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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가야산 神仙이 된 文昌後 孤雲 崔致遠 선생 (제1부)

오늘행복스마일 2018. 12. 27. 14:14

가야산 神仙이 된 文昌後 孤雲 崔致遠 선생 (제1부)

                            

                           고운최치원선생                이성동사단법인합천향토사연구회장 문화칼럼

 

                    

 

세계문화유산 팔만대장경을 봉안하고 있는 해인사는 조선 팔경중의 하나인 가야산과 남산제일봉이 병풍처럼 둘러 싸여 주위 경관이 빼어나게 아름다운 명승지에 위치해 있다. 통일신라 때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천이백년 화엄사상의 불법을 전파한 유서 깊은 화엄종찰이다. 해인사의 해인(海印)의 의미는 바다에 풍랑이 쉬면 삼라만상 모든 것이 도장 찍히듯 그대로 바닷물에 비쳐 보인다는 뜻으로 모든 번뇌가 사라진 부처의 마음 속에는 과거와 현재·미래의 모든 업이 똑똑하게 보인다는 것을 의미한다.  대승경전의 하나인 화엄경은 <대방광불화엄경>을 말하며 따라서 화엄세계는 광대무변하게 우주에 편만해 계시는 붓다의 만덕(萬德)과 갖가지 꽃으로 장엄된 진리의 세계라고 말한다. 그래서인지 해인사에 이르는 연도인 홍류동 일대는 부처님의 섭리로 사시사철 山水가 맑고 그렇게 아름다운 풍광을 빚어내는 것인지 모른다.

신라 말 벼슬을 버리고 여기서 한동안 머물다가 신선이 되어 종적을 감추었다는 최치원 선생의 농산정(籠山亭)과 재실(齋室)이 고즈넉이 서 있는 홍류동은 그 계곡 따라 십리길에 늘어서서 하늘을 떠받들듯 솟아 있는 키 큰 홍송 밑으로 봄철에 시작하여 여름철끝자락까지 은행나무 벚나무들이 눈부시게 푸른 터널을 이루며 싱그러운 녹음(綠陰)의 향취(香臭)에 젖게 하는 곳이라 누구나 이곳에 오면 부처님의 화엄의 세계에 들어서는 장엄한 분위기를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가을이 오면 이곳에서 펼쳐지는 천자만홍(千紫萬紅)의 아름다운 풍광이 계곡물을 붉게 물들인다 하여 언제부터인가 이곳을 홍류동(紅流洞)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이곳은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으로 당나라 전역에 이름을 떨쳤던 풍류객 고운(孤雲) 최치원 선생이 고국에 돌아와서도 난세(亂世)를 만나 포부를 마음껏 펼쳐보지 못하고 전국의 산과 바다와 강을 따라 주유(周遊)하다가 이곳 홍류동에 들려 그 아름다움에 매료되어 종착지로 머문 곳이다. 그가 이곳에 머물며 시끄러운 세상의 온갖 시비(是非)를 흐르는 벽계수(碧溪水)에 씻고 청산을 벗삼아 살다가 신선이 되어 가야산에 사라졌다는 설화가 천년이 지난 지금에도 구전(口傳)되어 전해지고 있다.

한국 한문학의 조종(祖宗)이라는 칭호를 받을 만큼 최치원은 그의 생애를 통해서 많은 글을 남겼다. 그에 관한 기록과 그가 저술한 작품을 통해 그의 생애와 사상 특히 당나라에서의 활동과 귀국 후 신라 사회에 미친 그의 정치이념과 문학 및 종교사상에 대해 개괄적으로 살펴본다.

 

Ⅰ. 생애와 사상

 

최치원의 생애는 알려진 바와 같이 유년시절, 당나라 유학시기, 귀국후 신라에서의 활동, 은거시기로 크게 나뉘어진다.

이에 본고는 그간 밝혀진 연구 성과에 힘입어 그의 생애와 저술을 살펴보고 당과 신라말의 정치적 상황에서 형성된 그의 정치이념과 시무십여조의 개혁안, 그리고 신라말의 사상적 혼란 속에서 타고난 그의 종교관의 방향을 분석하고자 한다.

 

1. 가계 및 유년시절

최치원은 본래 신라의 왕경(지금의 경주)의 사량부(沙梁部) 혹은 본피부(本彼部) 사람으로 후기 신라의 진보적 시문학을 대표하는 시인의 한 사람이다.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고운(孤雲) 또는 해운(海雲), 견일(肩逸)의 아들로 알려져 있고, 신라 골품제에서 6두품(六頭品)으로 신라의 유교를 대표할 만한 많은 학자들을 배출한 최씨 가문 출신이다.

특히 최씨가문 가운데서도 이른바 신라 말기 최승우, 최언위와 함께 3최(崔 )의 한 사람으로서 새로 성장하는 6두품출신의 지식인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최치원은 이 중 가장 먼저 귀국해 당나라에서 쌓은 학문과 경륜을 조국 신라를 위해 펼쳐보려는 포부를 가지고 있었으나 두 사람은 입신양명에 발목을 잡는 골품제에 항거하여 최승우는 서남방면에서 일어난 후백제의 견훤의 진영에 편입했고, 최언위는 송악의 호족 왕건 휘하에 들어가 신라의 조정과 등을 지게 된다.

신라에는 골품제라고 해서 총 8계급이 있었다. 성골(聖骨)과 진골(眞骨), 6두품(六頭品)에서 1두품까지 있었다. , 성골은 부계, 모계가 모두 왕족의 혈통으로서 가장 높은 계급이며, 진골은 부계나 모계 중 한 쪽이 왕족일 경우, 또는 정복된 왕족이 여기에 해당된다. 예를 들면 김유신 집안은 가야의 왕족이었는데 신라에 합병이 된 후 곧 진골이 되었다.

6두품은 두품 중 가장 높은 계급인데 신라 17관등 중 제 6관등까지의 승진 제한이 있었다. 일반 평민은 1-3두품에 해당하는데 평민들의 기록은 거의 나타나지 않고 있다.

성골은 그야말로 다른 종족, 다른 신분의 피를 허용하지 않고 철저하게 왕족의 족내혼으로 이루어지며 다른 피가 섞이면 진골, 그 이외의 왕족이 아닌 신분의 사람들은 원천적으로 편입이 금지되어 있었다. 왕족이 아닌 경우로서 가장 출세할 수 있는 등급은 6두품이었던 것이다.

이처럼 신라시대에도 이미 철저한 신분제도가 확립이 되어 있어서 신분상승이 어려운 사람들에게 불만의 소지가 많았던 것이다.

 

1) 최치원의 탄생과 신라말의 왕실

 

지난 역사나 오늘의 사회현상을 보아도, 인간이 태어나서 죽음에 이르기까지 그가 태어난 시대의 상황이 그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것은 누구나 인지하는 사실이다.

최치원이 태어난 해는 857년이다. 이때는 귀족들의 견제와 거듭되는 반란에 시달려 왕위를 오랫동안 유지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최치원이 태어난 해는 신라를 통치하던 문성왕이 죽은 해이다. 신라 중대의 강력한 왕권체제가 무너지고 신라하대의 각종 반란과 왕권교체로 정치적으로 매우 혼란했던 시기였다. 어느 시대든 이처럼 왕조의 말기는 혼란하다. 혼란은 결국 망국이라는 파국을 맞게 마련이다.

대개 이러한 시기에 태어난 사람은 시대 상황에 따라 삶의 방향도 큰 영향을 받는다.

그뿐만 아니라 한 사람의 출생은 그를 낳아준 부모의 사회적 계급과 지위와 연관되어 그 일생을 좌우할 만큼 삶 전체에 중요한 변수로 작용한다.

최치원의 삶은 전반적으로 불안한 시기에 태어났다는 점 외에 정치 중심지인 경주에서 태어난 것도 그의 생애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 그러나 그의 출생지는 오리무중이다. 이를 확인할 수 있는 문헌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이다.

 

최치원은 857년 <(憲安王 1년), (文聖王 19년)> 왕경인 경주에서 출생하였다. 그의 가계에 대하여 <崔致遠 字 孤雲 或 海雲 王京沙梁部人也 史傳泯滅不知其世系>, 『삼국사기』권 46 열전6, 최치원 조,

致遠乃 本彼部人也 今黃龍寺南昧呑寺南有古墟 云是崔候古宅也 殆明矣

(『삼국유사』권1, 혁거세 왕조)

위와 같이 삼국사기에서는 “최치원의 자는 고운 혹은 해운이요, 왕경의 사량부 사람이다. 그 세계(世系)를 알 수 없다”라고 기록되어 있고,

삼국유사에서는 “치원은 본피부(本彼部) 사람이다. 황룡사(皇龍寺)와 매탄사(昧呑寺) 남쪽에 그의 집터가 남아 있다”라고 기록하고 있어서 『삼국사기』에는 사량부인으로, 『삼국유사』에는 본피부인으로 상이하게 나타나 있다.

만약 김부식의 <삼국사기>와 일연의 <삼국유사>의 기록을 신뢰한다면 그는 경주 출신임에 틀림없다. 다만 경주 6촌 중 어느 부족출신인가를 가려내는 것은 <삼국사기> 신라 본조 유리왕조에 육부의 이름을 고치고 성씨를 줄 때, 陽山部를 급량부로 하고 李氏를 주고 돌산고허부를 사량부로 하고 崔氏를 주었다는 기록으로 보아 최치원은 사량부 출신일 가능성이 크다. 어쨋든 삼국사(三國史)에 관한 기록 중 우리나라의 사료 중 두 종류의 사료에 기대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최치원의 출신은 두 사료에 기대하는 게 합리적인 판단일 것이다.

출신 배경도 출신지만큼 한 인간의 삶에 운명을 결정하는 큰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

최치원은 그가 태어난 출생지도 불분명하지만, 태어난 家系도 분명치 않다. 그것은 최치원이 남긴 글 어디에서도 자신의 가계(家系)를 분명하게 밝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만 그가 남긴 작품 중에 자신의 아버지가 헌강왕의 命으로 ‘견일(肩逸)’이라는 이름을 하사(下賜)받았다는 기록만 남아있다. 삼국시대에 왕으로부터 이름을 하사받는 일은 나라에 큰 공을 세우거나 왕실에 특별한 업적이 있을 때 가능한 일이다. 경주 사로국 6촌장이 신라개국 공신으로서 유리왕으로부터 성씨를 하사받았다는 것이 그 예이다.

이와 같이 그의 세계(世系)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 아버지 견일은 원성왕의 원찰인 숭복사(崇福寺)의 창건에 관계하여 그 공로로 헌강왕으로부터 견일(肩逸)이라는 이름을 하사 받았다는 기록이 있다. 이 기록에 의하면 그 공로가 원성왕을 위해 지은 발원문(發願文)이다. 발원문은 불교에서 수행자가 정진할 때 세운 서원(誓願)이나 시주(施主)의 소원을 적은 글이다.

최치원의 아버지 견일이 숭복사를 창건하는데 관여하고 원성왕의 극락왕생 천도를 위해 발원문까지 지은 것을 보면 상당한 글 솜씨를 지녔음은 물론, 신라왕실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삼국유사'와 최치원(崔致遠)이 지은 비문에 의하면 "숭복사는 신라 선덕왕 이전에 파진찬(波珍飡) 김원량(金元良)이 창건하여 '곡사(鵠寺)'라 하였는데, 원성왕(785년~798년)이 죽자 이곳에 능을 만들고 지금의 위치로 절을 옮겼다. 경문왕이 폐사(廢寺)나 다름없던 곡사(鵠寺)를 재건한 것은 꿈에 원성왕(元聖王)을 보았기 때문이다. 역사상 꿈과 관련해서 전해지는 설화들이 많다. 그 한 예가 이성계가 왕이 될 꿈해몽과 관련된 청허당 휴정의 「설봉산석왕사기」이다.

무학대사는 이 꿈해몽으로 이성계와 인연을 맺고 조선왕조 최초이자 마지막 왕사가 된다.

결국 꿈은 해석이 중요하다. 특히 정치사에서 꿈은 단순히 꿈이 아니라 정치행위기 때문이다. 경문왕이 곡사(鵠寺)를 재건하면서 원성왕을 끌어드린 것은 고도의 정치적 의도가 깔려 있었다. 경문왕은 곡사의 재건과 숭복사로 개명을 통해서 원성왕 직계와의 족벌의식을 제고(提高)하고자 했던 것이다. 왕이 족벌의식을 높인다는 것은 곧 왕권강화를 의도한 것이다. 그 이면에는 당시 귀족들의 힘이 컸다는 것을 의미한다. 경문왕의 이러한 사업에 최치원의 아버지 견일이 관여하고 있는 것은 그와 경문왕이 사적으로 밀접한 사이라는 추정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경문왕이 즉위하여 꿈에 원성왕을 보고 이 절을 증축한 뒤 능원(陵園)수호와 명복을 빌게 하였으며, 헌강왕 때 이 절의 이름을 ‘대숭복사’로 하였다고 하나 그 뒤의 역사는 알 수가 없다.

경주시 외동읍 말방리 동쪽 토함산 자락, 숭복사지에는 최치원(857년~?)이 지은 비문이 1931년에 발견되었다. 절터에서 발견된 기와 조각 등으로 미루어 볼 때 이 절은 조선시대까지 존속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 비문을 받혔던 옛숭복사지의 귀부(龜趺)는 지금은 경주박물관 앞뜰에 놓여있다.

이로써 숭복사는 원성왕의 명복을 빌어주던 원찰이라는 것과 그곳에 있던 비문을 최치원이 지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보아 경문왕과 최치원은 동시대의 사람으로서 서로 신분은 다르지만 깊은 인연을 갖고 있었던 사이였다고 볼 수 있다.

경문왕은 최치원이 태어난 지 4년 되는 해에 왕위에 등극했고, 최치원이 당나라로 유학가기까지 왕위에 있었다. 경문왕은 「삼국유사」에 나오는 <임금님의 귀는 당나귀 귀>라는 '여귀설화(驪耳설화)'의 주인공이다. 경문왕이 왕위에 오른 직후부터 귀가 자꾸 길어져 나귀 귀처럼 커져갔다. 왕비와 궁녀, 신하들까지도 이 사실을 몰랐지만, 오직 왕의 두건을 만드는 복두장(幞頭匠)만이 이 사실을 알았다. 그는 왕의 함구령(緘口令)을 어길 수 없었기 때문에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었다. 그러다가 그가 죽을 무렵에 도림사(道林寺) 대나무 숲에 들어가 "우리 임금님의 귀는 당나귀 귀"라고 했는데, 그 뒤 바람이 불 때마다. 대나무숲에서 "우리 임금님의 귀는 당나귀 귀"라는 소리가 들렸다. 경문왕은 이 소리가 싫어 곧 대나무를 베어버리고 대신 산수유를 심었다. 그랬더니 그 뒤 바람이 불면 "우리 임금님의 귀는 길다네"라고 들렸다. 이 설화가 만들어진 것은 바깥세상 애환의 소리를 임금이 많이 듣기를 바라는 백성들의 순수한 소망이 묘사된 설화가 아니었을까,

<삼국유사>에 따르면 경문왕은 헌안왕의 사위 자격으로 왕위에 올랐다. 헌안왕이 경문왕을 사위로 맞이한 후 그를 후계자로 삼은 것은 그의 품성 때문이었다. 국선(國仙)이었던 경문왕 응렴(膺廉)은 스무살에 헌안왕의 부름으로 궁중 연회에 참석했다. 국선(國仙)은 당시 화랑도의 최고 지도자였다. 화랑도는 그 창설로부터 삼국통일이 완성된 문무왕대에 이르기까지 약 1세기 동안 융성하였으며, 삼국통일과정에 강한 무사도정신으로 국난을 극복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으나, 통일 후 나라에 태평시대가 계속되면서 쇠퇴하여 신라가 멸망할 때까지 존속하였다. 9세기에 들어와 왕권이 약해지고 귀족세력이 강해지자 귀족들의 사병 집단으로 변질되어 가면서 화랑이란 말은 쓰지 않고 선랑(仙郞), 국선(國仙) 등으로 불렸다.

궁중연회서 헌안왕과 응렴이 나눈 대화는 다음과 같다.

"낭(郎)이 국선으로 국토를 유력(遊歷)하며 어떤 일을 보았는가?"

"좋은 일 세 가지를 보았나이다."

"그 이야기를 들어보자"

"높은 자리에 있으면서 낮은 사람들보다 겸손하게 사는 이가 첫째요, 큰 부지이면서 겸손하게 옷을 입는 것이 둘째요, 본디 귀하고 힘이 있으면서 그 위세를 쓰지 않는 이가 셋째이옵니다."

헌안왕은 응렴의 얘기에 감동해서 딸과 왕위까지 물려주었다.

그렇게 왕위에 오른 경문왕은 즉위 후 대사면을 실시했다. 대사면의 정책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통치자가 할 수 있는 가장 큰 시혜 정책이다. 대사면의 명분은 화합과 포용이지만, 통치자의 입장에서 보면 초기 권력을 안정시키는데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다. 경문왕의 또 다른 주용 정책은 국학(國學)의 진흥이다. 682년 (신문왕2)에 설치한 통일신라시대의 교육기관인 국학은 신라가 삼국통일 이후 국가 정치제도를 정비함에 따라 지배체제의 효율적인 운영의 필요에 의해 추진된 것이다.

 

 

경주 박물관 앞뜰에 있는 숭복사 터 귀부

http://www.hamyang.org/choi1.htm

가야산 신선이 된

최치원 선생 (3)

합천향토사연구회장

이 성 동

 

경문왕이 이러한 목적을 가지고 국학진흥에 힘쓴 이면에는 자신의 권력기반을 강화하기 위한 의도가 깔려 있었다. 왕조 시대나 현대에 있어서도 자신의 권력을 펼칠 수 있는 수단이 인사권이다. 왕권의 힘은 바로 새로운 인물을 등용하거나 적재적소에 배치하는 인사권에서 나올 수밖에 없다. 삼국통일의 대업을 이룩한 제 30대 문무왕 때는 강력한 전제 왕권체제를 구축하여 정치, 사회, 문화 전반이 태평시대를 구가하였으나 이후 귀족세력들의 불만이 누적되어 제 35대 경덕왕 때에 이르러서는 귀족들의 조직적인 반발이 일어나 왕권이 급속도로 약화되기 시작한다.

제 36대 혜공왕 때에는 여섯 차례의 각종 반란과 친위 쿠데타 사건이 잇따르면서,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친왕파와 반왕파로 나뉘어 치열한 왕권다툼으로 신라는, 그야말로 한치 앞을 내다 볼 수 없는 혼란기로 치닫게 된다.

경문왕의 왕권회복정책은 6두품 자제들을 많이 입학시켜 졸업과 동시에 곧장 관직에 임명함으로서 가능하면 자신의 수족들을 요소요소에 배치하면서 동시에 반발세력을 잠재우고 왕권을 강화하는 고육책이었다. 국학에는 6두품 자제들이 많이 입학했는데, 이들은 9년 동안 논어(論語), 효경(孝經)을 비롯하여 예기(禮記), 주역(周易), 사서(史書), 모시(毛詩),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문선(文選) 등을 배웠다. 결코 이 과정은 상당한 재력은 물론 인내력과 학문에 대한 열정 없이는 불가능했다. 따라서 이 같은 과정은 정실인사를 배제하고 학문연찬(學問硏鑽)과 수신(修身)과정을 거친 자들에게 관직을 부여함으로써 귀족들의 반발을 제어할 수 있는 장치가 된 것이다.

경문왕의 아버지는 계명(啓明)이며, 어머니는 광화부인(光和夫人)이다. 할아버지는 43대 희강왕이며, 왕비는 이미 전술한 바와 같이 헌안왕의 큰 딸인 영화부인(寧花夫人) 김씨이고, 헌안왕의 작은 딸도 후에 왕비로 삼았다. 아들은 황(晃 :정강왕), 정(晶 : 헌강왕) 윤(胤)이고 딸은 만(蔓: 진성여왕)이며, 동생으로는 위홍(魏弘)이 있었다. 경문왕은 할아버지가 왕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헌안왕의 사위의 자격으로 왕위에 올랐기 때문에 자신의 입지를 만회하기 위해서도 열심히 국사에 전념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경문왕 때는 재위 중에 여러 차례 반란이 계속 발생했다. 경문왕 즉위 해인 861년에는 이찬 윤흥(允興)과 숙흥(叔興), 계흥(季興) 등이, 868년에는 이찬 김예(金銳), 김현(金鉉) 등이 874년에는 근종(近宗) 등이 반란을 꽤했다. 이처럼 경문왕은 재위 14년 동안 3차례나 반란이 있었다는 것은 여전히 경문왕의 왕위도 불안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경문왕의 불안했던 통치기간이 최치원으로 하여금 당나라 유학의 길을 선택하게 하는 동기가 된 것이다. 혼돈은 최치원과 같은 육두품 출신들에게 새로운 길을 모색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된 것이다.

 

2) 최치원은 왜 당나라에 조기 유학의 길을 택했나?

 

최치원은 6두품의 출신으로서 골품제(骨品制)하에서도 국가 요직에 임명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음에도 당나라에 유학의 길을 택한 것은 나이 때문이었다. 최치원의 아버지 견일은 그의 아들이 국학에 입학할 수 있는 입학연령이 되는 15세가 될 때까지 느긋하게 기다릴 수 없었다. 기다린다 해도 국학에의 입학을 또한 보장할 수 없었기 때문에 신라처럼 골품제가 없는 당나라에 가서 높은 관직에 오르면 쉽게 신분상승이 되리라 믿었던 것이다. 그러한 믿음은 당시 중국 당나라에 유학하고 당의 교육기관인 국자감에서 공부하여 당의 과거시험에 합격한 사람들이 많았다. 이 때 신라에서 당나라에 유학한 학생들을 숙위학생(宿衛學生)이라고 하였고 이들에게 응시 기회를 준 빈공과(賓貢科)라는 과거제가 있었는데 이 시험에 합격하면 당나라의 관리가 되기도 하였다. 최치원(崔致遠) 최승우(崔承祐), 최언위(崔彦撝) 김운경등이 당나라에서 유학하고 돌아와 국내에서 활약했고, 불교계에서는 의상과 원측, 혜초 등이 당나라에 유학하고 돌아와 불교진흥에 큰 역할을 했다. 그 외에도 당나라 유학을 다녀 온 사람들이 신라 조정의 높은 직위에 올라 있었던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와 같이 견일은 자신이 할 수 없었던 일을 아들을 통해 실현해보려는 강한 의지로 아들 최치원을 당나라에 유학을 보내게 된 것이다. 그는 최치원을 당나라에 보내면서 "10년 안에 진사에 급제하지 않으면 내 아들이라 하지 말라, 나 역시 아들을 두었다고 말하지 않으리라"는 말에서 그의 의지를 엿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아들 최치원을 당나라에 유학 보내고 난 후 아들이 당나라에서 벼슬하고 금의환향하는 것을 보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다. 그의 죽음에 대해서는 <계원필경>에서 간단히 언급하고 있을 뿐이다. 최치원은 자식으로서 아버지의 임종을 지켜보지 못했기 때문에 본의 아니게 불효자가 될 수밖에 없었다.

최치원의 형제로는 고국에 그의 형 현준(賢俊)이 있었고 종제(從弟)가 있었는데, 그의 형 현준(賢俊)은 해인사의 승려로 있었다. 종제로는 최서원(崔棲遠)과 최인연(崔仁渷)의 활동이 보인다.

 

2. 당나라에서의 활동

1) 당나라로 떠나다

 

최치원은 유학(儒學)적 소양(素養)을 쌓으며 성장했지만 신라의 골품제 하에서는 그의 역량을 소신껏 발휘할 수 없음을 깨닫게 되었고, 자신의 입신양명(立身揚名)을 위해서 입당(入唐)을 결심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최치원의 아버지 최견일이 아들을 당나라에 유학 보내기로 결정한 요인도 최치원이 가진 유학적 지식과 자식에 대한 신뢰감이었다. 최견일은 자식 뒷바라지를 위해 어떤 일도 마다하지 않을 정도로 자식에게 모든 것을 걸었던 사람이다. 최치원은 아버지 최견일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12세에 배편으로 당(唐)나라에 건너갔다. 최치원이 탄 배가 중국 산동의 등주(登州)에 도착했다. 이곳은 역사적으로 한반도와의 해상 교통로에 위치한 항구로서 신라인과 신라 선박의 출입이 잦았다. 발해만과 마주하고 있는 등주는 해상을 통해 온 신라 사람들이 당나라 수도 장안으로 가기 위해 처음으로 딛는 중국 땅이다. 여기서 수도 장안까지 가려면 교통수단이 복잡하고 여행 기간도 3개월 정도 소요된다. 최치원이 장안으로 가면서 운하를 이용했을 가능성이 높다. 왜냐하면 운하 근처는 물산이 집산하는 곳이고, 짐을 나르기도 편리하였기 때문이다. 최치원이 이용했을 가능성이 있는 이 운하는 뒷날 자신의 상관으로 모셨던 고병(高騈 : 중국명 고변)이 다스렸던 관할이었기 때문에 최치원의 당나라 입당에 중요한 의미를 주는 교통로가 되었을지 모른다.

 

2) 최치원이 도착한 장안

 

당나라 수도 장안(長安)은 유구한 역사를 자랑한다. 지금은 서안(西安)으로 불리는 장안은 한나라 고조 5년 (기원전 202년)에 설치한 현(縣)이었다. 중국 7대 고도(古都) 중 하나인 장안은 서한(西漢), 신(新), 동한(東漢), 서진(西晉), 전조(前趙), 전진(前秦), 후한(後漢), 서위(西魏), 북주(北周), 수(隨), 당(唐)의 수도였다. 중국 역대 왕조 중 가장 많은 왕조가 이곳을 수도로 삼았다. 사실상 중국 고대문명의 발상지이기도 하다. 장안에 위치한 위수(渭水) 평원은 중국 고대문명의 젓줄인 셈이다.

장안을 관중(關中)이라 하는 이유는 동쪽으로는 함곡관(函谷關)에 이르고, 서쪽으로는 무관(武關), 남쪽으로는 산관(散關), 북쪽으로는 소관(蕭關)에 이르고 있어, 네 관문의 한가운데 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관(關)이란 골짜기에 성벽을 쌓은 것이니 주변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음을 알 수 있다. 위수(渭水)는 그 분지평야 한 가운데를 흐르는 황하(黃河)의 지류이다.

우리가 흔히 들어온 ‘장안의 화제’는 중국의 고도(古都)인 장안(長安)에서 일어난 큰 얘깃거리를 말한다. 그 만큼 장안은 중국은 물론 한국인에게도 오랜 세월동안 유명한 도시로 기억되고 있다. 최치원이 장안에 도착해서 이곳이 얼마나 위대한 도시인가를 느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기원전 750년 전 “세계의 모든 길이 로마로 통한다” 했듯이 기원전 200년 전에는 세계의 모든 사람들이 블랙홀처럼 모여들었던 곳이 장안이다. 장안에는 최치원처럼 신라에서 온 유학생뿐만 아니라 돌궐, 거란, 위구르 등 각 지역에서 각양 각생의 사람들이 여러 가지 이유로 들어와 살고 있었다. 이때 장안에서 탄생한 사상과 예술, 문학, 제도 등은 세계 각국으로 퍼져 나갔다.

 

 

 

가야산 신선이 된

최치원 선생 (4)

합천향토사연구회장

이 성 동

 

당나라 장안에 도착한 최치원은 얼마간의 체류기간이 지난 다음, 타국에서 온 다른 유학생과 함께 국자감의 숙위학생이 되어 공부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다. 최치원은 이곳에서

인백지기천지(人百之己千之), 즉 남이 백번하면 자기는 천번하는 노력으로 경(經), 사(史), 자(子), 집(集) 등을 두루 섭렵(涉獵)하였다. 經, 史, 子, 集은 중국 남북조 시대에 책을 분류하는 방법으로 만들어진 개념인데, 경은 주로 사서오경인 '경서(經書), 사(史)는 '역사서'를 자(子)는 '자서(子書)'로 제자서(諸子書)'인데 춘추전국시대에 출현했던 제자백가의 주장을 담은 책으로 책의 이름에 자(子)가 붙는 경우가 상당히 많아. 예컨대『孟子』, 『老子(노자)』, 『한비자(韓非子』등이 그것이다. 집(集)은 시(詩)나 부(賦), 사(史) 등의 문학작품을 엮은 문집류를 일컫는 개념이다.

『계원필경(桂園筆耕)』의 서문에 의하면 이 시기에 그는 많은 시(詩)와 산문(散文)을 창작하여 뛰어난 시재(詩才)로 재능있는 문필가로 널리 알려져 중국의 이름난 시인, 문필가들을 경탄시켰다.

그는 서경(西京)에서 스승을 만나 공부한지 6년 만인 18세의 나이로 예부시랑(禮部侍郞) 배찬(裵瓚)이 주시(主試)한 빈공과(賓貢科)에 장원으로 급제했다. 그 뒤 동도(東都:洛陽)에서는 시작(詩作)에 몰두했는데, 이때 〈금체시 (今體詩)〉 5수 1권, 〈오언칠언금체시(五言七言今體詩)〉 100수 1권, 〈잡시부 (雜詩賦)〉 30수 1권 등을 지었다. 치원이 빈공과에 합격한지 2년 만인 876년(헌강왕 2)에 강남도(江南道) 선주(宣州)의 율수현위(溧水縣尉)로 임명되었다.

최치원의 표현에 따르면 “현위는 그 직급은 낮으나 그 임무는 매우 중해서(其官雖卑 其務甚重) 죄수들을 살펴야 하고 피로한 백성을 위무하니(推詳滯獄 慰撫疲) 동료 공직자는 그 직언을 겁내고 지방수령들도 두려운 마음을 가진다(佐僚能憚 其直聲 宰尹亦懷 其畏色).

사리(事理)를 말하자면, 실로 훌륭한 인재에게 맡겨야 한다“고 했다. 이러한 중요한 자리에 미성년인 만 19세의 외국인을 임명한 것은 당시 당나라로서는 파격적인 우대(최준옥, 사적고, 1982 보연각 265면)였다.

최치원 본인도 “본디 바닷가 출신으로 가문을 빛내게 될 줄 상상도 하지 못했거늘, 더욱이 수 천리 먼 이국에서 온 사람으로 한 고을 중책까지 맡았다.”고 회상했다. 이때 “급료가 많고(현위의 연봉은 당시 200~300석이었다고 함, -최완수 ‘신동아’ 2001년 9월호)

일은 한가로워 더욱 배움에 촌음(寸陰)을 헛되이 하지 않아, 지은 글 모두 5권”(계원필경 서문에서 중산복궤집 내력 설명)이었다.

최치원은 귀국 후 이를 진성여왕에게 봉정했으나 지금은 전해지지 않는다.

 

그는 당나라에서 벼슬하면서도 기울어져가는 고국 신라를 구하고 부모님을 뵙고 싶은 애뜻한 심정을 아래와 같은 詩로 달래기도 하였다.

 

窓外三苦雨 창밖에는 밤이 깊도록 비가 내리고

燈前萬里心 등불 아래 마음은 고국을 달리네

秋風惟苦吟 가을 바람에 시를 읊네

世路少知音 세상에 내마음을 아는 이 없네

 

율수현은 당시 강남서도(江南西都) 선주(宣州) 관할이었다. 현재 강소성 강령부에 속한다.

삼국사기 이병도박사 역주(1983년판과 2000년판 모두)는 “율수현은 지금 강소성 율양현(溧陽縣)”이라고 설명했으나 착오이다. 율수현은 지금도 율수현 그대로 엄존하고 있다. 남경 남쪽 50km 지점에 율양(지금은 市로 되었음)이 있다. 현재 각종 저서와 제종(諸宗) 족보의 70% 이상이 율수(溧水)를 표수(漂水)로 잘못 적고 있다.

2000년 10월 16일 이 현(縣)의 박물관 경내에 선생의 동상이 세워졌다. 2001년 10월에는 경주최씨 후예들이 찾아가 이 동상을 참배했다.

 

3) 학문정진 위해 현위(縣尉 )사직(辭職)

 

최치원은 877년 겨울 현위직을 사임하고 입산수학(入山修學)에 들었다. 공식적인 사임 이유는 박학굉사과(博學宏詞科 : 관리 선발을 위한 시험)에 응시할 준비를 하기 위해 입산했으나 진심은 다음과 같다.

"나는 덩굴풀처럼 누구에게 붙어사느니, 거미가 줄을 치듯 제힘으로 생계를 꾸려나가고자 한다. 수 없이 생각해 봐도 학문하는 것만 못하다(不如學), 평생에 애써 노력한 것이 오히려 헛될까 두려워서(百年勤苦 唯恐失之) 벼슬길의 진흙탕에 다투어 뛰어들지 않고 다만 유교의도를 좇았다(未兢宦途 但遵儒道). 그러므로 처음 벼슬에서도 진토를 싫어하고(莁仕而懷超塵土) 거처할 데를 고르는데 산천을 그리워하니(卜居而貪憶林泉) 속세의 요로와 교통하는 데는 눈길을 준 일이 없고(人間之要路通津 眼無開處) 물외의 청산과 녹수에 돌아갈 때만 꿈꾸었다(物外之靑山綠水 夢有歸時)"(계원필경 재헌계)

 

4) 가난과 난리로 절박한 상황에

 

그러나 혈혈단신 외국청년으로서 공부에 장기간 전념한다는 것은 힘든 일이었다. 두 세 해가 지나자 "녹봉은 남은 것이 없고, 글 읽을 양식이 모자랐으며"(제2장계) 설상가상으로 난리의 피 바람이 신변을 위협했다. 875년 황소의 난이 일어났다. 황소(黃巢)의 군대가 주변에 가까이에까지 밀어닥쳐 879년 6월 12일에는 율수의 주도(州都)인 선주(宣州)가 함락 당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생계가 아닌, 생사 자체가 걸린 절체절명의 급박한 상황이었다. "하늘이 높으니 물을 곳이 없고 날이 저무니 어디로 가야할까(天高莫問 日暮何歸)"(여격장서) "어디로 향해야 생을 안돈할 수 있을까(指何門而欲安生計)"(재현계)란 말은 바로 이런 급박함을 웅변해주고 있다.

이때의 심정은 다음 글에서 더욱 구체적으로 나타나 있다.

 

"집은 멀고 길은 험하다. 한없는 근심이 밤새도록 속을 태우고(窮愁則終夜煎熬) 먼 고향 소식은 해를 지나도록 막혀있다. (遠信則經年阻絶)." (여객장서)

언 베개에 마음이 상하는데 내 짝은 등불에 비치는 외로운 그림자뿐이다(凍枕傷神 孤燈伴影) 멀리서 들려오는 다듬이 소리는 나그네의 마음 두근거리게 하여 편안한 잠을 이룰 길 없으니, 천만 갈래의 울적함이 쌓인다. 더구나 집은 멀리 해 솟는 곳에 있고 길은 큰 하늘 못을 격해 있는 몸(家遙日域 路隔天池). 객사(客舍)에 들기가 원수보다 싫구나(投客舍而方甚死)" (재헌계)

전란 와중인 879년 이 해는 '일장공성만골고(一將功成萬骨枯)'란 고사성어가 생긴 해이기도 하다. 이 말은 한 장수의 전공은 만 명의 군사가 싸움터에서 죽은 결과라는 뜻으로, 오직 공(功)이 한 장수에게만 돌아가는 것을 개탄하는 말. 曺松의 <己亥歲>시에 나오는데 이 해가 바로 기해년이다.

875년에 일어난 황소(黃巢)의 난(亂)은 당나라 말기에 시작된 환관의 횡포와 인민에 대한 수탈이 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 지방의 토호나 상인층이 조정의 횡포에 반기를 든 것과 그 당시 기근도 한 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 저장성에서 구보의 반란(859년~860년), 쉬저우에서 방훈의 반란(868년~869년) 등이 이전에 일어났고, 황소의 난은 이러한 연장선상에서 일어난 조정에 대한 반란이다. 황소와 반란을 일으킨 자들은 산둥성에서 반란을 일으켰던 왕선지(王仙芝)가 죽자 그의 잔당들을 모아 규합했고, 대부분은 황소와 혈연을 맺은 자, 파산 농민, 유랑자들이 대부분이었다. 황소와 이들은 당나라 전역에서 약탈활동을 시작했다. 이 때문에 희종은 쓰촨성으로 망명했다. 희종이 망명한 뒤, 황소는 장안으로 들어가 국호를 대제(大濟), 연호를 금통(金統)이라고 불렀다. 또한 그에게 항복한 군인에게도 벼슬을 주었다. 그러나 그의 통치는 사실상 경제적 기반이 없었고, 그의 세력은 단지 장안 근교밖에 미치지 못하였으며, 결국 황소의 군대는 이극룡에게 격파당해 황소는 동쪽으로 도망간 뒤 산둥성의 타이산 부근에서 자결했다.(884년)

결과적으로 이 난은 당나라를 근본적으로 붕괴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최치원에게는 설상가상으로 또 하나의 이변이 생겼으니, 응시하고자 한 박학굉사과 시험이 황소의 난으로 무기 연기되어 버린 것이다(松本明 1975.'鈴木선생고희기념 동양사논총' 409면). 이 시험은 18년 뒤에야 다시 부활되었다.

 

5) 고병(高騈)의 막료로 관직 다시 시작

 

중국 당나라 말기, 황소의 난으로 나라가 혼란한 가운데인 879년 10월 문인 출신인 고병(高騈)이 진해(鎭海) 절도사(節度使)에서 회남(淮南) 절도사로 전임해 왔다. 그리고 이어 12월 고병은 동부지방 군총사령관(東面 諸道行營兵馬都統)을 겸했다.

고병은 권력이 막강해지고 일이 많아지자, 유능한 인재들이 필요하게 되었다. 이때 그 막하에 있던 최치원의 급제 동기생인 고운(顧雲)이 최치원을 추천하여, 최치원은 도(道)의 교통과 운수, 외관에 설치하였던 관(館)역(驛)의 순관(巡官)에 기용되었다.

위기에 처했던 최치원으로서는 그야말로 " 어쩌다 뭍으로 밀려나온 물고기가 고사 직전에 밀물을 만나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격이 되었다.(魚投水驟喜命蘇)"(재헌계) 현위를 지냈다는 경력 때문에 반란군에 잡힐 경우 처형당할지도 몰랐던 최치원은 이 관역순관 취임으로 일단 한숨을 돌리게 됐다.

최치원이 취임했던 도통순관은 요즘으로 치면 '정훈참모' 나 '공보관'의 직책에 해당된다.

 

절박함에서 벗어난 최치원은 찌들린 여관생활을 청산하고 관사(官舍)생활을 하면서 관직생활 틈틈이 책을 읽게 되었다.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었고 더 이상 출세할 생각도 없었다.

최치원의 이때의 심경은 다음 글에 잘 나타나 있다.

"사령부의 조치 내용을 받아보니 관사(官舍)를 내어주어 편히 있게 한다는 내용이다. 맡은 직책도 많았지만, 양식도 자못 넉넉하다. 논어에 이르기를 <배워서 넉넉하면 벼슬하고 벼슬해서 넉넉하면 배워야 한다> 했으므로 오직 공부만 하기로 했다. 다행히 생활하기 편한 관사에 들어가 삿갓 쓰고 짚신 신고 멀리 가는 수고를 덜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한 바구니 밥, 한 바가지 물로 길이 가난에 안빈(安貧)할 수 있다."한 것으로 보아, 빈곤한 생활을 탈피하여 의식주(衣食住)에 걱정이 없어진 것 같다.

 

최치원의 여유로움은 불과 몇 달이라는 아주 짧은 기간에 끝났다. 고병(高騈)은 얼마 안 있어 정승급인 태위(太衛)로 승격되었는데, 이 때문에 황제에게 보내는 표(表) 등 문서 일이 많아진 고병은 880년 여름 최치원을 본부로 불러올린다. 본부에서는 최치원을 불러올리는 배편을 마련하여주어 선생은 배를 타고 고우(高郵)에서 양주 교외 부둣가인 동당(東塘 : 지금의 수유만(茱萸灣)공원 부근)까지 40여 Km를 달려 그곳 군막에서 출정 나온 고병을 대면하게 된다. 여러 막료들의 추천을 받아, 고병은 최치원에게 본부근무를 보직하고, 그 자리에서 자신이 태위(太衛)가 된 데 대해 황제에게 감사의 인사를 올리는 '사가태위표(謝加太尉表)' 작성을 최치원에게 의뢰한다. 이때부터 최치원은 고병과 함께 종군생활이 시작된 것이다. 이후 고병은 최치원 선생이 작성해 올린 글을 보고 그 식견(識見)과 문장에 매료되어, 선생에게 모든 문서에 관해 중간 과정을 생략하고, 직접 보고하도록 특별히 배려했다.

 

6) 단계를 뛰어 넘은 초고속 승진

 

영광은 갑자기 그리고 한꺼번에 찾아왔다. 다섯 개의 직책(職責)이 일시에 최치원에게 주어진 것이다. 절도사 겸 도통인 고병은 선생을 절도사 직속의 순관에서 도통순관으로 막바로 승진시키는 한편, 황제에게 특별히 추천하여 승무랑(承務郞), 전중시어사, 내공봉이란 세 가지 직책과 이에 더하여 비어대(緋魚袋)까지 하사 받게 했다.

 

"지방의 한 현위로부터 곧바로 내전(內殿)의 직책을 겸하게 된 것이다.

특히 어대(魚袋)는 금 또는 은으로 장식한 물고기 모양으로서, 관복에 달고 궁궐을 마음대로 출입할 수 있는 일종의 출입증 같은 것이었다. 주머니(袋)에 넣고 다녔으므로 어대라 하였는데, 당나라의 사색공복(四色公服)제도는 1-3품은 자색(紫色), 4-5품은 비색(緋色), 6-7품은 녹색, 8-9품은 청색인데 자색 복엔 금어대, 비색 복엔 은어대를 차게 했다.

선생이 이때 하사 받은 것은 비색(緋色)어대로서 품계가 4-5품에 해당되는 것이다. 흔히들 선생이 이때 자금어대(紫錦魚袋)를 받은 것으로 잘못 기록하고 있는데, 자금어대는 귀국하여 신라 조정으로부터 받은 것이다. 당나라가 망한 지 17년 뒤인 924년에 건립된 지증(智證)대사 비명(碑銘)에는 당나라 때의 관직을 모두 빼고 신라에서 받은 관직만 새겼는데, 거기에 "사(賜) 자금어대 신(臣) 최치원"이 분명히 포함되어 있다.

 

이리하여 선생은 전위필연(專委筆硯))이라는 직책의 문서 일을 도맡게 되었는데 이후 "4년간에 쓴 글이 1만 수(首)<계원필경 서문>나 되었다.

 

그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격황소서(檄黃巢書 : 역적 황소에게 보내는 포고문)다. 이 글에 대해 고려 때 학자 이규보(1168-1241)는 "황소가 이 격문을 읽다가 <온 천하 사람이 너를 드러내놓고 죽이려 할 뿐 아니라, (불유천하지인 개사현육 :不唯天下之人 皆思顯戮), 지하의 귀신들까지, 쥐도 새도 모르게 너를 죽이려 이미 의논했을 것(억역지중지귀 기의음주 :抑亦地中之鬼 己議陰誅)이라는 구절에 이르러서는, 황소가 너무나 놀란 나머지 부지불식중에 상 아래로 굴러 떨어졌다고 한다."는 일화를 소개하면서, "귀신을 울리고 놀라게 하는 솜씨가 아니라면 어찌 능히 그러한 경지에까지 도달할 수 있는 글을 지었겠는가."(詩話叢林)라고 평했다.

 

이 글은 881년 황소가 장안을 점령한 뒤인 7월 8일에 쓴 것이다. 이 글에 "너는 궁궐을 침략하여 공후(公侯 :공작과 후작 벼슬)들은 험한 길로 달아나게 되고, 어가(御駕 :임금이 탄 가마)는 먼 지방으로 행차하게 되었다. 궁궐이 네가 어찌 머무를 곳이랴."란 대목은 황소가 난을 일으켜 대궐을 차지해도, 천하를 호령하고 백성이 따를 임금의 그릇이 아님을 경고하는 구절이다.

황소 토벌이 끝난 후 당나라 사람들 사이에는 ''이번에 황소를 토벌한 것은 칼의 힘이 아니라 최치원이 작성한 글의 힘이었다''란 말이 나돌았다고 한다. (김모세 한국위인전)

 

 

7) 석양에 기우는 당(唐) 나라 군영에서

 

선생이 고병을 대신하여 쓴 글들은 적군을 질타하고, 장병을 호령하는 내용도 있었지만, 동시에 집권세력의 내부 문제를 고심하는 글들도 있었다.

이때 당나라는 그 명운(命運)이 다해 석양에 지는 해와 같았다. 당나라의 쇠망을 예고하는 갖가지 병리현상이 도처에서 벌어졌다. 절도사들의 부정부패, 군부 내부 상호간의 참소-무고 사태가 빈번히 일어나고, 드디어는 우군간에 관할지를 놓고 전투를 벌이는 난맥상까지 빚어졌다. 이런 와중에서 임금은 누가 충신이고 누가 간신인지 구별하지 못하고, 지역 총사령관인 도통(都統)과 국방비 담당 총수인 염철전운사(鹽鐵轉運使)를 수시로 바꾸는 혼미한 리더십을 보였다.

당시 소금은 국가의 전매품으로 매우 중요한 국가 재정을 충당하는 수입원이었는데, 재정이 악화되면서 소금가격도 천정부지로 올랐다. 소금 밀매업자들은 싼 가격으로 팔아도 거액의 이익을 남겼으며, 비싼 관부의 소금보다 저렴하여 민중들로부터 큰 지지를 받았다.

어려서부터 무예를 연마하고, 경사(經史)와 서예에도 뛰어난 황소(黃巢)가 자신이 과거 시험에 여러 번 낙방한 것은 부패한 관료들이 있어 능력 위주의 선발이 불가능했기 때문인 것으로 생각했다. 따라서 그가 선택할 수 있었던 길은 소금장수였다. 소금 밀매업으로 그는 많은 돈을 벌었다. 염철전운사라는 직책은 이러한 소금과 철의 생산 및 밀매업을 단속하는 관리였다. 이 당시 소금 밀매업에 관련된 관원의 비리와 부정이 날로 심했기 때문에 도통과 염철전운사를 겸했던 고병도 그 자리를 탐하는 자들의 무고(誣告)로 그 권리를 박탈당했다가 다시 회복하는 어려운 고비를 여러 차례 겪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이러한 사정에 따라 고병의 막료였던 최치원 선생의 관직도 '도통순관'에서 '절도사순관'으로, 또 거기서 '도통순관'으로 여러 차례 직책이 바뀌는 시련을 겪었다.

 

"나는 염철전운사를 맡아 6년을 지냈으나... 더구나 통사(統師)의 직책을 여러 번 변경하는 중에... 군수물자(軍需物資)를 저축하고 나라를 부강케 하기란 아주 어렵고, 소금 굽고 철 주조(鑄造)하기란 더욱 어렵게 되어 버렸다" (883년 제도염철사를 회수하고 시중(侍中)겸 식읍 올려줌을 감사하는 장문-어느 상공에게)

 

선생은 당나라 조정의 내분과 난맥상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이런 글들을 귀국 직후, 신라 임금(헌강왕)에게 가감(加減) 없이 바쳤다. 당나라를 대국으로 받들던 신라의 외교적 입장을 보거나 또 당나라의 사신 자격으로 귀국해 있는 자신의 개인적 처지를 보거나, 이를 문서집으로 만들어 조정이 공람하도록 한다는 것은, 매우 중요하고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이를 결단한 선생의 의도는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선생이 귀국해서 본 신라의 내부 상황도 당나라와 다를 바가 없었고, 따라서 임금이 당나라의 예를 교훈으로 삼아 이러한 상황을 잘 대처해 나가기를 바라는 충정(衷情)과 소망이 있었던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고병(高騈)은 최치원 선생의 도움으로 여러 차례의 참소를 면했지만, 선생이 신라로 귀국한 뒤부터는 그를 변호할 사람이 없어 끝내 좌절하고 만다. "도교(道敎)신자인 부하의 말을 믿고 출정하라는 명령에 응하지 않았다"는 고발을 받아 또다시 병권을 박탈당하고, 울분 속에 선도(仙道)에 전념하다가 필사택(畢師鐸)에게 피살되었으니, 선생과 헤어진 지 불과 3년밖에 안 되는 887년의 일이었다, (구당서 권 182, 신당서 권 224하.) (최준옥 '고운선생문집' 하권 595면).

이러한 상황 속에서 선생은 자기에게 부여된 관직과 영화(榮華)에 만족하며 살 수 없었다. 고향의 부모와 山水를 그리워하는 마음이 간절할 때, 그곳의 산에 올라 객수를 달래보고 싶었지만, 그것도 뜻대로 되지 아니하였다. 그가 부모를 그리워하고 또 봉양하고 싶은 마음은 다음 글에서 여실히 나타난다.

 

"전달하는 조치를 받으매 매달 요전(料錢 : 급료) 20꿰미씩을 더 준다는 것이었습니다. 바라건대 제 끼니 때울 것만 남기고, 먼 고향에 계시는 어버이(遠鄕之親)에게 나누어드렸으면 합니다. "

"아득한 바다가 막혀, 부미(負米 : 부모 봉양)의 뜻을 이루기 어렵고, 하물며 오래도록 고향 사신이 없어 편지도 부치기 어렵던 차, 마침 본국의 사신 배가 바다를 지나간다기에, 이 편에 차와 약을 사 집에 부쳤으면 합니다. 제가 어버이 품을 떠난 지 오래되어, 어려운 생활을 면한 이상 까마귀 새끼가 자라서 늙은 어미에게 먹이를 물어다 주듯 그 반포(反哺)의 심정이 간절하다는 것을 감안하셔서, 석달치의 급료를 받아쓰도록 해주셨으면 합니다. 바라는 바는 저의 녹(祿)이 마침내 어버이에게 미쳐 멀리 이역에 나누고자 하는 것입니다." (謝探請料錢狀)

 

그 누가 까마귀를 검고 불길한 새라 하였는가

반포보은(反哺報恩), 그것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사람이 저 까마귀보다 못한 것을 끝내 슬퍼하노라

 

지은이 박효관(朴孝寬불1800~1890)

 

3. 귀국후 고국에서의 활동

1) 16년만에 고국 신라에 돌아오다

 

서기 884년 28세 때 드디어 선생은 귀국을 결심한다. 당시의 전란 때문에 "외국 젊은이들이 놀라, 당나라를 떠나는 상황이기도 했지만, 앞서 반포(反哺)의 심정을 토로한 '사탐청료장('謝探請料錢狀)'에 "약을 사 집에 부쳤으면 한다"는 구절이 있는 것을 보면, 귀국의 직접적인 동기는 아버지의 병환이 아니었을까 추정된다. 그래서 선생 본인은 귀친(歸覲)이라 표현했다(謝許歸覲啓). 어버이를 뵈러 집으로 돌아간다는 뜻이다. 그리고 선생의 사촌 아우 서원(棲遠)이 '신라에서 회남에 들어가는 사신 관직을 가지고 선생을 영접하러 온 것을 보면 신라왕의 부름과 가족들의 상봉 소원도 크게 작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884년 7월 마침 역적 황소(黃巢)가 토벌되어 '황소 죽은 것을 하례 드리는 표(表)'를 마지막 글로 지은 선생은 이해 8월 귀국 길에 오른다. 당나라 의종(毅宗)황제는 신라에 병력지원을 요청하는 소서(詔書)를 가지고 가는 사신의 신분을 선생에게 주었으며, 고병은 비용을 넉넉하게 주고 배편을 마련해주는 등의 후한 배려를 해주었다.

"어제 사령부 경리 직원이 8월 분 봉급을 보내 왔습니다. 저는 이미 귀국허가에 따라 특별히 노자(路資:교통비)를 받았었는데, 어찌 다시 봉급을 받음이 합당하겠습니까. 그래서 반납했더니 도리어 재송부 명령을 내렸습니다. 집을 윤택하게 하는데 쓰라는 말씀에 놀라 삼가 감사히 받습니다."

"저의 사촌아우인 서원(棲遠)이 신라국 사신단원의 자격으로 집안 편지를 가지고, 저를 영접하러 왔습니다. 장차 고국으로 돌아가려 하는데, 제 동생에게 어제 특별히 돈 30관을 내려주시는 큰 은혜를 주셔서 감사합니다."(謝賜弟棲遠錢狀)

 

선생이 귀국한 연유에 대해 서유구(1764-1845)는 "고병이 큰 일을 하는데 그 능력이 부족하고, 여용지(呂用之), 제갈은(諸葛殷) 등은 최치원이 당나라가 패망할 것임을 미리 예견하고 떠났는데, 떠난 지 3년만에 회남(淮南)에서 난리가 났으니(고병의 피살을 말함), 기미(幾微)를 아는 명철한 군자다움이 있다."(계원필경집序)고 했다.

8월 회남 군막을 떠나기 직전 선생이 받은 마지막 명의(名義)가 "회남입신라겸송국신등사 전동면도통순관 승무랑 전중시어사 내공봉 사 비어대 최치원(淮南入新羅兼送國信等使 前東面都統巡官 承務郞 殿中侍御使 內供奉 賜 緋魚袋 崔致遠)"(계원필경 권20 '제참산신문')이었으니, 이것이 선생의 당나라 생활 16년을 총결산하는 직명이었다. 10월에 대주산(大珠山) 밑에서 배를 띄었다. 배에 올라 대주산 산신에게 풍랑을 멎게 해 달라는 고사(告祀)를 지냈는데, 그때 선생이 이처럼 고사까지 지냈으나, 풍랑은 그치지 않아 중도에 곡포(曲浦)라는 곳에서 겨울을 나게 됐다. 그 동안에 여러 지우들과 석별의 정을 나누고 시를 화답하면서 고국으로 하루라도 빨리 돌아가고 싶은 마음을 달랬다.

이듬해 바다가 잔잔해져 드디어 3월에 그리던 고국으로 돌아왔다.

 

2) 아버지는 이미 세상을 떠나시고

 

귀국해 보니 그렇게도 보고 싶어 했고, 또 봉양하기를 다짐했던 아버지는 이미 세상을 떠나셨다.

선생이 귀국 길에 올라 바닷가에서 반년을 보낼 때 그의 아버지 견일이 세상을 떠난 듯하다. 서로가 보고싶어 했던 부자간의 상봉을 파도가 막았던 것이다. 당시는 배편 외에는 아무 통신수단이 없었기 때문에 이 사실을 선생은 물론 알지 못했다. 대숭복사 비명을 보면 "나는 중국에서 과거에 급제했지만 우구자(虞丘子)의 긴 통곡만 따라해야 했다. 이제 부모 가신 뒤의 부질없는 영광만 누릴 뿐이다."란 대목이 있다.

 

우구자(虞丘子)의 통곡은 '한시외전(漢詩外傳)'에 나오는 고어(皐魚)를 말한다. 그 일화는 다음과 같다.

공자가 길을 가다가 슬픈 통곡소리를 듣고 가보니 고어였다. 공자가 우는 이유를 물으니 고어가 답했다.

 

"樹欲靜而風不止 子欲養而親不待." (수욕정이풍부지 자욕양이친부대)

 

"나무는 고요히 있으려고 하나 바람이 그치지 않고

아들은 부모를 봉양하고 싶으나 부모께서 기다려 주지 않으십니다.

한 번 가면 다시 뵐 수 없는 것이 부모입니다."

 

고운선생이 고국에 돌아와서 "우구자의 긴 통곡만 해야 했다"고 한 것은 아버지를 봉양하고 싶어 귀국했으나, 아버지가 기다려주지 않고 돌아가셨다는 뜻이다. 귀국 직후 엮은 계원필경 서문에도 "돌아가신 아버지(亡父)께서 훈계하시기를..."이란 구절이 있다.

 

 

3) 헌강왕의 환대와 벼슬

 

신라시대 무당노래의 일종으로 '<삼국유사> 권2 처용가'에 등장하는 임금이 바로 헌강왕이다. 15세 전후 왕위에 올라 최치원 선생이 귀국한 이듬해 약관의 나이에 어지러운 세상 짧게 살다가 세상 떠난 헌강왕은 고운 선생을 반겨 <시독겸한림학사수병부시랑지서서감(侍讀兼翰林學士守兵部侍郞知瑞書監)>의 벼슬을 주고 자금어대를 하사했다. 헌강왕으로서는 최선의 배려를 한 것이다. 그러나, 경세(經世)의 포부를 책임지고 펼 수 있는 직위는 아니었다. 당시 중앙부처나 군부대의 장(長) 등 요직은 귀족인 진골(眞骨)만이 차지할 수 있었는데 선생은 귀족이 아닌 6두품 출신에 불과했다.

'시독'은 경서(經書 :사서오경 등) 강의를 하는 직책, '한림학사'는 국서를 작성하는 임무를 맡은 직책으로 당에서 유학하고 돌아오는 사람에게 의례적으로 주어지던 직위, '수병부시랑'은 오늘날의 국방차관이고 '수(守)'는 품계보다 상위직을 맡을 때 붙이는 것이니, 요즘으로 보면 서리 또는 대리란 뜻이다. '지서서감'은 문필기관의 부(副)책임자이다. 그러나 당시는 병부시랑이나 수병부시랑이 수 명 있었기 때문에 병권에 큰 영향력을 미치는 자리라고는 할 수 없다. 당나라 군의 일선 총사령부에서 중요한 일을 한 데 대한 예우나 경력 우대 차원이라고 보는 것이 무난한 해석일 것이다.

자금어대도 같은 맥락으로 보면 된다. 당 나라에서 이미 비어대((緋魚袋)를 받았으므로, 어대를 하사하자면, 그 보다 한 등급 높은 자금어대를 하사해야만 동격의 대우를 한 셈이 된다. 신라왕(경문왕, 진성여왕)이 당으로부터 정승, 즉 '검교태위(檢校太尉)'의 직첩을 하사 받은 것(선생의 글 '사은표')을 참작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당시 신라의 기득권 층인 진골 귀족의 입장에서 볼 때 선생의 귀국과 관계(官界)등장은 매우 거북스럽고 긴장스러운 돌발사였다.

당시 신라에는 과거제도가 없었고 진골이라는 혈통만으로 출세가 보장되는 시대였다. 진골로서는 매우 만족스럽고 편안한 체제였다. 이에 힘입어 그들은 나라 발전의 결실을 독차지하고 사치를 즐겼다. 이런 계제에 진골 아닌 6두품의 고운선생이 골품제가 없는, 그래서 신라보다는 훨씬 개방적인 당나라에 유학하고 거기다가 신라에는 없던 빈공과(賓貢科)라는 인재등용 시험에 합격했을 뿐만 아니라, 화려한 관작까지 지내고, 그것도 전도유망한 30세 미만의 창창한 나이로 돌아왔다. 이러한 선생이 언제 어떤 파괴력을 가지고 그들의 독점적 지배체제에 도전할지, 그들이 불안감과 의구심을 가지고 선생의 동태를 예의 주시했을 것임은 가히 짐작할 만하다.

그렇지 않아도 선생처럼 당나라 유학을 갔다가 귀국한 6두품들은 사회적 모순을 가장 민감하게 인식하고 그 극복방안을 모색하고 있었으며(최병헌 '신라사에서 본 최치원' 1983. 동방사상논고) 진골 중심의 폐쇄적인 신분체제에 불만을 품고 이에 저항하기 시작한 상황이었다(김경태등 '한국문화사' 1986.77면, 이화여대출판부. 하현강 '한국의 역사' 1979. 신구문화사. 95면). 선생이 이들의 선봉이나 영수(領袖)가 되어 예컨대 신라의 새로운 과거제도 실시와 같은 체제개혁적 주장을 한다면, 그것은 모든 기득권 세력에게는 혁명에 비견되는 타격이 된다고 할 것이다. 선생이 의심과 시기(疑忌 삼국사기의 표현)를 받았던 진정한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었던 것이다.

 

이때 귀족들의 사치 풍조에 대해 삼국유사는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서울 경주에는 35개의 금입택(金入宅 :부자집)이 있었다. 그들은 봄에는 동야택(東野宅), 여름에는 곡량택(谷良宅), 가을에는 구지택(仇知宅), 겨울에는 가이택(加伊宅)에서 놀았다 (전부 별장을 지칭한 듯). 49대 헌강왕 때는 성안에 초가집은 하나도 없고 노래 소리와 피리 부는 소리가 길거리에 가득 차서 밤낮으로 끊이지 않았다."

 

중국의 신당서(新唐書)에도 "재상가(宰相家)에는 녹(祿)이 끊이지 않고 노예가 3천명이며 무기와 말 소 돼지가 이 숫자와 비슷했다"고 쓰고 있다.

 

당시 788년에 실시된 과거제로서 독서삼품과(讀書三品科)란 제도가 유교정치사상에 입각한 정치운영을 목적으로 국학(國學) 내에 설치하였다. 학생들을 유교경전 독해능력에 따라 상(上)·중(中)·하(下)의 3등급으로 구분하는 일종의 졸업시험이었다. 이 성적을 관리임용에 참고하였으며 이는 곧 국학출신자들의 관직 진출을 제도적으로 보장하는 장치였다.

그러나 그것은 국학(國學)의 학생들만을 상대로 하는 졸업시험과 같은 것이기 때문에 대상이 극히 제한적이었고, 또 무엇보다도 어떤 직급 이상은 올라갈 수 없다는 골품제 원칙이 있어서, 평등주의 원리로 보면 진정한 과거제의 실시라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최치원 선생의 하동 쌍계사에 있는 '진감화상 비명(碑銘)'에는

"夫道不遠人 人無異國 (부도불원인 인무이국)"이란 말이 있다. 이 말은 "무릇 도(道)란 사람과 멀리 떨어져 있지 않고, 누구에게나 있으며, 이방인(異邦人)이 따로 없는 것"이라 하여, 도의 평등원리를 주장했다. 이러한 언급은 당나라 사람과 신라 사람의 평등을 강조하여 민족적 자존심을 지키기 위한 사상이면서, 이 사상 속에 내재된 인간 평등의식이 최치원 선생의 신라 본국의 골품제에 대한 모순을 지적하는 면도 내재해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즉 누구에게나 도가 있다는 견해는 이를 무시하는 신라 집권층에 대한 선생의 반발심을 은연중에 나타내는 말로도 해석된다.

삼국사기는 "치원이 귀국 후 집권층으로부터 시기를 많이 받아 자기의 뜻을 실현하려고 했으나, 용납되지 못했다. 행동하기가 자못 곤란하고, 걸핏하면 비난을 받으니..."라고 썼다. 의심과 시기를 받았다는 설명만 하고, 이때 선생이 앞으로 실현하려고 했던 ' 자기의 뜻이 무엇인지, 그리고 '비난을 받은' 이유가 무엇인지를 설명하지 않고 있다.

일부에서는 "선생의 재능을 시기하고 그 능력을 꺼렸다(猜才忌能)" (최영설 가야산학사당비陰記)고 기술하고 있는데 그것은 사태를 너무 좁혀서 본 것이다. 재능이 많아서 시기와 질투를 받는 것은 오늘날의 우리사회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그런 협의의 의미라면 선생의 전면적인 은퇴라는 결과까지는 없었을 것이다. 선생은 기득권 세력으로부터 단순한 시기와 질투를 받은 것이 아니라, 선생의 등장으로 그들이 누려온 만년의 권력에 장애가 되는 존재로 간주되어 밀려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선생은 기존 권력집단으로부터 배척의 대상자로 여겨졌다고 생각한다. 오늘날의 자유민주주의 사회에서의 이익집단 간의 이견이나 갈등과는 전혀 다른 절대권력인 골품제도체제하에서의 제거 대상이었던 것이다.

 

당시 헌강왕은 글을 좋아했을 뿐 아니라 선비들을 돌보고 예로써 대우했다. 그리고 특히 최치원 선생에 대해 큰 기대를 가지고 선생을 영접하기 위해 선생의 사촌 동생에게 사신의 자격까지 주어 당나라에 보내었다. 그래서 왕은 선생을 각별히 존경하고 중하게 여겨 장차의 국정에 선생의 기여함이 있을 것으로 보였다. 실제로 왕은 선생이 귀국하자 말자 선생을 불러 왕실 사찰인 대숭복사 비명과 國師인 지증대사 비명을 지으라고 친히 부탁했으며, 또 선생은 당나라에 있을 때 쓴 글 수만 수를 10개월 작업 끝에 " 추리고 정리한 후에 886년 1월 이를 28권으로 엮어 헌강왕에게 바쳤다. 이때 바친 글에 계원필경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것은 헌강왕과 최치원 두 사람 사이의 관계가 친밀했음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헌강왕은 성품이 총명 민첩하고 책 보기를 좋아하여 눈으로 한번 보기만 하면 모두 입으로 외울 정도였다 한다. 당연히 그 자신이 문필에 능하였고, 문사를 지극히 사랑하였다.(최완수 '신동아' 2001. 10월호)

 

이때 최치원 선생이 헌강왕에게 바친 글 28권의 내역은 다음과 같다.

 

-과거급제 후 東都(동도) 낙양(洛陽)에 있을 때 지은 시부(詩賦)인 사시금체 5수 (私試今體 5首) 1권, 오언칠언금체시(五言七言今體詩 100首) 1권, 신시부 30수(新詩賦 30首) 1권 등 총 3권과 현위(縣尉)로 있는 동안에 지은 시문(詩文)인 <중산복집(中山覆集) 5권, 계원필경집(桂苑筆耕集) 20권 등이다.

 

최치원의 불휴의 명저 <계원필경집> 20권

 

최치원이 중국에서 지은 <계원필경집>은 한국 최고(最古)의 문집이자 9세기 신라와 당(唐), 남만(南蠻) 등 동아시아 국제교류사 연구에 중요한 전적(典籍)이다. 계원(桂苑)은 계수나무 동산, 즉 향기가 진동한다 하여 학자나 문인이 모인 것을 지칭한다. 필경(筆耕)에 관해서는 선생 자신이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제가 마침 난리를 만나 군막(軍幕)에서 기숙(寄食)하게 되어 거기서 먹고 살아왔다(於是 粥於是)는 뜻으로 '필경'이라 제목했다."

<계원필경집>은 최치원이 당나라 회남절도사(淮南節度使) 고병(高騈)의 휘하 종사관으로 활동하며 지은 1만여 편 글 중에서 50수의 시(詩)와 320편의 글을 선생이 직접 골라 헌강왕에게 올린 시문집이다. 이 시문집에는 당 희종(僖宗 873~888) 때 반란을 일으킨 황소(黃巢)가 최치원이 보낸 격서(檄書)의 내용 중 "천하의 사람들이 모두 공개 처형하고자 생각할 뿐 아니라 지하의 귀신들도 은밀히 죽이려고 이미 논의했다"는 문장을 보고 의자에서 굴러 떨어졌다는 일화로 유명한 <격황소서(檄黃巢書)> 일명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이 들어 있다. 이 문집은 서문과 권1 하개연표(賀改年表)에서 권20 사허귀근계(謝許歸覲啓)로 구성되어 있다.

계원필경에 관해서는 현대 중국인들도 그 가치를 높게 평하고 있다. 특히 강택민 국가주석은 1995년 한국방문 때 국회연설에서 이 계원필경을 예로 들어가며 양국의 우호관계를 강조해 우리를 놀라게 한 바 있다.

 

중국의 당인핑 교수는 "중국 전통문학사에서 볼 때 <계원필경집>은 외국 문인이 편찬한 가장 오래되고 완비된 전적"이라며 "신라인의 무역활동, 신라와 당의 교류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이며, 특히 황소의 난 등 중국 사료에 없는 내용이 많아 정사(正史)를 보완하는 가치를 지닌다"고 높이 평가하고 "계원필경은 우선 중국 정사(正史)인 신,구당서와 자치통감에서 빠진 부분까지도 기록했다. 그래서 현재 우리는 중국정사에서 틀린 부분이 있으면 계원필경을 근거로 수정하고 있다. 계원필경은 매우 정확한 역사서이다."라고까지 말한다.(2000.11.25. KBS 역사스페셜 인터뷰)

 

그러나 불행히도 이 계원필경을 올린 뒤 반년밖에 안 되는 이해 7월 헌강왕이 죽었다. 아들 요(嶢)가 채 돌도 안 되었기 때문에 왕의 동생 정강왕이 임시로 나라를 다스렸는데, 그 정강왕도 또 1년 만인 887년 7월에 죽었다. 두 왕의 가까운 혈육으로는 누이동생 탄(坦)과 요(嶢)밖에 없었다. 탄이 할 수 없이 "임시로 왕의 직무를 맡으니[權知當國王事]"(謝嗣位表) 이가 곧 진성여왕이다.

이것은 고운선생의 입지를 매우 어렵게 하는 사태변화였다. 신라가 후기에 들어서면서 잦은 왕위쟁탈전으로 정권의 권위가 흔들렸으나 헌강왕은 증조가 45대 신무왕, 조부가 46대 문성왕, 아버지가 48대 경문왕이어서 정통성 차원에서 한 치의 이의도 없었고 따라서 왕권도 안정되었다. 그러나 그가 죽고 또 정강왕마저 일찍 죽어 여성이, 그것도 "임시"라는 이름으로 왕의 일을 맡으니 왕권이 제대로 안정될 리 없었다. 왕권이 약화되면 역으로 臣權이 강해질 수밖에 없다. 그런데 그 당시 신권은 진골귀족에게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진골들로부터 경계를 받고 있던 고운선생은 이리하여 중앙정계에서 철저한 소외를 당하기에 이르렀다.

 

지방 太守로 나가다

 

전술한 바와 같이 선생이 당나라에서 귀국했던, 885년 대숭복사비문(大崇福寺碑文)을 찬술(撰述)하게 되었는데, 그것이 완성된 것은 진성 여왕대(眞聖女王代)에 이르러서였다. 대숭복사비(大崇福寺碑)는 다른 비와 달리 최치원이 헌강왕의 명으로 신라 왕실 사찰이었던 대숭복사의 유래를 기록한 것이다. 이처럼 문장가로서 능력을 인정받기는 했으나 골품제의 한계와 국정(國政)의 문란으로 당나라에서 배운 바를 자신의 뜻대로 펴볼 수가 없었다. 이에 외직을 청하여 대산(大山 ; 지금의 전북태인), 천령(天嶺: 지금의 경남 함양), 부성(富城 :지금의 충남 서산) 등지의 태수(太守)를 역임했다. 그 당시 태수(太守)는 현재의 군수급의 직위이다.

선생이 중국에 있을 때 "어진 지방관이란 옛날에도 드물었다고 한탄한 바 있었기 때문에 그는 고국의 지방관으로 나갔을 때, 선정(善政)을 펴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 하나의 예로 함양상림(咸陽上林)을 들 수 있다. 이것은 함양군 함양읍의 외곽지대를 둘러싸고 있는 숲인데, 선생이 태수로 있을 때 홍수 피해를 막기 위한 목적으로 조성한 것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그리고 최대규모의 방풍(防風) 방재림(防災林)으로서 지금도 2만여 그루의 정정한 나무들이 우람한 숲을 이루고 있으며, 천연기념물 제154호로 지정돼 있다.

 

 

선생이 지방 태수로 전전하는 사이 신라는 극도의 혼란을 겪고 있었다. 폐쇄적 지배체제라는 구조적 원인에다가 왕권의 약화라는 시기적 상황까지 겹쳐 지방 호족(豪族)세력이 급격히 그 세를 팽창해 갔다. 더욱이 진성여왕이 평소에 각간 위홍(魏弘)과 정을 통하더니, 이때 와서는 늘상 궁궐에 들어와 일을 보게 하였다. 이들의 사랑은 해인사 원당암에도 그 흔적이 남아있다. 원당암은 원래 해인사 창건을 위한 기초 작업장이었다. 신라 40대 애장왕은 왕후의 난치병이 순응 대사의 기도에 의해 부처님의 가피(加被)를 받아 낫자, 왕은 순응대사가 발원한 해인사 창건을 도와주었다고 한다. 왕은 서라벌을 떠나 가야산에 임시로 작은 집을 지어 절 공사를 독려하고, 정사(政事)를 보기까지 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오늘날의 원당암이라는 것이다. 본절인 해인사보다도 더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는 원당암은 가야산 줄기 비봉산 중턱에 자리하고 있기 때문에 암자 이름은 본디 봉서사(鳳棲寺)였다고 한다. 이 봉서사가 원당암이 된 것은 진성여왕 때였다. 진성여왕은 각별한 관계에 있던 각간 위홍이 죽자 그를 혜성대왕으로 추존하고 해인사를 원당사찰로 삼았다고 한다. 최치원 선생이 가야산 산신이 되어 떠나는 길목에 꽂아 둔 지팡이가 지금의 젓나무가 되었다는 학사대 방향으로 <비로전>이라는 전각이 대적광전 바로 옆에 있다. 이 전각 안에는 진성여왕과 각간 위홍의 사랑과 영생을 염원하면서 조성했다는 두 분 비로자나불 부처님이 봉안되어 있다. 이 비로전은 노무현 대통령의 후원으로 그의 임기 중에 착공하여 건립된 것이다. 진성여왕은 각간 위홍이 죽게 되자 이후부터는 몰래 젊은 미남 두세 명을 조정에 끌어들여 음란하게 지내고, 아울러 그들에게 요직을 주어 국정을 문란시키니 민심이 조정에 등을 돌렸으며, 888년에는 여왕을 비난하는 대자보가 조정 앞 대로상에 나붙는(기방시정 사 방어조로 : 欺謗時政 辭 榜於朝路) 사태까지 벌어졌다 (삼국사기 권11. 신라본기 제 11).

889년(진성여왕 3) 나라 안의 여러 주와 군들이 공물과 부세(賦稅)를 보내오지 않아, 창고가 비고 나라 재정이 궁핍하였다. 왕이 사신들을 보내 독촉하였더니 이로 말미암아 도처에서 도적들이 벌떼처럼 일어나고, 농민의 봉기로 이어지면서 신라사회는 전면적인 붕괴의 국면에 접어들었다. 891년 양길(梁吉)과 궁예(弓裔)가 동해안의 군현을 공략하며 세력을 확장했고, 다음해에는 견훤(甄萱)이 자립하여 후백제를 세웠다. 최치원은 부성군 태수로 재직중이던 893년 당나라에 보내는 하정사(賀正使)로 임명되었으나 흉년이 들고 각지에서 도적이 횡행하여 가지 못했다. 그 뒤 다시 입조사(入朝使)가 되어 당나라에 다녀왔다.

선생이 다시 가 본 당나라는 10년 전 귀국 당시 보았던 상황보다 더욱 더 깊은 수렁에 빠져 있었다. 지배세력 내부의 상쟁과 난맥은 더욱 깊어져 선생이 애써 보필했던 고병(高騈)은 고발을 당하는 등 고초를 겪던 끝에 벌써 6년 전에 피살되었고, 절친했던 친구 고운(顧雲)도 벼슬을 떠났다. 그가 본 것은 절망뿐이었다. 선생이 신라로 돌아가고 그 10년 후인 907년 절도사 주전충(朱全忠)은 많은 선비들을 죽이고 당나라를 멸망시키게 된다.

 

924년의 지증대사 비명에도 "입조하정(入朝賀正)"이라는 글이 새겨져 있는 것을 보면, 선생이 하정사로 당나라에 다녀온 것은 틀림없다. 하정(賀正)은 신년을 하례하는 인사로서 시기는 893년 말과 894년 초 언저리로 추정된다. 전남 신안군 비금도 선착장이 있는 수대마을 뒷동산엔 선생이 당나라에 사신(使臣)가다가 파놓았다는 전설이 있는‘고운정(孤雲井)’이란 샘물이 지금도 맑은 물을 솟구치고 있다.(한겨레21 1999-7-22보도)

 

 

구국의 직언(救國의 直言) 시무십여조(時務十餘條)

 

떠나온지 10여년 만에 다시 찾아간 당나라의 망국상을 목격하고 귀국한 선생은 본국 신라의 상황도 더 이상 방관할 수 없는 극단적인 혼란상이었으므로, 비장한 결심을 하게 된다. 선생은 진골세력들의 서릿발 같은 위세에서 자신의 안위를 제쳐놓고 왕에게 구국의 직언(진성여왕 8년 894년 2월)을 하니, 그것이 바로 시무십여조(時務十餘條)이다. 이것은 나라의 난국을 타개하기 위해 급히 서둘러 시행해야 할 조정의 정무였다. 내용은 전하지 않아 정확한 것은 알 수 없지만 "신라사회의 발전을 저해하는 골품제를 완화하고 과거제에 의한 인재등용을 하라는 건의 등이 피력되었을 것"(하현강 '한국의 역사' 95면)이다. 그리고 10여 개 조항으로 되어 있는 것을 보아 선생의 평소 소신인 다음 내용도 당연히 포함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 임금의 덕화는 치우침도 편벽함도 없어야 한다.

* 정치는 仁을 근본으로 삼고 정성으로 백성을 구제해야 한다.

* 신하를 알아보기는 어진 임금밖에 없다.

* 비상한 인재가 있어야 비상한 일이 있고 비상한 일이 있어야 비상한 공이 있다.

* 천하를 다스리려면 먼저 부정 출세를 막아야 하고 어진 선비의 진출 길을 막아서는 안 된 다.

* 장차 곤궁에 빠진 백성을 살리려면 진실로 유능한 관리들에게 의지해야 할 것이다.

* 아래 사람이 이탈하는 마음이 있는 것은 대개 윗사람이 온전한 덕이 없기 때문이다.

* 예나 지금이나 사치란 다 몸을 망치는 법이다.

* 풍속을 순화시키는 데 제일 먼저 할 일은 권농이다.

 

시무십여조의 내용은 "추측컨대 진골의 좁은 테두리를 벗어나 6두품을 포함하는 폭 넓은 인재를 등용하여 정치를 시행할 것을 권고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신분보다는 실용적인 학문을 바탕으로 하는 인재 등용을 주장했으리라 추정한다. 이러한 정치 이념은 나중에 고려 왕건의 골품 지양정책, 광종의 과거 실시, 성종의 유학 장려책에 반영된다."(유성태 '고운 최치원' 225면)

 

"집권체제가 극도로 해이해지고 골품제 사회의 누적된 모순이 심화됨에 따라 야기된 여러 가지 문제점들을 해결해 보고자 한 노력이었던 것 같다. 이 정신은 고려왕조가 성립되고 사회가 안정을 찾아갈 무렵인 982년 성종에게 올린 최승로의 상소문 중 <時務 28조>로 계승되어진 것이 아닌가 한다."( 민족문화대백과사전-정중환)

 

<시무십여조>에 관해서는 연암 박지원(1737-1805)이 "최치원 선생이 시무십여조를 여왕에게 간했으나 여왕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연암집-함양 학사루기)고 기술되어 있다. 선생은 이처럼 자신의 건의가 묵살되게 되자, 나라의 위태로운 형세를 개탄(慨嘆)하며 "계림은 누른 잎과 같고(鶴林黃葉) 송도는 푸른 소나무와 같다.(告鳥 嶺靑松)"는 놀라운 글을 상서(上書)하였으니 훗날 신라 사람들은 그의 감식지명(鑑識之明)에 감탄하였다고 한다.

이후에도 나라의 사태가 악화되어가자 선생은 다음과 같이 탄식했다.

"전쟁과 흉년 두 재앙으로 최악의 상태가 벌어지지 않은 곳이 없었으니[惡中惡者 無處無也] 굶어 죽거나 전쟁으로 죽은 시체가 들판에 별처럼 즐비하게 널려 있었다[餓 戰骸 原野星排]."(선생이 895년 7월 16일 지은 해인사 묘길상탑기)

선생이 지은 해인사 묘길상탑기에는 굶주린 장병들을 위해 당시 해인사의 스님이 농촌으로 다니면서 벼를 보시받아 군량에 충당하고 그 나머지로 이 3층 석탑을 세웠으니, 이는 오로지 전란에 죄 없이 목숨을 잃은 고혼들의 명복(冥福)을 빌기 위한 것이다. 이 기문은 1965년 석탑사리(石塔舍利)장치 전문도굴단이 검거됨으로써 세상에 알려지게 됐다. 도굴단이 석탑 안에서 절취하였다고 자백한 유물은 4매의 탑지와 157기의 흙으로 만든 소탑 등이다. 이 4매의 지석 가운데 일부를 최치원이 짓고 기록하였다는 점이다. 탑지의 내용은 진성여왕대의 불안한 사회상을 반영한 것으로서 전국 각처에서 봉기한 도적의 무리들이 해인사를 침범하자 이에 맞서 법보사찰 해인사를 지키다가 목숨을 잃은 56명의 승려와 일반인의 명단과 함께 이들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하여 이 탑을 세운 연유를 적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선생의 글로서는 가장 최근에 발견된 글이다.

 

 

 

 

 

 

 

 

왕권교체의 비장한 외교문서 작성

 

삼국사기 신라본기 권 제 11에 보면, <진성여왕 8년(894) 10월에 궁예가 북원에서 하슬라로 들어오니 무리가 6백여 명에 달하였고, 다음 해 8월에 궁예가 저족(猪足)과 성천(狌川)의 두 군을 빼앗고, 진성여왕 10년(896)에는 도적들이 나라 서남쪽에서 일어났는데 그들은 바지를 붉게 하여 스스로 구분되는 표시를 삼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이를 일러 '적고적(赤袴賊)이라 하였다. 그들은 주와 현을 도륙하고, 수도의 서부 모량리(牟梁里)까지 와서 민가들을 겁탈하고 노략해갔다>로 기록되어 있다.

내란상태가 걷잡을 수 없게 되자 진성여왕은 897년 7월 왕권을 헌강왕의 아들 요(嶢)에게 양위한다. 이가 곧 효공왕(孝恭王)이다. 진성과 효공, 이때 이 두 임금이 교체되는 사실을 적어 당(唐)에 이를 고하는데, 이 글을 보낼 때 당나라 조정에 잘 알려진 선생의 영향력과 그의 뛰어난 문장력을 고려하여 선생에게 表文 짓기를 명하였다. 외교문서를 처리하는 중대한 문건이라 글을 쓰긴 했지만, 선생은 이 글에서 나라가 당면한 위급한 상황을 조금의 주저도 없이 사실 그대로 생생하게 그렸다.

당나라에 보낼 중대한 외교문서를 작성함에 있어서 선생은 신라가 처한 당면한 상황을 사실대로 썼다. 선생으로서는 나라가 멸망의 위기에 처한 것은 통치계급인 진골계급과 임금도 알고 우호관계에 있던 당나라에도 알려야 한다는 생각으로 당시 절박했던 상황을 대담하게 그대로 썼으리라 생각한다.

양위표(讓位表)와 사사위표(謝嗣位表)에 실린 그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환난이 한꺼번에 밀어닥쳤다. 북 쪽 무리가 경계를 침범하여 독을 내 뿜었고(진성여왕 9년의 일-삼국사기) 다음에는 곳곳의 고을이 다 도적의 난리를 만나 겁회(劫灰 : 세계파멸 큰불의 재)를 보는 것 같다. 게다가 사람 죽이기를 마치 칼로 삼베를 베는 듯 하고(殺人如麻 : 살인여마), 땅 위에 드러난 백골은 잡초처럼 버려졌으며(曝骨如莽 : 폭골여망), 백성의 유리표박(流離漂泊 : 일정한 집과 하는 일이 없이 이곳저곳으로 떠돌아다님)은 날로 심하고 이것저것 가릴 것 없이 다 태우는 옥석구분(玉石俱焚 : 옥과 돌이 함께 불탄다는 뜻으로 선인과 악인이 모두 함께 재앙을 당함-書經)의 맹렬한 불꽃은 바람 같이 거세니, 어진 나라가 변해서 병든 나라가 되었다(致使仁鄕 變爲疵國) : 치사인양 변위자국)... 개미 떼가 제방을 무너뜨리고 메뚜기가 국경을 뒤덮고 있으니(蟻至壞堤 蝗猶蔽境 : 의지괴제 황유폐경) 백성들이 신열이 나도 물로 씻어줄 수 없고, 물에 빠졌어도 건져줄 수 없다(熱無以濯 溺未能援 : 열무이탁 익미능원). 모든 국고와 창고는 한결같이 비어 있고 나루로 통하는 길은 사방으로 막혀 있다(帑 一空 津途四塞 : 탕 일공 진도사색)." (진성여왕이 중국에 보내는 양위표)

 

"벼슬에 나아가는 것을 어렵게 하고 물러나는 것을 쉽게 하는 것은 곧 군자의 마음 씀이요, 멸사봉공은 실로 옛사람들이 힘쓴 바인데, 이를 입으로 자랑하는 이는 많아도 몸소 실행하는 이는 드물다``` 큰 흉년이 자주 들어 도둑들이 사방에서 일어났는데, 그들은 형세를 타고 벌떼가 날 듯 하매, 갑자기 성(城)을 파괴하고 고을을 노략질하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연기와 티끌이 국경을 빙 두르고 제 때에 농사를 지을 수 없게 했다. 뭇 도적이 번성한 데다 먹을 식량마저 마련키가 어렵게 되었다. 지금 군읍이 두루 도적의 소굴이 되었고( 郡邑遍爲賊窟 : 군읍편위적굴) 산천이 모두 전쟁터다( 山川皆是戰場 : 산천개시전장 :)" (효공왕이 중국에 보내는 사사위표 : 謝嗣位表)

벼슬 내놓고 가야산으로

 

선생이 지은 양위표(讓位表)와 사사위표(謝嗣位表)에는 나라를 그토록 위기에 처하게 한 상층부 진골세력들이 나라를 구할 생각은 않고, 무위무능으로 자리만 차지하고 있는 데에 대한 선생의 솔직한 심정을 노정(露呈)한 것으로 보인다.

관직에 나아가는 것을 어렵게 하고 물러나는 것을 쉽게 하는 것은 곧 군자의 마음 씀이요, 멸사봉공(滅私奉公)은 실로 옛사람들이 힘쓴 바인데, 이를 입으로 자랑하는 이는 많아도 몸소 실행하는 이는 드물다."는 부분이 있는데, 이것이 누구를 지칭하는 것인지는 명백하다. 나라 상층부를 독차지한 진골세력이 풍전등화(風前燈火) 위난에 빠진 나라를 구할 생각은 않고, 무위무능(無爲無能)으로 자리만 차지하고 있는데 대한 지적이다. 시무십여조 파동에 이어 또다시 위기감을 느끼게 된 진골세력들이 최치원을 이제는 더 이상 두고 볼 수는 없다 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선생을 축출하는 일에 본격적으로 나섰을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이 글을 쓴 1년 뒤인 898년 선생은 시무십여조를 올리고 받았던 별 실권도 없던 아찬 벼슬을 버리고 떠나게 된다. 삼국사기 권46에는 "치원은 서쪽으로 당에 가서 벼슬할 때나 동쪽으로 고국에 돌아왔을 때 모두 어지러운 시절을 만나 처신하기 어렵고, 고단하여 움직이면 곧 잘 허물을 입었으므로, 스스로 때를 만나지 못한 것을 한탄하면서 관직에서 물러나 산과 강, 바다를 소요자방(逍遙自放)하며 지냈다. 그가 유람했던 곳으로는 경주 남산(南山), 강주(剛州) 빙산(氷山), 합주(陜州:합천)의 청량사(淸寺), 지리산 쌍계사(雙溪寺), 합포현(合浦縣 :지금의 마산, 창원) 별서(別墅) 등이 있다. 또 함양과 옥구, 부산의 해운대 등에는 그와 관련된 전승이 남아 있다. 만년에는 가족을 이끌고 가야산 해인사(海印寺)에 들어가 모형(母兄)인 승려 현준(賢俊) 및 정현사(定玄師)와 도우(道友)를 맺고 지냈다. 904년(효공왕 8) 무렵 해인사 화엄원(華嚴院)에서〈법장화상전 法藏和尙傳〉을 지었으며, 908년 〈신라수창군호국성팔각등루기(新羅壽昌郡護國城八角燈樓記)〉를 지었고 그 뒤의 행적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삼국사기〉에는 고려 태조 왕건(王建)이 흥기할 때 비상한 인물이 반드시 천명을 받아 개국할 것을 알고 "계림(鷄林)은 황엽(黃葉)이요 곡령(鵠嶺)은 청송(靑松) (고려가 흥성하고 신라가 망한다)"이라는 글을 보내 문안했다고 한다. 이는 최치원이 신라말에 왕건을 지지한 희랑(希朗)과 교분이 있었던 점으로 미루어 전혀 가능성이 없는 것은 아니다. 이때 왕건을 지지한 후광으로 희랑대사는 그의 후원을 받아 고려초 해인사를 크게 중창한 기록이 있다.

 

최치원의 사상과 문학

 

그의 사상은 기본적으로 유학(儒學)에 바탕을 두고 있었으며 스스로 유학자로 자처했다. 최치원의 유교사상에 대한 이해를 위한 자료는 정치사상 즉 '치국(治國)에 관련된 것이 많다. 그러므로 그도 여는 유자(儒者)들과 마찬가지로 유교적 이상정치를 강렬하게 희구했다고 보여진다. 여기서 말하는 유교적 이상정치란 요순시대(堯舜時代)의 정치를 가리키는 것이며, 그것은 곧 도의 정치를 일컫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불교에도 깊은 이해를 갖고 있었고, 비록 왕명에 의한 것이기는 하지만 선사(禪師)들의 비문을 찬술하기도 했다. 특히 〈봉암사지증대사비문 鳳巖寺智證大師碑文〉에서는 신라 선종사(禪宗史)를 세시기로 나누어 이해하고 있다. 선종뿐만 아니라 교종인 화엄종에도 깊은 이해가 있었을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그가 화엄종의 본산인 해인사 승려들과 교류하고 만년에는 그곳에 은거한 사실로부터 짐작할 수 있다. 도교에도 일정한 이해를 지니고 있었는데, 〈삼국사기〉에 인용된 〈난랑비서 鸞郞碑序〉에는 유·불·선에 대한 강령적인 이해가 나타나고 있다.

한편 문학 방면에도 큰 업적을 남겼으며 후대에 상당한 추앙을 받았다. 그의 문장은 문사를 아름답게 다듬고 형식미가 정제된 변려문체(騈儷文體)였으며, 시문은 평이근아(平易近雅)했다. 당나라에 있을 때 고운(顧雲)·나은(羅隱) 등의 문인과 교류했으며, 문명을 널리 떨쳐 〈신당서 新唐書〉 예문지(藝文志)에 〈사륙집 四六集〉·〈계원필경〉이 소개되었다. 고려의 이규보(李奎報)는 〈동국이상국집〉에서 〈당서〉 열전에 그가 입전(立傳)되지 않은 것은 당나라 사람들이 그를 시기한 때문일 것이라고까지 했다.

『신당서』예문지(藝文志)에는 "최치원의『사륙집(四六集』1권과『계원필경』20권이 있다"고 하고 주를 붙여 이르기를 "최치원은 고려 사람으로 빈공과(賓貢科)에 급제해 고병(高騈)의 종사관이 되었다"라고 했으니, 그의 이름이 중국에 알려진 것이 이와 같았던 것이다. 또 그의 문집 30권이 세상에 유통되고 있다.

최치원은 많은 불교 관련 글을 남겼거니와, 그 가운데 『쌍계사진감선사탑비(雙溪寺眞鑑禪師塔碑)』,『성주사낭해화상탑비(聖住寺朗慧和尙塔碑』,『봉암사지증대사탑비(鳳岩寺智證大師塔碑)』, 『대숭복사비(大崇福寺碑)』 등 이른바 '四山碑銘과 『법장화상전(法藏和尙傳』이 저명하다.

 

출처 : 경주최씨도천공/학사당,농산정,가야서당
글쓴이 : 道泉 최평열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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