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역사의 인물들 34
후기신라의 시인 최치원
“야, 어느 것을 쥘까? 활일까? 칼일까?”
“아니야. 책일지도 몰라. 이 집안이야 대대로 선비가 아니냐.”
돌상이 차려지고 숱한 사람들의 기원 속에 색동옷 차려입고 고운 꽃신을 신은 어린애는 그 무엇을 잡으려고 화려 돌상에 나섰습니다.
서글서글한 눈에 귀 또한 어찌 큰지 동네여인들은 이구동성으로 야단들입니다.
어린애는 조금도 주저 없이 커다란 붓을 냉큼 집어듭니다.
사람들은 손뼉을 치며 어린애를 버쩍 들어올렸습니다.
“아니 신통하구려. 제꺽 붓이로구만.”
“아무렴. 어련 할라구요.”
사람들의 축복 속에 어린 최치원은 돌 생일상을 받았으며 아버지의 엄격한 통제 속에 어려서부터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최치원은 857년 경주에서 태어났습니다.
최치원은 어렸을 때부터 남달리 총명했고 10살에 벌써 사서삼경을 모두 통달하여 사람들을 놀라게 했습니다.
사서삼경은 유교 교리를 적은 책인데 그것을 익히기란 매우 어려운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그는 제 또래들 중에서도 뛰어나게 글을 잘 썼다고 합니다.
최치원은 자를 고운 또는 해운이라 했습니다. 그의 초상에 대해서는 고려시기의 학자였던 리인로의 기록이 있습니다.
“최치원은 원래 구름과 같은 수염에 뺨은 옥과 같이 희였고 그의 머리 위에는 항상 흰 구름이 깃든 듯 했습니다. 그의 초상은 그가 기거하던 서재에 걸려서 지금도 남아 있다”
그가 12살에 이르던 어느 날 아버지는 아들을 사랑채로 불러 앉혔습니다.
“사내나이 12살이면 다 자란 셈인데 이제는 당나라에 가서 공부를 계속하도록 하여라.”
큰 나라를 숭상하던 그 시기 양반들의 생각이었습니다.
최치원은 아들을 큰 나라에 보내어 큰 뜻을 이루게 하자는 아버지의 마음을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었지만 정든 고향산천과 사랑하는 부모 곁을 뜨고 싶지 않았습니다.
“아버님, 소자는 고국 땅에서 떠나고 싶지 않소이다. 내 나라에서 공부하도록 해주사이다.”
아들은 절절하게 호소했지만 아버지의 말이면 그 가정의 법으로 되고 있던 때이니 이것은 한갓 애원이었습니다.
“항차 나라를 빛내어나갈 사내대장부가 되자면 부모의 슬하에서 떠나야 하느니라.”
그리하여 최치원은 12살에 붓과 필통을 등에 지고 고국 땅을 하직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뱃머리에 선 아버지는 떠나는 아들에게 엄한 훈계를 했습니다.
“네가 만약 10년 안에 과거급제하지 못한다면 내 아들이 아니다. 또 항차 나에게는 아들이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아무쪼록 글공부에서 성공하고 돌아오기를 바란다.”
어머니는 어린 아들이 애처로워 눈물을 흘리며 바래었습니다.
“부디 몸 성히 무사히 오너라. 인편이 있거들랑 자주 소식을 전해야 한다.”
어머니는 또다시 외돌아 서서 옷고름에 눈물을 찍었습니다.
이렇게 최치원은 당나라로 들어가 젊은 시절의 대부분을 해외에서 보냈습니다.
그는 아버지의 뜻을 명심하고 열심히 배웠습니다. 남들이 백 가지를 읽을 때 자신은 천 가지를 알리라는 속심을 가지고 낯과 밤이 따로 없이 열심히 읽고 또 읽어나갔습니다.
사람들이 그에게 어떻게 그렇게도 빨리 음운을 뗄 수 있었는가라고 물으니 그는 이렇게 대답하는 것이었습니다.
“내 본시 이를 구해서가 아니라 다만 부모님께 기쁨을 드리기 위해서이지 내 몸을 위해서가 아니었노라.”
최치원은 당나라에서 6년 간 지식을 쌓아 18살에 진사잡과에 장원으로 급제했습니다. 답안지를 본 시험관들은 뛰어난 문장에 놀랐습니다. 이름을 부르니 아직 나이가 어린데 그것도 조선사람입니다.
최치원은 중국의 고을인 율수현위로 임명되어 벼슬살이를 시작했고 그 후 희남절도사 일도 맡아보았습니다.
그는 이렇게 16년이라는 긴 세월을 장안, 락양, 율수현 등에서 벼슬을 하면서 열심히 학문을 닦아나갔습니다.
다른 나라 사람으로서 그것도 젊은 나이에 당나라의 적지 않은 벼슬을 지냈다는 것은 최치원이 얼마나 문장이 바르고 재능이 있었는가를 잘 보여줍니다.
최치원의 초기창작생활은 당나라에서였습니다. 그는 재능 있는 문필가로 당나라 문인들을 감동시켰으며 그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았습니다.
이 시기 그의 작품들은 「증산복계집」(5권)에 묶어져 있습니다.
이때 그의 작품들 중에서 가장 이목을 끄는 것은 떠나온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었습니다.
자신이 태어나고 자기를 젖 먹여 길러준 고향의 부드러운 땅과 맑은 물이 언제나 눈앞에 삼삼히 안겨들곤 했습니다. 그의 이런 심정은 오언절구 시인 「비 오는 가을밤에」에 그대로 노래되었습니다.
내 가을바람에 부쳐 쓸쓸히 노래 부르나
세상사람 그 누구도 알아주지 못 하구나
창밖엔 밤비만 구슬피 내리는데
고향 만리길이 등잔 앞에 떠오른다
시는 수만리 이국땅 찬비 내리는 스산한 가을밤의 고독을 그리면서 어린시절 떠나온 고향에 대한 사랑의 감정을 절절히 그렸습니다,
또한 시 「봄바람」에서는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바다건너 저 먼 나라에서
네 아마 갓 불어온 게로구나
새벽부터 웅얼대고 앉아
생각을 다잡지 못하노라
딱하여라 이따금 서재로 들어
부산히 장막을 설레이는 건
꽃철이 곧 다가온다고
저 멀리 고국소식 전하렴인 듯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담은 시로서는 이밖에도 「산양에서 고향친구를 만났다가 헤어지면서」, 「상태위에게」, 「동풍」, 「바닷가를 한가로이 거닐며」, 「바닷가에서 봄을 맞으며」 등 많은 작품들에서 볼 수 있습니다.
이 시기 최치원이 당나라에서 쓴 시만 해도 ‘상자에 차고 넘치었다.’고 전해집니다.
최치원의 가까운 친구였던 당나라의 시인인 고운은 그를 두고 이렇게 찬양하여 노래했습니다.
내 들으니 바다 위에 큰 자라 셋이 있어
높고 높은 산을 머리에 이었나니
구슬, 자개, 황금대궐 산마루에 솟았고
천만리 넓은 바다 그 산 밑을 둘렀네
그 밑에 자리 잡은 계림땅 푸른 한 점
지리산의 정기 어려 기이한 인재 태어났네
열두 살에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와
그 문장이 온 당나라천지를 감동시켰네
십팔 세에 과거시험장에 들어가
한 살로 장원급제를 쏘아 맞혔네
고운은 최치원의 시구에 대하여 또한 이렇게 찬양했습니다.
“학파인즉 고래가 바닷물결을 뽑는 듯 하고 문장기세인즉 날카로운 검이 은하수를 의지하고 서 있는 것 같다.”
최치원이 고국으로 돌아올 때 고운은 이런 시를 지어 그와의 이별을 서러워했습니다.
바람을 따라 선경을 따라
달과 함께 인간세상을 왔던가
정처 없이 살 곳을 찾지 못하여
막막한 길 다시 선경으로 가려는가
최치원은 이에 대하여 이렇게 화답했습니다.
무협중봉의 해에
베옷으로 당나라에 들어와
은하 열수의 해에
금의로 동쪽으로 돌아가노라
하지만 그는 역시 귀족이었습니다. 관료생활이 그로 하여금 그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만든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당시 온 나라 땅을 뒤흔들며 짓밟힌 생존권을 되찾기 위해 일떠선 황소이농민폭동을 눌러버리는 데 쓰이게 될 글을 그가 써 준데서 드러났습니다.
최치원은 고병의 청탁으로 명문을 골라 격문을 써주었습니다.
그는 여기에 이런 구절까지 써넣었습니다.
“…천하의 모든 사람들이 그대를 죽여야 한다고 할 뿐만 아니라 이 땅 밑의 귀신들까지도 이미 그대를 죽이기로 의논하였노라.”
이 글을 읽고 황소이는 자기를 죽이려드는 양반부자놈들에게 천추의 원한을 품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최치원의 글에서 커다란 흑점으로 되었습니다. 귀족들은 그 격문을 놓고 황소이를 토벌한 것은 칼의 힘이 아니라 최치원의 글의 힘이라고 최대의 걸작으로 추슬러 올렸지만 피의 원한을 씻으려 목숨도 두려움 없이 싸움 길에 나선 봉기자들은 끝없는 저주와 격분을 보냈습니다.
그러나 오랜 기간 이국에서의 귀족생활은 점차로 이러한 그에게 모순으로 가득 찬 현실을 가려보게 했고 비판적으로 대하도록 했습니다.
결국 그는 이 어지러운 모든 것을 내던지고 고향으로 떠나올 결심을 했습니다.
최치원은 884년 28살에 조국으로 돌아왔습니다.
이때부터 그의 생애의 두 번째 단계가 시작되었습니다.
귀국 후 그는 한림학사의 벼슬을 거쳐 수병부시랑, 지서서감의 자리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진성여왕은 그에게 아찬이라는 급이 높은 벼슬을 주었습니다.
최치원은 이 시기 근 10년간에 걸쳐 여러 건의 개혁안들을 왕에게 제출하기도 했고 문란해진 법들을 바로잡기 위해 894년에는 진성여왕에게 10가지 종목으로 된 ‘시무책’을 써서 시사문제들에 대한 자기의 정당한 의견을 내놓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도리어 후환이 되고 말았습니다. 집권세력의 미움을 받아 최치원은 지방으로 내려가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복잡한 심리적 정서적 체험과정은 그에게 권력을 쥔 세력들에 대한 증오의 감정을 낳게 했고 반대로 땅에 발을 붙이고 백성들의 생활을 주의 깊게 살피도록 했습니다. 그의 이러한 고통은 글귀에 그대로 반영되었습니다. 이 시기 최치원은 현실에 대한 모순과 부정적인 현상들을 폭로하는 사회적 문제들을 들고 나왔습니다. 이것은 그의 글에서 가장 주되는 주제영역으로 되었습니다.
그는 풍자와 비판의 검을 들고 시문학에서 새로운 이채를 띠게 되었습니다.
시 「강남녀」에서는 다음과 같이 읊고 있습니다.
강남에 풍속이 음탕하여
부유한 집 처녀들 교만하여
바느질 하는 것을 부끄러워하고
분 바르고 거문고만 타는데
그 곡조 고상치 못하고 음탕하다
그리고 청춘이 천년 갈듯 여기며
이웃집 가난한 처녀들이
온 종일 비단 짜는 것 비웃어 말하기를
“너희들 아무리 비단을 짜도
그것 한 오리 입어 못 보리라” 하네
이 시는 날마다 분이나 바르고 음탕한 곡조의 거문고만 뜯고 있는 부잣집 여자들과 해종일 베틀에 앉아 바디를 놀리면서 쉴 새 없이 일하는 여인들의 고달픈 생활을 대조하면서 양반집 딸들의 기생충적인 이면을 비판했으며 가난하고 불쌍한 백성들의 생활을 동정하고 있습니다. 권세만 믿고 잘 난 체 하며 자기들의 뼈를 놀려 부를 창조해가는 백성들을 조소하는 세도가문의 악습에 신랄한 조소를 보내면서 해종일 비단을 짜도 비단옷 한 벌 입어볼 수 없는 여인들에게 심심한 동정을 보내고 있는 것입니다.
시에서는 이와 같이 대조의 형상을 통하여 당대의 근본적인 모순을 발가놓고 있습니다.
또한 최치원은 봉건관료배들의 허위와 위선에 가득 찬 더러운 몰골을 짐승에 비교하여 조소했고 명예와 이속을 채우기 위해서는 그 어떤 짓도 서슴지 않는 양반들의 더러운 안속을 시라는 무기로 여지없이 벗겨내었습니다.
시 「소박한 생각」, 「붓길 가는대로」는 그 대표작으로 됩니다.
시 「소박한 생각」에서 최치원은 봉건관료배들을 교활한 여우나 삵에 비유했습니다.
여우가 조화를 부려 미인이 되고
삵이 변하여 선비가 된다네
그 누가 알랴 짐승의 무리들
사람으로 둔갑하여 나타난 것을
겉모양 변하기는 쉬우나
속마음 바로 가짐은 진정 어려워
참과 거짓을 분별하려거든
마음의 거울을 닦아야 하리
시에서는 이와 같이 권력자들을 ‘짐승의 무리’로 낙인하고 제 안속만 차리는 교활하기 이를 데 없는 간사한 자가 겉보기엔 멀끔하게 차리고 나서서 세상을 속이고 뒤에 돌아앉아서는 백성의 살을 발가내고 있음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시 「붓길 가는대로」에서는 양반귀족들의 출세욕과 탐욕을 풍자하면서 허위와 위선으로 가득 찬 그들의 세계를 드러냈습니다.
버리라, 원하노라, 이욕의 문 굳게 닫고
나의 한 몸 그런 것에 더럽히지 않으리
권세와 탐욕을 다투는 추악한 무리들
죽음을 무릅쓰고 바닷물 속까지 뛰어드네
부귀를 탐내면 티끌에 물들기 쉽고
마음이 어지러워지면 그 잘못 씻기 어려우리
깨끗하고 맑은 삶을 그 누구와 의논할고
세상 사람들 모두가 단술만 즐기고 있네
하지만 시들에서는 백성을 죽이고 나라를 구렁텅이에 밀어 넣는 간사한 무리들을 쳐서 없애 버릴 데 대하여 제기하지 못하였으며 다만 날카로운 비판과 더불어 도덕적 수양을 쌓을 데 대하여 호소한 것으로 그치고 말았습니다.
농사는 해마다 흉하고 정사는 날마다 더욱 문란하여 가슴에 맺힌 원한을 풀기 위해 백성들이 곳곳에서 들고 일어나 나라 안은 더없이 어지러운데 지방군수생활에서도 아무런 재미를 못 붙인 최치원은 번민에 싸여 관직을 버리고 이것과 결별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현실은 그가 후백제의 견훤의 폭정에 이런 격문까지 보내도록 했습니다.
“근자에 삼한 땅의 운수가 비뚤어져 전국에 흉년이 들어 많은 백성들이 나라를 반대하여 일어서고 논밭은 모조리 적지가 되었으므로 내란의 위험을 종식시키고 나라의 재산을 구원하고자 이웃과 우호선린관계를 맺었더니 과연 수천의 땅이 농사를 짓고 누에치는 잠업을 즐기고 7~8년을 두고 군사가 한가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대로 말하면 털끝만한 이익에 눈이 어두워 첩들을 모조리 붙들어가고 보물을 모조리 빼앗아 수레에 실어갔으니 그 원흉으로 말하면 걸주보다 더하고 그 잔인함을 말하면 짐승보다 더하여 나의 원한은 하늘이 무너질 듯 지극하다.”
울분으로 하여 울적한 나날을 보내던 최치원은 모든 것을 버리고 가야산으로 들어갈 용단을 내렸습니다. 그는 42세로 짐작되는 898년 가야산으로 들어가 세상과 담을 쌓았습니다. 그의 이 행동은 물론 적극적이 못되기는 하지만 권력에 대한 항거의 표시인 것입니다. 자신의 시에서도 쓰고 있듯이 어지러운 세상에서 이욕의 문을 닫고 자기를 더럽히지 않으며 한생을 순결하게 마치려는 것이었습니다.
최치원은 그 어떤 미련도 없이 모든 것을 버리고 처자권속들을 데리고 일생을 같이 하려는 몇몇 동료들과 함께 가야산으로 들어갔습니다.
이 시기가 최치원의 생활에서 세 번째 단계에 해당됩니다.
가야산에 독서당을 짓고 들어앉은 최치원은 많은 작품들을 남겼습니다.
그러나 그 시기 작품들은 별로 전해지지 못하고 있습니다.
시 「독서당」에서는 자기의 감정을 이렇게 비유했습니다.
내리는 골물이 산속에 뿜어대니
지척에서 하는 말도 들을 수가 없구나
두어라 뜬 세상 시내소리 하도 귀찮아
골물로 하여금 막으려 함이로다
최치원의 창작에서 독특한 자리를 차지하는 것은 「향악잡영」이다. 이것은 그 시기 흩어지고 있던 「대면」, 「속득」, 「산예」, 「금환」, 「월전」 등 5가지 놀이의 내용과 그 과정을 시로 옮긴 관극시입니다. 여기에서 「대면」, 「속득」, 「산예」는 고대로부터 내려오던 탈춤이고 「금환」은 교예형태의 작품이며 「월전」은 어릿광대들의 풍자극의 형태입니다.
최치원은 「향악잡영」에서 이것들을 조화롭게 엮어 중세극예술의 얼굴과 그 특징에 대하여 그려내었습니다.
이것은 오늘까지도 그 시기 극예술에 대한 귀중한 자료로 됩니다.
최치원은 생애의 전 기간 수많은 글을 썼습니다. 그의 글들은 가장 오랜 문집인 「계원필경」(20권)과 「사륙문집」 등 여러 문집들에 수록되어 전해지고 있습니다.
총체적으로 최치원의 시에서 가장 큰 자리를 차지하는 것은 당대의 불합리한 현실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입니다.
그는 모든 것을 비교적 진실하게 그렸으며 고향과 산천에 대한 사랑과 함께 중요하게는 부정적 면에 대하여 정당하게 비판해 나섰습니다.
물론 그는 양반 관료로서 그 테두리를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었고 출신과 시대의 제한성을 가지고 있었지만 당대 사회에 대한 비판의 무기를 들었다는 데에 그의 시문학의 진보성이 있는 것입니다.
최치원의 글에서는 중세소설의 싹을 보여준 산문들도 있습니다.
대표작으로 전설을 기초로 한 환상체소설인 「두 여자의 무덤」이 있습니다.
주인공은 최치원 자신으로 되어있습니다.
소설은 최치원이 율수현 남쪽에 있는 초현관을 유람하다가 잠자리를 정했는데 그 앞 언덕에 있는 두 여자의 무덤 돌문에 그들 두 여인을 위한 시 한 수를 써놓은 것으로부터 발단됩니다.
시는 이렇게 되어있습니다.
뉘 집의 두 여인이
이 무덤에 묻혀 있어
적막한 황천 살이
몇 봄이나 겪었느뇨
시냇가 밝은 날 그림자 아래
형용만 남아
황량한 묘두에는
이름마저 찾기 어렵구나
꽃다운 정 꿈에나마
서로 통하고저
기나긴 밤인들
한 나그네의 정을 탓하리
만일 외로운 여사나마
회포를 나눌 수 있다면
서로 시를 주고받아
낙천의 원혼 위로하고저
그런데 그날 저녁 무덤의 두 여인이 그에게 찾아옵니다. 그 여인들로 말하면 이 고장 부호인 장씨의 두 딸인데 언니는 팔랑자이고 동생은 구랑자이다.
그들은 최 공에게 자기들이 무덤 속으로 들어오게 된 사연을 눈물로 하소합니다.
“저와 제 동생은 율수현 초성 땅 장씨네 집의 두 딸이었나이다. 아버지는 벼슬에 뜻이 없고 장사를 주로 하여 큰 부자가 되었으며 갖은 향락을 하였사옵니다. 그러나 소녀가 18살이 되옵고 동생이 16살이 되었을 때 저는 소금장수의 아내로, 동생은 차장수의 아내로 보내기로 정했사옵니다.
그래서 저희들 둘이는 다같이 불만을 품고 시집갈 생각이 없사와 딱한 심정을 풀길 없었나이다.”
여인들은 오랜 세월 마음에 드는 이를 만나지 못하다가 최 공을 찾아 왔다고 했습니다. 그들은 장밤을 서로 시를 주고받으며 즐겁게 지내다가 새벽이 되자 시 한 수씩 남기고 바람처럼 간곳없이 사라집니다.
작품은 두 여인의 형상을 통하여 자유로운 개성을 막아나서는 낡은 관습의 부당성에 대하여 드러내고 그 구속에서 벗어나려는 여인들의 지향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러나 소설은 장사군은싫다 하면서도 최 공을 이상적인 인물로 그려낸 것은 선비인 저자 자신의 제한성에서 나온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런 부족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작품은 중세소설의 싹으로서 수이전체문학이라는 산문형태를 개척했으며 형상에서 특이한 수법들을 취하고 있는 것으로 하여 자기의 뚜렷한 자리를 차지했습니다.
이처럼 최치원은 시와 산문에서 우리 문학사에 커다란 자리를 차지하는 인물입니다.
최치원은 문학뿐 아니라 역사, 철학, 민속, 서예 등 여러 부문에서 자기의 재능을 보여주었습니다.
철학에서도 그는 일부 유물론적인 견해를 내놓았습니다.
그는 ‘성인’은 태어나면서부터 모든 것을 다 안다고 하는 그릇된 견해를 비판해 나섰으며 사람은 비록 타고난 총명을 가지고 있더라도 배우지 않고는 사물의 리치를 깨달을 수 없고 아무것도 모르는 ‘무식한 농부의 자식’이라 할지라도 열심히 배우기만 하면 무지에서 벗어 날 수 있고 인재로 될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물론 최치원은 신라가 망하고 고려가 세워지는 복잡한 시기에 활동한 사람으로서 또한 관료생활을 했고 선비라는 그 울타리를 벗어나지 못한 것으로 하여 여러 가지 제한성이 없지 않으나 현실 자체를 냉정하게 비판하고 고향산천에 대한 사랑의 감정을 반영한 것으로 하여 그 이름과 작품들은 역사에 남게 되었습니다.
최치원이 언제 어떻게 세상을 떠났는가에 대해서는 전해지는 것이 없습니다.
농산정(籠山亭)
정자 아래 물가엔 최치원의 시를 새긴 제시석(題詩石)이 남아 있습니다.
'제가야산독서당(題伽倻山讀書堂)'이라는 제목의 칠언절구인데, 최치원
선생이 벼슬을 버리고 속세를 하직하고 가야산에 들어와서 독서당을 짓고
이곳 가야산 홍류동계곡의 물소리를 들으며 지은 둔세시(遁世詩)입니다.
그 풀이는 본문 중에 있습니다.
狂奔疊石吼重巒
人語難分咫尺間
常恐是非聲到耳
故敎流水盡籠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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