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흐는다

[스크랩] 최치원(崔致遠)-한국의 위대한 인물

오늘행복스마일 2018. 12. 27. 14:26

 

한국의 위대한 인물

 

변환기의 지식인 최치원(崔致遠)

857~ ?

 

1) 골품제의 벽에 가로막힌 지식인, 최치원

 

신라 말기 이름난 학자이자 문장가였던 최치원(崔致遠)857(신라 문성왕 19) 경주에서 태어났다. ()는 고운(孤雲), 해운(海雲)이었다. 세계(世系)는 자세히 알 수 없지만 그의 집안은 대대로 6두품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868(경문왕 8) 12세의 어린 나이로 중국 당나라로 유학을 가 7년 만인 87418세의 나이로 외국인을 대상으로 한 과거 시험인 빈공과(賓貢科)에 합격하였다.

 

합격 이후 잠깐 말단 지방관으로 있다가 880년 회남절도사(淮南節度使) 고변(高騈)의 막료로 활동하였다. 이 무렵 당은 황소(黃巢)의 난으로 어지러웠는데, 최치원은 황소를 토벌하던 고변의 종사관으로서 각종 문서 작성을 담당하였다. 최치원을 유명하게 만든 격황소서(檄黃巢書)’도 이때 지은 것이다.

 

29세가 되던 88517년 만에 신라로 돌아왔다. 이미 신라에서도 그 문장이 유명하였으므로 헌강왕은 그를 시독 겸 한림학사 수병부시랑 지서서감사(侍讀兼翰林學士守兵部侍郎知瑞書監事)로 임명하였고, 여러 지방관직을 역임하였다. 889년 전국적으로 농민 봉기가 일어나 나라가 어지러워지자 894년 시무책(時務策) 10여 조를 진성여왕에게 올려 정치를 바로잡으려 노력하기도 했다. 하지만 신라의 혼란은 계속되었고, 실망감과 무력감에 사로잡힌 그는 벼슬을 그만두고 산천을 유람하다가 해인사(海印寺)에서 말년을 보냈다.

 

2) 최치원의 사상과 저술

 

어릴 때부터 유학을 공부했던 최치원은 유교를 사상적 바탕으로 삼았으며 스스로 유학자를 자처하였다. 그런 만큼 그는 유교적 정치이념에 입각한 통치 질서, 즉 국왕을 중심으로 하는 정치체제의 구축을 지향했다. 더욱이 그가 살았던 9세기 말 신라는 진골 귀족의 입김이 거세지고 지방에 대한 통제력을 점차 상실해가고 있던 어지러운 상황이었다. 따라서 혼란기의 지식인으로서 최치원은 왕권 강화와 중앙집권적 정치체제의 정비를 통해 당시의 난국을 극복하고자 노력했다고 할 수 있다.

 

최치원은 불교와도 깊은 인연이 있었다. 그는 여러 신라 고승(高僧)들의 비문을 찬술할 만큼 불교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말년에는 해인사에 들어간 이후 화엄사상(華嚴思想)에 경도되었으며, 정현사(定玄師)와 최치원의 친형으로 전해지는 승려 현준(賢俊)을 도우(道友)로 삼았다. 그는 또한 도교에 대해서도 이해가 깊었다고 한다. 이처럼 유교뿐만 아니라 불교와 도교에도 정통했던 최치원은 삼교(三敎)의 가르침이 다를 바 없다고 보고 이를 조화시키는 삼교융합론을 제시하기도 하였다.

 

최치원은 이러한 자신의 사상을 뛰어난 문장으로 담아냈다. 당에 머물 때부터 문장으로 이름을 날려 많은 글을 지었으며, 당의 문인들과도 활발하게 교류하였다. 그의 문장은 당시 유행하던 사육변려문(四六騈儷文)으로, 문장이 화려하고 자수(字數)나 운율이 규칙적인 형식미를 갖춘 것으로 평가된다. 그렇다고 해서 그의 문장이 단순히 화려한 수사에만 그친 것은 아니었다. 그는 객관적인 사실을 그대로 전달하려 노력하였으며 전고(典故)를 풍부하게 인용하여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고자 하였다. 그가 남겼다고 전해지는 저술은 다음과 같다.

 

먼저 시문집으로는 신당서(新唐書)예문지(藝文志)에 최치원의 저술로 사륙집(四六集)1, 계원필경(桂苑筆耕)20권이 있었다고 전한다. 또한 신라에 돌아와 지은 글은 문집 30권으로 편찬했다고 한다. 그밖에 구체적인 서명이 전해지는 것으로는 금체시(今體詩)1, 오언칠언금체시(五言七言今體詩)1, 잡시부(雜詩賦)1, 중산복궤집(中山覆簣集)5, 사륙집(四六集)1권 등이 있다.

 

다음으로 불교 관련 저술로는 부석존자전(浮石尊者傳)1, 법장화상전(法藏和尙傳)1권과 석이정전(釋利貞傳), 석순응전(釋順應傳)및 흔히 사산비명(四山碑銘)으로 통칭되는 선사(禪師) 4인의 비명 등이 있었다. 또한 중국과 우리나라의 역사를 연표로 정리한 것으로 추정되는 제왕연대력(帝王年代曆)도 지었다고 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현재까지 전해지는 것은 계원필경법장화상전, 사산비명뿐이고, 삼국사기(三國史記)』 『동문선(東文選)등에서 일부를 확인할 수 있을 따름이다.

 

3) 우리나라 최고(最古)의 문집, 계원필경집(桂苑筆耕集)

 

최치원의 시문집인 계원필경집(桂苑筆耕集)은 현존하는 우리나라 최고(最古)의 문집이자 고대 유일의 문집으로, 신당서(新唐書)에 기록될 만큼 국제적으로도 유명한 저서였다고 할 수 있다. 여기에는 그가 고변 휘하에서 생활하면서 지은 1만여 수의 시문(詩文) 가운데 시 50수와 표(), () 320편의 글이 담겨 있다.

 

8853월 신라에 돌아온 최치원은 계원필경집20권을 지어 이듬해 정월 헌강왕에게 바쳤다. 이후 여러 차례 간행되었는데 현재 간행 연도가 확인되는 가장 오래된 판본은 1834(조선 순조 34) 당시 호남관찰사였던 서유구(徐有榘, 1764~1845)가 홍석주(洪奭周, 1774~1842)의 부탁으로 그의 집안이 소장하고 있던 계원필경집을 교정해 전주(全州)에서 간행한 것이다.

 

계원필경집20권 가운데 권1에서 권16까지는 대부분 고변을 대신하여 지은 것들이다. 1과 권2는 황제에게 올리는 표() 각각 10편씩, 3에서 권6은 장() · 주장(奏狀) · 당장(堂狀) 10편씩 실었다. 7에서 권10은 고변이 자신과 친밀했던 이들에게 보낸 별지(別紙) 20수씩을 담았다. 11에는 유명한 격황소서등 조령류(詔令類)인 격서(檄書)와 서() 10편을, 12에는 자기보다 어리거나 아래 사람에게 보내는 사적 편지인 위곡(委曲) 20편을 실었다.

 

13과 권14는 자기 휘하의 관리에게 보내는 편지인 거첩(擧牒) 25편씩 수록하였다. 그리고 권15와 권16은 도교, 불교에 대한 내용으로, 15에는 15편의 재사(齋詞), 16에는 4편의 제문과 2편의 서(), 2편의 기(), 2편의 소()를 실었다. 15의 재사는 당나라 도교 연구의 귀중한 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17에서 권20은 최치원 자신과 관련된 글로 구성되었다. 17과 권18에는 서() · () · () 35편을 수록했는데 대부분 상주문이거나 자신의 의견을 개진하는 글이다. 19는 지인과 고변 휘하의 인물에게 보내는 20편의 장 · · 별지 · 잡서(雜書)로 역시 자신의 의견을 제시하기 위해 지은 것들이다. 20에는 40편의 계 · · 별지 · 제문 · 시가 실렸는데 최치원이 신라로 돌아오는 과정에서 작성한 글이 대부분이다.

 

이처럼 다양한 유형의 시문으로 구성된 계원필경집은 촉망 받던 젊은 지식인 최치원의 현실 이해와 지향점이 담겨 있는 중요한 자료라 할 수 있다. 비록 그 자신은 이상을 실현하는 데 실패하였지만 고려에서 유교적 정치이념을 바탕으로 하는 정치 질서가 확립되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또한 계원필경집에 실린 글 가운데는 그의 뛰어난 문장과 풍부한 전고 인용이 돋보이는 경우가 많아, 1478(조선 성종 9) 편찬된 동문선계원필경집의 시 26, 각종 글 169편이 실려 후대 문장가들의 모범이 되었다.

 

況汝出自閭閻之末, 起於隴畝之間, 以焚劫爲良謀, 以殺傷爲急務. 有大愆可以擢髮, 無小善可以贖身. 不唯天下之人皆思顯戮, 抑亦地中之鬼已議陰誅. 縱饒假氣遊魂, 早合亡神奪魄. 凡爲人事, 莫若自知. 吾不妄言, 汝須審聽.”

 

더군다나 너는 평민 출신으로 농촌에서 일어나 분탕질하는 것을 능사로 알고, 살상(殺傷)하는 것을 급선무로 삼고 있다. 너에게는 셀 수 없이 많은 큰 죄만 있을 뿐, 용서받을 만한 선행(善行)은 조금도 없다. 그래서 천하 사람들이 모두 너를 죽여서 시체를 널리 보이려고 생각할 뿐만 아니라, 땅속의 귀신들도 남몰래 죽일 의논을 이미 마쳤을 것이다. 그러니 지금 잠시 목숨이 붙어 있다 하더라도 조만간 혼이 달아나고 넋을 뺏기게 될 것은 뻔한 일이다. 무릇 어떤 일이고 간에 스스로 깨닫는 것이 중요한 법이다. 내가 아무렇게나 말하는 것이 아니니, 너는 잘 알아듣도록 하라.

 

계원필경집11, 격황소서(檄黃巢書)

伏惟感慰, 竊以勛華聖代, 唯務擧能, 邵泰賢流, 共推取實. 用捨旣歸於重柄, 古今皆託於長材, 人望所諧, 主恩斯在.”

 

삼가 생각건대, 훈화(勳華, 요순)의 성대(聖代)에는 오직 능력이 뛰어난 이를 천거하려고 힘썼고, 허소(許劭)와 곽태(郭泰)의 현명한 무리는 함께 실질을 취하는 것을 추구하였습니다. 사람을 쓰고 쓰지 않는 것이 중요한 권한에 속하는 만큼 고금에 걸쳐 모두 뛰어난 인재에게 맡겼으니, 인망이 그에 만족스러워야만 임금이 그 직위를 맡기곤 하였습니다.

 

계원필경집7, 이부배찬상서(吏部裴瓚尙書)

(네이버지식백과-한국의 위대한 인물, 국립중앙도서관)

 

 

출처 : 청 산 별 곡
글쓴이 : 淸虛堂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