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사극을 좋아하는데 사극을 시청하면서 등장하는 여인들의 세계에 대해 평소 궁금했던 것들을 한번 정리해보았다. 특히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한 드라마 허준, 상도, 대왕세종,장희빈, 왕과 비, 장녹수, 홍국영, 여인천하, 명성왕후, 대장금,이산, 불멸의 이순신 등에 자주 등장하는 여인들의 세계를 중점적으로 살펴보려 한다.
먼저 조선시대 여인들의 대명사인 내명부와 외명부의 뜻을 알아보자.
내명부(內命婦)란 조선시대 궁중에 있던 왕비와 후궁, 그리고 이들을 모시는 여자 관리(궁녀)를 통틀어 일컫는 말이다.
조선 초기에는 궁녀 조직을 내관(內官) 또는 여관(女官) 등으로 불렀으나 경국대전에서 내명부로 통일하여 기록하였다. 내명부의 상대 개념으로 왕족과 관리의 아내를 일컫는 외명부(外命婦)가 있다.
임금의 딸인 공주와 옹주, 세자의 딸인 군주, 현주 등은 혼례를 치른 후 부마를 따라 궐 밖으로 나가 살기 때문에 외명부에 속한다. 이러한 내·외명부의 최고 권한은 중전(中殿) 즉, 왕비가 쥐고 있었으며, 왕도 내명부 일에는 간섭하지 않는 것이 관례였다.
조선시대 내.외명부 품계 및 호칭(표1)
품계 |
중전[中展. 왕비(王妃)] : 내.외명부 총괄. 품계(品階) 및 첩지 부여 | ||||||
내명부(內命府) |
외명부(外命府) | ||||||
왕궁(王宮) | 세자궁(世子宮) |
왕실 |
종친의 처 | 문무관의 처 | |||
공주 ㆍ옹주는 품계(品階)가 없음 | |||||||
정1품 | 빈(嬪) | 내관(內官)으로 직무는 없고, 사실상 임금의 첩으로 임금의 총애에 따라 품계 상승 | ㆍ | 내관으로 직무는 없고, 사실상 세자의 첩으로 세자의 총애에 따라 품계 상승 | 부부인(府夫人-왕비의 어머니) | 부부인(府夫人) | 정경부인 (貞敬夫人) |
종1품 | 귀인(貴人) | ㆍ | 봉보부인(奉保夫人-임금의 유모) | 군부인(郡夫人) | |||
정2품 | 소의(昭儀) | ㆍ | 군주(郡主-왕세자의 적녀) | 현부인(縣夫人) | 정부인(貞夫人) | ||
종2품 | 숙의(淑儀) | 양재(良재) | ㆍ | ||||
정3품 | 소용(昭容) | ㆍ | 현주(縣主-왕세자의 서녀) | -정3품 당상관 신부인(愼夫人) |
-정3품 당상관 숙부인(淑夫人) | ||
종3품 | 숙용(淑容) | 양원(良媛) | ㆍ | -정3품 당하관 -종3품 신인(愼人) |
-정3품 당하관 -종3품 숙인(淑人) | ||
정4품 | 소원(昭媛) | ㆍ | ㆍ | 혜인(惠人) | 영인(令人) | ||
종4품 | 숙원(淑媛) | 승휘(承徽) | ㆍ | ||||
정5품 | 상궁(尙宮) 상의(尙儀) |
ㆍ | ㆍ | 온인(溫人) | 공인(恭人) | ||
종5품 | 상복(尙服) 상식(尙食) |
소훈(昭訓) | ㆍ | ||||
정6품 | 상침(尙寢) 상공(尙功) |
ㆍ | ㆍ | 순인(順人) | 의인(宜人) | ||
종6품 | 상정(尙正) 상기(尙記) |
수규(守閨) 수칙(守則) |
ㆍ | ||||
정7품 | 전빈(典賓) 전의(典衣) 전선(典膳) |
ㆍ | ㆍ | ㆍ | 안인(安人) | ||
종7품 | 전설(典設) 전제(典製) 전언(典言) |
장찬(掌饌) 장정(掌正) |
ㆍ | ㆍ | |||
정8품 | 전찬(典贊) 전식(典飾) 전약(典藥) |
ㆍ | ㆍ | ㆍ | 단인(端人) | ||
종8품 | 전등(典燈) 전채(典彩) 전정(典正) |
장서(掌書) 장봉(掌縫) |
ㆍ | ㆍ | |||
정9품 | 주궁(奏宮) 주상(奏商) 주각(奏角) |
ㆍ | ㆍ | ㆍ | 유인(孺人) | ||
종9품 | 주변징(奏變徵) 주징(奏徵) 주변궁(奏變宮) |
장식(掌食) 장의(掌醫) |
ㆍ |
ㆍ |
1. 왕의 여자들
조선시대 궁중의 꽃은 왕비를 포함한 후궁과 궁녀라 할 수 있겠다.
왕비 즉 중전(中展)은 왕의 정실 부인이라 하겠고 후궁(後宮. 后宮)은 첩(妾)보다는 좀더 격식있는 말인 소실(小室)이라고 보면 되겠다. 첩은 정식으로 인정받는 위치가 아닌 반면에 소실은 정식으로 공인된 제2부인의 신분이다.
따라서 첩의 자식들인 서얼(庶孼)들은 아버지의 신분에도 불구하고 그 지위를 인정받지 못하였으나 소실의 자식들은 아버지의 신분을 물려받고 정실(正室)부인이 아들이 없을 경우 장자의 위치를 이어받기도 했다는 점이 다르다.
궁녀는 아직 왕의 부인즉 후궁의 위치를 얻지 못했으나 언제라도 후궁이 될 수 있는 자격을 가졌으며 일상적으로는 왕과 왕비 등 왕실의 잡다한 일들을 처리하는 '일하는 부인'쯤 된다고 보면 되겠다.
궁녀는 입궁한지 얼마 안 된 어린 생각시(애기궁녀)나 시간이 흘러 18세에 관례를 치른 궁녀(나인, 내인, 內人), 나인이 된 지 15년 이상 되어 따로 첩지를 받은 고참 궁녀인 상궁(尙宮)이나 모두 다 합법적인 왕의 여자들인 것이다.
2. 후궁(後宮)
1) 후궁의 유래
후궁이란 원래 중국 천자(天子:황제)가 거처하는 궁중의 전전(前殿) 뒤에 있는 깊숙한 부분이라는 뜻으로 이슬람세계의 하렘(禁斷의 장소)과 유사하다. 중국 천자의 궁성은 외조(外朝)와 내정(內廷)으로 확연히 구분되어 있는데, 외조는 천자가 주권자로서 백관(百官)을 접견하고 정치를 주제하며 의식을 행하는 장소로 되어 있다.
반면 내정은 천자가 한 집안의 주인으로서 황후 이하의 부녀와 미성년인 아이들 및 환관(宦官) 등과 함께 개인적인 가정생활을 보내는 장소이다. 이 내정이 후궁으로, 그 구성 인원은 여자가 다수를 점하므로 이 궁중의 여자들도 후궁이라 지칭하게 되었다. 청나라 때의 베이징[北京] 궁성에서는 건청문(乾淸門)이 내정과 외조와의 경계를 이루어, 환관이 이 밖으로 나가거나, 관료가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금하였다.
중국은 고래로 일부다처제(一夫多妻制)로 내려와 처첩(妻妾)의 수는 신분이 높은 자일수록 많음은 유교(儒敎)에서도 공인되어 있었다. 주공(周公)이 제정하였다고 전하는 《주례(周禮)》에 따르면, 천자는 1명의 후(后) 외에 3부인(夫人), 9빈(嬪), 27세부(世婦), 81여어(女御:女官) 등 모두 121명의 처첩을 둘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후세(後世)의 천자인 경우는 이에 그치지 않고 백낙천(白樂天)이 당(唐)나라 현종(玄宗)을 노래한 《장한가(長恨歌)》에서 後宮佳麗三千人이라 읊은 바와 같이 많은 여인을 후궁에 두었다.
《진서(陳書)》에 “寵傾後宮이라 한 것처럼 천자의 총애는 정처(正妻)인 후(后)보다는 첩인 3부인(三夫人:貴妃 ·貴嬪 ·貴人) 이하의 여인들에게 기울어져, 후궁이라는 말은 거처하는 장소나 후(后)를 포함한 천자가 거느렸던 모든 여인을 뜻하기보다는, 천자 또는 임금의 첩을 지칭하는 뜻으로 쓰이게 되었다.
천자가 궁중에 처첩을 많이 두는 것은 그 후사(後嗣)를 얻음을 명목으로 하였으나, 실제로는 천자가 여색에 빠져서 건강을 해쳐 정치를 혼란에 빠뜨리고, 한 왕조의 말기에는 천자가 후계자를 얻지 못하고 일찍 죽는 것과 같은 역효과를 빚기도 하였다. 후궁에서의 연락(宴樂) 때문에 정치를 망친 천자의 예는 적지 않으나 그 가운데에서도 한(漢)의 성제(成帝), 진(陳)의 후주(後主), 수(隋)의 양제(煬帝)가 꼽히는데 후궁 양귀비(楊貴妃)에게 빠져 안녹산(安祿山)의 난을 만나 황제 자리를 빼앗긴 당나라 현종의 예는 특히 유명하다.
한국에서 임금의 첩으로서 후궁에 대한 기록은 고려시대부터 비교적 자세하게 나와 있다.
고려에서는 왕의 적처(嫡妻)를 왕후라 하고, 그 후궁은 부인(夫人)이라 하여 중국의 천자와 대등한 호칭을 하였으며, 후궁인 부인들에게는 내명부(內命婦) 벼슬인 귀비(貴妃)·숙비(淑妃)·덕비(德妃)·현비(賢妃)의 명칭과 정1품의 품계를 주었는데, 이 명칭은 정종(靖宗) 이후 궁주(宮主)·원주(院主) 또는 옹주(翁主) 등 개칭이 빈번하였다.
고려에서 후궁이 많았던 왕으로는 태조로서, 그는 건국과정에 호족(豪族)·공신(功臣)·귀화귀족(歸化貴族)들을 회유하기 위한 혼인정책으로 제1왕후 외에 제6비까지를 왕후라 부르고 부인이라 칭한 후궁만 20명이 넘었다.
2) 조선왕조의 후궁
조선시대에는 중국 제후국(諸侯國)의 예(禮)를 뚜렷이 하여, 왕의 적처는 후(后)라 하지 않고, 격하하여 비(妃)라 하고, 후궁들에게는 내명부의 벼슬을 주어 숙원(淑媛:종4품)·소원(昭媛:정4품)·숙용(淑容:종3품)·소용(昭容:정3품)·숙의(淑儀:종2품)·소의(昭儀:정2품)·귀인(貴人:종1품)의 순으로 올리고, 후궁의 으뜸은 빈(嬪:정1품)이라 하였다. 이 빈에는 처음부터 왕의 후사(後嗣)를 위하여 왕비나 세자빈과 같이 금혼령(禁婚令)을 내리고 간택하여 들어오는 경우와, 궁녀로 들어왔다가 왕의 승은(承恩.왕과 잠자리를 같이 함)을 입어 왕자를 낳고 궁녀에서 특별상궁(승은상궁), 숙원, 소용, 숙의 등을 거쳐 빈으로 승격되는 경우가 있었다. 경종(景宗)의 생모인 장희빈(張禧嬪) 즉, 희빈 장씨 등 선원보(璿源譜)에 올라 있는 역대 빈들은 거의 후자에 속한다. 조선시대의 후궁은 규정으로만 보아도 숙원에서 빈까지 8명에 이르나, 태종·세종·성종·선조·영조와 같이 치적(治績)이 뚜렷하다고 후대에 인정받은 왕들은 후궁의 수가 많아 이들에게는 자녀를 낳은 후궁이 9명이었고, 자녀를 낳지 않아 선원보에 오르지 않은 여인까지 합하면 몇 명인지 알 수 없을 정도이다.
1897년(광무 1) 조선이 대한제국으로 바뀌어 황제국으로 격상하면서 고려시대와 마찬가지로 귀비·귀빈·귀인 등 중국과 같은 호칭으로 올랐고, 이를 아울러 3부인(夫人)이라 하였다.
3) 드라마에서 볼 수 있는 후궁 이야기
드라마 <이산>의 성송현의 경우 정사에 따르면 원래 정조의 후궁인 화빈 윤씨(和嬪尹氏) 처소의 지밀 나인이었으나 정조의 승은을 입고 상의(尙儀: 내명부 정5품) 즉, 특별상궁(승은상궁)의 첩지를 받았고 1782년(정조 6)에 아들을 출산하여 소용(昭容: 내명부 정3품)으로 봉해졌으며 이듬해에 그의 아들이 세자(文孝世子)에 책봉되자 빈(嬪: 내명부 정1품)으로 승차하여 의빈 성씨(宜嬪成氏)라 불렸다. 반면에 홍국영의 누이동생이었던 원빈홍씨는 후궁으로 간택되어 내명부 품계 없이 바로 빈으로 책봉되어 원빈(元嬪)의 작호와 숙창궁(淑昌宮)의 궁호를 받았다.
후궁이 삼간택과 가례(친영례 제외) 절차를 밟고, 처음부터 빈(嬪)에 봉작되어 입궁한 사례는 조선 역사상 원빈이 처음이었다. 이는 후궁의 출신 배경이 얼마나 중요한지 잘 보여주는 사례이다.
드라마 <대장금>의 경우 수라간 나인 이던 연생(連生)이 어느날 갑자기 중종의 승은을 입고 특별상궁이 되긴 하였으나 오랫동안 잊혀졌다가 장금이 상선에게 부탁하여 다시 한번 중종의 승은을 입어 결국 회임하여 내명부 종4품 숙원(淑媛)의 첩지를 받았다.
드라마 <장녹수>와 <왕과 비>. 영화 <왕의 남자> 등에 나오는 연산군 때 후궁 장녹수(張綠水)는 첩의 자식인 노비 출신으로 가무를 비롯한 다양한 예술적 재능으로 연산군의 눈에 들어 입궁하게 되는데 바로 숙원의 첩지를 받았고 이후 연산군의 총애를 받아 내명부 종3품 숙용(淑容)에 봉해진다.
후궁의 품계는 역시 임금의 총애 정도가 얼마나 중요한지 잘 보여주는 사례이다.드라마 <장희빈>의 경우 중인계급의 서얼 출신인 장옥정(張玉貞)이 남인들의 추천으로 입궁하여 자의대왕대비전(慈懿大王大妃殿.장렬왕후. 인조의 계비)의 나인으로 있다가 마침 인경왕후를 잃고 슬퍼하던 숙종의 승은을 입었으나 숙종의 모후인 현렬왕대비(明聖王后 金氏)의 미움을 사 출궁되었다가 대비가 죽고난 후 장렬왕후의 강력한 추천과 숙종의 의지로 재입궁하여 바로 후궁 반열인 내명부 종4품 숙원으로 봉해졌다. 이후 정2품 소의를 거쳐 나중에 조선 20대 왕 경종이 되는 아들을 낳아 숙종의 계비인 인현왕후(仁顯王后 閔氏)의 소생이 없었던 관계로 세자로 봉해지자 정1품 빈의 첩지를 받아 그 유명한 장희빈(禧嬪張氏)이 된다. 기사환국(己巳換局)의 여파로 인현왕후가 폐서인되어 출궁되자 조선왕조 역사상 유일무이하게 중인 출신으로
왕후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 하지만 인현왕후가 죽고 장희빈이 저주했던 사실이 발각되어 희빈으로 강등되었다가 갑술옥사 때 사사되는데 이 일로 숙종은 이후 빈어(嬪御:임금의 첩)에서 후비(后妃:임금의 정실)로 승격되는 것을 금지하는 법을 만들었다.
4) 후궁의 출궁(出宮)
후궁은 죄가 있어 내쳐지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출궁하는 일이 없었지만 왕이 승하하고 세자가 보위를 잇게 되면 왕비인 중전은 대비(大妃)로 격상되어 물러나고 후궁들은 선왕의 총애 정도가 자녀 출산 여부에 따라 처우가 달랐다.
즉, 자녀가 없는 후궁들은 대부분 궁 밖으로 나가야 했고 불문에 입문하여 승려가 되는 경우도 많았다.
하지만 세자를 낳은 후궁이나 자손을 많이 낳은 후궁들은 궁내에 따로 거처를 마련해 주었고 궁호(宮號)도 하사받았다. 드라마 <이산>의 예를 보면 정조 이산의 생모이자 영조의 아들이며 세자였던 사도세자(思悼世子)의 빈이었던 혜빈 홍씨(獻敬王后 惠嬪 洪氏)가 정조로부터 혜경궁(惠慶宮)이란 궁호를 받은 걸 알 수 있다. 또한 사가에 경조사가 있을 경우에는 휴가를 주어 출궁할 수 있었다.
4) 대한제국의 후궁들
순헌귀비 엄씨(純獻貴妃嚴氏1854-1911)는 8세때 나인으로 입궁하여 명성황후의 시위상궁으로 있던 어느 날 , 나이 들고 용모가 볼품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고종의 승은을 입음으로써 명성황후를 분노케 하고 대궐을 깜작 놀라게 했다.
엄씨는 궁에서 쫓겨나 있다가 10년후인 1895년 을미사변으로 명성황후가 죽은 뒤 5일만에 다시 입궐하였으며, 1897년 44세의 늦은 나이에 영친왕(英親王1897-1970) 이은을 낳았다.
엄귀비는 어려운 시절 고종의 내조는 물론, 진명, 숙명 등 근대여성교육기관의 설립을 후원하는 등 명성황후의 그늘에 가려져 잘 알려지지 않았던 중요한 인물이다.
그녀는 58세를 일기로 생을 마쳤으며 서울 동대문구 청량리 의 영휘원(옛 홍능)에 묻혔습니다.
광화당 이씨(光華堂 李氏 1887년 - 1970년)는 고종황제의 후궁으로 유복(裕福)한 중인 계급의 집안에서 태어나 13세 때에 경복궁 지밀(至密)의 세수간(洗手間) 나인(內人)으로 입궁하여, 고종으로부터 승은을 입었다.
황자 '육(堉)'을 낳고 종1품 귀인(貴人)에 책봉 되었는데, 왕자가 2살로 요절(夭折)하였다. 고종황제가 승하한 후 덕수궁에서 나와 나라에서 지어준 사간동(司諫洞) 집에서 삼축당 김씨와 함께 살다가 1970년 훙서하여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 홍유릉 권역에 예장되었다. 삼축당 김씨(三祝堂 金氏 1890년 - 1972년)는 고종황제의 후궁으로 13세 때에 경복궁 세수간 나인으로 입궁해서 고종의 사랑을 받은 가장 어린 후궁이었다.
그러나 후사(後嗣)를 얻지 못해 특별상궁(特別尙宮)으로 남아 있다. 순종이 즉위하여 순종으로부터 부왕(父王)에 대한 효도의 연장으로 '삼축당(三祝堂)이란 당호(堂號)를 받고 금반지까지 하사 받았다.
1972년 별세하여 묘는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 홍유릉 권역에 광화당 이씨묘와 함께 예장되었다.
5) 조선왕조에 화제가 되었던 후궁들
O 조선조 9대 성종(成宗 재위 1608-1623)의 폐비 윤씨는 연산군의 어머니로서 종2품 숙의에서 중전이 되었다가 폐위되어 사사되었다.
O 조선조 11대 중종(中宗 재위1506-1544)때의 후궁 경빈 박씨는 평성부원군 박원종의 수양딸로서 정1품 빈으로 있다가 1533년 각서의 변(인종을 저주한 사건)으로 사사 되었다.
O 조선조 16대 인조(仁祖 1595-1649 재위 1623-1649)때의 종1품 귀인(貴人) 조(趙)씨는 숭선군의 처 신(申)씨를 저주한 사건으로 사사되었다.
O 조선조 21대 영조(英祖)때의 종2품 숙의(淑儀) 문씨는 영조가 총애한 후궁이었으나 사도세자의 죽음에 연루되어 후에 정조에 의해 폐위되었다.
* 이상의 후궁들은 모두 하나같이 미모가 뛰어나 왕의 총애를 받았으나 끝이 안 좋았던 후궁들이다.
장녹수와 장희빈도 여기에 포함되나 위에서 언급했으니 생략한다.
반면에 15대 광해군 상궁이었던 김개시(金介 屎,일명: 개똥)는 다른 왕들의 후궁과는 달리 후궁의 첩지도 받지 못하였고 미모 또한 보잘 것 없었으나 판단력이 뛰어나고 영민하여 광해군의 총애를 한 몸에 받았다.
그러나 김개시는 왕의 총애를 등에 업고 국정에 깊이 관여하였고 매관매직을 일삼는 등의 죄로 인조반정 때 참수되었다.
* 정조 때이므로 후궁이 된 송현이 가체머리 없이 첩지머리만 한 것을 알 수 있다.
3. 궁녀(宮女)
1) 궁녀의 정의
궁녀(宮女)는 궁의 일을 보는 여성을 말한다.
협의로는 상궁과 나인, 애기나인(생각시)만을 지칭하는 것이며 이들은 내명부(內命婦)에 속한 실무직으로 종 9품 주변궁(奏變宮)부터 정 5품 상궁(尙宮)까지의 품계를 받았다.
후궁(後宮)이 될 경우 정 1품 빈(嬪)부터 종 4품 숙원(淑媛)의 품계가 내려졌다.
넓은 의미로는 궁녀보다 하층 계급인 비자, 무수리, 각심이, 방자, 손님, 의녀 등도 궁녀에 포함할 수 있겠지만 일반적으로 '궁녀=왕의 여자=왕 이외의 남자와 접촉 불가'가 상식이므로 분명히 궁녀는 아니다.
이들은 대개 상궁, 나인의 시중을 들거나 궐의 하찮은 잡무에 종사하였다. 이들은 품계도 받지 못했고 대우 또한 일반 궁녀들에 비해 매우 좋지 않았다.
2) 입궁 및 궁녀의 생활
원래는 각 관청의 여자 노비 중에서 선발되었으며, 양인 여성을 궁녀로 만들었을 경우 60대의 장형과 1년의 도형에 처해졌다. 그러나 나중에는 중인계층의 양인 여성도 궁녀가 되었다.
조선시대에는 여성의 지위가 낮고 유교적 관습으로 인해 사회적인 활동도 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궁녀는 선망의 대상이 되는 직업이 되었다. 운이 좋으면 승은을 입어 후궁이 되어 권세를 누릴 수도 있는 기회가 주어졌기 때문이다.
때로는 정치적인 목적으로 궁녀가 되려는 경우도 있었고 왕의 여자는 아무나 될 수 있었던 게 아니어서 아무나 궁녀가 되기 위해 입궁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정치적인 배경이나 최소한 상궁 이상 내명부의 추천이 있어야만 견습나인(애기나인)인 생각시가 될 수 있었다.
머리를 생머리로 빗는다 하여 생각시라 하였는데 4, 5세에 입궁하는 지밀과 6, 7세에 입궁하는 침방, 수방의 생각시들만 생을 맬 수 있었다. 10세 미만의 생각시들은 한 방에 한 명씩 선배 상궁에게 맡겨져 양육되다가 7, 8세 무렵부터 교양을 쌓았다. 생각시는 무려 15년이나 궁중법도, <한글, 천자, 대학, 소학, 동몽선습,열녀전서 등은 물론 궁체 연습까지 다양한 학문과 교양을 익히면서 훈련을 받았다.
궁녀는 역적의 후손이어서도 안 되고 유전학적으로나 우생학적으로 하자가 없어야 선발되었다.
재미있는 것은 처녀성 감별법인데, 궁녀 후보자 중 13세 이상 소녀는 의녀가 앵무새의 피를 팔목에 묻혀보고 처녀인지 아닌지 판단했다. 앵무새 피가 묻으면 처녀이고, 묻지 않으면 처녀가 아니라는 것이다. 궁녀의 출신계급은 지밀(至蜜)과 침방(針房)·수방(繡房)나인은 중인계급이어야 했고, 나머지 처소의 나인은 상인계급 이상이어야 했다.
입궁연령도 지밀이 가장 어린 4∼8세, 침방과 수방은 6∼13세, 그 외에는 12∼13세가 일반적이었다.
궁녀의 근무는 낮과 밤의 상하번제(지밀의 경우)나 격일제로 이를 '번살이'라고 한다.
근무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것은 관례 후 정식 나인이 되고부터다.
궁녀의 관례는 성년식과 더불어 사실상 신랑 없는 결혼식도 겸하는 것으로, 본가(친정)에서 버선-누비바지-속치마-장롱 등과 잔치음식까지 장만해 들여온다. 관례를 한 후엔 방을 꾸며 마음맞는 친구와 둘이서 한 가정을 갖는다.
남자의 정을 느낄 수 없는 외로운 처지여서 동성애(대식.對食)를 하는 경우도 많았고 성대용품도 공공연하게 많이 사용했다고 전해진다. 이외에도 <조선왕조실록>에는 궁녀와 얽힌 성범죄도 많이 기록되어 있는데 그 대상은 왕자군부터 내시-승려 등 다양하다. 또한 이들은 궁에 들어오면 늙고 병들기 전까지는 궁궐 밖으로 나갈 수 없었다.
단, 모시던 분이 승하할 경우 3년 상을 치른 후에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또한 드문 일이지만 나라에 극심한 가뭄이 발생하면 궁녀들 중 일부를 출궁시키기도 했다.
이러한 사례는 중국의 전례에 기인하는 것이며 일례로 영조 때는 30명이나 되는 궁녀를 출궁시켰다고도 한다.
궁녀는 왕과 내시의 남자와 접촉하는 것이 엄격하게 금지되었다.
드라마 <대장금>에서도 민정호가 대장금을 연모하는 것이 문제가 되는 장면이 나온다.
물론 드라마니까 그 정도도 허용된 것일 테지만. 아무튼 궁녀는 언제든 왕의 승은을 입을 가능성이 존재하기 때문에 왕가의 혈통 보존 때문에서라도 궁녀의 남자 관계는 철저하게 막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연로하거나 병으로 궁에서 나온 궁녀들은 모여서 살았으며 불교 사찰에 시주를 하면서 신앙에 의지하여 외로움을 달랬다고 한다. 따라서 조선 시대 천주교 탄압으로 순교한 순교자 중에 궁녀가 있었던 것도 궁녀들이 평생 궁에 갇혀 지내면서 사는 외로운 삶에 지쳐서 의지할 대상을 찾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 영조 이전이므로 중전과 상궁 모두 가체(어여머리)를 하고 떨잠과 선봉잠으로 장식한 것을 볼 수 있다.
상궁은 직첩을 받으면 그날부터는 머리에 은으로 된 개구리 모양의 첩지(머리 가르마 가운데에 장식하는 것)를 달거나 가체(어여머리)를 올리고 선봉잠으로 장식한다. 첩지머리는 가체머리가 너무 무거워 내외명부 여인들이 목병이 많이 생기고 그 치장에 큰 돈이 들어 낭비이므로 영조가 왕실 행사 시를 제외하고는 금지시키고 간편한 첩지머리를 하게 했다. 정조 때부터 상궁이 되기 전은 항아(姮娥,嫦娥; 달 속에 있는 선녀)님이라 부르고 상궁이 되면 비로소 마마님이라 부르고 대접받는다. 상궁 첩지를 받으면 궁안에 방을 하나씩 주어 따로 세간을 내준다. 따로 밥짓고 빨래하는 하녀를 두고 살림을 하는데 이 일을 하는 사람을 각방서리라 한다
제조상궁(提調尙宮)
일명 '큰방 상궁'이라고 하여 수백 명의 궁녀 중 으뜸이 되는 상궁으로 권세와 권위가 대단하여 남자관리로 치면 영의정의 지위와 같다고 하겠다. 제조상궁은 단 한사람이며, 자격은 궁녀 중에 연조가 오래되고 위품이 있고 인격이 높아야 한다. 학식이 많고 수많은 궁녀를 통솔할 수 있는 영도력이 있어야 하고 인물도 출중하여야 한다. 제조상궁의 임무는 대전 어명을 받들고 내전의 대소 치산(治産)을 주관한다. 제조상궁에 대한 음식대접은 임금님의 수라상과 가짓수를 같게 하고 분량만 적게 한다. 그리고 큰방 상궁이 궁궐을 출입할 때는 세수간 나인과 비자(婢子)가 따라 다닌다. 재상도 이들을 함부로 하지 못했고 어려운 청원이 있으면 먼저 이 제조상궁에게 부탁하는 일이 많았다고 한다. 심지어 재상과 제조상궁이 의남매를 맺는 경우도 있었다. 드라마 <대장금>에서 박정수가 연기한 제조상궁 박씨가 우의정 오겸호와 접촉하는 장면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부제조상궁(副提調尙宮)
제조상궁의 다음 자리로 일명 아랫고(阿里庫,下庫)상궁이라고도 하며 제조상궁이 세상을 떠나면 그 자리를 이어간다. 보석과 의식주에 걸친 왕의 귀중품은 물론 수라에 쓰이는 반상기용인 은기(銀器), 자기(磁器) 및 유기(鍮器)와 비단 등이 있는 아랫곳간의 물품들의 출납은 부제조 상궁의 담당이다.
궁녀들의 근태나 소행 등을 감시하고 평가하며 수시로 궁녀들의 처소도 검사하여 궁안에서 일어나는 궁녀들의 음란, 비리, 모함, 사치행위 등의 모든 부정부패를 감시하고 또 조사하여 조금이라도 구율에 벗어난 행동을 한 궁녀들에게는 가차없이 처벌주던 상궁이다
대령상궁(待令尙宮)
일명 지밀(至密)상궁이라고 한다.
24시간 내내 왕의 곁에서 어명(御命)을 받드는 자세로 대기하는 역할을 맡은 상궁이다.
보모상궁(保母尙宮)
왕자녀의 양육을 맡는 내인들 중의 총책임자이다. 동궁에 두 명, 그밖의 궁에는 한 명씩 있다.
왕자녀들은 어릴 때에 이들을 '아지(阿只)'라고 부른다.
시녀상궁(侍女尙宮)
궁중의 지밀에서 상시 봉사하면서 여러 가지 업무를 행한다.
서적 등을 관장하고 글을 낭독하고 글의 정사(淨寫)를 맡고, 대소잔치의 내연에 좌우 찬례(贊禮), 전도(前導), 승인(承引), 시위(侍衛) 등을 거행하고, 각 종실(宗室), 외척(外戚)들의 집에 내리는 하사품에 관한 업무를 관장, 규찰(糾察)하고 그릇과 기타를 다스리는 일 외에 대소 사우(祠宇; 따로 세운 사당집)를 총관하여 곡읍(哭泣; 소리내어 슬피움)도 하며, 왕비와 왕대비의 특사로 그 본댁(本宅;친정)에 어명을 받들고 나가기도 한다.
복이처상궁(僕伊處尙宮)
아궁이를 담당하는 곳의 책임 상궁으로, 침실에 불을 때는 것과 내전에 붉을 밝히는 임무를 담당하였으며 세답방에 예속되어 있었으나 임무가 독립적인 기능을 하던 곳이었습니다.
기미상궁(氣味尙宮)
왕과 왕비에게 올려진 수라을 곁에서 한 술씩 미리 먹어 보며 검사하던 상궁이다.
왕과 왕비의 안전을 위해 혹시 수라에 독 등의 유해물질이 들었는지 음식이 상했거나 이물질이 들어 있지나 않은지 확인하던 절차를 담당하던 상궁이다.
일설로는 이러한 일을 내시부의 내관이 담당했다고도 한다.
6처소 상궁
침방상궁(針房尙宮)
수방상궁(繡房尙宮)
수랏간최고상궁(일명 水剌間最高尙宮) : 내소주방(外燒廚房)과 외소주방(外燒廚房), 퇴선간(退膳間)의 상궁들을 총괄하는 상궁. 드라마 <대장금>에 이러한 직책이 있으나 별도의 입증할 만한 근거는 찾아보기 어렵다.
다만, 평상시의 수라나 잔치상 등을 총괄하는 주방 최고 책임자가 있지 않았을까 추측해 볼 뿐이다.
드라마에는 간장.된장.고추장 등을 만드는 장고(醬庫) 담당 상궁(여운계 분)도 있었고 수라간 최고상궁이 예하 상궁들을 각 처소로 배치 인사하는 장면이 나온다. 수라를 만드는 일은 중요하고 다른 처소에 비해 일도 많은 편이라 촐괄 책임자를 별도로 두었을 가능성도 있어서 주석을 달아둔다.
생과방상궁(生果房尙宮)
세답방상궁(洗踏房尙宮)
세수간상궁(洗水間尙宮)
일반상궁(一般尙宮)
이상의 상궁들 외에 뚜렷이 직함이 붙지 않은 일반상궁들이 각 처소마다 7, 8명씩 있어서 그 아래의 내인들을 총괄하고 처소마다의 모든 업무를 책임지기도 한다. 상궁들은 존칭으로 '마마님'이라 부르는데 민가에서는 대가댁의 소실(小室)을 높이는 말이기도 하다.
4). 나인(내인. 內人)
관례를 치르고 18세 이상의 성인이 된 궁녀를 이르는 말이다.
정식으로 내명부 품계를 받은 궁녀 중에서 정5품의 상궁과 상의를 제외한 나머지 궁녀들은을 총칭하여 나인이라고 한다. 보통 5세에서 13세 정도의 나이에 입궁하여 견습나인인 생각시(애기나인)가 되는데 궁중법도와 기본적인 학문을 익히다가 10년 정도 지나면 일종의 성인식 겸 임금과의 혼인식을 상징하는 계레(계례. 남자의 관례와 같은 것으로, 땋은 머리를 풀고 쪽을 찌어 비녀를 꽂는 의식.대개는 허혼이 되면 올리지만 그 밖에도 15세가 되면 올림)를 치르고 정식 내인이 되며 이 때 내명부 품계 첩지를 받게 된다. 입궁하는 나이는 배치될 처소에 따라 차이가 있었는데 지밀이나 세수간 나인이 될 생각시가 가장 어려 5세에서 7세 정도였고 어느 정도 체력과 기술이 필요한 침방.수방.소주방.생과방.세답방 나인들은 10세에서 13세 정도였다. 상궁이 되는 나이도 보통 입궁한 지 35년 정도가 지나야 하니 보통은 40세에서 50세 사이가 되어야 하나 지밀이나 세수간 나인은 30대 중후반에 되는 경우도 많았다. 또한 지밀이나 세수간 나인이 아니고는 왕을 접할 기회가 별로 없어 보통 지밀이나 세수간 나인들이 승은을 입고 특별상궁 이상의 후궁 반열에 오르는 경우가 많았다. 나인은 왕이 계신 대전(大殿) 외에도 왕대비(中殿), 대왕대비, 동궁 그 밖의 왕자, 공주의 궁과 그리고 후궁과 별궁, 왕의 사친(私親)의 사당(祠堂)에 배치되었다. 왕과 왕비가 거처하는 곳을 각전(各殿)이라 하고, 대군, 왕자, 공주, 옹주, 후궁, 신주를 모신 곳을 각궁(各宮)이라 하여 별도로 궁인(宮人)이라는 관리를 두었는데 왕족들이 사는 궁들은 각기 사유재산과 그밖에 국가에서 내리는 공물(供物)을 가지고 완전히 독립세대를 이루고 있으므로 그 궁에 소속된 나인들은 물론 그 궁에서 보수를 받았다. 나인(內人)은 대전(大殿), 내전(內殿)에 항시 거주하는 지밀(至密)나인과 침방(針房), 수방(繡房) 등에서 일하는 도청(都廳)나인, 내소주방(內燒廚房), 외소주방(外燒廚房), 생과방(生果房), 세답방(洗踏房), 세수간(洗水間) 등에서 일하는 처소나인으로 크게 나뉘었는데 지밀을 제외한 침방.수방.소주방.생과방,세답방.세수간 등을 6처소라 하였으며 내시부의 환관(내시) 이외의 남자와는 접촉하는 것이 금지되었다.
어쩌다 임금의 눈에 들어 승은을 입으면 특별상궁 이상의 품계와 직첩을 받아 본인은 물론 사가의 식구들도 부귀 영화를 누릴 수 있었지만 이러한 경우는 극히 드물어 대다수의 나인들은 일생을 각기 맡은 소임에 따라 일생을 수절(守節)하며 보내야 했다.무수리나 비자 등의 하녀들은 생각시를 부를 때는 생항아님 혹은 '애기항아님이라고 높여 불렀으며 특히 지밀의 생각시들에게는 왕이 부리는 생각시라 하여 어른 상궁도 '해라'를 사용하지 못하고이러우, 저러우' 투로 말했다. 일반 나인을 생각시나 무수리나 비자 등의 하녀들은 항아(姮娥)님이라고 높여 불렀다.
김씨 항아님 최씨 항아님 식이다.
또 상궁이 나인을 부를 때는 이름 석 자 사이에 '가(哥)'를 붙여 말했다.
박가 복례 서가 영실 하는 식이다.
나인 등 아랫사람이 상궁을 부를 때는 마마(媽媽)님이라고 하는데 예를 들어 침방 김씨 마마님' 식이다.
나인간에는 서로 최씨 형님 김씨 항아님식으로 불렀다. 드라마 <대장금>에서는 이에 따르지 않고 이영애 등 나인이 양미경과 견미리에게 각각 '한 상궁 마마님 최 상궁 마마님이라 부르고, 나인끼리 서로 '장금아 연생아 금영아'라고 부르는 것은 순전히 시청자의 식별을 돕기 위해서라는 게 이병훈 PD의 설명이다.
지밀(至密)나인
지밀이란 대궐에서 가장 지엄(至嚴)하고 중요한 곳으로 말 한마디 새어나가지 못한다는 뜻이다. 왕내외가 거처하는 궁궐 중에서 가장 깊은 곳으로 침전(寢殿)을 말한다. 이들은 우선 왕과 왕비의 신변보호 및 기거(起居), 침(寢), 식(食), 의(衣)등 일체의 시중과 물품관리 및 내시부(內侍府), 내의원(內醫院), 내선사(內膳司) 들과 중요한 교섭을 담당한다. 나인들 중 엘리트라 할 수 있는 지밀나인은 왕을 제일 가까이에서 모시기 때문에 왕의 승은을 입어 후궁이 될 가능성이 가장 많았다. 때문에 겨우 대소변을 가릴 정도의 4, 5세의 나이에 궁으로 데려와 7, 8세 무렵부터 〈동몽선습〉 〈소학〉 〈내훈〉 〈열녀전서〉는 물론 궁체연습까지 철저히 훈육을 한 후에야 지밀나인이 될 수 있었다.
소주방(燒廚房)과 퇴선간(退膳間)나인
소주방은 수라간(水剌間)이라고도 하며 안소주방과 밖소주방으로 나뉜다. 안소주방(內燒廚房)내인은 왕, 왕비의 조석 수라상을 관장하며 주식에 따르는 각종 찬품을 맡아 한다. 밖소주방(外燒廚房)내인은 궐내의 대소 잔치는 물론 윗분의 탄일에 잔치상을 차리며 차례, 고사 등도 담당한다. 지밀에 부속되어 있는 중간 부엌인 퇴선간에서 수라를 지으며 안소주방에서 운반한 음식을 다시 데워서 수라상에 올리고 수라상 물림을 한다. 드라마 <대장금>에서 수라간 상궁과 나인들의 주 활동 공간이 바로 이 소주방과 퇴선간이다.
생과방(生果房)나인
후식에 속하는 것, 즉 생과(生果), 숙실과(熟實果), 조과(造菓), 차(茶), 화채(花菜), 죽(粥) 등을 만든다. 조석 수라상은 소주방내인을 도와서 거행하며 잔치음식의 다과(茶菓)류는 이 곳에서 관장한다.
아침, 저녁으로 왕실의 세숫물을 대령하고, 옻칠한 커다란 함지박에 따뜻한 물을 담아 목욕을 시키는 일과 요강의 시중과 수건, 그릇 세척도 담당하고 내전을 청소하는 일을 하였다. 왕비가 나들이할 때 가마 옆에 서서 시위, 호종하는 수행 비서 역할도 담당했다.
무수리(水賜伊)
수사(水賜)라고도 한다. 수사이(水賜伊)나 무수리라는 말은 원래 몽골어로 '소녀'라는 뜻이다. 고려 말기 원(元)나라의 대고려 속국정책(對高麗屬國政策)에 따라 원나라 ·고려의 왕실이 통혼(通婚)을 하고, 원나라 공주가 고려 왕실에 들어오면서부터 몽골 풍습과 몽골어가 사용되어, 여자종을 무수리라 부르게 되었다. 이후 조선에도 이어져 궁중 용어가 되었다. 주로 나인들의 각 처소에서 물긷기, 불때기 등 험한 잡역을 맡아하는 여인이었으며 대개 기혼자로 아침저녁 출퇴근했다. 앞에 패(牌)를 달고 다녔는데 이 패는 조석의 대궐 통근과 각 별궁간 심부름 다닐 때 아무때나 드나들 수 있는 신분증과 같은 것이었다.
의녀(醫女)
여의(女醫)라고도 하며 여러 읍의 관비(官婢) 중에서 뽑아들여 간단한 진맥이나 침술법을 가르치는 여인들로 출산때 조산부 노릇까지 하였고 궁중잔치에 춤을 추는 기생 역할도 해서 일명 '약방(藥房)기생'이라 불리웠고 여죄인을 잡아가는 등의 여순경 역할도 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일시적으로 의녀 본연의 일을 한 적도 있었지만 효종때 '내의원의 의관의 수를 줄이고 대신 침의와 의녀 22명을 두었다'라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지금의 간호사에 해당하는 전문직으로 보인다. 환자에 대한 독자적인 진료와 처방을 할 수 없었고 철저히 내의원 의관의 지시에 따라야 했던 점으로 보아 드라마 <대장금>의 장금의 경우는 극히 예외적인 일이라 하겠다. 의녀는 결혼도 할 수 있었고 궐 밖에서 거주하며 출퇴근했으므로 궁녀에 포함되지는 않는다.
비자(婢子)
붙박이로 각 나인들의 처소나 상궁의 살림집에 거주하며 시중들었던 하녀를 말한다.
각심이(손님방아이, 방자;房子)
상궁이 비번 날 살게 되는 개인의 처소에서 부리던 가정부·식모·찬모 등의 총칭이다. 이들의 월급은 국가에서 지불하였으므로 방자라고도 한다.
손님
손님은 왕의 후궁으로서 당호가 바쳐지고 독립세대를 영위하는 여인의 집에서 살림을 맡아하던 일종의 가정부에 해당된다. 이런 의미로 볼 때 손님이라는 이름은 궁 밖에서 온 사람이라는 뜻으로 다른 궁중의 시녀들, 곧 무수리나 비자, 각심이 등과는 다르게 예의를 갖추어 주는 말로 보인다.
'역사는흐는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12_1222 [걷고 싶은 서울길] 앵봉산 숲속 여행 구파발 역에서 원점 회귀 .... (0) | 2019.01.02 |
---|---|
[스크랩] 서울 제기동 고려대박물관 선농당 영휘원 홍릉수목원 (0) | 2019.01.02 |
[스크랩] 하늘이 감춘 명당, 천장산(天藏山)에 오르다 (0) | 2019.01.02 |
[스크랩] 하늘이 숨긴 명당, 천장산을 거닐다 (0) | 2019.01.02 |
[스크랩] 하늘이 감춘 명당, 천장산(天藏山)에 오르다 ...2017년 3월 서울학교, 제3기를 마감하며 (0) | 2019.01.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