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흐는다

[스크랩] 신분의 벽에 막혀 뜻을 펼치지 못한 비운의 천재 최치원(崔致遠)

오늘행복스마일 2018. 12. 27. 14:13

 

 

● 신비스런 행적의 경주 최씨 시조

 

요즘 들어 조기 유학이 급증하고 있지만 1천여년 전에 이미 조기유학에 성공한 역사 인물이 있으니, 그가 바로 최치원(崔致遠)이다. 최치원이 최근 1천여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중국에서 되살아나고 있다. 인구 5백만명의 강소성 양주시에서 한·중 교류의 일환으로 최치원 기념 사업을 벌이기로 한 것이다. 양주시는 최치원이 과거 급제 후 잠시 관리로 있었던 곳으로 그와 관련한 유적과 유물이 많이 남아 있는데, 그가 근무햇던 관청 건물 뒤에 기념관을 건립할 예정이라고 한다. 이처럼 중국에서도 높이 평가받고 있는 최치원에 대해서는 출생에 대해서도 신비스러운 이야기가 전한다.

 

최치원의 어머니가 그를 잉태한 지 4개월만에 금돼지에게 납치되어 최치원을 낳았는데, 이를 불길하게 여긴 그의 아버지가 최치원을 무인도에 버렸다는 것이다. 그러다가 선녀들이 그를 양육하고 있는 것을 알게 된 아버지가 마음을 바꾸어 다시 최치원을 집으로 데려와 길렀다고 한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최치원은 머슴살이를 하러 재상의 집으로 들어갔는데, 여기서 재상의 딸과 서로 사랑하게 된다. 그후 최치원은 당나라에 가던 도중 용궁에 들르기도 하고, 위이도(魏耳島)라는 섬에서 비를 내리게 하는 비법과 신인(神人)의 화를 면할 수 있는 비법을 전수받는 등 초인적인 능력을 갖추었다. 당나라에서는 벼슬길에 오르지만 간신들의 모함으로 고난을 겪다가 귀국을 결심하는데, 이때 당나라의 황제 희종(僖宗) 이환(李儇)이 무릎을 꿇고 사죄하였다고 한다. 물론 여기서 최치원이 당나라에서 벼슬을 했다는 대목을 제외하고는 설화적인 이야기지만, 최치원에 대한 신비한 이야기는 그의 발자취가 머물렀던 곳이면 어디에나 많이 남아 있다.

 

이처럼 최치원 본인에 대한 이야기는 무성한 반면 그의 가계에 대해서는 부조(父祖) 이상으로 전혀 알려진 게 없다. 그의 부친에 대해서는 이름이 최견일(崔肩逸)이며, 6두품 신분으로 대숭복사(大崇福寺)라는 사찰을 건립하는 데 종사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 외의 가족으로는 현준(賢俊)이라는 승려가 된 형과, 최치원이 귀국할 때 당나라까지 마중갔다는 서원(棲遠)이라는 동생이 있다. 최치원의 부인은 그가 지은 시에 한번 등장할 뿐이고, 그 자식들에 대해서는 아무런 기록이 없다. 그러나 경주(慶州) 최씨(崔氏)에 그의 6대손이 고려에서 벼슬을 하는 등 크게 출세했다고 나와 있는 점을 보면 자식들이 있었던 것은 분명한 듯하다.

 

최치원의 가계만큼이나 그의 출생지에 대해서도 정확히 알려진 바가 없어서 어떤 기록에는 전라남도 옥구(沃溝)라고도 나오지만, 아무래도 경주로 보는 것이 옳을 것 같다. 본래 신라에는 시가지의 중심에 자리잡은 박·석·김씨 집단과 그 주변으로 사로6촌의 여섯 성씨 즉 양산촌(후의 급량부)의 이씨·고허촌(사량부)의 최씨·대수촌(모량부)의 손씨·진지촌(본피부)의 정씨·고야촌(습비부)의 설씨 거주촌이 있었다. 최치원의 유택(幽宅)이 황룡사 남쪽에 남아 있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그는 사로6촌 가운데 최씨 동족 부락인 사량부에서 태어난 것 같다. 최치원이 한국의 대성(大姓) 중 하나인 경주 최씨의 시조로 추앙되고 있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이다. 과거에 급제했다고 해서 생활이 금방 좋아지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는 진사에 급제한 뒤 낙양으로 옮겨 가서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글을 썼지만 가난한 생활은 여전했다. 다음의〈도중작(途中作)〉이란 시는 머나먼 타국에서 떠돌아야 했던 그의 적막한 심정을 잘 보여준다.

 

˝東飄西轉路岐塵 갈림 길 먼지 속에 이리 날리고 저리 굴러

獨策羸驂幾苦辛 파리한 말 혼자 타고 고생이 얼마던가?

不是不知歸去好 돌아가는 것이 좋은 줄 모르지 않지마는

只緣歸去又家貧 돌아간다 하더라도 가난하기 때문일세.˝

 

고국에 돌아가고 싶은 생각은 간절하지만 가난한 탓에 귀국마저 마음대로 할수 없는 아픔이 생생하게 표현되고 있다. 그러나 최치원은 이처럼 어려운 생활 속에서도 부(賦) 50수와 시 100수, 잡부시(雜賦詩) 30수를 짓는 등 학문 연마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리고 20세 때 처음 관직에 나가는데, 강소성 선주의 을수현이라는 작은 고을의 현위(縣尉) 직이었다. 현위는 업무가 그다지 바쁘지 않은 한직이어서 학문과 저술에 정진할 수 있다. 이때 저술한 것이 공사시문(公私詩文)을 모은『중산복궤집(中山覆簣集)』다섯 권이며, 쌍녀분(雙女噴) 기담(寄談)이 생긴 시기도 이때이다.

 

쌍녀분 기담은 최치원의 뛰어난 문학적 재능을 알려주는 일화이다. 쌍녀분은 을수현의 남쪽에 있는 오래된 무덤인데, 최치원이 이 무덤 앞에 있는 석문에다 무덤의 주인인 두 처자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을 담은 시를 써넣자, 이에 감동한 두 여인이 최치원의 꿈에 나타나 회포를 풀고 사라졌다는 내용이다. 중국 설화가 최치원의 재능과 결부되어 나타난 이 이야기는 그의 시가 죽은 여인의 혼까지 움직일 정도로 뛰어났음을 반영하고 있다.

 

최치원이 학문 연구에 대해 품었던 갈망은 현실 생활에 안주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그는 21세 때 현위 직책을 미련 없이 버리고, 빈공과보다 한 단계 높은 박학굉사과(博學宏詞科)에 응시하고자 다시 산에 은거하였다. 직업을 버리고 아무련 도움 없이 시험 준비를 하다 보니 날이 갈수록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하기가 어려워졌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최치원이 고국에 돌아가지 못했던 것은 자랑스런 아들이 되어 고국 땅을 밟고자 하는 부모에 대한 효성과 조국에 대한 사명감 때문이었다.

 

이렇게 곤란을 겪고 있는 최치원에게 식량을 보내주어 배고픔을 면해준 사람이 고변(高辯)이었다. 워낙 생활이 곤궁했던 최치원은 당시 회남절도사로 있던 고변에게 공자의 문하에도 타향 사람이 있었으니 자신을 받아달라고 간청했는데, 고변이 그의 청을 받아들여 최치원은 고변의 문객(門客)이 되엇다가 다시 그의 추천으로 관역순관(館驛巡官)이 되었다.

 

● 붓으로 황소의 반란군을 물리치다.

 

최치원이 당에서 활약하게 된 직접적인 계기는 고변이 황소의 반란(875년~884년)을 진압하는 임무를 띤 제도행영병마도통(諸道行營兵馬都統)이 되면서였다. 최치원은 그의 종사관이 되어 서기의 책임을 맡았다. 이때 최치원의 나이 불과 24세로 그는 4년간 군무에 종사하였다. 당시 중국은 강남 지방의 황소(黃巢)가 일으킨 농민들의 반란으로 온통 전란의 도가니에 휩싸여 있었다. 최치원은 황소의 반란군을 토벌하기에 앞서 지금까지도 너무나 유명한 ‘격황소서(檄黃巢書)’를 작성한다.

 

이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은 그 문장이 너무나 웅장하고 위엄이 있는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특히 “……천하의 모든 사람들이 다 너를 죽이려고 생각할 뿐 아니라, 문득 땅 속의 귀신도 벌써 남몰래 베기로 결의하였다”는 글귀는 황소가 읽다가 너무 놀라 침상에서 떨어졌을 정도로 충격을 주었다고 한다. 이 충격의 여파로 황소의 반란군은 기세가 한풀 꺾여 이극용(李克用)이 이끈 관군에 의해 토벌되었다고 하니 이야말로 붓으로 칼을 부러뜨린 셈이다.

 

반란군 토벌 후 고변의 보고를 받은 희종 황제는 “황소를 토벌한 것은 칼의 힘이 아니라, 최치원이 쓴 격황소서의 힘이로구나”라고 격찬하였다. 많은 인재를 가진 중국에서 중국인도 하지 못한 일을 24세의 신라 젊은이가 이룬 쾌거였다. 그는 종사관으로 있으면서 후에『계원필경(桂苑筆耕)』의 모체가 되는 1만여편의 시문을 지었다.

 

최치원은 이 공로로 승진은 물론이고, 당 황제에게 자금어대(紫金漁袋)를 하사 받는 영광을 누렸다. 자금어대란 붉은 금빛으로 장식한 고기 그림이 있는 주머니로, 이 속에는 이름을 적은 신표(信表)가 들어 있어 이것을 차면 마음대로 대궐을 드나들 수 있는 일종의 VIP 신분증이었다.

 

또 최치원은 자기만의 숙소에서 시중을 받는 등 풍족한 생활을 누리게 되었다. 의식주를 위해 불철주야 동분서주했던 지난날의 힘겨운 생활도 막을 내린 것이다. 최치원이 활동하던 당시 중국에는 워낫 콧대가 높아 다른 사람의 재능을 인정하지 않는 나은(羅隱)이라는 강동 지방의 시인이 있었는데, 이 나은마저 최치원에게는 직접 지은 시를 보여줄 정도로 중국에서 최치원의 명성은 확고부동해졌다.

 

● 금의환향을 했건만……

 

중국에서 상당한 명성을 쌓고 부족함 없는 생활을 누리던 최치원이었지만, 그의 소망은 갈고 닦은 자신의 재능을 고국을 위해 쓰는 것이었다. 그래서 화려한 생활에 대한 유혹을 과감히 뿌리치고 884년 최치원은 드디어 당 황제인 희종에게 귀국 결심을 밝혔다. 희종은 최치원의 뜻이 변할 수 없는 것임을 알고 최치원이 중국에 끼친 공훈에 걸맞는 최대한의 예우를 베풀어 그가 당나라의 사신 자격으로 신라에 귀국하도록 하는 파격적인 조치를 단행했다.

 

이는 요즘으로 말하면 미국 시민권이 없는 사람을 미국 대통령 특사 자격으로 남한에 보내는 것과 같은 대접이었다. 최치원은 중국인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당나라의 사신 자격으로 당의 많은 문사들의 전송을 받으며, 신라를 떠난 지 16년만에 그리던 신라 땅을 밟게 되었다. 당시 중국에서 최치원의 명성이 얼마나 높았는지는 중국에서 같이 진사에 급제하고 사귄 고운(顧雲)이 지은 다음의 송별시에서 알 수 있다.

 

〃내 들으니 바다 위에 금자라 셋이 있어
머리마다 높고 높은 산을 이었다.
산 위에는 구슬과 자개 궁궐, 황금전각이 있고
산 아래는 천리만리 넓은 바다로다.
그 곁에 점 하나 푸른 계림의 땅
자라산의 정기 어려 기특한 인재 났도다.
열두 살에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
그 문장이 온 중국을 감동시켰고,
열여덟에 과거장을 휩쓸고 다니더니
한 대의 화살로 금문책을 깨뜨렸다.〃

 

위의 시가 격찬한 것처럼, 우리 나라의 한문학은 최치원의 등장으로 4·6병려체를 갖추었으니 최치원은 명실공히 우리 민족 문학의 초석을 닦은 인물이다. 이 때문에 성현(成俔)의『용재총화(慵齋叢話)』에서는 “우리 나라의 문장은 최치원에게서 비롯된다”고 하였으며, 홍만종(洪萬宗)의『소화시평(小華詩評)』에서는 “수나라와 당나라 이래 간책(簡冊)이 있다 하나 극히 적으며, 신라의 최치원에 이르러 문체가 고루 갖추어져 문학의 조종(祖宗)이 되었다”고 평가하는 등 여러 기록에서 그의 업적을 기리고 있다.

 

이처럼 중원에서 큰 명성을 떨친 최치원이 귀국하자 신라의 헌강왕(憲康王)은 그에게 시독(侍讀) 겸 한림학사(翰林學士) 수병부시랑(守兵部侍郞) 지서서감(知瑞書監)을 제수하였다. 그러나 최치원의 부모는 아들의 성공을 보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난 뒤여서 그는 “과거에 급제해서 돌아오니 효도해야 할 부모는 계시지 않는다”는 자로(子路)의 탄식으로 아픔을 달래야 했다. 최치원은 당나라에서 지은 여러 글들을 정리하는데 몰두하였다. 그리고 이때 헌강왕에게 많은 저술을 올렸는데, 그 결과 탄생한 것이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한시 문집인『계원필경집(桂苑筆耕集)』이다.

 

하지만 당시 신라는 최치원이 중국에서 닦은 능력을 마음껏 펼 수 있는 여건과 거리가 멀었다. 사회 곳곳에서는 이미 붕괴의 조짐이 드러나고 있었다. 골품제에 의한 신분 차별이 엄존하는 상황에서 조정에서는 진골 귀족들의 권력 다툼이 벌어졌으며, 지방에서는 호족들이 세력을 키워하고 있었다. 그 결과 세금이 제대로 걷히지 않아 나라 살림이 말이 아니었고, 농민들도 이중 삼중의 부담으로 끼니를 연명하기조차 힘든 경우가 많았다.

 

중국에서 화려한 명성을 쌓은 최치원이었지만 6두품 출신인 그가 신라 사회에서 부딪혀야 하는 신분의 벽은 너무나 두터웠다. 귀족들의 질투와 시기를 견딜 수 없었던 최치원은 마침내 지방 장관을 자원하여 태산군(태인), 함양, 부성(富城) 등의 태수(太守) 직을 전전하였다.

 

그러나 최치원은 신라 사회를 바로잡으려는 노력을 포기하지 않고 38세 때인 894년에 진성여왕(眞聖女王)에게 시무(時務) 10조를 건의했다. 현재 그 시무책의 내용은 무엇인지 알 수 없지만, 국왕은 이를 받아들여 그에게 6두품이 맡을 수 있는 최고 직급인 아찬 벼슬을 내렸다.

 

최치원의 개혁책은 왕실에서 그것을 흔쾌히 수락한 것을 보면 아마도 왕권을 강화하고, 귀족 세력을 견제할 수 있는 6두품 출신 인사를 등용하는 방안이엇을 것이다. 그러나 중앙집권을 기반으로 국정을 바로잡으려던 그의 개혁책은 이미 기울대로 기운 신라 사회에서는 도저히 실현 불가능한 것이었다.

 

● 꿈을 접고 가야산으로

 

마침내 최치원은 신라 부흥의 꿈을 접은 채 한창 나이인 42세에 벼슬을 그만두고 가야산으로 입산하였다. 이때 그가 입산한 산에 대해서는 경남 합천의 가야산이라는 종래의 설 외에, 충남 홍성과 서산·예산의 접경지에 있는 가야산이라는 주장이 새롭게 제기되었다. 이 주장의 근거로는 최치원의 친필이 충남 홍성군의 쌍계계곡에서 13점이나 발견되었고, 최치원이 생전에 쌍계계곡에서 멀지 않은 충남 서산에서 수령을 지낸 점 등이 제시되고 있다.

 

그러나 최치원이 말년에 불교 관계 저술을 했고, 그 가운데「해인사 선안주원벽기(海印寺善安住院壁記)」등이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해인사가 속해 있는 합천의 가야산이 맞는 것 같다. 최치원은 이 시기에 울적한 마음을 달래느라 경주 남산, 협천 청량사(淸凉寺), 지리산 쌍계사, 합포현 별서(別薯), 양산 임경대(臨鏡臺), 부산 해운대, 김해 청룡대 등 명승지를 소요했는데 오늘날 숱한 곳에서 그의 발자취가 발견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그러나 최치원이 입산 후 명승지나 배회하면서 무위도식한 것은 아니다. 가야산 은거는 오히려 학문의 깊이와 다양성을 더해준 시기였다. 최치원이 입당할 무렵 당나라는 유교·불교·도교가 혼합적으로 존재하던 시기여서 그는 다양한 사상을 접할 수 있었다. 신라에서도 지식인들은 불교, 특히 선승(禪僧)들과 밀접한 교류를 가졌고, 선승 역시 유학에 대한 이해가 높았으므로 유·불 양쪽에 깊은 소양이 있는 경우가 많았다.

 

최치원은 유학을 중시하는 6두품 출신 가문이었으므로 유학할 당시부터 유교에 가까웠고, 여기에다 과거 급제를 위해 다양한 유교 경전을 설립했으므로 그의 정치적 이념은 유교를 바탕으로 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그는 신라인으로서는 유일하게 유교의 선성(先聖)으로 문묘에 배향되었다. 또 그가 모셨던 고변은 신선을 믿고 도원(道院)을 세운 인물이었으므로, 최치원 역시 도교에 관심을 가졌다. 최치원이 우리 나라에 도맥(道脈)을 전해준 대표적 인물로 추앙되는 것이나, 그가 마지막에 홀연히 신선이 되었다고 전해지는 것은 그가 도교와 맺은 관계 때문이다.

 

최치원은 귀국 후 왕명을 받고 불교 관계 비문들을 저술하면서 불교에도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나중에는 유교보다 불교에 더 기울었는데, 그 시기는 그가 정치에 대한 뜻을 접고 가야산에 입산한 후이다. 그는 불교에 심취하여 불교의 진리가 유교, 도교보다 더 위대한 것이라 하였으며 왕명이 아닌 자신의 의지에 따라 많은 불교 관련 저술을 하였다.

 

이;러한 이유로 조선시대에 이르러 최치원의 문묘 배향이 합당하지 않다는 비판이 끊이지 않았다. 주자 성리학의 입장에서 보면 최치원은 유학자로서의 순수성이 의심되는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상사적 입장에서 보면 후일 서산대사(西山大師)가 “유학을 배우는 사람으로서 고운(孤雲)과 같이 된 이후에애 불(佛)이 불(佛)인 까닭을 알게 된다”라고 말했듯이 최치원은 유(儒)와 불(佛)에 정통한 신라를 대표하는 학자라 할 수 있다.

 

● 지식인 최치원의 한계

 

최치원에 대한 초인적인 설화가 많은 것은 신라에서는 물론이고 당나라에서도 그를 세상에 드문 문호(文豪)로 숭배한 탓에 그의 명성이 점차 신격화되었기 때문이다. 최치원은 수많은 저술을 남겼으나, 오늘날에는『계원필경집』만 온전히 전하고, 그밖에 약간의 시문(詩文)과 금석문 몇 편이 남아 있다.

 

『계원필경집』은 한문학사상 최고(最古)의 문집으로 매우 중요한 위상을 차지하고, 최치원이 신라에 귀국한 후 지은《사산비명(四山碑銘)》은 금석문의 신기원을 여는 백미로 평가받고 있다. 이 때문에 최치원은 설총(薛聰)을 제외하면 신라인으로는 유일하게 문묘에 배향된 문인군자(文人君子)이며, 현인으로 추앙받고 있는 인물이다.

 

고려의 현종(顯宗)은 최치원이 창업에 은밀한 공로가 있다 하여 내시령의 증직(贈職)과 문창후(文昌侯)의 증시(贈諡)를 내리기도 하였다.『삼국사기(三國史記)』에 의하면 최치원이 “계림은 시들어가는 누런 잎이고, 개경의 고니재는 푸른 솔이다”라 하여 신라가 멸망하고 고려가 일어날 것을 예언한 서한을 보낸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최치원은 자신과 함께 3최로 손꼽히던 최언위(崔彦撝)가 태조(太祖) 왕건(王建)의 신하가 된 것과 달리 신라 왕실에 대한 충성심을 버리지 않았다. 따라서 이 내용은 사실 여부를 떠나 고려 왕조의 창업을 합리화하는 데 거론될 정도로 그의 명성이 빛났음을 보여주는 예이다.

 

그러나 이처럼 뛰어난 지식인임에도 불구하고 최치원의 현실 인식에 대해서는 아쉬움이 남는다. 그 가운데 하나가 발해사에 대한 인식이다. 최치원은 발해를 ‘북국’, 신라를 ‘남국’으로 보는 ‘남북극시대’라는 시각을 갖고 있었으나 이를 민족사적으로 자각하지 못했다. 즉 신라는 당의 ‘대번(大蕃)’ 발해는 ‘소번(小蕃)’이므로 당나라가 양자를 동격에 두어서는 안 된다고 호소할 정도로 사대주의적 인식에 매몰되어 당의 이간 정책을 극복하지 못했던 것이다.

 

또 최치원은 3최로 불린 최언위나 최승우(崔承祐)에 비해 지식인이 갖춰야 할 신념이나 용기가 부족했다고 평가받을 수 있다. 골품제라는 족쇄를 차고 있었던 신라의 6두품 지식인들이 진보된 역사를 추구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 결과 최언위는 신라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태조 왕건을 택함으로써 이후 경주 최씨 족속들이 고려 사회에서 문신 귀족으로 부상하는 단초를 연 행동하는 지식인이 되었다. 최승우 역시 비록 역사적 판단이 정확하지 못했던 셈이 되었지만, 후백제의 견훤(甄萱)에게서 새로운 도약을 계획한 점에서 최언위와 맥을 같이한다.

 

이들에 비해 신라 왕실에 대한 충성심에 얽매여 벼슬도 지키지 못하고 은둔한 최이원은 역사적 전환기에 뜻을 펴지 못한 채 고뇌하는 지식인으로 머물고 말았다. 하지만 최치원이 신라를 떠나 태조 왕건에 귀부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그의 뜻이 그만큼 현실적인 공명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음을 보여주는 증거가 될 수도 있다.

 

  

 

 

출처 : 正天 金齋巖의 INTERNET 國史·時事 讀書院
글쓴이 : 대모달(大模達)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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