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흐는다

[스크랩] 승만부인과 진덕여왕

오늘행복스마일 2018. 12. 27. 14:36
우리 역사에서  오직 신라에만 여왕이 있었고,신라에는 3명의 여왕이 있었다. 이 3명의 여왕에 대해서 흥미를 가진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그 여왕에 대해 알려진 기록은 많지 않다. 선덕여왕은 최초의 여왕으로, 또 "지기삼사"라 하여 영특한 왕으로 기록이 상대적으로 많은 편이고 말기의 진성여왕은 나라를 망하게 한 여왕으로 부정적으로 알려진 것이 또한 많다.

그러나 선덕의 뒤를 이은 진덕여왕은 알려진것이 거의 없는 편이다. 그녀가 김춘추에 비해 어떤 면에서 성골로 인정받을수 있었는지, 얼마의 나이에 등극했는지 혼인은 했는지, 자식은 왜 없는지 알길이 없다.

삼국사기
*진평왕의 아우 국반(國飯)갈문왕의 딸이다. 어머니는 박씨 월명(月明)부인이다. 타고난 자질이 풍만하고 고우며 키가 7척이고 손을 내리면 무릎아래까지 내려갔다.

삼국유사 왕력
*아버지는 진평왕의 아우 국기안(國其安)갈문왕이다. 어머니는 아니(阿尼)부인 박씨로 노추(奴追)ㅇㅇㅇ갈문왕의 딸이다. 혹 월명부인이라고도 하나 잘못이다.  

신상정보는 이게 전부다. 삼국유사 왕력에서 아버지를 국기안이라 했지만 국반의 오기로 생각하면 될 것이고 어머니가 월명부인이 아니라고 한것도 "아니"를 월명의 아명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러므로 진덕여왕은 진평왕의 아우 국반갈문왕의 딸임은 틀림없다 하겠다.

삼국사기에는 진평왕이 즉위와 동시에 아우들을 갈문왕에 봉했다는 기사가 있다. 진평왕이 어린 나이에 등극했다지만 그 아우들도 갈문왕이란 지위를 부여하는 것으로 보아 아주 어린애는 아니었을 것이다. 진평왕의 재위기간 54년, 선덕여왕 재위기간 16년을 더하면 70년의 세월이 흘렀고 진평왕의 아우들은 진평왕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던건 분명해 보인다.

여기서 진덕여왕의 즉위시 나이를 추산할 수 있다. 아마 40이 넘지 않았을까? 그 나이까지 혼인하지 않았다고 볼 수는 없다. 그러므로 혼인을 했으나 자식을 보지 못한 중년의 여인 진덕을 추정하게 된다.

앞서 진덕여왕의 이름을 거론하지 않았는데 승만(勝曼)이다. 그런데 이름의 음이 같은 또 한 사람의 승만부인을 우리는 보게 된다. 승만(僧滿)으로 글자는 다르지만 음이 같은 이 사람은 삼국유사 왕력에 진평왕의 계비(繼妃)로 등장한다.

결론부터 말해서 두 사람을 동일인이라 하면 대부분 펄쩍 뛸 것이다. 하지만 생각을 좀 더 해 보자.
삼국사기에는 진평왕이 계비를 맞았다는 내용이 없다. 오직 삼국유사 왕력에서만 진평왕의 계비가 승만부인이고 성이 손(孫)씨라는 기록이 있다. 없는 계비를 만들어 넣었다고  보기는 여러 정황상 힘들다.

진평왕의 재위기간이 길었고 아들이 없었기에 마야왕비가 먼저 사망했다면 계비가 있었음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삼국사기는 어떤 이유에서 계비에 관한 기록을 배제했을 수 있다.

진평왕이 계비를 맞았다고 가정한다면 어떤 여인을 왕비로 맞았을까? 당시 왕실의 혼인 패턴을 알아볼 필요가 있다. 여기서 다시 성골을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성골남자가 없어 여자가 왕이 되었다는데 왕실은 성골을 낳기 위해 노력했을 것이다. 그럴려면 성골여인을 맞아야 한다.

진평왕의 사촌동생 용춘이 성골이 아니고 그 아들이며 진평왕의 외손자인 김춘추도 성골이 아니라는데(성골의 기준이 정립되지 않았지만) 하여튼 성골은 부모 양쪽이 왕과 최근친이어야함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러므로 진평왕의 계비가 손씨라는건 너무도 생뚱맞은 내용이다. 이 시기는 물론이고 그 뒤에도 손씨가 신라왕실에 들어왔다는 근거는 전혀 없다.(내가 추정하기로는 손이라는 성은 당시에 생기지도 않았다) 그러므로 "孫"이라는 성은 후대 어떤 이유에서 추가한 내용이란 것이다.

만일 진평왕의 아우인 국반의 딸이라면 어떠한가? 이미 성골이라 하지 않았는가!
진평왕의 계비로는 그 조카가 적격이란 것이다. 그것은 신라왕실의 혼인관습에서 익히 보아오던 바이다. 진평왕이 언제 계비를 맞았는지 알 수 없으나 재위 후반기라면
조카의 나이로도 적절한 편이다.

그러므로 진덕여왕 승만과 진평왕의 계비 승만부인은 같은 시대 비슷한 나이의 인물로 추정이 된다. 신라에 동명이인을 더러 보지만 같은 시대 비슷한 신분의 동명이인(발음상)은 찾아 볼 수 없다. 당시에 이름의 한문표기보다 그 발음이 더 중시되었음은 익히 아는 바이다. 창녕척경비에 심맥부지라는 진흥왕과 같은 이름을 볼 수 있지만 두 사람을 혼동할 일은 없었다.

그러므로 진평왕의 계비 승만을 僧滿으로 적은 것은  한 인물을  다른 사람으로 보이게끔 고의로 그렇게 표현한게 아닐까 추정하는 것이다.

과연 진평왕의 왕비신분이었던 여인이 왕위에 오를 수 있었을까?  안된다고 생각하는건 우리의 고정관념이 아닐까. 여자가 왕이 되는 마당에 과거 누구의 왕비였다는 신분이 문제되지 않을 수 있다. 왕위에 오를 자가 실세 권력자라면 더 말할 나위가 없다.대표적인 예로 당의 측천무후가 있다. 황제를 자처했다.

진덕여왕을 대체로 김춘추와 김유신이 권력을 잡은 뒤 허수아비로 내세운 여왕으로 보는 시각이 강하다. 하지만 어찌 아는가? 그 반대일 수 있다고 본다.

진평왕의 계비라면 그렇지 않을 것이다. 조선시대 권력을 휘두른 과부 왕비들을  떠올려 보자. 선덕여왕의 즉위에도 그녀의 영향력이 작용했을 수 있다. 왕실의 숨은 권력자로 행세했을 가능성이 높다.

선덕여왕은 비담의 반란와중에 사망했다. 반란군에 시해당했다는 주장도 있다.

그 반란과 계승, 권력투쟁과정에 승만부인이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김춘추와 김유신을 이용하여 반란세력을 진압하고 권력을 쟁취하였을 수도 있다고 본다.  

진덕여왕은 신라사의 큰 분기점이 되었다. 그녀의 신상에 대해서는 알려진게 별로  없었고 7년이란 짧은 재위기간을 두고 사라졌다. 신라왕실에서 숨기고 싶었던 많은 얘기가 기록에서 감춰졌고 그래서 신라사는 의문투성이로 남아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2005-01-24 08:56:56)  
선덕.진덕의 시대는 열도의 지통과 원명.원정의 시대와 상당히 비슷한 점이 많은 것 같아요.
국가적으로 위기시대인 듯 하고 신분제도에 혁명이 인 듯 합니다.
만엽 권1-1이 바로 혈통 보다는 행동하는 자를 우선하겠다는 인식입니다.
神權과 정치권력이 정통성을 놓고 충돌한 것이지요.
고주몽이 소서노를 배제하고 유리를 선택할 때 했을 법한 말이지요.
원작자는 雄略이라고 되어 있습니다만 이 인식이 천무라는 시아버지의 모습을 통하여 초벽에게 전달되고 원명은 그 고구려적인 인식을 첫머리에 놓았던 것입니다.
나도 그렇게 하겠다는 것이지요.
이는 高市시대를 선택하지 않은 시어머니 持統의 시대를 거치면서 위기극복은 혈통유지와는 사뭇 다른 사안이어서 필요하면 나는 "高市를 선택하는 방향으로 갔을 것"이라 표현하고 있습니다.
선덕.진덕도 이와 같은 의식을 가졌으리라 추정해 봅니다.

족외혼은 남성중심 보다는 여성기준으로 이뤄졌을 것이라 추정합니다.
과거 태어나는 자식이 누구의 자식인지 모르는 모계사회가 지속되어 있었었기에 남성을 기준으로 족외혼을 논한다는 것은 사리에 맞지 않지요.
한 남성이 자매를 취한다는 것은 남성의 권위를 나타내는 것으로 보일지 모르나 여성들이 남성의 존재를 배제하는 여성권력일 수 있는 거죠.
형사취수 제도 역시 남성권력이라기 보다 여성권력에서 배태되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합니다.

이러한 관습들은 유교사상이 자리하기 이전까지 광범위하게 오래도록 지속되었습니다.
아주 최근까지 언니와 결혼했다가 이혼하고 동생과 혼인신고를 할 수가 있었지요.
서석 (2005-01-24 10:49:21)
돌님은 일본고대사에 해박하시군요. 저는 한반도관계기사만 주로 봅니다.
과거 화랑세기관계로 모계혈통부분이 여기서 많이 다루어졌었지요.화랑세기의 진위문제는 저도 과거보다 한발 물러선 입장입니다만 그기에 올려진 양대 모계혈통세력은 설사 그 자료가 조작물이라 하더라도 신라사의 비밀에 접근할 수 있는 핵심이라 생각됩니다.

최근 이종욱교수가 화랑세기의 인물 미실을 주인공으로 한 책을 냈다는데 진흥~진덕간은 신라의 전성기이자 격동기였습니다. 경주일대를 장악한 소국에서 일거에 한반도의 절반을 차지하는 팽창을 했다가 다시 고구려 백제의 협공으로 존망의 위기로 치달은 격동기였습니다.

그 시기 신라왕실을 지탱한 주체는 몇몇 여인들이었다고 하면 믿기 힘들지만 진흥과 진평이 어린 나이에 즉위하고 어머니의 섭정을 받았다는 사실을 상기하면 새삼스러운 일은 아닙니다.

선덕과 진덕은 그 여인천하의 마지막 불꽃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선덕과 진덕이 왕실의 오래된 관습에 의해 어쩔수 없이 등장한 비정상적인 계승이라는 인식은 근본부터 잘못일 수 있다고 봅니다.

진평왕 말기에 일어난 칠숙과 석품의 난, 선덕여왕 재위 마지막에 일어난 비담의 난등은 권력욕이라기보다 나라를 구하겠다는 대의명분과 나름의 정통성(왕위계승에 관한)도 갖추고 일정한 민심을 등에 업고 기도되었다는 생각입니다.

패자는 말이 없고 악의 무리로 낙인찍혀 사라진 것이지요.
김하준 (2005-01-24 11:26:48)  
가능한 추론으로 생각됩니다.
(2005-01-25 09:45:04)  
제 생각은 가따리라 혼자만의 생각이고 혼자만의 놀음이니 괘념치마시고 계속 올려주시기 바랍니다.

화랑세기 건은 유학자적 입장에서의 자유로운 학문탐구라기 보다 日학자적 입장을 반영한 듯 싶고 이후에 민족주의적 색채를 가미한 냄새가 나서 딴지를 좀 걸었습니다.

성골붕괴과정이 우리역사를 탐구함에 있어 상당히 비중있는 것임에도 이를 다룬 자료들이 부족한 현실이 안타깝습니다.
지금은 알기 어렵지만 고구려 역시 소서노가 쫓겨나지 않았다면 그 사상이나 관습은 많이 달라졌었겠지요.
상징적으로 보면 봉황에서 용으로 그 권력구도가 옮겨가는 사상혁명의 전환기라 봄이 옳을 듯 싶습니다.

성골이 멸손된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진평왕의 재위기간이 너무 길었나 봐요.
진평~진덕까지 77년이라면 3~4세대까지 이루어지는 시간이 되고,
고구려, 백제의 찝쩍거림이 지속되면서 군부는 강화된 시기였습니다.
승계1순위, 2순위가 사라지고 3순위 정도가 되면 이미 중앙권력에서는 상당히 배제된 상태가 되어가지요.
이쯤되면 고려.조선시대처럼 부계혈통계승이 아닌 한, 칠골정통과의 결합을 의도적으로 정치적으로 차단하려할 것입니다.
쿠테타를 빌미로 그나마 있던 3~4순위 계승자 마저 정리되어버린 상태로 보이네요.
신라왕조는 철종을 잉태하지 않는 사회였거든요.

출처 : 서석
글쓴이 : 김동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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