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흐는다

[스크랩] 최치원 선생

오늘행복스마일 2018. 12. 27. 14:34


:: 崔致遠 선생 ::



최치원 동상

  

 

해운대 동백섬 최치원 유적지 동상

  


 

부산 해운대 지명의 유래가된 최치원이 남긴 글씨

  

 

최치원 흉상 

 

 

작가 미상의  최치원 초상화

 

 

 해운대 유래비

 

 

해운대 유적 보존 공적 기념비

 


 

"중국에 있는 최치원 박물관"  


최치원은 고국인 신라보다 중국 당나라 에서 더욱 실력을 인정 받았다.

 

 秋夜雨中(추야우중)


秋風惟苦吟 (추풍유고음) 가을바람 홀로 쓸쓸한 소리

世路少知音 (세로소지음) 세상에는 날 아는 이 없네

窓外三更雨 (창외삼경우) 창밖은 한밤 중 비가 오는데

燈前萬里心 (등전만리심) 등잔불 앞에서 고향 그리는 마음이여!

 

* 贈雲門蘭若智光山人(증운문란약지광산인)

 

雲畔構精廬 (운반구정려) 구름 밭두둑가에 요사채 짓고

安禪四紀餘 (안선사기여) 참선에 몰두한지 40년 넘었네

?無出山步 (구무출산보) 지팡이 짚고 山門(산문) 밖 나선 적 없고

筆絶入京書 (필절입경서) 서울로 편지 한 장 띄운 적 없네

竹架泉聲緊 (죽가천성긴) 대 홈통엔 샘물소리 끊이지 않고

松?日影疎 (송령일영소) 소나무 창가엔 해 그림자 성기네

境高吟不盡 (경고음부진) 높은 경지 노래로 다할 길 없어

暝目悟眞如 (명목오진여) 눈 감고 진여의 경지 깨닫네.

 

* 題伽倻山(제가야산)

 

狂噴疊石吼重巒 (광분첩석공중만) 미친 물결 바위 부딪쳐 골짜기 가득 울려

人語難分咫尺間 (인어난분지척간) 지척간에도 말소리 분간하기 어렵네

常恐是非聲到耳 (상공시비성도이) 세상의 시비 소리 귀에 들릴까 두려워하여

故敎流水盡籠山 (고교유수진농산) 일부러 물소리로 온 산을 귀 멀게 만든 듯.


   :: 최치원 선생 ::

 

 1. 서기857년(文聖王19년) 신라의 수도 사량부(沙梁部)에서 탄생하셨고 부친은 옥구(沃溝) 의 지현사(知縣事)를 지낸 견일(肩逸)입니다.


2. 성은 최(崔)씨요 이름은 치원(致遠) 자(字)는 고운(孤雲), 호(號)는 해운(海雲)으로 어릴 때부터 풍의(風儀)가 아름답고 성품이 정민(精敏 ; 학식이 많고 재주가 있음)하시어 학문을 좋아하는 천재였습니다.


3. 고운선생이 탄생하실 때 까지 신라에는 문자가 없었고 기록도 할 수가 없는 시대였습니다. 고운선생께서는 신라 골품제(骨品制)에 따른 성골(聖骨)과 진골 (眞骨)이 아닌 평민으로 태어나서 타고난 천재(天才)를 살리시고 입명(立名 〓 立身揚名) 함으로써 효도를 하기위해 당시 천하대국인 중국 당(唐)나라에 유학하시어 그 나라의 과거(科擧)에 급제(及第)하시고 벼슬을 하면서 한문학(漢文學)을 대성(大成)하시어 우리나라 최초의 문집인 계원필경(桂苑筆耕)을 남겼으니 삼국사기나 삼국유사보다 수백년이나 앞선 기록문자 입니다.


이러한 관계로 최씨의 중시조가 되셨고 경주가 대본(大本)이 되었다. 고운선생께서는 그의 저서 경학대장(經學隊仗)33페이지에서 효(孝)를 강조했습니다.


선계기지 선술기사(善繼其志 善述其事)

선조의 뜻을 잘 베풀어라. 선조가 이룬 일을 잘 베풀어라.


「효는 덕(德)의 근본이며 백가지 행실이 나오는 근원이기 때문에 어버이의 뜻을 잘 계승하여 그 못 이룬 뜻을 감히 빠뜨리지 말아야한다.」


선조의 유지(遺志)를 잘 받들어 남으로부터 무식하다는 말은 듣지 않아야 할 것이다. 라고 가르쳐주셨습니다.


4. 정민호학(학식이 많고 재주가 있으며 학문을 좋아함)시절의 전설

선생이 열두살 경 신라국 라승상 (羅丞相 ; 天子<황제>를 보좌하는 대신, 정승, 제상)댁에 고용되어 시간이 나는 데로 학업을 증진하셨습니다.


그때 중국 당나라에서는 신라의 학문정도를 시험하기위해 석함(石函)하나를 보내어 그 속에 무엇이 있는지를 알아서 한 달 내로 보고하도록 하명을 하였습니다.

신라의 선조왕도 문무백관에게 이 하명을 따르도록 했으나 날자는 되어가도 아는 사람이 없고 결국 라승상의 책임으로 돌아가게 되었을 때 고민을 하면서 식음을 전폐하고 몸 져 누었습니다.


라승상의 부인과 딸이 그에게 권하기를 최동(崔童 ; 최치원)에게 하문(下問)할 것을 권 했으나 라승상은 고용인에게 묻는 것이 말이 안 된다고 일축했습니다. 그러나 국가와 대감이 당나라로부터 수치를 당하는 것보다 낫다고 권했고 이를 수락하며 최동에게 물었습니다.


최동은 나를 승상의 사위로 삼아주면 답하겠다고 했고 라승상은 처음에는 거절을 했으나 결국은 허락을 하고 최동은 시로 답을 하였습니다.

 


단단 석중물(團團 石中物)은    반백 반황색(半碧 半黃色)이요

야야 지시조(夜夜 知時鳥)가    함정 미토음(含情 未吐音)이라.


둥글고 둥근 돌 속의 물건은   반은 흰색이오 반은 노란색이요.

밤마다 시간을 알리는 새가    뜻을 머금고도 토해내지 못하고 있다.

 


이 내용을 당나라에 보고하였더니 함중 물은 계란(鷄卵)이 아니고 닭(鷄)이라고 알아낸 사람과 석함을 갖고 당나라로 오도록 하라는 명령이 내려졌습니다.


라승상이 어린사위 최동이 당나라에 가면 온갖 어려운 질문이 있을 것이며 난처해질 것 을 염려를 했으나 신라왕 선조께서는 최동을 입당(入唐)하도록 하셨습니다.


입당하여 석함을 열어보니 이미 계란이 닭이 되어 있어 참으로 탄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합니다.


5. 당나라에서의 행적

(1) 당나라로 출발

선생은 12세(서기868년, 신라헌안왕2년)에 만리붕정(萬里鵬程) 유학길에 오를 때 선생의 아버지께서 말씀하시기를


「당나라에 가서 십년을 공부하여 과거를 못하면 나의 아들이라 하지마라 나도 아들을 두었다고 하지 않을 테니 열심히 공부하여 아버지의 소원을 잊지 말고 공을 세우도록 하라.」

아버지의 엄격한 훈계를 갖고 애절한 이별을 하 며 단신으로 상선을 타고 수륙만리 먼 길 떠나면서 오매불망(寤寐不忘)하셨습니다.

(2) 당나라에서의 행적

* 12 ~ 17세(서기869 ~ 873년, 신라 경문왕9 ~ 13년)에 당나라에서 어진 스승을 만나 열심히 공부를 하셨습니다.


* 18세(서기874년, 신라 경문왕14년)에 선생은 풍속이 다른 나라에서 외로운 유학생활이 지만 천품(타고난 기품)이 뛰어나고 재질이 비범하여 고난을 극복하고 어진스승을 찾아 열심히 매진하고 아버지의 훈계를 잊지 않았습니다.


인백기천(남이 백의 노력을 하면 나는 천의 노력을 한다.)으로 유학한지 6년 만인 선생의 나이 18세에 예부 시랑배찬의주시(시험하는 일의 담당 최고책임자)로 된 제과 (당나라 때 임시로 특별한 재능을 가진 사람을 뽑기 위해 황제<天子>가 친히 출제를 하여 실시하든 과거)에 응시하여 단번에 급제를 하셨으니 아버지의 훈계인 십년보다 4년을 단축시킨 훌륭한 성공이 일시에 중국천하를 진동시켰다고 합니다.


* 19세(서기875년, 헌강왕 1년)에 동도(東都), 낙양(洛陽)에 유랑(일정한 목적 없이 떠 돌아다님) 공부(工夫)하심.


* 20세(서기876년, 헌강왕2년)에 선주(宣州) 표수현위(漂水縣尉)에 임명(任命)되었음. (지방 행정관의 자리 - 어린 나이에 외국인에게는 이례적인 대우였음.)


선생은 바쁜 공무 중에도 틈틈이 쓴 글이 오백권이 되었으며 그중에는 명작의 하나인 중산복궤집(中山을 쌓는 데는 마지막 한 바구니의 흙까지 노력해야한다는 의미)인데 이 책은 현재 전해지지 않음.

선생의 문재(文才)는 날이 갈수록 사람들을 놀라게 했고 행정관으로서도 능력이 비범했습니다.


* 21세(서기877년, 헌강왕3년)에 이해 겨울 표수현위를 사직하셨음.


* 22세(서기878년, 헌강왕4년)에 굉사과(宏詞科)에 응시하기위해 탁마( 학문과 덕을 닦음)하심.


* 23세(서기879년, 헌강왕5년)에 황소(黃巢)의 반란군이 장안을 함락시키고 그 세력이 크게 떨쳐지면서 당나라의 조정에서는 사천절도사(당나라시대에 한지방의 군정 및 행정사무를 총괄하던 관서) 고병(국문으로 표기시는 고변으로도 가능함)을 제도행영병마도통(관군의 총지휘자)으로 임명하여 반적(叛賊)을 토벌케 했습니다.


고병(高騈)은 평소 선생의 인격과 문재(文材)를 추앙해 오든 분이기에 선생을 종사관(從事官)으로 서기(書記)의 책임을 부여했습니다.


4년간의 군막(軍幕)에서 대임(大任)을 맡아 표(군주에게 올리는 서장), 장(보고문서), 서(장부), 계(안내로 사료됨), 격문(급히 여러 사람에게 알리는 글), 등 이 선생의 손에 의해 이루어졌습니다.


이 해에 승무랑(承務郞) 시어사(恃御史) 내공봉(內供 奉)에 도통순관(都統巡官)의 요직에 진급하시면서 포장(표창을 하기위해 주는 휘장)으로 비어대(붉은 비단으로 만든 주머니)를 받으셨습니다.


* 24세(서기880년, 헌강왕6년) 7월 8일에 토 황소 격문(討 黃巢 檄文)을 지었는데 이 한편 의 글은 반적 황소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이글 중에


「천하의 모든 사람이 너를 죽이려고 생각할 뿐만 아니라 땅속의 귀신까지도 이미 너를 죽이려고 의논하였을 것이다.」


라는 구절에서는 포악무지(暴惡無知)했든 황소도 놀라 혼비백산(魂飛魄散)해서 자기도 모르게 의자에서 떨어졌다고 합니다. 이 일로 선생의 문명(文名)이 천하에 떨쳤습니다.


참고

황소에게 보낸 격문은 참으로 유명하지만 장문이라 관심 있는 사람은

㉮한글번역 고운 최치원선생 p222

㉯고운선생 역사 발췌집 p19

㉰경주최씨 상식 p57을 참고 바랍니다.


* 25세(서기882년, 헌강왕7년)에 계속 군막에서 서역(書役)에 종사하셨습니다.


* 26세(서기883년, 헌강왕8년)에 당나라 황제로부터 자금어대(紫金魚袋 ; 붉은 금빛의 물고기 모양으로 된 주머니 속에 성명을 써둔 표신<대궐에 급한 용무로 출입이 가능한 훈장>)를 하사 받으셨습니다. 외국청년에게는 더 없는 영광으로 시를 지어 감사의 뜻을 전했다고 합니다.

* 27세(서기883년, 헌강왕9년)에 선생은 계원필경집(桂苑筆耕集)을 완성하셨습니다.

이 책 서문에 편찬의 유래와 내용 등을 간단히 밝히셨는데 그것은 회남( 당나라 때 십도<十道>의 하나로서 회수 이남의 땅이라는 뜻으로 지금의 중국 하남성)에서 종직(從職)하여 고시중(고병을 모신다는 뜻)의 필연(붓과 벼루라는 뜻으로 문필에 종사하는 역할을 전적으로 맡게 되자 몰려드는 군서<軍書>)등을 전담하여 4년간 힘써 이룬 것이 일만여 수(首)가 되었으나 도태(가려낸다는 뜻)를 거듭 하여 1/10이나 2/10도 되지 않지만 모래를 파 헤쳐 금을 발견하였다는 것에 비교 하옵고 부서진 기와(瓦)조각으로 벽(壁)을 그리는 것보다 낫다는 생각에 드디어 계원집 이십 권을 이루었고, 때마침 융막(군대막사)에서 우식(寓食)하면서 소위 전어시(된죽이라는 뜻) 죽어시(묽은 죽이라는 뜻)한 까닭에 첩이(문득 이라는 뜻) 필경(筆耕)이란 위목(제목)을 붙였다 라고 하셨습니다


23세부터 4년간 종군하신 것을 보아 27세에 계원필경집이 완성되었다고 보면 될 것입니다.


* 28세(서기884년, 헌강왕10년) 10월에 당나라 희종황제(僖宗皇帝)는 선생이 고국에 돌아갈 뜻이 간절하심을 짐작하고, 특히 국서(國書)를 가져가는 사신의 자격을 띠게 해주셨고 고병은 이백관이나 되는 돈과 행장(行裝)을 갖추어 주었으며 문사(文士)들인 고운(顧雲), 양첨(楊瞻), 오만(吳巒)등은 석별하는 시를 지었는데 그중에서 고운(顧雲)은 같은 해에 급제하여 친교가 가장 두터웠고 선생을 고병에게 추천한 사람으로서 다음과 같은 시를 주었습니다.


고운선생의 송별시 중에서 마지막 부분을 소개하면


십이승선 도해래 문장감동 중화국 (十二乘船 渡海來 文章感動 中華國)

십팔횡행 전사원 일전사파 금문책 (十八橫行 戰詞苑 一箭射破 金門策)


해석을 하면

열두 살에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와서 문장으로 중화국을 뒤흔들어 감동시켰고, 열여덟에 문단을 마음껏 휩쓸었고 단한발의 화살로써 금문책(과거)를 냅다 쏘아 맞혔다.


이 시에 대해 고운선생의 답시는

무협중봉지세 사입중화 (巫峽重峰之歲 ?入中華)

은하열숙지년 금환고국 (銀河列宿之年 錦還故國)


해석을 하면

열두 살 나이에 실이 중화국에 들어와서

스물여덟의 나이에 비단이 되어 고국으로 돌아가리.


참고

중국의 무협이라는 산이 있는데 봉우리가 6개가 있어 중(重)이니 열둘이라는 의미이며 은하에는 스물여덟의 별자리가 있습니다.


선생은 본국사신(本國使臣) 김인규와 집안의 소식을 갖고 영접 차 온 사촌동생서원과 함께 많은 사람의 전송을 받으며 회남(淮南)을 떠나 금의환향 길에 올랐습니다.

고병은 풍랑이 심할 때 뱃머리에 달면 풍랑이 두렵지 않다는 약주머니를 주면서 평온한 뱃길에 무사함을 기원했습니다. 그러나 유산(乳山)에 이르러 풍랑이 심하여 배를 멈추고 있다가 겨울철이 되어서 곡포(曲浦)에 정박하여 겨울이 지나고 봄이 올 때 까지 참산 신령(?山 神靈)에게 제를 지내기도 했습니다.


6. 환국후의 행적과 사적(還國後의 行迹과 事蹟)

* 29세 (서기885년, 헌강왕11년) 3월에 그리던 고국에 돌아왔고 헌강왕은 시독 겸 한림학사(翰林學士 ; 천자의 명령을 기안하는 일을 하던 벼슬), 수병부시랑(守兵部侍郞 ; 지금의 국방부 차관) 지서서감(知瑞書監 ; 문필기관의 부 책임자)의 요직을 주었고 선생도 즐거이 나아가 나라를 위해 경륜을 펴 보이려 했습니다.


이시기 선생의 글

원친초위어의문 모이영봉사즉수영친 (遠親稍尉於倚門 某已榮奉使則遂寧親)


해석

멀리계시는 어버이는 문에서 기다리는 걱정이 조금은 위로가 될 것이요 어떤 이는 영광스럽게 사신으로써 어버이를 뵈옵게 되었다.


이 해에 헌강왕의 명으로 대숭복사비문(大崇福寺碑文)을 찬술(책을 지음)하게 되었는데 완성은 진성여왕(眞聖女王)에 이르러서 였습니다.


* 30세(서기886년, 헌강왕12년, 정강왕1년) 정월에는 당나라에서 지었든 계원필경 집과 중산복궤집 및 시부(詩賦)3권을 합하여 헌강왕에게 올렸고 그중 계원필경만 전해 오는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서적으로 높이 평가받고 있습니다.

선생은 「왕비 김씨(金大成의 3세 손녀) 위고 수석가래상번 찬병서(爲考<곰곰히 생각 하며 만든다는 뜻> 繡釋迦如來像幡 讚?序<차례를 따라 자세히 기록 한다>)를 짓다」


* 31세(서기887년, 진성여왕1년)에 정월칠일에 「대화엄종(大華嚴宗) 불국사(佛國寺) 비로 차나(毘盧遮那 - 遮는 차 혹은 자로도 읽음) <진흥왕소주불(眞興王所鑄佛)> 문수보현상 찬병서(文殊普賢像 讚?書)」를 짓다.


같은 날 「대화엄종 불국사 아미타불상<진흥왕소주불>찬병서(大華嚴宗 佛國寺 阿彌陀 佛像<眞興王所鑄佛>讚?書)」를 짓다.


같은 해 11월에 「왕비김씨 위선고 급 망형 추복시곡원문(王妃金氏 爲 先考<먼저 돌 아가신 아버지를 위하고> 及 亡兄<그리고 먼저 사망한 형> 追福<죽은 자의 명복을 빌 기 위하여 불공을 드리는 것>施穀<배푸는 곡식 또는 재물>願文<바래는 글>)」을 짓다. 선생이 왕명에 의해 지은 비명「진감선사비(眞鑑禪師碑)」가 건립되다.


이 비는 선생이 직접 짓고 친필의 비가 쌍계사 대웅전 앞에 건립되어 있으니 배견(拜見)하기 바랍니다.


* 32세(서기888년, 진성여왕2년)에 서기887년에 헌강왕이 사망 후 아우인 정강왕이 즉위 했으나 그도 1년 만에 사망했습니다.


그 후 여동생인 진성여왕이 즉위했으나 내행(內行)이 부정하여 연소미장부(年少美丈夫)를 불러드려 음란한 짓을 하고 그들에게 국정의 요직을 맞기니 국정은 탁란(濁亂)하여 회뢰가 공행하고(賄賂<뇌물>가 公行<공공연히 이루어 짐>), 상벌 임면의 불공정(賞罰 任免의 不公正) 등 기강이 해이해지고 국정이 어지러워 졌습니다.


* 33세(서기889년, 진성여왕3년)에 중앙의 흐린 정치는 지방행정에도 크게 영향을 주어서 중앙의 위령(威令)이 땅에 떨어지고 지방에서는 동란(動亂)의 유발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선생은 기우러져 가는 국운을 회복하기위해 여러 가지 진언도 하지만 시행되지 않고 높은 학문과 포부를 가졌기 때문에 시기와 질투가 시작되어 조정의 인물까지 선생의 일거일정을 주시방해를 일삼아서 가슴에 품은 이상과 포부는 사라져가고 나라를 위해 갖고 있는 경륜도 펴보지를 못했습니다.

* 34세(서기890년, 진성여왕4년)에 선생은 시세의 불우함을 어쩔 수 없어 결연히 내직을 사양하고 지방관을 자청하여 첫 번째로 나간 곳이 태산군 <전북 태인>태수(현재의 군수)였습니다.


태수가 되어 지방백성을 다스리는 일에 힘쓰기도 했지만 선생은 쇠망해가는 국운과 함께 한탄스런 나날을 보냈습니다.


왕명으로 낭혜화상비문(朗慧和尙碑文)을 찬술하였습니다.


* 35세(서기891년, 진성여왕5년) 때는 벌써 북원 원주(北原 原州)에서 일어난 양 길(梁 吉)이 그의 부하 궁예로 하여금 북원 동부락(현재의 강원도 원성군)과 명주 관내(현재의 강릉시)를 공취(공격하여 빼앗음) 하였음.


* 36세(서기892년, 진성여왕6년, 후백제1년)에 비장(부장군) 견훤(甄萱)이 완산(전주)에서 기병(군대를 일으킴)하여 완산일대를 점거하고 무진주(지금의 광주시)를 습격하여 동남부군현(東南部郡縣)들이 투항귀속(投降歸屬) 하니 자립하여 왕이 됩니다.


* 37세(서기893년, 진성여왕7년, 견훤2년) 이해 병부시랑(兵部侍郞) 김처회(金處誨)를 당 나라에 보냈으나 항해도중 풍랑으로 익사했습니다.

이때 선생은 부성군(충남서산) 태수로 재임 중이었는데 조정(朝廷)에서 하정사(새해를 축하하는 사신)로 삼아 당나라로 파견하려 하였으나 흉년으로 인하여 중지되었습니다.


그 후 당나라에 다녀온 일 이 있다고 하나 년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리고 천령군(경남함양) 태수를 역임하신바 있으나 년대는 확실히 알 수 없어 나 부성태수로 가기 전으로 추측합니다.

헌강왕의 유명(임종할 때 하는 분부)으로 지증대사의 비문을 찬술하셨고 건립은 서기924년에 되었습니다.


* 38세(서기894년 진성여왕8년, 견훤3년)에 선생은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이 더욱 간절해 2월에 정치의 급선무십여조(急先務十餘條 = 시무십여조<時務十餘條>)를 상소(上疏)하시고 왕은 기꺼이 받아드리고 신라의 직위 중 제6위인 아찬(阿?)벼슬을 내려주니 이것은 진골(眞骨) 이외의 사람이 받을 수 있는 최고의 벼슬입니다.


그러나 시무책은 실행을 보지 못했습니다. 선생의 탁월한 정치적 식견을 알 수 있는 귀중한 글은 지금은 전해지지 않고 있습니다.

옮겨온글

출처 : 江 友 會
글쓴이 : 부르버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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