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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에밀레종의 비밀> 제1부 9장. 사촌과 김양상 - 제 2의 아이, 그리고 배후(7/1)

오늘행복스마일 2018. 12. 27. 12:57

 

 제1부 폭력적 진실, 에밀레종전설

 

 

 

 

 

 9. 사촌과 김양상(金亮相, 金良相 ;선덕왕)-제 2의 아이, 그리고 배후

 

 

 

  권력의 제2인자

 

 

  에밀레종전설에는 여러 유형이 있고, 그중에 후일담형이 있음은 이미 밝힌 그대로이다. 실언형 및 배신형에 대해 후일담형이 갖는 차별성은 종이 완성된 후 제2의 아이(원목이)가 따라 죽는다는 데에 있다. 특히 제2의 아이가 제1의 아이(원산이)의 사촌으로 나오고, 또 자발적으로 죽음을 택하는 것으로 설정되어 있다. 특히 원목이는 평소 원산이를 생각하는 마음이 지극했고, 원산이의 죽음으로 인한 충격과 허무감이 죽음의 길로 들어서게 했다는 것이다. 그 점에서 혜공왕의 사촌으로 지목한 선덕왕 김양상에 대한 평가는 여간 조심스런 일이 아닌데, 기존의 시각과는 정반대이기 때문이다.

 

  김양상은 경덕왕 22년(764)에 시중을 역임했으며, 혜공왕 10년(774)에 상대등에 오른다. 그리고 3년 뒤인 동왕 13년(777) 하(夏) 4월에는 상소를 올려 국정을 극렬하게 비판하고, 혜공왕이 시해된 뒤에 왕권을 차지한다. 그의 재위기간은 780년부터 785년까지 만 6년에 불과한데, 바로 그가 <신종명>에는 김옹에 이은 제2인자로 나타난다.

 

검교사 숙정대령 수성부령 검교감은사사 각간 신 김양상(檢校使 肅政臺令 修城府令 檢校感恩寺使 角干 臣 金良相)

 

  숙정대령은 오늘의 검찰총장, 수성부령은 수도방위사령관에 비견되며, 검교감은사사는 그 무렵 감은사가 중창되고 있었던 듯 그 감역을 총괄하는 자리였다. 김옹만은 못하지만, 혜공왕 초기의 권력구조 속에서 일정한 지분을 차지하고 있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현재 혜공왕 13년(777)의 국정 비판이나 혜공왕 이후 왕위에 올랐다는 이유로 그에 관해서는 부정적인 평가가 중론이다. 반 무열왕계 세력의 중추적 인물로 혜공왕을 죽이고 왕위를 찬탈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료의 행간을 꼼꼼히 읽어보면, 흔히 보는 찬탈자의 잔인하고 야비한 모습과는 그가 먼 거리에 있음을 깨닫게 된다.

 

  첫째, 즉위 후 오묘에 직계조상 2대를 모실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친조부를 젖혀놓고 외조부 성덕왕과 선대 김효방을 개성대왕(開聖大王)으로 추존해 이친묘(二親廟)를 구성한다. 경덕왕을 자신의 아비로 대체하는 선에 그친 것이다. 이는 자신을 성덕왕의 계보에 편입시킨 처사로, 그가 반 무열왕계의 노선을 걸었다면 쉽게 납득이 안 간다. 그는 성덕왕의 외손으로 몸속에 흐르는 무열왕계의 피를 태생적으로 부정할 수 없는 처지였다. 그 점은 이미 이광규가 “부계로 말하면 선덕왕은 무열계 왕실과 관계가 없는 사람이지만 그의 모인 사소부인四炤夫人은 성덕왕의 女이니 그는 모계로 보면 혜공왕의 고종사촌형제가 된다. 따라서 선덕왕은 외가로 말하면 무열계 친족집단에 속한다고 하겠다.”(이광규,『한국가족의 사적史的 연구』, p.137, 일지사, 1986)고 파악하기도 했다. 더 나아가 신형식은 김양상을 김옹과 함께 중대사회를 떠받치고 있는 왕당파로 간주하고 있으며,(申瀅植:「新羅中代專制王權의 展開過程」,『汕耘史學』4, p.25. 汕耘學術文化財團, 1990. 이호영은 에밀레종의 명문에 나타난 職名을 근거로 김양상과 김경신을 역시 왕권파로 파악하고 있다.(李昊榮:「新羅中代王室과 奉德寺」,『史學志』, pp.13~14, 檀國大史學會, 1974)

 

  김양상의 유일한 업적으로 평가되는 패강진(浿江鎭) 개척도 반추를 요한다. 당나라와의 지루한 교섭 끝에 그곳이 신라의 강역에 정식으로 포함된 것은 성덕왕 34년(735). 진덕여왕2년(648)에 김춘추와 당 태종 사이의 밀약에서 대동강 이남을 할양을 받기로 한 지 87년 만에 나당 사이의 해묵은 현안이 종결된 것이다. 이후 황무지로 버려져 있던 그곳에 주목한 김양상은 781년에 패강 남쪽의 군현들을 안무하고, 다음해에는 지금의 서울인 한산주를 순행하여 그 민호를 대대적으로 옮긴다. 또한 783년에 이르러 패강진전(浿江鎭典)의 두상대감(頭上大監)을 설치하는 등 유독 그곳에 집착한다. 이야말로 중대왕실의 유업을 계승하려는 의도로 판단해도 좋을 것이다.

   

  둘도 없는 충신!!

 

  둘째, 그는 한번도 권력욕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적이 없다. 오히려 무욕(無慾)의 모습까지 보이는데, 즉위할 때도 신하들의 추대를 세 번씩 물리치는가 하면, 6년이라는 짧은 재위 중에도 몇 차례나 양위 의사를 밝힌다. 사망에 즈음한 조서에도 그의 그런 성향이 잘 묻어난다.

 

과인은 본질이 워낙 얇아 대보(大寶)에 야심이 없었고, 추대를 도피치 못하여 부득이 즉위하였던 것인데, 즉위 이래로 해마다 일이 순성(順成)치 못하고 민생이 곤궁하니, 이는 다 나의 덕이 백성들의 뜻에 맞지 아니하고 정치가 천심(天心)에 합치 아니한 때문이다. 항상 위를 선양하고 밖으로 퇴거하려 하였으나 여러 신하들이 매양 지성껏 말리므로 뜻과 같이 되지 못하고 머뭇거리다가 지금에 이르렀던 바, 홀연히 병에 걸려 일어나지 못하니 생사에는 명(命)이 있는지라 다시 무엇을 한하랴.(『삼국사기』9,「신라본기」, ‘선덕왕6년 정월’조)

 

  문맥 어디에도 찬탈자의 모습은 비치지 않는다. 도리어 현실과 원칙 사이에서 갈등하다가 뜻에 없는 왕위에 올랐고, 사촌인 혜공왕의 죽음과 중대왕실의 몰락을 막지 못한 데 따른 회한과 속죄 속에 말년을 보낸 허무주의자의 초상이다.

결국 그는 자신을 화장해 동해구에 산골(散骨)하라는 유언을 남긴다. 동해구라면 더 말할 것 없이 문무왕의 성적이 즐비한, 중대왕실의 성소라는 점에서 그는 사후의 세계에 들어서도 중대왕실과의 정서적 유대를 계속 간직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마지막 순간까지 중대왕실의 일원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한 것이다.   

 

  『삼국사기』와『삼국유사』를 근거로 할 때 사후 화장된 신라의 왕은 모두 8명으로, 그중 문무왕과 효성왕, 그리고 선덕왕만 동해구를 장지로 택한다. 반면, 원성왕, 진성여왕, 효공왕, 신덕왕, 경명왕 등 하대신라의 왕 5인 가운데 동해구를 유택으로 삼은 경우는 하나도 없다. 불교식에 따라 화장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유골은 서라벌을 벗어나지 않은 것이다.

째, 가장 논란이 되는 혜공왕의 죽음만 해도 지금껏 시원하게 밝혀진 건 하나도 없다.『삼국유사』에는 왕16년(780) 2월에 일어난 김지정(金志貞)의 난을 진압한다는 명분으로 4월에 궐기한 김양상의 소행으로 분명 나와 있다. 그러나『삼국사기』가 전하는 내용은 정반대이다.

 

(2월에)이찬 김지정이 반(叛)하여 도당을 모아 궁궐을 에웠다. 4월에 상대등 김양상이 이찬 김경신으로 더불어 군사를 일으켜 지정 등을 주(誅)했으나, 왕과 후비는 난병에게 피살되었다. 양상 등은 왕을 시(諡)하여 혜공왕이라 하니 원비 신보왕후는 이찬 유성의 딸이요, 차비는 이찬 김장의 딸·····(『삼국사기』9,「신라본기」, ‘혜공왕16년2월 및 4월’조)

 

    이 기사의 문맥을 비틀지 말고 있는 대로 정직하게 읽으면, 김양상은 모반의 주모자이기는커녕 김지정이 일으킨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거병한 둘도 없는 충신이다. 어디에도 역적으로서의 냄새는 느껴지지 않는다. 다만, 그 와중에 궁성에 인질로 잡혀 있던 혜공왕과 왕비가 김지정 군에 의해 시해되고 마는데, 그 사태를 막지 못해 자책하는 듯한 뉘앙스마저 풍긴다. 이러한 판단은 그가 곧바로 혜공왕과 왕비에게 시호를 올린 점에서도 뒷받침된다. 그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로, 조선조 세조가 영월에 귀양 가 있던 단종을 액사케 하고 그 시신을 청령포 겨울강물에 팽개쳐 두었던 비정한 모습과는 사뭇 대조적이다.

이와 같이 정작 사료에 비치는 김양상의 면모는 ‘후일담형’에 나타난 원목이의 모습과 통하는 면이 없지 않다. 따라서 그가 반왕권파의 수괴라는 주장의 근거들을 엄정하게 재검토할 필요가 발생한다.

 

  우선, 김양상이 내건 거병의 명분은 ‘군측(君側)의 악(惡)’을 제거하자는 데 있었다. 그런데 바로 여기서 ‘군측의 악’이란 말의 의미가 매우 애매하다. ‘군(君)’, 즉 혜공왕이 아니라 왕을 에워싸고 있는 특정세력을 지칭하기 때문이다. 일단 김양상은 혜공왕을 제거하고자 군사를 일으킨 게 아닌 것이다. 그렇다면 혜공왕을 에워싼 그 특정세력의 범주에는 김지정보다는 만월부인과 김옹이 더 어울린다. 만약, 김지정 자신이 왕이 되고자 한, 곧 모반의 주역이라면 당연히 ‘역적(逆賊)’, 혹은 ‘역도(逆徒)’로 지칭해야 온당하며, ‘군측의 악’이라는 표현은 성립될 수 없기 때문이다. 김지정의 난이 만월부인 남매의 친위 쿠데타일 개연성을 전적으로 부인하기 어려운 실정인 것이다.

  실제로, 난을 일으킨 김지정이 만월부인 파인지, 혜공왕 파인지, 혹은 스스로 왕위를 노린 야심가인지 전혀 불분명하다. 더욱이 그가 궁궐을 장악한 후, 김양상이 궐기할 때까지 만 2개월간 궁궐 내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일이 진행되었는지도 안개에 덮여 있다. 만약 김양상이 권력욕에서 거병했다면, 시간을 그리 오래 끌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도리어 정반대의 해석이 가능해진다. 그는 그 긴박한 상황에서 만월부인 세력의 볼모가 되어 있는 혜공왕을 무사히 구해내는 일을 최우선 과제로 여겼을 수도 있다. 거병을 두 달씩이나 늦춘 것도 혜공왕을 자칫 위험에 빠뜨릴 것을 우려한 신중한 태도일 수도 있는 것이다.

한편, 김지정의 난이 만월부인 측에 의한 친위 쿠데라라면 풀어야 할 문제가 남는다. 궁중을 포위한 그 두 달 동안, 이미 무력한 상태에 있는 혜공왕을 제거하는 것은 여반장일 터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게 밀어붙이지 못하고 주저한 것 역시 궁성 밖에 위치한 김양상을 의식한 결과일 수 있는 일이다. 이에 관한 해석은 뒤에서 다시 개진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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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무튼 김양상은 군사를 일으키면서 김춘추의 6대손으로 분류되는 김주원(金周元)을 끌어들인다. 김주원은 혜공왕 13년(777)에 시중을 역임한 인물로, 몇 안 남은 중대왕실의 울타리라 할 종친이었다. 그러므로 김양상이 반 무열왕계였다면, 김주원은 도리어 경계 내지 제거 대상에 올랐을 것이다. 하지만 김양상은 정반대로 김주원을 합류시킨다. 왜 그랬을까. 김주원을 통해서 중대왕실을 지키려는 자신의 의도를 천명하고자 했는지 모른다. 요컨대 김양상의 궐기는 권력찬탈이 아니라 만월부인 일파를 제거해 중대왕실을 복원하는 데 그 목적이 맞춰졌다고도 볼 여지가 충분한 일이다.

 

 

  중대왕실의 복원을 꿈꾸다

 

  혜공왕은 김양상의 바람과는 달리, 난을 진압하는 와중에 횡사하고 만다. 김양상의 모든 계획이 수포로 돌아간 것이다. 결국 그는 중망에 따라 마지못해 왕위에 오르게 된다.

  이후 김양상은 김주원을 자신의 후계자로 지목하고 있었던 듯 상대등으로 임명한다. 실제로 김주원은 왕위계승권자로서 가장 유력했고, 김양상이 후사 없이 사망하자 군신이 그를 왕으로 추대하기도 했다. 그러나 김주원은 대권을 눈앞에 두고 좌초하고 만다. 불운하게도 알천(閼川)이 홍수로 범람하여 왕성으로 입성하지 못하자 그것을 군신이 하늘의 뜻이라 하여 다시 상대등 김경신(원성왕)을 추대한 것이다.

  아무튼 이렇게 보면 김양상이 혜공왕 13년(777)에 올렸다는 이른바 시정극론(時政極論)도 색깔이 전혀 달라진다. 그동안 그의 상소는 혜공왕으로 대표되는 왕권파에 대한 경고로 풀이되어 왔다. 하지만 당시 섭정의 지위를 이용해 국정에서 혜공왕을 배제하고 월권을 일삼던 만월부인과 김옹 등 외척을 겨냥한 공격으로도 풀이할 수 있다. 김양상이야말로 그들의 전횡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위치에 있었고, 그들로 인한 혜공왕의 방황과 고통을 정확하게 응시하고 있었을 것이다. 특히, 그 전 해인 혜공왕 12년(776) 정월과 2월에 잇달아 있은 동해 제사 및 국학 방문 등 혜공왕의 친정(親政) 움직임에 대해 만월부인 측의 반발 내지 무력화 시도가 있었다면, 혜공왕 편에 서서 만월부인의 퇴진을 강력하게 요구한 것일 수도 있다. 외척의 득세로 인한 국정의 파행을 비판하면서 왕권의 정상화를 도모했다고 보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오늘의 사가는 김양상에게 중대왕실 붕괴의 혐의를 씌어 비판하지만, 옛 서라벌 사람들은 오히려 혜공왕을 지켜내지 못한 것을 괴로워하다가 죽은 인물로 그를 기억하고 옹호하고 있는 것이다. 이 점에서 그를 중대왕실의 마지막 군주로 비정하고 있는 신형식의 관점은 ‘사실史實’에 부합한다.  

 

 

  김양상과 관련해 한 가지 더 살펴야 할 사항이 있다.

  알다시피 <신종명>의 ‘별기’에는 그가 김옹과 더불어 에밀레종의 검교사를 맡은 것으로 나와 있다. 에밀레종 주성이 경덕왕의 여망이었음을 감안하면, 두 사람이 나란히 검교사 직에 보임된 것은 경덕왕의 뜻이 반영된 인사로 볼 수 있다.

경덕왕은 두 사람을 함께 검교사로 지명한 의중은 무엇일까.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일종의 후계구도로 생각된다. 김옹은 아내의 오라비로 처남이 되고, 김양상은 누이의 아들로 조카가 아닌가. 경덕왕의 입장에서는 처남과 조카 이상으로 믿을 만한 사람이 마땅찮았을 것이다. 따라서 두 사람에게 어린 후계자와 왕실의 버팀목이 되어주길 기대했고, 그러한 자신의 의중을 에밀레종의 검교사라는 상징적인 자리를 통해 밝혔다고 보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두 사람을 쌍두마차로 해서 자신의 사후에 대비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지금까지의 논의를 간추리자면 오늘날의 사가는 김양상에게 중대왕실 붕괴의 혐의를 씌어 비판하지만, 옛 서라벌 사람들은 오히려 혜공왕을 지켜내지 못한 것을 괴로워하다가 죽은 인물로 그를 기억하고 옹호하고 있다. 적어도 서라벌 사람들은 그를 중대왕실의 파괴자로서 인식하고 있지는 않은 것이다. 이와 관련해, 『삼국사기』에서 김양상을 혜공왕의 바로 뒤에 묶어놓고 있음을 근거로, 그를 중대왕실의 마지막 군주로 비정하고 있는 신형식의 관점은 탁견이라 하겠다.

 

 

○ 전제주의와 반 전제주의에 대해

 

중대신라기를 전제주의 세력과 반 전제주의 세력의 대립구도로 파악하는 것은 우리 학계의 해묵은 관점이다. 중대신라 전 기간의 권력변동과 정책, 천문현상, 외교, 불교, 문화예술 등의 모든 영역을 해석하는 데 그러한 이분법이 결정적인 잣대로 기능해 왔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조합이 중대신라기의 정치 및 문화사 서술의 중요한 기준으로 기능해 왔다.

 

○ 전제주의세력 : 반 전제주의세력

○ 친 왕권파 : 반 왕권파

○ 무열왕계 : 반 무열왕혜

○ 친 혜공왕계 : 반 혜공왕계

 

혜공왕 대만 보더라도 혜공왕과 만월부인을 왕당파, 김옹과 김양상 등을 반왕당파라는 식으로 단순하게 이원화시켜 이해해 온 것이다.(이기백, 「신라 혜공왕대의 정치적 변혁」, 및 김수태,『신라중대정치사연구』등)

 

그러나 ‘전제주의(專制主義:absolutism, 혹은 despotism)’와 ‘반 전제주의’의 개념부터 애매하다. 상식적으로 전제주의의 반대는 민주주의(民主主義:democracy), 혹은 공화주의(共和主義: republicanism)를 지칭하기 때문이다. 이른바 전제주의 중대왕실을 타도하고 수립한 하대신라에서 민주정이나 공화정을 지향했다는 사실이 확인되지 않는 한 전제주의 대 반 전제주의 세력의 대결구조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해 하일식은, “王權을 중심으로 역사를 파악한 나머지 모든 인간을 ‘친왕파’와 ‘반왕파’로 분류․판단하려는 경향도 존재한다. 신라사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성향에 대해, 지금까지 많은 연구가 ‘친왕파’, 또는‘반왕파’의 분류를 해왔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일치된 이해에 도달하지 못하고 있는 상태는 그 경향이 낳은 폐단의 일단에 불과할 것이다.”고 이미 지적한 바 있다.(하일식:「新羅政治體制의 運營原理」,『역사와 현실』20, p.37, 1996)

 

실제로 그러한 경직된 사고로는 여러 세력이 난마처럼 뒤엉켜 합종연횡하면서 전개된 당시 권력암투의 실상을 충분히 드러내기 어렵다. 단적인 예가 혜공왕과 만월부인 사이의 갈등이나, 혹은 조정과 왕실에 엄청난 그림자를 드리웠을 외척문제, 또 경덕왕의 후계구도 등은 특별한 논의가 찾기 어려운 실정이다. 아울러 <신종명>의 ‘원구’에 본격적으로 주목한 논고도 보이지 않는다. 진지한 숙고를 요하는 부분이다.

 

 

출처 : 성낙주의 석굴암미학연구소
글쓴이 : 성낙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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