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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신촌 이대 뒤편의 봉원사(奉元寺)

오늘행복스마일 2018. 12. 27. 15:38

신촌 이대 뒤편의 금화산 봉원사(奉元寺)

 

삼천불전의 비로나자불과 작은 삼천 부처상 

 

서울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볼수 있는 유서깊은 고찰로서는 삼성동의 봉은사도 있지만 서대문구 봉원동 이대 뒤편의 봉원사도 있다. 서울 주변에는 안국동의 조계사, 삼청동의 칠보사, 보문동의 보문사, 안암동의 개운사, 홍은동의 백련사 등 약 60여 개의 사찰이 있다. 규모면에서 봉은사와 봉원사가 그중 웅장하다. 그러므로 한국의 불교사찰을 보고 싶어 하는 외국인이 있어서 안내해서 간다면 역시 봉은사와 봉원사 둘 중에 한곳을 정해서 찾아가면 관찮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안국동의 조계사는 조계종 본부라는 의미는 있지만 사찰로서는 규모가 내세울만하지 못하다는 의견들이다. 봉원사를 찾아가려면 지하철 2호선 신촌역에서 내려 지선버스 7024번을 타면 바로 절 앞까지 올라간다. 처음부터 봉원사 뒤편의 안산도시자연공원에 등산 목적으로 왔다면 신촌역에서 내려 땀좀 흘리면서 한참 걸어가야 한다.

 

삼천불전과 석가모니 부처님의 진신사리 1과를 모렸다는 삼층석탑. 삼천불전의 단청이 참으로 화사하다.

 

대체로 우리나라의 유명 사찰들은 절에 올라가는 길목에 온갖 식당과 노래방과 단란주점까지 줄지어 있어서 점심을 준비해 오지 않더라도 공연히 식사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지만 외국 손님들과 함께 우리의 불교문화를 보여주기 위해 천년고찰에 간다면 이런 유흥업소들로 인하여 오히려 민망할 지경이 되기가 일수이다. 그런데 봉원사나 봉은사에는 그런 기미가 없다. 빌딩 숲으로 둘러싸인 삼성동의 봉은사 앞에 빈대떡과 도토리묵을 만들어 파는 민속식당들이 줄지어 들어설 수는 없는 일이겠고 이화여대와 연세대 가장자리에 있는 봉원사의 경우에도 식당이나 노래방이 들어설 여유가 없다. 봉원사의 앞은 모두 주택가이다. 무슨 불가마인지 하는 커다란 건물이 하나 있을 뿐이다. 봉원사 앞에 있는 집들은 개인 집도 있겠지만 가만히 보면 봉원사와 관련한 분들이 살고 있는 집들이 더러 보였다. 그래서 가깝기는 하지만 봉원사에 출퇴근하는 것 같다. 태고종의 승려들은 결혼을 하여 가정을 가질수 있기 때문에 집들이 필요한 모양이다.

 

대방(구 염불당)에 모신 각종 인물들. 천정의 단청과 닫집이 화려하다.

 

봉원사와 봉은사가 이름이 비슷하다고 하여 무슨 연관이 있지 않느냐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없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봉은사는 조계종이지만 봉원사는 태고종이란 것이다. 조계종과 태고종이 어떻게 다르냐고 어떤 불자에게 물었더니 잘 모른다고 하여서 또 어떤 스님에게 물었더니 ‘아, 태고종은 중이 결혼해서 가정을 가질수가 있지만 조계종은 그런게 없어요.’라고 잘라 말하였다. 그것뿐이 아니라고 생각하여 자료를 찾아보았더니 태고종은 사찰의 개인소유를 인정하고 승려의 결혼문제를 자율에 맡기며 출가를 하지 않더라고 사찰을 운영할수 있다고 되어 있었다. 바쁜 시간에 조계종과 태고종의 차이점에 대하여 설명할 하등의 이유가 없으므로 이만 그치기로 하고 본론으로 들어가 봉원사를 잠시나마 답사해 보도록 한다. 사실 서울에 살면서도 서울 서쪽 구석에 자리잡고 있다는 이유로 거의 한번도 찾아가 보지 않았다는 것은 봉원사에 계신 분들에게 미안한 노릇이라고 생각한다. '거의'라는 말을 사용한 것은 언젠가 수십년전에 한번 갔었던 기억이 나기 때문이다. 친구 아버지의 환갑잔치에 갔던 일이 있는데 그게 봉원사 구내에서 열렸던 잔치인지 그렇지 않으면 외부의 건물에서 열렸던 것인지 생각이 나지 않는다. 그동안 봉원사를 찾아가 보지 못했던 것은 아무래도 교통편이 서먹해서일 것이다. 하지만 한번 봉원사를 찾아가서 그 분위기에 젖고 나면 다시 찾아가게 된다는 것이 주위 사람들의 한결같은 주장이므로 나로서도 불원간 다시 방문할 확율이 높다. 더구나 절 뒤로 등산로가 개발되어 있어서 일부러라도 찾아오는 사람들이 많다는데 오로지 불교예술을 감상하기 위해서라면 약간의 교통상 불편일지언정 감수해야 할것이다.

 

 

대웅전과 앞마당의 연꽃 단지. 특이하게 대웅전을 해태가 지키고 있다.

 

각설하고, 봉원사에는 세간의 관심을 끌만한 것이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중에서도 두가지만 내세우고자 한다. 첫째는 우리 한글의 연구와 교육을 목적으로 한글학회(전 국어연구학회)가 창립된 곳이 바로 봉원사라는 것이며 둘째는 대웅전 앞마당 한쪽에 있는 대방(大房)이라는 건물이 다름 아니라 바로 아소정(我笑亭)이란 이름을 가진 마포 염리동에 있던 대원군의 별장 건물을 옮겨 온 것이라는 것이다. 이만하면 봉원사가 다른 절보다 역사적으로 흥미가 있는 장소라는데에 의견의 일치를 보아야 할것이다. 이밖에도 관심을 기울일만한 곳이 여러 군데 있다. 대방에 있는 奉元寺라는 현판은 영조(英祖)의 친필이라고 하며 그 안에 걸려 있는 편액들의 글씨는 추사 김정희의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영조의 친필 현판은 북한 공산당의 남침으로 빚어진 6.25 동란때에 소실되었다는 말이 있다. 아무튼 서예전시회에 따로 갈것 없이 여기와서 현판들만 감상해도 좋을 것이다.

 

봉원사 경내 

 

삼천불전에는 국내 최대의 삼천불이 모셔 있으며 그 앞에 있는 삼층석탑에는 석가모니 부처님의 진신사리 1과를 모셨다고 한다. 그보다도 봉원사는 귀중한 불교문화 의식인 영산재(靈山齎)를 보존하고 있는 곳이라는 자부심을 지닌 사찰이다. 영산재는 부처님이 인도 영취산에 모인 중생들에게 법화경을 설법하시는 모습을 재현한 불교의식으로 그 화려하고 장엄함이 과연 불교 예술의 진수처럼 보이는 것이다. 그리고 단청! 단청이라고 하면 봉원사를 빼놓을 수 없을 정도로 전통이 있다. 또 한가지 자랑할 것이 있다. 봉원사는 한국불교태고종의 총본산이라는 것이다. 일반 방문객으로서는 조계종이면 어떻고 태고종이면 어떠냐는 생각이지만 기왕이면 총본산의 타이틀이 있는 절이면 공연히 기분이 높아질수 있다. 봉원사에는 명부전, 칠성각, 미륵전, 극락전, 전씨영각, 수운각, 영안각 등 여러 전각이 있는데 그중에서 지장보살을 주불로 모신 명부전(冥府殿)의 현판은 조선 태조때 숭유억불 정책을 내걸었던 정도전의 글씨라고 하니 이건 또 무슨 조화인지 모르겠다. 이제 조금 더 살펴보도록 하자. 불교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각 전각에 모신 부처님들을 구별하며 나름대로 공부를 할수 있을 것이다.

  

삼천불전에서 열린 봉원사 영산재(Credit)

 

우선 한글학회에 대한 이야기부터 시작하자. 봉원사 경내를 두루 살피다 보면 대웅전 뒤편에 웬 양옥이 한 채 있다. 천년고찰에 양옥이 웬 말이냐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아무튼 이 건물이 한글학회의 전신인 국어연구학회가 처음 시작된 곳이다. 그간의 사연을 보면, 일찍이 1908년 8월 31일 한힘샘이라는 아호를 가지신 주시경 선생의 가르침을 받은 하기국어강습소 졸업생과 몇몇 뜻있는 인사들이 모여 우리말과 우리글의 연구와 교육을 목적으로 국어연구학회를 만들었다. 우리 얼, 말, 글을 지키고 널리 펴려는 선각자들은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우리나라 최초의 연구 모임인 국어연구학회를 조직하여 개화의 요람기에 봉원사에서 창립총회를 가졌다. 그후 이 학회는 조선어연구회(1921)-조선어학회(1931)로 이름이 바꾸다가 오늘날 한글학회(1949)의 전신이 되었다. 그리하여 2008년 8월 31일 학회창립 100돌을 맞아 봉원사에 표지석을 세워 한글학회가 처음 시작한 곳임을 기리게 되었으니 그 뜻이 거룩하다. 예전에 주시경 선생이 주관하여 국어연구학회의 창립총회를 가졌던 건물은 지금 다른 목적으로 사용하고 있어서 안을 들여다보면 수많은 등잔과 함께 늠름한 모습의 부처님이 서 있다 .

 

 한글학회가 태동했던 장소와 기념 표지석

한글학회가 창립되었던 건물 내부의 현재 모습

 

다음은 대방이다. 대방에는 봉원사라는 한문 현판이 걸려 있다. 대개 절의 이름을 써넣은 큰 현판은 절의 입구, 주로 일주문 등에 걸어 놓는데 봉원사에는 일주문 같은 것이 없다. 그래서인지 조금 이상하긴 하지만 대웅전 앞마당에 자리 잡고 있는 대방이란 건물에 봉원사라는 현판을 걸어 놓았다. 권좌에서 물러난 대원군은 마침내 세상 모든 일이 덧없음을 깨닫게 되었다. 대원군은 자신의 일생이 한낱 뜬구름과 같았음을 되돌아보고 공연히 아웅다웅했던 지난날을 스스로 조소한다는 뜻에서 별장의 큰 건물에 아소정(我笑亭)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나는 웃노라’라는 뜻이리라. 아소정은 마포 염리동에 있었다. 사변후 아소정의 옆에 있던 동도중고등학교를 증축하면서 아소정의 운명은 부평초 신세가 되었다. 결국 금화산의 봉원사 마당으로 옮겨지게 되었다. 원래 아소정은 99칸의 대궐 같은 집이었으나 봉원사로 시집오면서 약간 축소가 되었다. 그런 사연이 있는 건물이 봉원사 앞마당의 한쪽에 자리 잡고 있으니 감회가 깊다고 하지 않을수 없다. 아소정을 옮겨 놓은 장소에는 원래 염불당이라는 전각이 있었으나 비교적 최근인 1966년 소실되어 중건의 목적으로 아소정을 옮겨 놓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보아하니 아소정, 즉 대방이 자꾸 쇠퇴하여 가고 있는 느낌이다. 단청은 모두 허옇게 벗겨저서 흉물스럽기까지 하다. 마침 예수재(豫修齋)도 올리고 있으니 기금을 마련하여 옛 아소정을 말끔하게 복원한다면 한이 없겠다.

 

영조의 친필이라는 봉원사 현판. 그 안에 있는 다른 현판들은 추사의 글씨라고 한다. 그나저나 집이 너무 낡아있다. 목재가 썩는것 같다. 칠이 모두 벗겨졌다. 국민들이 존경하는 김동길 교수님의 말씀: 이게 뭡니까?

 

기왕에 예수재라는 말이 나온김에 한마디 덧붙인다면, 어떤 사람들은 절의 현수막에 생전예수재라고 크게 적어 놓은 것을 얼핏 보고 '아니, 절에서 무슨 예수에게 재를 올린단 말인가? 나원참! 요즘 절은 기독교와 서로 합작하는 모양이지?'라고 말했다고 하지만 기독교의 예수(Jesus)와 불교에서 말하는 예수(豫修)와는 뜻이 달라도 한참 다르다. 예수재란 간단히 말해서 자기의 사구재를 살아 있을 때에 미리 지낸다는 것이다. 죽은 후에 좋은 곳으로 가게 해 달라고 사전에 부처님에게 올리는 재이다. 그래서 생전예수재라고 한다. 예수는 미리 닦는다는 뜻이다. 불가에서는 주로 윤달에 재를 올린다. 요즘 각 사찰에서 생전예수재를 올리느라고 스님들이 바쁘다. 기독교에서는 예수님에게 죽어서 좋은 곳으로 보내 달라고 미리 헌금하는 경우는 없다. 안그래도 요단강을 건너서 좋은 천국으로 가게 되기 때문인듯 싶다.

 

대웅전의 삼존불과 화려한 닫집, 그리고 아름다운 천정의 단청

그러나 극락전은 어찌하여 이다지도 쇠락해 졌는지?

 

봉원사에는 여러 전각이 있는데 그중에서 대웅전과 삼천불전의 위용이 가장 우세하다. 그리고 이 두 건물만이 단청을 화려하게 입혀 놓았다. 다른 사찰이나 궁궐의 단청과는 달리 이곳저곳에 금칠을 해서 번쩍번쩍하는 것이 무척 호사스럽다. 삼천불전(三千佛殿)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는 곳의 용두(龍頭)의 장식 또한 그럴듯하여 보기에 좋다. 삼천불전의 안에는 비로나자불과 작은 부처님 모습이 3천개 이상이나 진열되어 있다. 대단하다. 아마 이런 불전은 봉원사 이외에는 다른 곳에 없을 것이다. 삼천불전을 바라보면서 또 하나 관심을 가지게 하는 것은 창살 무늬이다. 아름다운 꽃 장식을 연이어 해놓은 것으로 참으로 멋있다. 대저 사찰의 대웅전에는 전각의 벽면에 부처님의 일생을 설명한 벽화가 그려져 있기 마련이다. 봉원사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런데 벽화에 등장하는 사람들의 복장과 헤어스타일 등이 중국 스타일이어서 신통하게 생각되었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인도의 북부(현재의 네팔 남부)에서 태어나시었는데 모든 장면을 중국 스타일로 그려 놓았으니 영문을 모르겠다. 도교사상이 혼합되어서였을까?

 

대웅전의 벽화. 인물들이 중국여자들 같다. 빵떡 헤어스타일에 중국 드레스이다.

 

기왕에 봉원사의 역사에 대하여 일고하지 않을수 없다. 원래 봉원사의 전신은 현재 연세대 자리에 서기 889년 신라 제51대 진성여왕 시절에 지었다는 반야사(般若寺)였다고 한다. 그것을 1748년 조선조 영조 때에 현재의 위치로 이전하며 증축하였다는 것이다. 영조는 봉원사라고 적은 친필 현판을 내려 주었다. 신도들은 이때부터 봉원사를 새로 지은 절이라고 하여 ‘새절’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봉원사는 갑신정변의 요람이라는 주장도 있다. 갑신정변의 주도했던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등 개화파 인사들이 정신적 지도자였던 이동인(李東仁)스님이 봉원사에서 계시면서 이들을 코치하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봉원사 입구의 부도탑들

 

봉원사는 바로 앞에 주택들이 널려 있지만 의외로 조용하여 풍경소리마저 정겹게 들리는 곳이다. 봉원사로 올라가는 길옆에는 고승들의 부도가 늘어서 있다. 어떤 부도의 조각은 대단히 정교하여 그것만 구경해도 봉원사까지 올라온 보람이 있다고 하겠다. 봉원사의 또하나 자랑은 기묘한 모양의 보호수와 연꽃 단지이다. 연꽃은 연못에서 피지만 봉원사에는 대웅전 앞에 연못이 있을수가 없으므로 커다란 함지박(?)을 수없이 가져다 놓고 그 안에서 연을 키우고 있다. 비록 플라스틱 그릇에 담겨 있는 연이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하나의 커다란 연꽃 밭과 같아서 거룩하다. 또 하나 명물은 감로수이다. 시원한 물이 철철 흘러나와 땀을 식히는데 제격이다. 감로수는 부처님 앞에도 받친다고 한다. 그리고 16나한상! 괴상하게 생긴 노인들 조각이 대웅전 올라가는 아래쪽 계단 양 옆에 늘어서 있다. 존자(尊者)들로서 부처님의 신통하신 법력을 수호하고 있다고나 할까? 그나저나 존자분들이 모두 노인네들인데 아주 억세게 생겼을 뿐만 아니라 괴상하게도 생겨서 눈길을 끌고 있다.

 

 

 범종각. 삼천불전등의 위세 때문에 한쪽에서 구박받고 있는 듯한 모습이다.

수많은 등잔들. 각자의 혼백을 위로하기 위한 등불. 

 나한 존자상

대웅전의 단청과 용두 장식 

 훌륭한 고목. 보호수인것 같다.

삼천불전의 화려한 단청과 용두 장식과 창살 무늬 

 

삼천불전의 조각들도 정교하다. 

 삼천불전의 창살 무늬

대원군의 아소정을 옮겨 놓은 대방. 귀중한 문화유산이다.

 아름다운 조각이다.

 

영안각. 역시 너무 훼손되어 있다. 아름다운 전각인데...아무튼 봉원사는 할일이 많다.

봉원사의 명물 감로수 약수. 연꽃 3단계를 거쳐 약수가 떨어지도록 설계되어 있다. 약수터의 황룡이 찾는이를 반겨준다.

출처 : 정준극
글쓴이 : 정준극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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