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역사에서 오직 신라에만 여왕이 있었고,신라에는 3명의 여왕이 있었다.
이 3명의 여왕에 대해서 흥미를 가진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그 여왕에 대해 알려진 기록은 많지 않다. 선덕여왕은 최초의 여왕으로, 또
"지기삼사"라 하여 영특한 왕으로 기록이 상대적으로 많은 편이고 말기의 진성여왕은 나라를 망하게 한 여왕으로 부정적으로 알려진 것이 또한 많다.
그러나 선덕의 뒤를 이은 진덕여왕은 알려진것이 거의 없는 편이다. 그녀가 김춘추에 비해 어떤 면에서 성골로 인정받을수 있었는지, 얼마의 나이에 등극했는지 혼인은 했는지, 자식은 왜 없는지 알길이 없다. 삼국사기 *진평왕의 아우 국반(國飯)갈문왕의 딸이다. 어머니는 박씨 월명(月明)부인이다. 타고난 자질이 풍만하고 고우며 키가 7척이고 손을 내리면 무릎아래까지 내려갔다. 삼국유사 왕력 *아버지는 진평왕의 아우 국기안(國其安)갈문왕이다. 어머니는 아니(阿尼)부인 박씨로 노추(奴追)ㅇㅇㅇ갈문왕의 딸이다. 혹 월명부인이라고도 하나 잘못이다. 신상정보는 이게 전부다. 삼국유사 왕력에서 아버지를 국기안이라 했지만 국반의 오기로 생각하면 될 것이고 어머니가 월명부인이 아니라고 한것도 "아니"를 월명의 아명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러므로 진덕여왕은 진평왕의 아우 국반갈문왕의 딸임은 틀림없다 하겠다. 삼국사기에는 진평왕이 즉위와 동시에 아우들을 갈문왕에 봉했다는 기사가 있다. 진평왕이 어린 나이에 등극했다지만 그 아우들도 갈문왕이란 지위를 부여하는 것으로 보아 아주 어린애는 아니었을 것이다. 진평왕의 재위기간 54년, 선덕여왕 재위기간 16년을 더하면 70년의 세월이 흘렀고 진평왕의 아우들은 진평왕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던건 분명해 보인다. 여기서 진덕여왕의 즉위시 나이를 추산할 수 있다. 아마 40이 넘지 않았을까? 그 나이까지 혼인하지 않았다고 볼 수는 없다. 그러므로 혼인을 했으나 자식을 보지 못한 중년의 여인 진덕을 추정하게 된다. 앞서 진덕여왕의 이름을 거론하지 않았는데 승만(勝曼)이다. 그런데 이름의 음이 같은 또 한 사람의 승만부인을 우리는 보게 된다. 승만(僧滿)으로 글자는 다르지만 음이 같은 이 사람은 삼국유사 왕력에 진평왕의 계비(繼妃)로 등장한다. 결론부터 말해서 두 사람을 동일인이라 하면 대부분 펄쩍 뛸 것이다. 하지만 생각을 좀 더 해 보자. |
삼국사기에는 진평왕이 계비를 맞았다는 내용이 없다. 오직 삼국유사 왕력에서만 진평왕의 계비가
승만부인이고 성이 손(孫)씨라는 기록이 있다. 없는 계비를 만들어 넣었다고 보기는 여러 정황상 힘들다.
진평왕의 재위기간이 길었고 아들이 없었기에 마야왕비가 먼저 사망했다면 계비가 있었음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삼국사기는 어떤 이유에서 계비에 관한 기록을 배제했을 수 있다. 진평왕이 계비를 맞았다고 가정한다면 어떤 여인을 왕비로 맞았을까? 당시 왕실의 혼인 패턴을 알아볼 필요가 있다. 여기서 다시 성골을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성골남자가 없어 여자가 왕이 되었다는데 왕실은 성골을 낳기 위해 노력했을 것이다. 그럴려면 성골여인을 맞아야 한다. 진평왕의 사촌동생 용춘이 성골이 아니고 그 아들이며 진평왕의 외손자인 김춘추도 성골이 아니라는데(성골의 기준이 정립되지 않았지만) 하여튼 성골은 부모 양쪽이 왕과 최근친이어야함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러므로 진평왕의 계비가 손씨라는건 너무도 생뚱맞은 내용이다. 이 시기는 물론이고 그 뒤에도 손씨가 신라왕실에 들어왔다는 근거는 전혀 없다.(내가 추정하기로는 손이라는 성은 당시에 생기지도 않았다) 그러므로 "孫"이라는 성은 후대 어떤 이유에서 추가한 내용이란 것이다. 만일 진평왕의 아우인 국반의 딸이라면 어떠한가? 이미 성골이라 하지 않았는가! 진평왕의 계비로는 그 조카가 적격이란 것이다. 그것은 신라왕실의 혼인관습에서 익히 보아오던 바이다. 진평왕이 언제 계비를 맞았는지 알 수 없으나 재위 후반기라면 조카의 나이로도 적절한 편이다. 그러므로 진덕여왕 승만과 진평왕의 계비 승만부인은 같은 시대 비슷한 나이의 인물로 추정이 된다. 신라에 동명이인을 더러 보지만 같은 시대 비슷한 신분의 동명이인(발음상)은 찾아 볼 수 없다. 당시에 이름의 한문표기보다 그 발음이 더 중시되었음은 익히 아는 바이다. 창녕척경비에 심맥부지라는 진흥왕과 같은 이름을 볼 수 있지만 두 사람을 혼동할 일은 없었다. 그러므로 진평왕의 계비 승만을 僧滿으로 적은 것은 한 인물을 다른 사람으로 보이게끔 고의로 그렇게 표현한게 아닐까 추정하는 것이다. 과연 진평왕의 왕비신분이었던 여인이 왕위에 오를 수 있었을까? 안된다고 생각하는건 우리의 고정관념이 아닐까. 여자가 왕이 되는 마당에 과거 누구의 왕비였다는 신분이 문제되지 않을 수 있다. 왕위에 오를 자가 실세 권력자라면 더 말할 나위가 없다.대표적인 예로 당의 측천무후가 있다. 황제를 자처했다. 진덕여왕을 대체로 김춘추와 김유신이 권력을 잡은 뒤 허수아비로 내세운 여왕으로 보는 시각이 강하다. 하지만 어찌 아는가? 그 반대일 수 있다고 본다. 진평왕의 계비라면 그렇지 않을 것이다. 조선시대 권력을 휘두른 과부 왕비들을 떠올려 보자. 선덕여왕의 즉위에도 그녀의 영향력이 작용했을 수 있다. 왕실의 숨은 권력자로 행세했을 가능성이 높다. 선덕여왕은 비담의 반란와중에 사망했다. 반란군에 시해당했다는 주장도 있다. 그 반란과 계승, 권력투쟁과정에 승만부인이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김춘추와 김유신을 이용하여 반란세력을 진압하고 권력을 쟁취하였을 수도 있다고 본다. 진덕여왕은 신라사의 큰 분기점이 되었다. 그녀의 신상에 대해서는 알려진게 별로 없었고 7년이란 짧은 재위기간을 두고 사라졌다. 신라왕실에서 숨기고 싶었던 많은 얘기가 기록에서 감춰졌고 그래서 신라사는 의문투성이로 남아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
출처 : 서석
글쓴이 : 김동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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