에서 탈출할 때 일어난 사건을 들려주었다. 그 말을 듣고 궁예는 몇 날 며칠을 고민하였다. 그리고 절을 내려와 죽주의 도둑무리 기훤의 부하로 들어갔다. 그러나 기훤은 의심이 많고 애꾸인 궁예를 푸대접하였으므로 다시 산을 나와 북원(원주)의 양길의 무리에 합세하였다. 양길에게 능력을 인정받은 궁예는 이어 부두목이 되었다. 궁예는 예사 도둑이 아니었다. 궁예는 자기를 축출한 신라왕가를 토벌하여 왕자의 지위를 찾고자 하였다. 이러한 이상을 지닌 궁예는 덕을 베풀어 인심을 얻었으므로 뜻을 세워 일어서자말자 곧장 3500명의 대 부대를 편성할 수 있었다. 궁예는 북원(원주)에서 명주(강릉)로 쳐들어가 기반을 잡고 스스로 장군이라고 불렀다.

궁예는 민심을 얻었으므로 백성들이 따르고 지방 호족들과 좋은 장수들이 모여들었다. 특히 송악의 왕륭과 왕건 부자가 귀순한 일은 궁예에게 큰 보탬이 되었다. 왕륭은 궁예에게 귀순하며 왕건을 중요하게 쓰도록 권유했고 왕건은 수많은 전투에서 승리하여 궁예의 뜻에 보답했다. 그러나 나라의 힘이 굳건해지고 나라의 밑받침이 쌓이는 시기에 궁예는 의심이 많아지고 주위를 믿지 못하는 성격이 나타났다. 왕후 강씨를 의심하여 불에 달군 쇠부지깽이로 국문(심문)하여 죽였으며, 이어 강씨와 자기의 소생인 두 왕자도 죽였다. 신하들도 분별없이 죽이고 물리쳤으므로 불안한 신하들이 전전긍긍戰戰兢兢(어쩔 줄 몰라)하였다. 자신을 미륵의 화신이라 스스로 추대하고 부처님이 되었으며 불경을 지어 반포하였다. 관심법觀心法을 자행하여 사람의 속셈을 꿰뚫어 볼 수 있다고 호언하며 무수한 사람들이 쫓겨나거나 죽었다. 승려 석총은 당대의 고승이었는데 궁예가 지은 불경을 쓰레기라고 비판했다가 궁예가 내리친 쇠몽둥이에 맞아 죽었다. 왕건도 몇 차례 위기를 넘겼는데 반역을 도모한 혐의로 불려와 사경에 처했을 때 한림랑 최응이 임기응변으로 구해 가까스로 연명한 일도 있었고 몇 번이나 좌천되고 추천되는 반복을 거듭했다. 신하들은 불안에 떨고 백성들의 원망이 하늘을 찔렀다. 이에 마군장군 신숭겸, 홍유, 복사귀, 배현경들이 모여 왕건을 왕으로 추대하기로 혁명을 모의했다. 그러나 왕건은 사양했다. 왕건의 집으로 찾아온 그들은 동석한 왕건의 부인에게 술안주로 하게 텃밭의 오이를 가져다달라고 자리를 피하게 하고 왕건에게 혁명세력의 추대를 승락할 것을 모두가 무릎을 꿇어 간청했다. 그래도 왕건은 군왕과 신하의 의리를 들어 거절했다. 이를 미리 간파하고 옆방에서 엿듣고 있었던 부인이 왕건의 갑옷을 가지고 와서 왕건에게 입혔다. 비로소 왕건이 승낙하고 혁명은 성공하여 왕건이 왕으로 추대되었다. 궁예는 모반의 소식을 듣자 처음에는 충성스러운 왕건이 그럴 리 없다고 반신반의하였으나 결국 사태가 급박함을 알고 왕의 옷을 벗고 평민의 옷으로 갈아입은 뒤 궁성을 탈출했다. 그러나 백성들에게 발각되어 맞아죽었다. 궁예가 후고구려를 건국한 뒤 영주 부석사를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신라왕의 화상이 걸려있는 것을 보고는 분을 참지 못하여 화상을 칼로 내려쳤다고 한다. 신라 왕실에 대한 반감이었다.

 

# 고려 왕건의 출생과 도선국사 설화(이야기 한국사, 교양국사연수회 인용)

 

왕건의 아버지 왕륭이 몽녀 한씨와 결혼하여 개성의 송악산 남쪽 기슭에 살림을 차렸다. 어느 날 도선국사(백두선인)가 왕륭의 집 앞을 지나며 혼잣말처럼 말했다.

“어허, 기장(쌀, 보리, 콩, 조와 더불어 5곡의 하나)을 심을 터에 어찌 삼(삼베의 원료)을 심었는가?”

이 말을 들은 한씨가 남편에게 전했고 왕륭은 도선국사를 쫓아가 동구 밖에서 만났다. 공손히 예를 올려 삼가 뵈옵기를 청하니 도선국사가 왕륭에게 말했다.

“내가 일러주는 대로 집을 지으면 천지의 대수(이치)에 부합하여 이 집에서 명년에 슬기로 운 인물이 태어나리니 이름을 왕건이라고 하십시오.”

그리고 봉투를 만들어 겉에 ‘삼가, 글을 받들어 백 번 절하면서 미래에 3한을 통일할 주인 대원군자를 당신에게 드리노라’ 라고 써주었다. 왕륭은 도선국사를 모셔가려고 몇 번이나 머물기를 간청하였으나 도선국사는 곧 만날 날이 있을 것이니 기다리라고 하며 떠났다. 왕륭은 봉투를 받들어 백 번 절하고 도선국사가 말한 대로 집을 지었더니 예언대로 다음 해에 왕건이 태어났고 스님은 약속대로 왕건이 16세 되던 해에 다시 찾아와 2년 동안 왕건의 스승이 되어 가르쳤다. 두 번째의 만남에서 도선국사는 왕건에게 왕도를 전수했으며 또한 비기 선기옥형의 행방을 알려주었다. 선기옥형은, 연개소문의 반란 때 군사들이 신궁을 범접하고 소도가 불타자 천지화랑과 신녀들이 도피시켰다. 고구려 주몽제가 백두선인으로부터 물려받았던 백두산의 동굴이었다. 만승천자萬乘天子의 영예를 얻고 새 나라를 세우는 절차였다. 왕건은 궁예를 물리치고 고려를 창건하자마자 백두산으로 달려가 선기옥형을 참배하였다. 그리고 나라의 기틀이 완성되자 신궁을 세우고 소도를 설치한 뒤 선기옥형을 안치했다. 고려의 500년 역사가 여기에서 비롯했다. 왕건이 백두선인 즉 도선국사에게 선기옥형을 전수받은 일은 역사의 기록에는 없으나 왕가에 비전되는 설화로 이어져내려왔다.

* 도선국사는 전남 영암에서 태어났다. 그 어머니가 빨래를 하다가 시냇물에 떠내려오는 오이를 먹고 낳았다고 한다. 도선국사는 우리나라 풍수지리설의 시조다. 전국 방방곡곡에 도선국사의 전설이 흩어져있다. 도참설의 창시자 중국 당나라 일행 스님의 가르침을 받았다는 기록이 있다.

* 조선시대 초 무학대사가 조선의 새 궁궐터를 물색하던 중 한양(서울)의 삼각산에 올랐는데 ‘무학, 여기에 잘못 오르다’ 라는 도선국사의 비기(비밀로 전해 내려온 비석)를 발견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또 무학대사가 삼각산 만경대(국망봉)에 올랐을 때 궁궐터를 왕십리 부근에 잡으려고 했는데 정확한 자리가 마땅치 않아 머리를 싸매고 주변을 돌아다니고 있던 때, 어느 날 소를 타고 가는 한 노인과 마주쳤다. 무심코 지나치는데 노인이 소를 꾸짖으며 ‘이 놈 소야, 미련하기가 무학이 같은 놈이로고. 왜 바른 길을 두고 굽은 길로 가느냐!’ 고 소를 채찍질했다. 눈이 번쩍 뜨인 무학대사는 노인에게 정중하게 가르침을 빌었고 노인은 여기서 10리를 더 가라고 했다 한다. 노인은 무학대사에게 가르침을 주려는 도선국사의 현신(나타남)이었으며, 서울의 왕십리는 여기서 생겨났다.

 

       

             고구려는 한국사             풍수지리 비조鼻祖 도선국사와 풍수지리개념도   지구촌

             주은래(오른쪽) 방담   풍수의 한국 위치                         * Daum Blog 인용

 

◎ 통일신라의 멸망

 

* 말기로 내려오면서 통일신라는 골품제도가 문란해지고 왕위쟁탈이 자심하여 중앙집권력, 왕권이 약화되었다. 김현창은 헌덕왕 14년 한기 8019년(AD. 822년) 난을 일으켜 ‘장안국’ 을 건국하고 연호를 정운이라고 했다. 36대 혜공왕 때는 ‘대공의 난’ 이 있었고, 지방세력들이 성장하여 호족세력으로 대두되었다. 그 예로 나주에서는 해상세력이 대두했고 군소 세력들이 여기저기서 일어났다. 국가정신은 약화되고 화랑도는 개인주의가 팽배하였으며 사치와 향락풍조가 만연하였다. 농민반란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진성여왕 때는 농민들이 노비가 되거나 도적이 되는 일이 비일비재하였다.

 

* 한기 8084년(AD. 887년)부터 진성여왕의 문란한 생활, 대야주의 은자거인 사건, 상주의 원종와 애노의 난, 평주의 대호족 박지윤 가문 궁예에게 귀순, 왕륭 왕건 부자 귀순, 최치원 면직, 견훤의 후백제 건국, 공주 장군 홍기 궁예에게 귀순, 별이 비오듯이 떨어짐, 강주 장군 윤응 궁예 귀순, 명주 장군 김순식 귀순, 진보성주 홍술 귀순, 견훤이 신라 왕경에 침입 경애왕 자살 경순왕 보위에 올림, 동쪽 110여성 고구려에 항복 등 끊임없는 내우외환內憂外患과 후백제의 침공으로 통일신라는 국운의 쇄락을 막을 길이 없어 환란 때마다 고려에 도움을 요청했다. 드디어 한기 8132년(AD. 935년) 10월, 경순왕이 김봉휴를 보내 고려에 투항을 상의했다가 그 해 11월 백관百官(모든 신하)을 거느리고 투항했다. 왕건은 경순왕을 경주의 사심관으로 임명하고 딸 낙랑공주를 경순왕의 후비后妃로 주었으며 왕건은 경순왕의 백부 잡간 억렴의 딸과 혼인했다.

 

◎ 미륵신앙과 풍수지리 그리고 선기옥형

 

* 미륵신앙은 백성들의 현실지향 이상국가의 염원이다. 미륵부처님의 세상이 오기를 바란다. 특히 세기말이나 국가 쇠망기에 집권자의 힘이 쇠퇴하고 지도층의 생활이 퇴폐적이고 부패가 만연되어 사회상이 혼란한 시대에는 더욱 현실을 도피하려는 미래지향적 이상이 두드러진다. 고대의 지도자들은 신화적 인물이었으나 근세의 지도자는 영향력이 큰 인간이었으므로 신화로 각색할 수도 없었고 부처라든지 미륵임을 구체적으로 말한 일은 없었다. 그러나 궁예는 오랫동안 절에서 터득한 경륜으로 스스로 산 부처가 되었다. 법회를 열고 불경을 집필하며 국가통치체제의 기치를 불교적 이상국가로 내걸었다. 아들들의 이름도 보살로 지었다. 관심법(다른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보는 일)이라는 심리적세계를 끌어들여 통치를 신격화하려고 했다. 이런 일은 종교에서는 가능하지만 국가경영자로써는 합당하지 않았다. 그러나 신라는 왕조말기의 행태로 부패와 부조리가 발호했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미륵신앙과 풍수지리설 등 이상주의가 널리 퍼졌다.

도선국사는 풍수지리의 비조鼻祖(始祖)다. 중국의 일행 스님에게 사사(배움)를 했다고 하나 역사연대로 봐서는 믿기 어렵고 그 사상적 후계를 이었다고 본다. 도선국사는 한국 방방곡곡에 도참설을 심어 오늘날까지도 도선국사의 행적이 여기저기서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 이기론에 의하면 우주 삼라만상이 우주의 운행질서의 이치로 시간과 공간의 궤적을 그리며 돌아가는데 자연 안의 하나인 인간도 우주질서의 운행에 따라 태어나고 소멸한다. 그래서 사주팔자나 풍수지리가 인간의 삶에 대입된다. 여기에 미륵신앙이 개입한다.

 

* 이와 같은 민속신앙적 토대에서 선기옥형은 이상주의적 과학의 산물이다. 우주천체를 선기옥형으로 모사하여 만들어놓고 있지만 천체운행의 요체는 심안, 마음이었다. 모사해놓은 선기옥형이 오히려 상징적이었던 것이다. 요즘 경주의 첨성대가 실제 천문관측대가 아니고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제단이라는 견해가 있다. (요즘 선덕여왕의 개인 제단이라는 연구 결과, 이 역시 제단과 천문 관측 역할 수행 시설, 위 장방형 틀에 선기옥형을 안치했다고 생각함) 고작 10미터 남짓한 단을 쌓고 천문을 관찰하는 일은 과학적 의미가 없다. 높이 올라가 하늘을 관찰할 필요가 있었다면 더 높은 구릉지대나 산이 있었지 않은가? 마니산의 참성단은 산 정상의 제단(요즘에 참성단이 제사와 천문 관측 시설이라는 연구결과 발표)이다. 하늘과 소통하는 장소는 대부분 산 정상이었다. 첨성대는 평지제단이었을 것이다. 첨성대는 선기옥형을 설치하여 천체 운행을 관찰하고 하늘에 제사도 지내는 천체운행 관측의 제단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선기옥형은 천체운행의 원리를 본떠서 만든 천문관측기로써 계절의 변화를 예측하여 생활과 직결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망원경이 없었던 시대에 하늘의 움직임을 관찰하는 일은 누적된 기록과 천체 변화를 종합적으로 파악하고 이를 주술적이거나 초인적인 현상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심안의 세계와 결부하여 판단하는 일이었다. 고대사회에서는 이 일을 대개 신관이 맡았는데 고려시대에서는 서운관, 조선시대에서는 관상감의 관리들이 맡았다. 선기옥형(혼천의)은 한국에 세 개가 남아있다. 선기옥형 원형, 고조선 신시시대 한인천왕이 하늘에서 가지고 내려온 천부인 선기옥형은, 그 동안 우여곡절을 겪었으나 고려 태조 왕건에게까지는 도선국사를 통해서 전수되었다. 그러나 조선은 이를 전승하지 못했다. 태조 이성계가 조선의 정통성을 세우기 위해 전국의 명산 30여개를 수행자처럼 순례하면서 찾으려고 했으나 얻지 못했다. 그에게는 왕사 무학이 있었으나 무학을 통해서도 선기옥형을 얻지 못했다. 선기옥형을 전수하는 하늘의 뜻이 무학에게도 닿지 않았던 것이다. 조선은 선기옥형을 얻지 못하였고, 태종 때 농부가 대동강변에서 발굴한 ‘천상분야열차 각석’ 으로 천체 운행을 살폈을 뿐이다. 그리고 조선 중기에 들어서자 선기옥형을 제작하여 사용했다. 고구려 주몽제가 소서노가 비류와 온조 데리고 고구려를 떠날 때 주었던 모사한 선기옥형을 참조했으리라는 가정 뿐 이 또한 기록이 없다. 조선이, 이성계가 선기옥형을 전승하지 못한 이유는 모른다. 단지 하늘의 뜻으로만 파악한다. 선기옥형은 천지화랑과 함께 영영 자취를 감추었다. 이를 계승하여 복원하려는 이들이 있다. 1만 년 동안 면면이 이어져 내려오는 천지화랑(선비)의 후예들이다. 단순한 선기옥형 실체의 복원이 아니라 대한인의 내면에 잠재되어 있을 영적인 세계, 정신계발이다.

 

        3신할미, 탄생설화            3신각                     비파형 동검과 유물                 청나라 서태후

              생명의 꽃                              * Daum Blog 인용                                     (조선인설)

 

# 전남 장성의 고봉학술원 애일당, 선기옥형을 복원하려는 수도자들에게 하는 운곡선생의 정기강의

(전략) 한 예를 들어 강의를 마무리하겠습니다. 후고구려의 궁예는 자신의 출생이 신라의 왕자였다는 것을 안 뒤에 삶이 달라집니다. 망나니생활에서 벗어나 웅대한 이상을 꿈꾸게 되었습니다. 자신을 산 부처로, 미륵의 환생으로 이상국가의 실현을 펼치려고 했습니다. 제정분리시대에서 정치적 판단이 잘못된 것입니다. 궁예는 국가를 창업할 수 있는 자질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이를 꿰뚫어 본 사람이 한림랑 최응입니다. 최응은 소년천재로 약관에 발탁되어 궁예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습니다. 궁예는 최응에게 파격적인 대우를 하였습니다. 궁 안에서 살게 하고 국가 크고 작은 일로부터 개인적인 문제까지도 모두 최응에게 물어서 결정하였습니다. 최응이 발탁되었을 때 그는 궁예의 이상국가 실현을 믿었습니다. 그러나 궁예는 타락의 길을 걸었습니다. 최응은 몇 번이나 벗어나려고 했지만 궁예에게 매인 인연의 사슬은 너무 질겨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최응이 희망을 가지게 된 것은 바로 왕건이라는 인물이었습니다. 왕건도 궁예에게 몇 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겼습니다. 결정적인 고비는 왕건이 반역을 도모하고 있다는 참소(고발)였습니다. 최응이 이를 먼저 눈치채고 왕건에게 알렸습니다. 그러나 고지식한 왕건은 최응의 충고를 듣지 않고 궁예에게 붙들려왔습니다. 궁예는 관심법을 들먹이며 왕건의 반역을 다그쳤습니다.

 

궁예 : (불 같이 격노하여 석장을 궁궐 바닥에 내리치며) 내 그대를 형제로 부르며 내 몸처 럼 신임했거늘 반역을 꾀하다니 ….

왕건 : 폐하! 신은 결코 반역을 한 일이 없습니다. 통촉하시옵소서!

궁예 : (석장을 왕건의 머리 위에 내리칠 듯이 들이대며) 짐이 관심법을 한다는 사실을 알 지 못하는가?

왕건 : (엎드려 마루에 이마를 찧으며) 폐하! 어찌 신이 폐하에게 반역을 도모하리까? 폐하! 제 아비를 상기하소서!

궁예 : (한층 누구러지며) 네 아비 왕륭이 내 목숨을 구해준 일은 잊지 않는다. 그러나 네 배반은 용서할 수 없다.

왕건 : 폐하! 목숨을 버리라면 버리겠나이다. 그러나 신의 결백은 믿어주시옵소서.

궁예 : 그래도 이 놈이! 내 관심법을 우습게 보누만.

한림랑 최응 : (곁에 부복하여 있다가 들고 있던 서책을 왕건의 발 앞에 떨뜨린다. 서책을 줍는 척 하며 왕건에게 눈짓을 하며) 장군, 폐하의 관심법은 신통미묘합니다. 자복하시 지요. 이미 폐하께서 다 알고 말씀하시는 것이니 …. 자복하고 목숨을 비십시오.

왕건 : (최응을 한 번 쳐다보고 작심한 듯 그러나 난감한 표정으로) 폐하! 죽을 죄를 졌습 니다. 반역을 꾀했나이다. 목숨만 살려주십시오.

 

궁예는 왕건이 자복하자 자신의 신통한 관심법에 깊이 빠져들어 자만심이 더욱 커지고 자칫 죽을뻔한 왕건은 한림랑 최응의 기지로 살아났습니다. 한림랑 최응은 나이 어린 천재소년 선비였습니다. 선기옥형으로 천문을 통달하여 천리를 꿰뚫고 있어 왕건의 고려 건국을 예견하고 있었으나 궁예에게 의탁한 몸이었고 궁예의 신망이 매우 두터웠으므로 끝까지 인연을 버리지 못하였지요. 왕건이 궁예를 축출하고 고려를 세우자 최응은 입산하였습니다. 병이 들어 죽었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궁예의 죽음을 목격한 최응은 왕건의 왕실에 남을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최응은 궁예의 비극적인 삶을 이미 알고 있었으나 궁예의 부름에 따라나섰고 왕건을 살려냈으나 궁예도 버리지 않고 한 시대를 마무리 한 것입니다. 자신의 역할을 예견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이제 선기옥형의 설계도가 완성되었으니 재료를 마름질 하는 일이 시작되리라고 기대합니다.

 

◎ 격동하는 사회, 고려

 

             

                  고구려 계승  고려의 전성기 강역과                      여진정벌도

                  중국 동북부, 왜 통치 강역도                            * Daum Blog 인용

 

* 고려역사연대표

1대 태조 한기 8115년(AD. 918년) - 36대 공양왕 한기 8589년(AD. 1392년),

34대 473년 간

 

역대

    왕명

재위기간

               역사 개요

  1대

   태조

   AD. 918-943

   궁예 의탁, 장군들의 혁명 왕건 왕권 획득

  2대

   혜종

         943-945

   태조의 장자

  3대

   정종

         945-949

   왕규의 난 평정, 불교 숭상, 서경 천도 계획

  4대

   광종

         949-975

   노비안검법, 과거제, 공복제도 실시

  5대

   경종

         975-981

   전시과(관리 안정의 새로운 토지제도) 제정

  6대

   성종

         981-997

   유교 수용 중앙집권적 봉건제도

  7대

   목종

         997-1009

   전시과 개정, 학문 장려, 강조에게 피살

  8대

   현종

        1009-1031

   강조 옹립, 거란 침입 혼란 강화, 문화 발전

  9대

   덕종

        1031-1034

   거란 대비 천리장성 축조, 국사 편찬 완성

  10대

   정종

        1034-1046

   천리장성 축조, 적자 상속 적서 구별 법제화

  11대

   문종

        1046-1083

   율령 관제 병제 완비, 학문 열성 서예 능함

  12대

   순종

        1083

   문종 장자, 즉위 해 사망

  13대

   선종

        1083-1094

   동생 대각국사 의천, 문화 융성기

  14대

   헌종

        1094-1095

   이자의의 난 평정, 병으로 숙부 양위

  15대

   숙종

        1095-1105

   해동통보 주조 화폐제도, 황금시대 전개

  16대

   예종

        1105-1122

   학교 설립 학문 진흥

  17대

   인종

        1122-1146

   이자겸과 묘청의 난, 김부식 3국사기 편찬

  18대

   의종

        1146-1170

   정중부의 난 폐위

  19대

   명종

        1170-1197

   정중부 추대 등극, 최충헌 폐위

  20대

   신종

        1197-1204

   최충헌 옹립 등극

  21대

   희종

        1204-1211

   최충헌 제거 실패 폐위

  22대

   강종

        1211-1213

   최충헌 추대 등극

  23대

   고종

        1213-1259

   몽고 침입 강화도 천도, 8만대장경 간행

  24대

   원종

        1259-1274

   삼전도 굴욕, 임연, 3별초 난

  25대

   충렬왕

        1274-1308

   원에 굴복, 왕명에 忠字, 왕비 원 제국공주

  26대

   충선왕

        1308-1313

   등극 10년 만에 원나라에서 국정, 학문 교류

  27대

   충숙왕

        1313-1330

   정사 염증 양위, 2년 만에 복위

  28대

   충혜왕

        1330-1344

   정사 혼란, 원나라 귀양 가던 중 병사

  29대

   충목왕

        1344-1348

   원나라 볼모, 모 덕녕공주 섭정

  30대

   충정왕

        1348-1351

   외척 발호 정치 문란, 왜구 침입

  31대

   공민왕

        1351-1374

   원나라 배척 기씨 제거, 국토 수복, 노국공주

  32대

   우왕

        1374-1388

   10세 즉위, 위화도 회군 이성계 폐위

  33대

   창왕

        1388-1389

   이성계 세움, 1년 만에 강화도 축출, 시해

  34대

   공양왕

        1389-1392

   이성계 세움, 실권 탈취 폐위, 고려 멸망

 

        

                                   직지심경 (프랑스 루브르박물관 소장)                    고려청자

                                          1377년 인쇄 세계 최초 금속활자본 * Daum Blog 인용

 

* 고려는 고려인삼과 고려청자의 나라로 잘 알려져 있다. 고려청자의 신비한 색조는 맑은 하늘빛 비취색이다. 오늘날도 재현하기 어려운 이 빛깔을 고려 백성, 그러니까 민중의 염원이 서린 빛깔이라고 한다. 고려시대에는 유난히 민란이 많았다. 고려역사를 민란의 역사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사회의 가장 밑바닥에 있었던 천민들까지도 반란을 일으켰다. 말하는 짐승 취급을 받았던 사람들이 먹고살기 위해 목숨을 걸고 일어섰던 것임

 

* Corea(꼬레아)는 고려시대 이후 불리운 대한 이름이다. 유럽권이나 스페인어권에서 사용했던 고려의 이름이 대한의 범세계적인 이름으로 굳어진 것이다. 이를 물려받은 Korea가 대한민국의 공식명칭인데 젊은이들은 Corea를 고집한다. Korea가 일제시대의 잔재殘滓로써 한국명을 영어 알파벧 C(Corea)로 시작하면 일본의 J(Japan)가 뒤에 오기 때문에 일본제국 식민지통치 때 일부러 K(Korea)로 시작하는 명칭으로 바꿨다는 것이다. 통상적으로 대한민국의 호칭은 Corea였는데 언제부턴가 Korea로 바뀌었다. 국호를 함부로 바꾸기는 어렵겠지만 젊은이들의 주장이 합리적이라면 일제청산과 민족정기 차원에서 고려해야 한다.

덧붙여 ‘한국’ 이라는 명칭은 일본제국이 조선사편수회에서 ‘임나고’ 를 조작하면서 만들어냈다. 일반적으로 ‘대한제국’ 이나 ‘대한민국’ 의 준말이라고 여겨지나 ‘한국’ 은 준말일 수 없다. ‘한’ 은 순수한 우리 말의 ‘한’ 인데 한자를 빌어 쓰면서 ‘韓, 桓’ 으로 표기하였기 때문이다. ‘대大한’ 은 중국이 사용하는 ‘대청국大淸國’ 이나 ‘대당국大唐國’ 같은 문법적 맥락이다. 해방 이전까지는 ‘대한’을 사용하였다 (Daum의 블로그 ram2dam 인용). 애국가의 ‘대한사람’ 이나 ‘대한독립만세!’ 를 보면 알 수 있다. 영국은 대영제국, 일본도 제 나라를 대일본제국이라고 한다.

‘대한민국’ 을 공식적으로 사용한 것은 제헌국회에서 헌법을 기초하며 헌법기초위원회에서 국호를 논의하여 투표로 결정했다. 그러나 준말을 ‘한국’ 으로 공식화하지는 않았으니 고려해야 한다. ‘Corea’나 ‘대한’ 을 공식적으로 변경할 수 있으면 가장 좋겠으나 국호를 바꾸는 일이 쉽지 않으니 외교적으로나 학술적으로 그리고 사회에서 공용화하면 될 것이다. 흔히 쓰는 ‘한반도’ 와 ‘한국기원, 한기’ 그리고 Corea, ‘대한민국과 한국’ 들은 역사학 그리고 사회학적 접근이 요청됨

 

* 신라 천년은 역사의 일어남과 스러짐에 의한 왕조의 멸망이라고 보더라도 궁예의 한 장군에 불과했던 왕건이 일어서고, 웅대한 이상을 품고 백제의 옛 땅을 거의 장악하여 욱일승천旭日昇天(하늘을 찌를 듯 한 기상)의 기세로 3한 통일을 눈 앞에 두고 있었던 견훤은 국가 건설의 뜻을 펴보지도 못하고 당대에 몰락한다. 이는 역사적 필연이라기보다는 한 나라의 건국자로써 제왕적 기반의 문제였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후3국은 왕건의 고려 건국을 위한 역사적 과도기였고 묘상苗床(새싹을 키우는 못자리)의 시기였다. 왕건은 자중지란自中之亂(안에서 스스로 무너짐)으로 무너져 내린 견훤의 후백제를 일산(선산)전투의 승리로 복속시키고, 신라마저 경순왕이 백관을 거느리고 스스로 항복 귀순하여 왕도王道가 열린다. 그러나 왕권이 취약하여 왕가와 귀족 그리고 유력한 호족들을 회유하기 위해 혼인동맹을 하였는데 후궁이 무려 29명이었고 왕자들이 25명 공주가 9명이었다. 또한 지도층의 규합만으로 창업이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민심을 추스르려고 민심을 다독이는 정책을 같이 편다. 후백제는 아자개를 앞장세워 전쟁으로 여러 작을 고을들을 합병했으나 신라는 스스로 귀순했다. 그러나 그렇게도 민심을 얻으려고 스스로 경계했음에도 불구하고 고려는 수많은 내부의 반란을 겪었음

 

                        공민왕의             김은진 화백의       공민왕과 노국공주상         루벤스의

                      천산대렵도               인삼 그림            * Daum Blog 인용          개성상인

 

◎ 고려, 반란叛亂과 민란民亂의 역사

 

* 요나라(거란)의 침입

고려는 고구려의 옛 땅을 회복하려고 하였다. 지금의 몽골과 만주지역에는 거란족과 여진족이 유목생활을 하고 있었다. 거란족의 야율아보기가 여러 부족을 통일하여 대진국 애왕 16년 한기 8119년(AD. 922년)에 요나라를 건국하였고, 한기 8123년(AD. 926년) 요나라의 침략으로 대진국은 멸망하였다. 태조 왕건은 고구려 옛 땅의 회복을 꿈꾸고 있었다. 대진국 유민을 같은 민족이라며 흔쾌하게 받아들였다. 요나라는, 남으로 경계를 한 고려의 북진정책과 동쪽으로 국경인 중국 송나라와 고려의 돈독한 외교적 관계 그리고 압록강 유역의 정안국과 연합 등 요나라에게는 국경을 맞댄 세 방면의 국제적 고립과 위협이었다. 그래서 요 나라(성종 12년, AD. 993년)는 먼저 정안국을 쳐서 복속하고 고려의 위협에 대비하기 위해 압록강 유역에 3개 성을 쌓았다. 그리고 고려의 친송정책에 위협을 느낀 요나라가 한기 8190년(AD. 993년), 한기 8207년(AD. 1010년), 한기 8215년(AD. 1018년) 고려 현종 9년에 세 차례에 걸쳐 고려를 침략했다.

 

․ 1차 침입 - 한기 8190년(AD. 993년) 10월에 요나라 소손녕이 고려의 박양유장군, 서희장군과 맞부딛쳤는데 고려는 봉산군을 빼앗기자 청화사를 파견하여 화친을 맺었다. 소손녕은 서경 이북의 땅을 떼어주라는 할지론을 요구했다. 조정의 중의는 할지론을 선택하였으나 서희장군과 이지백이 항전을 주장함으로 화의가 결렬되어 소손녕이 안융진을 공격하였으나 실패하자 서희장군의 담판을 받아들였다. 소손녕은 서희장군에게 ‘고려는 본래 신라에서 일어났는데 어찌하여 고구려 땅을 침식하는가’ 라며 강동 6주의 반환을 요구했고, 그리고 ‘송나라와는 외교를 하면서 이웃 나라인 요나라는 왜 소외시키는가?’ 하고 추궁했다. 서희장군은 ‘고려는 고구려를 계승했으며 요나라의 동경도 옛 고구려의 영토이므로 돌려주어야 한다’ 고 맞대응 했다. 요나라가 세 번째로 트집을 잡은 압록강 유역 방위에 대해 ‘압록강 유역에 성을 구축한 것은 고려와 요나라 사이에 여진이 있어 이를 견제를 하자는 것이다’ 라고 설득했다. 유명한 ‘서희장군의 담판’ 이다. 이렇게 담판하여 압록강 280여리 개척에 동의를 얻었다. 그리고 송나라의 연호를 버리고 요나라의 연호를 사용하기로 약속했다. 그러나 고려는 은밀히 송나라와 교류를 계속하였고 강동 6주도 돌려주지 않았다.

 

․ 2차 침입 - 한기 8207년(AD. 1010년) 고려 현종 1년에 요나라 성종이 직접 40만 대군을 이끌고 침략했는데 고려 안에서 일어난 ‘강조의 반란’ 을 빌미로 삼았다. 그러나 실상은 송나라와 교류를 차단시키고 강동 6주를 회복하려는 속셈이었다. 개경이 함락되어 현종은 나주(전남)로 피난하는 지경에 이르렀으나 요나라는 병참선이 차단되자 화친을 요청했다. 현종은 친조를 약속하고 화친을 맺었는데 퇴각하는 요나라 군사는 고려의 귀주성 군사의 공격으로 큰 피해를 입었다. 그 이후에도 고려는 친조의 약속을 이행하지 않고 여전히 송나라와 교친하였으므로 요나라는 3차 침입을 감행하였다.

 

․ 3차 침입 - 유명한 ‘귀주대첩’ 으로써 한기 8215년(AD. 1018년) 12월 요나라 소배압이 10만 대군을 이끌고 침략하자 고려는 강감찬장군을 상원수로 삼고 부원수에는 강민첨장군을 임명하여 20만 군사로 대비하였다. 소배압은 몇 번의 실패로 퇴각하다가 귀주성에서 강감찬장군에게 대패, 살아서 돌아간 적은 수천에 불과했다.

 

* 여진 정벌

새로 일어난 동여진 완안부족의 우야소가 한기 8300년(AD. 1103년) 고려 숙종 8년에 함흥 부근까지 영역을 넓혀 주둔하였으며, 이듬해에는 완안부의 기병이 정주관 밖에까지 쳐들어왔다. 문하시랑 평장사 임간장군을 보내 평정하려고 하였으나 실패, 추밀원사 동북면 행영 병마도통 윤관장군을 여진 정벌에 투여했으나 역시 실패하고 임기응변으로 화친을 맺고 돌아왔다. 윤관장군은 패인이 여진의 기마병에 있었다고 보아 별무반을 신설하여 기마특수부대를 창설하였다. 한기 8304년(AD. 1107년) 여진의 동태를 감시하던 변방의 보고를 받고 원수 윤관장군과 부원수 오연총장군이 17만 대군을 출병, 크게 이겨 9성을 쌓았다. 그러나 뒤에 요나라 서쪽과 국경인 여진이 자국의 방위를 역설하며 9성을 되돌려달라고 하여 화평을 위해 되돌려주었다. 이는 뒷날 아골타가 금나라 (신라 경순왕의 태자, 마의태자와 덕주공주의 후예)를 세워 중원을 평정하는 바탕이 되었다.

 

        

              해동통보                                            고려청자               * Daum Blog 인용

 

* 몽고전쟁

최씨정권이 확립되었을 때부터 고려는 몽고의 압박을 받았다. 몽고족은 금나라의 세력권에 있었는데 13세기 걸출한 영웅 테무친이 부족을 통일하고 한기 8403년(AD. 1206년) 칸(한, 황제)에 즉위하였다. 징기스 칸이다. 징기스 칸은 금나라(여진의 아골타가 건국)를 침략하고 요나라(거란의 야율아보기가 건국)를 공격하였으며, 징기스 칸에게 밀려난 요나라는 고려의 국경 강동성에 은거하였다. 고려는 몽고와 연합하여 강동성의 요나라를 공격하여 요나라는 패망하였는데 몽고는 이를 빌미로 과다한 공물을 요청하였다. 고려 조정에서는 화전 양론이 대두되었으나 전쟁론이 우세하였다. 때마침, 한기 8422년(AD. 1225년) 몽고 사신으로 고려에 왔던 저고여가 돌아가다가 압록강 부근에서 피살된 사건이 일어났다. 몽고는 이를 빌미로 고려를 침공했다.

 

․ 1차 침입 - 한기 8428년(AD. 1231년) 몽고 장군 살리타가 북쪽 경계의 여러 성을 함락하고 개경을 포위하였다. 고려는 귀주에서 박서장군이 분골쇄신(뼈가 부서지고 몸이 으스러짐)하였으나 수도가 포위되자 화의를 요청했다. 몽고는 서북면에 다루가치(몽고군 주둔지)를 설치하고 물러났다. 이후 몽고가 더욱 무리한 조공을 요구하자 막리지 최우는 항전을 결심하고 한기 8429년(AD. 1232년) 강화도로 도읍을 옮겨 항몽 결전에 들어갔다. 몽고군이 기마병 위주기 때문에 물에 약하다는 전술적 천도였다.

 

․ 2차 침입 - 몽고는 개경을 지나 한강 남쪽까지 공략하였으나 살리타가 처인성 싸움에서 김준후장군에게 사살되어 철군했다. 그 이후에도 몽고군은 한기 8456년(AD. 1259년) 고려 고종 46년 강화가 맺어질 때까지 여러 차례 침입했다. 그러나 강력한 반몽정책을 표방한 최씨정권이 강화도를 근거지로 끈질긴 항쟁을 하였다. 육지에서는, 일반 민중들이 위기에는 산성과 섬으로 물러서고 한편으로는 집단으로 농사를 지으며 침략군에 대항하는 전술을 활용하였으므로 몽고군은 강화도를 함락시키지는 못했다. 그러던 중 최씨정권이 붕괴되어 항몽전은 변화를 초래하였으나 또 다시 정권의 부침이 계속되면서 강화와 항몽전이 번갈아 일어났다. 한기8467년(AD. 1270년) 몽고의 세력을 업은 국왕이 개경으로 환도를 하였고 무신정권도 끝났다. 항몽전의 선두에 섰던 3별초는 배중손장군을 필두로 진도에서 항몽전을 펴다가 제주도로 옮겼으나 한기 8470년(AD. 1273년) 진압되었다.

 

* 합단의 침입

한기 8487년 (AD. 1290년) 고려 충렬왕 16년 원나라의 합단이 만주에서 반란을 일으켜 고려의 동북지방을 침입한 사건을 말한다. 왕은 강화도로 피난하였다. 고려와 원나라 연합군의 공격으로 진압하였다.

 

* 홍건적의 침입

홍건적은 중국 직례지에서 일어나 한 때 기세를 떨쳤으나 원나라 군대에 쫓겨 만주로 들어왔다. 랴오양을 점거한 홍건족 장군 모거경이 4만의 무리를 이끌고 한기 8556년(AD. 1359년) 고려 공민왕 8년에 침범하였다. 왕은 남쪽으로 피난하고 서경(평양)이 함락되었다. 그러나 편장 이방실, 안주만호 안우가 이끄는 고려군의 맹렬한 반격을 받아 서경을 버리고 퇴각하다가 궤멸되어 남은 병사 300여명이 압록강을 건너 도망갔다. 그 뒤 홍건적은 수군을 동원하여 황해도와 평안도의 해안지대를 침범하였고, 공민왕 10년 한기 8558년 (AD. 1361년) 10월에 10만 병력으로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너 다시 고려에 침입하였다. 공민왕은 남으로 피난하고 도지휘사 이방실, 상원수 안우가 대적하였으나 중과부적으로 패하여 개경이 함락되었다. 한기 8559년 (AD. 1362년) 1월 총병관 정세운이 이방실원수들과 개경을 수복하고 평정하였다. 개경을 수복할 때 동북면 상만호 이성계가 홍건적의 괴수 사유, 관선생의 목을 베는 공을 세웠다. 홍건적은 패망하여 물러갔으나 막대한 타격을 입은 고려의 국운도 기우러졌다.

 

* 왕규의 반란

혜종 임종 직전, 한기 8142년(AD. 945년)에 일어난 조작적 반란이다. 서경장군 왕식렴이, 대광 왕규가 반란을 모의한다고 하며 개경에 난입하여 왕규와 300여명의 추종 세력을 참살한 사건이다. 정종이 왕식렴의 군대를 동원하여 정적을 거세하고 왕권을 찬탈한 구테타였다.

 

* 이자겸의 난

이자겸은 고려 전기 최고 문벌 귀족이고 예종의 외할아버지로써 정치적 실권을 장악했다. 인종이 즉위하자 왕위 찬탈을 모의하였다는 죄로 예종의 동생인 대방공 보와 그 세력을 처형하였다. 지방 출신 신진관료세력의 발흥을 제거하는 정치적 책동이었다. 이자겸은 인종에게 두 딸을 왕비로 들여보내고 마침내는 인종을 폐하고 스스로 왕이 되려는 야심을 품었다. 그러나 동지였던 척춘경과 반목하여 축출되었고 전기 귀족사회가 몰락하는 발단이 되었다.

 

* 묘청의 난

연이은 반란으로 국가 기강이 해이해지고 민심이 어지러운 때 정지상을 중심으로 한 개혁 정치세력과 묘청이 임금의 총애를 업고 권력의 전면에 떠올랐다. 고려는 국시를 북진정책에 두었고 북벌 분위기가 형성되어 있었다. 서경(평양)은 북진정책의 전진기지였다. 묘청은 도참설과 풍수지리를 내세워 서경 천도를 주장했다. 더불어 정치, 교육 등 내정의 유신과 칭제건원을 진행하고 여진의 금나라를 정벌코자 했다. 반면 김부식을 비롯한 개성의 중앙세력은 보수적이어서 충돌이 불가피했다. 뜻이 좌절되자 묘청은 한기 8331년(AD. 1134년) 서경을 근거지로 군사를 일으켰다. 국호를 ‘대위’ 라 하고 연호를 ‘천개’ 라고 했으며 군대는 ‘천견충의군’ 이라고 불렀다. 개혁세력을 지원하던 임금이 등을 돌리고 김부식이 대원수로 임명되어 진압을 했는데, 반란군에서 내분이 일어나 묘청이 죽고 반란은 진압되었다.

 

  11세기 잉글랜드의 코벤트리 레오프릭성주 고다이버 부인(16세)상像, 가혹한 세금을 감면해주라는 부인의 탄원에 성주가 반 농담으로 발가벗고 말을 타고 성 안을 한 바퀴 돈다면 감면해주겠다고 하자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감연히 실행함, 주민들은 모두 커틴 을 내리고 문을 잠궜다고 함. 동시대 고려 백성들의 사회상 대비. 이어 김부식상, 보각 국사 일연상, 해인사의 대장경판                                       * Daum Blog 인용

 

* 무신정변

무신의 반란으로 고려의 문벌 귀족사회는 한기 8367년(AD. 1170년) 무너졌다. 무신정권의 성립은 귀족사회의 정치권력 독점과 토지 소유의 특권적 지위가 극심한 횡포를 부렸기 때문이었다. 권력과 영지를 놓고 귀족들 간에 항쟁이 전개되었는데 특히 기성 문벌귀족에 대한 지방출신 신진관료들의 도전이 치열했다. 문반들의 권력다툼에 무반은 소외되고 천대를 받았다. 무반은 귀족의 호위병 역할이 고작이었다. 무반은 요나라와 여진의 전쟁을 통해 세력을 축적하고 한기8273년(AD. 1076년)의 전시과, 한기 8306년(AD. 1109년) 무학재 설치로 기반이 강화되었다. 고려의 군사제도는 일반 농민으로 충당되었는데 귀족들의 농민 착취가 심하였고 온갖 잡역에 시달렸으므로 농민 출신 무반들이 직접 상관인 무인들의 불만에 동조하였다. 한기 8367년(AD. 1170년) 태평호문泰平好文(글을 좋아함)의 군주 의종이 문신들과 보현원에 놀러갔을 때 이를 호위한 무신 정중부, 이의방, 이고들이 구테타를 일으켜 문신들을 살해하고 의종을 페한 뒤 왕의 동생 명종을 옹립하여 무신정권을 수립하였다. 무신정권은 한기 8467년(AD. 1270년) 원종 11년 임연 부자가 몰락할 때까지 100년 간 지속되었다. 무신정치는 무인들의 집합체인 중방(무신의 협의체)을 중심으로 이뤄졌다. 한기 8368년 (AD. 1171년) 이의방이 이고를 주살, 한기 8371년 (AD. 1174년) 정중부가 이의방 제거, 한기 8376년 (AD. 1179년) 정중부도 경대승에게 참살, 한기 8380년 (AD. 1183년)에는 이의민이 집권하였으나 그 역시 한기 8393년 (AD. 1196년) 최충헌에게 숙청되었다. 최충헌은 전제정치로 무신정권의 안정을 찾아 최우, 최항, 최의에 이르는 4대 62년 간 최씨정권이 지속되었다. 최충헌은 명종을 폐하고 신종, 희종, 강종, 고종을 마음대로 세우는 초월적인 권력을 행사했다. 한기 8455년 (AD. 1258년) 고려 고종 45년 김릉, 임연이 최의를 제거함으로써 최씨정권이 무너졌다. 무신정권이 몰락한 직접적인 원인은 몽고의 무신정권에 대한 압력이었고 국왕도 왕권회복을 위해 몽고와 결합하였다. 한기 8467년(AD. 1270년) 몽고의 옹호를 받은 국왕이 강화도에서 개경으로 천도를 명하였으나 임유무가 이를 듣지 않자 홍문규, 송성례들이 임유무를 죽였다. 이에 왕정이 복구되고 100여년에 걸친 무신정권은 끝났다.

 

* 농민, 천민(개인노비 만적)의 난

무신정권은 농민의 수탈이 과중하여 농민생활은 더 곤궁하였으므로 무신 상호간의 정권다툼으로 통제력이 약화된 틈을 타 농민들이 봉기했다. 무신정권기의 민란은 명종과 신종대의 30년간에 집중적으로 일어났다. 무신정권의 형성기와 최충헌의 독재정치가 자리잡기 전의 시기로 지방통제력이 약한 시기다. 한기 8369년 (AD. 1172년) 명종 2년 서북계의 창주, 성주, 철주 주민이 수령首領의 탐학貪虐(욕심 많고 괴롭힘)과 가렴주구苛斂誅求(약탈 수준의 빼앗음)에 반발하여 일어났고, 한기 8371년 (AD. 1174년) 서경유수 조위총의 난 때에는 농민들이 참여하였다. 한기 8373년 (AD. 1176년) 명종 6년 공주 명학소에서 망이, 망소이가 난을 일으켰다. 농민이 주체였으나 천민집단의 특수행정구역인 ‘소’ 에서 일어났다는 것은 농민반란에 부곡천민部曲賤民들의 신분해방운동이 복합되었다는 것이 특징이다. 한기 8379년(AD. 1182년) 명종 12년 충청도 관성(옥천)과 부성(서산)에서 수령의 탐학에 농민반란이 일어났다. 전주에서는 군인과 관노(관청의 노예)가 반란을 일으켰다. 한기 8390년(AD. 1193년) 명종 23년에는 경상도일대에서 민란이 일어났는데 김사미는 청도(운문)에서, 효심은 초전(울산)에서 반란을 일으켜 서로 연합하여 경상도일대에 확장되었으나 밀성(밀양)에서 정부군에 밀려 7000여 명이 죽고 진압되었다. 한기 8396년(AD. 1199년) 신종 2년에는 명주(강릉)에서 민란이 일어나 동경(경주)민란과 합세하였다. 이듬해 진주에서 공사노비의 반란이 일어났고, 협천(합천)에서는 부곡민(천민)의 반란이 일어나 연합전선을 전개하였는데 농민도 가담하였다. 경상도 일대의 민란은 한기 8399년(AD. 1202년) 신종 5년에 경주를 중심으로 한 대규모 민란으로 확대되었다. 반란의 기치로 신라의 부흥을 내걸었는데 최충헌의 토벌로 평정되었다. 한기 8395년(AD. 1198년) 개인노비 만적이 개경 북산에 공사노비를 모아 ‘무신란 뒤 공경대부(높은 벼슬아치)가 천민에서 많이 나왔으므로 우리들도 최충헌과 우리의 주인들을 죽이고 천민에서 해방되면 공경장상(높은 벼슬아치)이 될 수 있다’ 고 선동하였으나 모의 첫날 인원이 많이 모이지 않아 다음 날로 기약을 했는데 내부의 밀고자에 의해 진압되었다. 이후 정권은 농민을 감싸고 권농에 치중하여 토지를 돌려주었으며 세금을 줄였다. 이들 민란은 귀족중심의 엄격한 신분사회에서 새로운 사회체제로 변하는 원동력이 되어 고려사회의 발전에 공헌하였다.

 

* 김보당과 조위총의 난

정중부의 난이 발생한지 3년 뒤 명종 3년 한기 8370년(AD. 1173년)에 동북면 병마사 김보당이 일으킨 무신정권에 반대하는 난이다. 김보당은 전통적으로 문벌귀족 가문이었는데 무신정권에 참여하였다가 소신과 기대가 사라지자 의종 이래 문란해진 정권의 기강을 바로잡는다는 기치를 내걸고 정중부와 이의방의 제거와 의종의 복위를 명분으로 거병하여 거제도에 유폐된 의종을 경주로 나오게 하였다. 그러나 김보당이 안북도호부에서 붙들려 개경으로 이송된 뒤 죽었고 의종도 이의민에게 살해되어 3개월 만에 무산되었다.

명종 4년에는 서경 유수 조위총이 정중부와 이의민의 토벌을 목적으로 거병하였다. 민란의 성격을 띠었으나 무신정권에 의해 진압되었다.

 

       

              북벌정책                  강화도 초지진                강화도                       척경입비도

             효종 영릉                * Daum Blog 인용           갑곶돈대(포대)

 

◎ 고려의 멸망

고려 후기에는 권문세족과 신흥사대부 사이의 대립이 격화되고 밖에서는 왜구와 홍건적의 침입 그리고 원나라와 명나라의 교체기의 대외관계 변동이 멸망의 원인이었다. 왜구는 대마도와 일본 근해연안에 본거지를 두고 고종 때부터 연해에 출몰하였는데 충정왕 때는 강화도까지 약탈을 당하여 계엄령을 선포하였다. 이 때문에 바다의 물자 운반 길이 끊겨 중앙정부의 재정에 타격이 오고 농민들도 수탈에 핍박을 당하였다. 일본정부에 협조를 요청했으나 일본정부도 통제를 하지 못했다. 고려는 국방력을 강화하고 적극적인 왜구 토벌에 나섰는데 최무선은 한기 8574년(AD. 1377년) 화통도감을 설치하고 화포를 제작하였다. 공민왕 때는 홍건적이 원나라의 반격을 받아 서경을 침입하였다. 홍건적이 두 번째 침입한 한기 8558년 (AD. 1361년)에는 수도 개경이 함락되었다. 동북아정세가 요동을 치는 시대였다. 중국에서는 주원장이 일어나 원나라를 치고 명나라를 세웠다. 원나라는 북쪽으로 쫓겨 북원으로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고려조정은 친원친명세력으로 대립하였는데 명나라가 철령위를 설치하여 고려를 압박하였다. 그리고 1388년 쌍성총관부 관할로 철령 이북의 땅을 명나라의 직속령으로 한다는 일방적 통고를 했다. 이에 크게 분개한 최영은 고구려의 옛 땅이었던 요동정벌을 계획하였다. 드디어 우왕 14년 최영장군은 8도도통사로써 좌군도통사 조민수장군, 우군도도통사 이성계장군을 거느리고 요동정벌에 나선다. 이 때 이성계장군은 ‘4불가론’ 을 들어 요동정벌을 반대하였다.

첫째, 원나라와 명나라가 교체되는 과도기라 하나 고려의 군사로 대국 명나라를 친다는 것 은 불가하다

둘째, 한창 농사철인 여름에 군사를 동원하면 농사에 지장을 주고

셋째, 원정을 틈타 왜적이 침입한다면 도성이 위험하며

넷째, 장마철이라 주무기인 활의 아교가 녹을 염려가 있고, 군사들이 병에 걸릴 위험이 있 다

그러나 최영장군은 이성계장군의 반대를 무릅쓰고 거병했다. 마지못해 출병한 이성계장군은 압록강 안 위화도에서 장마를 피해 머물러 있었는데, 마침내 회군하여 최영 등 반대파를 제거하였으며 우왕을 폐위하고 창왕을 세웠다가 다시 공양왕을 세웠다. 그러나 정치의 실권은 이성계 일파가 장악하였고 왕은 허수아비였다. 결국 이성계는 조준과 정도전 등의 추대로 고려왕국을 종식시키고 조선을 건국했다.

 

 

 

 

 

 

 

 

 

 

 

 

 

 

 

 

 

 

 

 

 

 

 

 

 

 

 

 

 

 

 

 

 

 


출처 : 이천만의 시詩
글쓴이 : 이천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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