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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답사]영휘원(永徽園) & 숭인원(崇仁園) 탐방-(1/2)

오늘행복스마일 2019. 1. 2. 09:49









 

[답사]영휘원(永徽園) & 숭인원(崇仁園) 탐방-(1/2)

(2011/03/26 현재)


(사)서울문화사학회의 제243회 답사지로 서울 동대문구지역 유적지중
청량리동에 있는 조선 26대 고종(재위 1863∼1907)의 후궁인 순헌귀비 엄씨(1854∼1911)의
묘소인 영휘원(永徽園)과 순헌귀비 엄씨가 낳은 영친왕의 아들 이진(李晋, 1921∼1923)의
묘소인 숭인원(崇仁園) 탐방 전경 입니다 


 

 

 

 

 

 

 

 

 

 

 

 

 

 

 

 

 

 

 

 

 

 

 

 

 

 

 

 

 

 

 

 

 

 

 

 

 

 

 

 

◈  영휘원(숭인원포함)(永徽園(崇仁園包含))

 

-종    목 사적  제361호 
-지 정 일 1991.10.25
-소 재 지 서울 동대문구  청량리동 204-2외 


영휘원은 조선 26대 고종(재위 1863∼1907)의 후궁인 순헌귀비 엄씨(1854∼1911)의 무덤으로 위패는 조선 역대 왕이나 왕으로 추존된 이의 생모인 7명의 후궁을 모신 칠궁(七宮)에 모셨다. 엄귀비는 신교육에 관심이 많아 양정의숙· 진명여학교를 설립했고, 숙명여학교 설립시 많은 돈을 기부하는 등 근대 사립학교 발전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영휘원 안에는 영친왕의 아들 이진(李晋, 1921∼1923)의 무덤인 숭인원이 있다. 원래 이곳은 명성왕후를 모셨던 홍릉이 있었으나, 1919년 경기도 남양주시(당시 미금시) 금곡동 고종황제의 릉과 합장하기 위해 옮겼다. 영휘원과 숭인원 주변에는 많은 석물과 정자각· 비각 등이 있다.

 

추가로 설명 드리면 영휘원은 조선 제 26대 고종황제의 후궁인 순헌귀비 엄씨의 무덤이고, 숭인원은 한말의 마지막 황태자 영왕(영친왕이라고도 함)의 큰아들 이진의 무덤입니다. 순헌귀비 엄씨라고 하면 대부분 낯설어 하다가도 "혹 드라마 사극에서 엄상궁이란 호칭 들어보셨지요? 바로 그분의 묘입니다." 라고 말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아주 익숙해합니다. 또한 이진의 묘라고 하면 낯설어 하다가도 "이방자여사가 낳은 아기"라고 하면..아! 하는 탄성과 함께 다 알고 있다는 듯 반응을 보이곤 합니다.

 

순헌귀비 엄씨는 평민출신인 영월 엄(嚴)씨 엄진삼(嚴鎭三)의 딸로서 5세 때 아기나인(內人)으로 대궐에 들어왔다. 후에 왕후인 민비의 총애를 받아 민비의 시위상궁으로 발탁되었는데 시위상궁이라 함은 사가로 말하면 몸종이나 다름없었다. 그런 처지에 어느 날 갑자기 그녀가 고종임금과 동침을 했다. 그녀는 인물이 빼어난 미모의 소유자도 아니었고 또한 임금과 동침을 해서 승은을 입었을 때는 당시 국민평균 수명이 50세 정도였던 시절 그녀의 나이는 32세였다.


그런 궁녀가 어느 날 아침 갑자기 임금님의 침소에서 치마를 뒤집어 입고 나왔으니 대궐 안 사람들이 깜짝 놀랄 수밖에.(그 당시 궁녀가 임금님의 승은을 입게 되면, 다시 말해 임금님과 동침을 하게 되면 그 사실을 대궐 안에 널리 알리기 위해 치마를 뒤집어 입고 나오는 것이 관례였다.)


▶ 민비의 분노와 대궐밖으로 쫓겨난 엄상궁

 

"어떻게 이런 일이!" "상감마마께서 귀신한테 홀리셨나? 저렇게 늙고 못생긴 여자를 왜 건드렸지?""혹시 거짓부렁으로 저러는 게 아닐까?" 그러나 어김없는 사실이었다. 왕후 민비도 처음엔 엄상궁이 워낙 자신과 가까워서 믿어왔던 사이였고 또한 엄상궁이 늙고 못생겨서 임금님께서 탐을 낼 까닭이 전혀 없다고 믿었기에 자기 가까이에 둔 것인데 상상해본 일조차 없었던 배신행위가 일어난 것이었다.

민비가 얼마나 분노했던지 직접 매를 치려고 형틀을 차리라고 명령했다. "네 이년. 네가 어찌 나에게 이럴 수가 있느냐?" 차라리 자기보다 어리고 예쁜 여자였더라면 그녀의 분노가 덜했을지도 모른다. 늙고 못생긴 엄상궁을 임금님께서 건드렸다는 것은 민비로서는 배신감은 물론이려니와 자존심마저 크게 상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왕후 민비의 분노는 고종임금의 철저한 사과와 통사정으로 거두어 드릴 수밖에 없었다. "제발 그녀에게 형벌을 가하지 마시오. 짐이 다시는 엄상궁을 가까이하지 않으리다."하며 사정을 하고 다짐을 했다." 그러하시다면 엄상궁 저 개보다 못한 것을 대궐 밖으로 즉시 내쳐 주시오." 민비의 강력한 주장에 의해 엄상궁은 그 길로 대궐에서 쫓겨났다.

 

하지만 10년 후, 일본 낭인들에 의해 민비가 살해된 후 5일만에 엄상궁은 대궐에 다시 들어와 고종의 수발을 들게 되었다. 일본인 폭도들이 대궐에 침입하여 한 나라의 국모인 왕비를 살해하고 온갖 만행을 저지르자 민심이 흉흉해지고 대궐 안에는 공포 분위기가 짙게 깔렸다. 잘못 하다가는 고종임금마저도 저들에 의해 살해될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었다. 엄상궁은 이때 기지를 발휘하여 당시 일본보다는 힘센 나라로 여겨졌던 러시아 공사관으로 고종임금을 빼돌렸다. 후에 '아관파천'이라는 사건으로 역사에 기록된 이 사건은 엄상궁이 자신이 타고 다니던 가마 속에 고종을 태우고 정동에 위치한 러시아공사관으로 갔던 사건이다. 국왕이 옮겨갔다는 것은 정부가 옮겨갔다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고종은 즉시 그 당시 친일내각의 수반이었던 김홍집을 제거하고 친일내각이 만든 각종 정책을 폐기시켰다.


▶ 엄상궁의 '아관파천(俄館播遷)'

 

그로부터 만 1년 동안 고종은 엄상궁과 함께 러시아의 보호를 받으며 러시아공사관에서 정무를 보게 되었고 엄상궁과의 사이에서 아들을 얻게 되는데 그가 곧 영친왕(英親王)이라 불려졌던 영왕(英王)이다. 고종에게는 12명의 자녀가 있었는데 모두 어린 나이에 죽고 나중에 성인이 된 자녀는 4명, 즉 마지막 임금인 순종, 궁녀 장씨 소생 의친왕, 엄귀비 소생인 영왕, 그리고 나중에 양비에게서 낳은 덕혜옹주 뿐이었다.

 

순종은 아이를 가질 수 없는 성불구자였기 때문에 후계자인 왕세자를 책봉하게 되었을 때 10살이나 손위가 되는 의친왕을 제치고 엄귀비의 뜻대로 2살 먹은 어린 영왕이 황태자로 책봉됐다. 고종은 1897년에 '조선'이라는 국호(國號)를 버리고 '대한제국(大韓帝國)'이라고 고쳤다. 참으로 획기적인 대 사건이라 아니할 수 없었다. 조선왕조는 500년 가까이 청나라를 대국大國)으로 섬기면서 청나라 황제와는 동격일 수 없다는 사대사상에서 임금을 '황제'라 칭하지 못했고 '왕(王)'이라 부르면서 황제가 다스리는 나라라는 뜻의 '제국(帝國)'은 감히 꿈도 꾸지 못했다.

 

그러나 청나라가 국력이 쇠잔하여 바람 앞에 촛불처럼 약해졌으므로 이 기회에 완전한 독립국가의 면모를 갖추고자 '대한제국'이라 했던 것이다. 임금을 황제라 칭하고 왕세자를 황태자로 높여 불렀던 대한제국(1897)이 한일합방(1910)으로 나라의 주권을 빼앗길 때까지 대한제국 13년은 우리나라가 근대국가로 기틀을 갖추어가던 때였다. 그러나 한일합방이 있은 후에 일본은 고종황제를 태왕(太王)으로, 헤이그 밀사사건을 빌미 양위를 받은 순종은 이왕(李王)이라 칭하고 황태자는 영친왕이라는 호칭으로 강등시켰다.

 

 엄귀비의 아들 영친왕은 조선총독 이토오 히로부미에 의해 일본황실에 볼모로 잡혀 일본으로 유학을 가게 되었고 그 후 일본 육군사관학교에 입교했다.나라를 빼앗기고 아들마저 저들의 볼모로 잡힌 엄귀비의 고통이야 오죽했으랴! 엄귀비는 소중한 황태자인 자기 아들이 겪기 힘든 고된 훈련을 받는 도중에 점심으로 주먹밥을 먹는 광경을 고종과 함께 대궐에서 활동사진(영화)으로 보다가 얼마나 애통했던지 입에 물고 있던 떡에 급체하여 이틀 후에 세상을 떠났다.


엄귀비는 생전에 모은 재산으로 나라를 짊어지고 나갈 인재를 키우는 교육에 큰 도움을 주었으며 양정의숙(현재 양정중고교)과 여성들의 신교육을 위해 진명여학교를 설립하였다. 또한 명신(후에 숙명으로 개명함)여학교가 재정난에 허덕이자 당시로서는 거금이었던 200만 평의 땅을 기증하기도 했다. 현재 신위는 청와대 경내 칠궁에 있는 덕안궁에 모셔져 있습니다.

 


▶ 슬픈 왕세손의 무덤, 숭인원(崇仁園)


홍릉에 있는 영휘원 경내 입구에는 또 하나의 큰 무덤이 있으니 곧 비운의 왕세자 이은(垠)의 아들 즉 순종의 왕세손인 이진(晉)의 무덤이다. 무덤의 크기가 마치 왕릉 규모처럼 크지만 그 무덤의 주인 이진은 겨우 8개월 된 아기였다. 대한제국의 마지막 임금인 순종에게는 슬하에 자식이 없었고 엄귀비의 아들인 이은(垠)이 2살 때 왕세자로 책봉되어 일제에 의해 영왕이라 불리어졌다.

 

영왕은 10살 때 일본유학이라는 명목으로 일본 황실의 볼모로 잡혀가 그 후 계속하여 일본에서 살면서 일본의 흉계로 일본 황실의 방계 황족인 마사꼬와 정략결혼을 하게 되었는데 그가 곧 이방자 여사이다. 이방자 여사는 본인의 회고록에서 일본천황의 궁내성에서 조선 황태자와의 결혼을 발표할 때까지 자신의 부모가 자신에게 전혀 상의를 안 했다고 기술함으로써 일본이 당시 조선왕가에서 청혼을 해옴으로써 혼인을 발표한다는 것이 터무니없는 거짓임이 분명했다.

 

이은의 어머니인 엄비는 본인의 출신가문이 훌륭치 못한 것을 한탄하였으므로 장차 대통을 이을 자신의 아들을 당시 최고의 가문으로 꼽히는 여흥민씨 집안의 쟁쟁한 혼맥을 지닌 민영돈의 딸로 민갑완과 혼인을 시키고자 하여 이미 비밀리에 약혼선물까지 보내놓은 후였다. 그 후 엄귀비가 죽자 약혼은 흐지부지되고 영왕은 일본의 허락이 없이는 귀국조차 못하는 신세였기에 정략결혼이 성사될 수밖에 없었다.

일본은 조선 왕자를 자국의 사위로 삼음으로써 아예 조선을 없애려고 했던 것이다. 더구나 의사의 진단에 따르면 마사꼬가 아기를 가질 수 없다고 했으니 그들로서는 더더욱 이 혼인을 성사시키려 애썼다. 그것은 곧 조선왕가의 씨를 말리려는 행위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영왕과 결혼을 한 마사꼬가 일본에서 첫아들을 낳자 대궐은 물론이요 온 나라가 들썩하였다.아기 이름은 진이라 하고 아이는 탈없이 잘 자랐다. 하지만 슬픈 일이 생겼다. 영왕이 8개월 된 아들 진을 데리고 마사꼬와 함께 일시 귀국을 하여 큰아버지이기도한 순종에게 결혼인사차 덕수궁을 방문했던 1922년 5월에 갑자기 왕세손인 진이 죽었다. 일설에 의하면 일본은 아이를 낳을 수 없는 여자인 마사꼬를 간택하여 영친왕과 결혼시켰으나 아이를 낳을 수 없다던 마사꼬가 아들을 낳자 마사꼬를 진맥한 의사는 자결케하고 진은 독살되었다고 하지만 사실인지 아닌지는 아직 규명되지 않고 있다.

 

당시의 풍습은 자식이 부모보다 먼저 죽으면 장례를 치룰 수가 없었으나, 순종황제가 이진의 죽음을 애석하게 여겨 성인왕족의 장례와 동일하게 특별히 국상에 준하는 장례를 치러 주고 왕릉에 버금가는 묘를 쓰게 하고  원호를 숭인원이라 하였으며, 이진 할머님이신 순헌귀비 엄씨가 모셔져있는 영휘원 남측 경내에 묘역을 조성하였습니다.

출처 : 백운의 여행이야기
글쓴이 : 백운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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