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흐는다

[스크랩] 동대문구 영휘원과 숭인원

오늘행복스마일 2019. 1. 2. 09:52

 

동대문구 청량리동에 소재하는 능으로 

지정면적의 규모는 55,015㎡이다.

1991년 10월 25일 사적 제361호로 지정되었다.

 

 

영휘원(永徽園)은 대한제국 고종(高宗)의 후궁(後宮)인

순헌황귀비(純獻皇貴妃) 엄씨의 무덤이다.

영휘원 경내에 있는 숭인원(崇仁園)은

의민 황태자의 아들 원손 이진의 무덤이다.

 

 

 

 

능의 입구에 조선시대 왕계도가 적혀있다.

 

 

들어가면 진달래가 화사하게 반긴다.

 

 

 

 

 

 

 

 

엄귀비는 1854년 11월 태어나 증찬정(贈贊政) 엄진삼(嚴鎭三)의

 장녀로 태어나 8세에 경복궁에 들어가 명성황후 민씨의 시위상궁(侍衛尙宮)이 되었다가,

 을미사변으로 명성황후가 시해된 후 아관파천 때 고종을 모시며

후궁이 되어 1897년 영친왕 이은을 출산하였다.

 

 

귀인(貴人)에 봉해졌고, 1901년 비에 진봉되고, 1903년에는 황비(黃妃)에 책봉되었다.

1911년 7월 20일 별세하여, 순헌(純獻)이라 시호를 올리고,

8월에 양주 천수산(天秀山)에 무덤을 만들고 원호는 영휘라 하였다.

위패는 서울특별시 종로구 궁정동에 있는 칠궁에 봉안되어 있고 시신은 이 곳에 묻혔다.

 

 

정자각(丁字閣)

정자(丁字)형의 맞배집으로 제관들이 산릉제례를 지내는 것으로

 젯상, 향상, 축상, 촛대상, 신어상, 준소상을 비치함.

궁궐의 연침(蓮寢)을 모방하여 침전(寢殿), 능전(陵展), 능침(陵寢)이라고도 한다.

 

 

 

 

정자각 뒤에서 바라본 모습

 

 

비각(碑閣)

신도비(神道碑) 또는 비갈(碑碣)을 보호하는 집으로

정자각 왼쪽에 있으며 왕과 왕비의 일대기가 써있다.

 

 

 

 

묘의 시설로는 봉분 . 곡장(曲墻) . 혼유석(魂遊石) . 문인석(文人石) . 망주석(望柱石)

장명등(長明燈) . 석양(石羊) . 석호(石虎) 등이 있고 사초지(莎草地)도 조성되어 있다.

 

 

 

 

 

 

 

 

영휘원에서도 세종대왕 신도비가 보인다.

 

 

세종대왕 기념관에서 바라본 영휘원순헌황귀비(純獻皇貴妃)의 묘소이다

 

 

높은 곳에 묘가 자리하고 있어서 잘 보이지 않고

 올라갈 수 없게 막아 놓아서 멀리서만 볼 수 있다.

 

 

 

 

영휘원 신 문(神門)

영혼이 출입하는 문으로 홍문, 또는 홍살문이라고도 한다.

 

 

 

 

왼편으로는 영휘원과 숭인원을 관리하는  재실이 있다.

 

 

재실 앞에도 문이 하나 더 있다.

 

 

 

 

 

 

 

 

 

 

 

 

 

 

 

 

숭인원 전경

 

 

숭인원(崇仁圓, 사적 제361호)

 

 

숭인원 홍살문

 

 

숭인원 정자각

 

 

정자각 뒤에서 홍살문을 바라보면서

 

 

숭인원 비각

 

 

대한제국의 황족으로 일제강점기 이왕가의 원손이자

영친왕 이은의 맏아들이며 이구 공의 형인  이진(李晉)의 묘소이다.

 

 

이진은 대한제국의 원손으로 본관은 전주이다.

아버지는 의민 황태자 이은이며 어머니는 의민 황태자비 이씨이다.

1921일 8월 18일 일본에서 태어났으며 조선을 방문했다가 귀국을 하루 앞두고

태어난지 1922년 5월 11일 8개월 만에 덕수궁 석조전에서 의문사 하였다.

 

 

갑작스러운 죽음과 석연치 않은 경과(죽기 전 초콜렛 색의 덩어리를 계속 토해냈었다 한다)

 때문에 독살설이 강하게 제기되었으며,  일제가 조선황실의 대를 끊기위해 

저지른 것이라는 설도 있고 조선황실에서 이방자 여사의 일본 피가 섞인

 황손을 인정할 수 없어 벌인 것이라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숭인원은 식민지하 망국의 비극적인 역사가 서려있는 곳이다.

 

 

순종황제의 명으로 원손의 예로 묘(墓)는 원(園)으로 조성하여 예장하고

 할머니인 순헌황귀비 엄비의 묘소 건너편에 안장하였다.

 

 

 

 

 

 

 

 

 

 

 

 

 

 

수령 150년 정도 된 산사나무(2009.10.15, 천연기념물 제506호)

산사나무는 장미목 장미과의 낙엽활엽 소교목이며 5월에 흰색으로 꽃이 피고

9 ~ 10월에 붉은색의 둥근열매가 익는 것이 특징이다.

열매는 산사자라 하여 해열제로 쓰인 기록이 조선왕조실록에 있으며 산사주를 담가

 약술로 먹기도 한 전통나무이나 이 나무만큼 크게 남아있는 것이 거의 없을 정도가 되었다.

영휘원 산사나무는 높이 9m, 가슴높이둘레 약 2m에 이르며 크기가 크고

줄기의 골 모습도 특징적이고 수형이 또한 아름다워 전국의 산사나무를 대표한다.

찍고보니 옆지기가 가장 좋아하는 나무라고 한다

나는 이렇게 오래된 산사나무는 처음 보았다.

 

 

숭인원 앞에 핀 할미꽃 잘 보호해야 할텐데 !!

요즘은 할미꽃도 눈에 띄지 않아서  보기 힘든 귀한 꽃이 되었다.

 

 

 

 

 

 

홍릉길은 청량리동 207번지 일대에 있는 홍릉 (사적 제207호)에서 도로명이 유래한다.

원래 이 곳은 황실의 가족묘지로 정한 곳인데,  명성황후의 능인 홍릉이 있어

이 일대를 홍릉(洪陵)이라 일컬었으나, 홍릉 자체는 1919년 3월 고종이 승하하자

경기도 남양주시 미금시 금곡동(金谷洞)에 고종과 함께 합장하기

위해 옮겨지고 현재는 빈 무덤터로 남아있다.

 

 

홍릉터 남쪽에는 고종의 계비 엄비의 묘소가 있는

영휘원과 영친왕의 맏아들 이진의 묘소인 숭인원이 있고

홍릉 터 북쪽으로는 1970년 11월 준공된 세종대왕 기념관이 있으며

홍릉 터 나머지에는 1960년대부터 과학연구기관이 들어섰는데 한국유일의

 식물표본지구인 임업연구원을 비롯하여 한국과학기술연구소, 한국과학기술정보센터,

한국개발연구원, 한국국방연구원 등이 있다.

 

 

출처 : A Bird Of Paradise
글쓴이 : 극락조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