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흐는다

[스크랩] 장충단(奬忠壇) - 을미사변 - 순종과 민충정공의 비문 글씨

오늘행복스마일 2018. 12. 29. 11:53

 

<안개 낀 장충단 공원>

 

안개 낀 장충단 공원 누구를 찾아왔나
낙엽송 고목을 말없이 쓸어안고 울고만 있을까
지난 날 이 자리에 새긴 그 이름 뚜렷이 남은 이 글씨
다시 한번 어루만지며 돌아서는 장충단 공원

 

지금도 어쩌다 친구들과 어울린 술자리가 끝나고 뒤풀이로 노래방에라도 가게 되면 나의 18번지는 단연코 배호가 부른 이 "안개 낀 장충단 공원" 이다. 1960년대 요절한 가수 배호는 이 노래로 대중들의 인기를 한 몸에 받았었다. 나중에는 이 노래 덕분에 대중들의 구미에 맞는 남녀간의 사랑이야기를 같은 제목으로 하여 영화를 만들어 흥행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이 노랫말에 함축되어 있는 우리의 슬픈 역사를 알고 이 노래를 부르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  

 

행여 누가 이 글을 읽고 장충단 공원에 가는 사람이 있다면, 명성황후를 지키려다 순사했던 당시의 사람들과 그들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하여 세웠던 사전(祠殿)마져 지켜지지 못했던 슬픈 우리의 역사를 한 번쯤 생각해보고, 지금은 그 위치마저 잊혀지고 있는 장충단 비라도 찾아가 "안개 낀 장충단 공원"을 애절하게 불렀던 요절한 가수 배호를 기억해주기 바라는 마음으로 백과사전에 기록되어 있는 장충단 공원과 이경직, 홍계훈의 약사를 여기 소개한다. 

장충단(奬忠壇)공원

예로부터 경치가 좋기로 유명했던 이 계곡에는 조선 영조 중엽 이래 도성 남쪽을 수비하던 어영청의 분소인 남소영(南小營)이 있었고, 근처에는 남소문(南小門)이 있었다. 1895년 을미사변으로 명성황후 민씨가 살해된 후 5년 뒤인 1900년 9월 고종(高宗)은 이곳에 사전(祠殿) 1동과 부속건물 2채를 건립하고 장충단을 꾸며, 을미사변으로 순사(殉死)한 궁내부대신 이경직과 연대장 홍계훈을 비롯한 호위 장졸들의 영혼을 위하여 매년 봄·가을에 제사를 드렸다.

그러나 1910년 8월 일제에 의해 장충단은 폐사되고, 1920년대 후반부터는 민족정신을 말살하려는 그들의 의도에 따라 장충단공원이라 하여, 벚꽃 수천 그루를 심고 놀이터·연못·산책로·광장·교량 등의 시설을 설치하는 한편, 상하이 사변 때 전사한 일본군의 동상을 비롯해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의 보제사(菩提寺)인 박문사 등을 건립했다. 박문사의 건물은 경복궁의 예원전 및 부속건물을 이축한 것이고 입구의 문은 옛 경희궁의 흥화문을 옮겨 세운 것이었다.

8·15해방 직후 이것들은 즉시 철거되었고, 여러 가지 공원 시설물들이 들어서게 되었다. 6·25전쟁으로 장충단 사전과 부속건물은 완전히 소실되고, 장충단비(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1호)가 남아 있을 뿐이다. 현재 그 자리에는 신라 호텔의 일부와 한때 국빈전용의 숙소였던 영빈관이 있다. 비의 전면에 새겨진 '奬忠壇'이라는 글자는 순종이 황태자일 때 쓴 글씨이고, 뒷면에는 민영환이 쓴 143자의 문장이 새겨져 있다. 1959년 청계천 복개공사로 이전한 수표교가 근 15년간 공원의 초입에 있었으나, 지금은 세종대왕기념관에 보존되어 있다.

이경직 1841(헌종 7) 충북 청주~1895(고종 32). 한말의 문신.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위양(威穰), 호는 신부(莘夫). 아버지는 참판 선보(善溥)이다. 1876년(고종 13) 동몽교관(童蒙敎官)이 되고, 1885년 문과에 급제했다. 그 뒤 홍문관부수찬·참의내무부사(參議內務府事) 등을 거쳐 1892년 전라도관찰사가 되었다.

 

그 해 12월 전라도 삼례역(參禮驛)에 모인 동학교도들이 교조 최제우(崔濟愚)의 신원(伸寃)을 요구하고, 동학도에 대한 침탈을 금지해달라는 소장을 제출하자 동학은 이단이므로 계속 금압 할 것이며, 교도들에 대한 지방관리의 침학 만은 금단하겠다고 약속하여 동학교도들을 해산 시켰다.

 

이듬해 동학교도 40여 명이 과거 응시를 가장하여 서울로 올라가 경복궁 광화문 앞에 엎드려 고종에게 직접 교조신원을 요구한 사건이 일어나자, 교도들의 상경을 미리 막지 못했다 하여 파면되었다. 1895년 궁내부대신이 되었다. 그해 8월 20일 일본공사 미우라 고로[三浦梧樓]가 일본군인과 낭인집단을 동원, 궁궐로 난입해 민비를 학살한 을미사변 때 왕비의 침전인 옥호루(玉壺樓)에서 난입하는 폭도들을 막다가 총탄을 맞고, 고종이 보는 앞에서 이들의 칼에 찔려 죽었다.

 

1897년 대광보국숭록대부의 직계, 1899년에는 의정부 의정(議政)이 추증되었다. 시호는 충숙(忠肅)이다.

홍계훈(洪啓薰, ?~1895년)은 조선 후기의 무장으로 1895년 음력 8월 20일(양력 10월 8일 새벽5시 50분,6시) 을미사변 때 일본군을 막다가 장렬하게 죽었다. 초명은 재희(在熙), 본관은 남양(南陽)이다. 신원은 확실치 않으나, 미천한 신분이었다. 무예청 별감으로 관직을 시작한 그는 1882년 8월에 일어난 임오군란 당시 명성황후 민씨를 업고 피신시킨 공으로 출세하였다. 1884년장위영 영관(領官)을 지냈다. 그해 동학란이 일어나자 양호초토사(兩湖招討使)로 출전하여 전주를 탈환하고 그 공으로 훈련대장이 되었다.

 

을미사변 때 광화문 앞에서 일본군의 침입을 저지하다가 죽었는데 다만 《고종실록》에서는 광화문 밖에서, 《한국통사》에서는 궁궐 안에서, 《대한계년사》에서는 궁궐 안에서 칼을 맞고 죽었다고 하였다. 또 《매천야록》에서는 총을 맞고 쓰러진 뒤 며칠 뒤에 죽었다고 되어 있다.

 

이사벨라 비숍은 《한국과 그 이웃들》에서 일본 장교의 칼에 피습한 뒤 여덟 발의 총탄을 맞아 치명상을 입었다고 썼다. 그는 을미사변 때 조선의 왕비 명성황후 민씨를 지키다가 죽은 궁내부 대신 이경직과 더불어 1900년 장충단에 제향되었다.

 

황현은 《매천야록》에서 홍계훈을 “졸병에서 일어나 높은 지위에까지 올랐는데, 인품이 염결(廉潔)하고 근신(勤愼)했다.”라고 호평했다.

 

 

1969년 원래 세워져 있던 자리가 신라호텔이 들어서면서 지금의 자리로 옮겨져 있는 장충단 비 

장충단이라는 비문은  황태자시절의 순종황제가 쓴 글씨이다

 

 

 비의 뒷면의 글씨는 충정공 민영환이 썼다.

처음 장충단을 세웠던 자리에 1969년에 호텔실라가 들어서 있다. 

 호텔신라를 세운 호암 이병철의 동상이 장충단 자리에 세워져 있다.

 청계천의 수량을 체크하기도 했던 수표교가 청계천 복개공사로 이곳으로 옮겨져 있다.

장충단의 사적 표지석

 

 

 

 

 

 

출처 : 운중풍월(雲中風月) woonjungpungwal
글쓴이 : 雲中風月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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