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흐는다

[스크랩] 사도세자의 영우원(永祐園)

오늘행복스마일 2019. 1. 2. 23:39

 

이 글의 전편(前篇)은 필자의 다른 글 문정전(文政殿)과 사도세자

 

 

영우원(永祐園)

 

1762년 (영조 38년) 윤 5월 21일

 

사도세자가 뒤주 안에서 숨을 거두자 영조는 양주(楊州) 땅 남쪽

중량포(中梁浦) 옆 배봉산(拜峰山) 자락에 묻도록 한다.

 

임금과 왕비 무덤은 (陵)이고 그 이하는 을 붙일 수 없었다.

사도세자 무덤을 처음 배봉산 밑에 쓸 때는 수은묘 (垂恩墓)라고 했다.

그러다가 14년 뒤 1776년 정조가 즉위하자 원(園)으로 승격시켜

영우원(永祐園)으로 부르게 되었다.

 

 

 

영조 ! 사도세자 묘에 곡림(哭臨)하다

 

실록 영조 38년(1762 임오) 7월 23일

 

임금이 사도세자(思悼世子) 묘에 거둥 하였는데,

사도세자의 장례 일이기 때문이었다. 중략

 

5월에 사도세자가 죽고 장사를 7월에 지냈으니 달 수로 석 달 만이다.

예법(禮法)에 천자는 일곱 달, 제후는 다섯 달, 경대부(卿大夫)는 석 달,

사서인(士庶人)은 달을 넘겨 (踰月) 장사한다고 한 바 있다.

 

사서인이 달을 넘겨 장사 지낸다지만 방구께나 뀌어야 그 정도

끌 수 있었을 것으로, 백성은 대충 며칠 지난 뒤 땅에 묻었을 것이다.

다시 실록으로 돌아가..

 

 

임금이 정자각(丁字閣)에 들어가 곡림(哭臨)하고 나서

중략 .

 

..임금이 말하기를 “13일의 일은 종사에 관계된 것이다.

그때 비로소 아버지라 부르는 소리를 들었으니,

오늘은 아버지를 부르는 마음에 보답하려 한다

하나는 내가 20년 부자지은(父子之恩)을 마치려 온 것이고.

후략

 

 

영조 스스로는 무덤에서 한번 울어 부자의 의(義)를 나타냈지만

손자 정조는 장지(葬地)에 따라 가기는커녕 상여 나갈 때 배웅도

또 장사 후 혼백을 맞아들이는 반우(返虞)도 하지 못하게 하였다.

 

정조는 그 뒤 할아버지 영조의 허락을 가까스로 받아 산소에 다니지만,

혜경궁 홍씨는 영이별(永訣)도 못한 채 떠나 보낸 남편 무덤을

33년이 지난 정조 19년 을묘년(1795)이 되어서야

현륭원(顯隆園-지금 융릉(隆陵)으로 처음 찾아 갈 수 있었다.

 

 

 

사도세자 마지막 가던 길을 따라서

 

필자는 창경궁에서부터 배봉산(拜峰山) 영우원(永祐園) 자리 까지

7km를 1762년 7월 사도세자 상여가 가던 길을 따라 걸어 보았다.

 

 

사진 : 대동여지도 중 경조오부.

삼각산에서 배봉산에 이르는 산 줄기와 필자의 답사길을 그려 보았다.

 

창경궁 선인문(宣仁門) 안에서 최후를 맞은 만큼

(필자의 다른 글 문정전과 사도세자 참조)

혼전(魂殿)이 있던 곳, 상여가 나간 곳도 당연히 창경궁일 것이다.

 

 

사진 : 창경궁 홍화문

안에는 그 유명한 창경원 사꾸라가 활짝 피었다.

창경궁 벗꽃이라고 해야 마땅한 것을 모르지 않지만

창경원 야사꾸라가 워낙 입에 익었다.

 

 

그런데 상여는 과연 창경궁 정문인 홍화문(弘化門)으로 나갔을까?

죄인으로 죽은 정황으로 보아 작은 문인 선인문으로 나갔을 것 같기도 하다.

 

어느 문이던 창경궁을 떠난 상여는 원남동 로터리 지나 종로 4가를

지났을  텐데 그 뒤는 동대문-흥인문(興仁門)으로 나갔을까?

 

왕조 시대 일반인의 시체-상여가 나가던 문은 따로 있었다.

사도세자 상여는 시구문(屍口門) 곧 광희문(光熙門)으로 나가

청계천을 건너고 또 다시 건넜을 수도 있지만,

한편 하관(下棺) 할 때 영조가 곡림(哭臨) 한 걸 보면 흥인문일 것도 같다.

 

창경궁 정문 흥화문으로 상여가 나왔는지?

또 도성을 흥인문을 통해 나갔는지?

 

어딘가에 자료가 있겠지만 필자가 쉽게 찾을 수 있는

한중록이나 실록, 승정원일기 등에는 나타나지 않는다.

어쨌던 필자는 다리가 아파서 그냥 동대문(흥인문) 쪽으로 걸어갔다.

 

 

흥인문을 지나면 관우를 모신 동묘(東廟-東關王廟)가 있다.

영조는 사도세자를 묻는 것을 보고 돌아 오는 길에 동묘에 들렀다.

 

실록 영조 38년(1762) 7월 23일

.환궁할 때에 관왕묘(關王廟)를 들렀다.

 

 

아들 앞장세워 놓고 무슨 정신으로 관왕묘를 들렀을까?

 

 

 

사진: 동묘. 3년 전에 찍은 것으로 지금 수리공사 중이다.

 

관왕묘(關王廟)는 삼국지에 나오는 관우(關羽)를 모신 묘(廟 :

墓와 발음은 같지만 한자가 달라 템플-신전, 사당이란 뜻)인데

임진왜란 때 명나라 군사들이 가지고 온 신앙이다.

 

우리나라 성리학자들은 이런 미신을 굉장히 싫어했지만,

이른바 재조지은 (再造之恩)의 명나라가 지으라는 것을 거부할 수 없었다.

동묘는 명나라 신종(神宗-萬曆帝)의 직접 요청(실은 종용)으로 지었다.

 

 

동묘와 신설동 로터리를 지나 용두동에 오면 안암천이 흐른다.

 

 

 

 

안암천 옆  한솔웨딩은 조선 시대 선농단(先農壇)이 있던 자리로

그 후 60년대 까지 서울 사대(師大)가 있었고 또 전에 경춘선(京春線)이

출발하던 성동역(城東驛)이 근처에 있었다.

 

선농단은 임금이 봄에 농사시범을 보이던 곳으로 그 때 모인 사람들에게

쇠 뼈다귀를 푹 곤 국물에 밥을 말아 대접한 것이 선농탕(先農湯)인데

그 후 발음이 변하여 설렁탕이 되었다고 하나, 필자가 보기에 별로

미덥지 않은 (說)이다.

 

선농단-서울사대 옛터를 지나면 경동시장이 나타나고 이어 청량리 역이다.

 

 

 

사진 : 청량리 역앞

 

역 근처 그 유명하던 588 번지는 이제 정비(?)가 다 된듯하고

걸핏하면 불 나던 대왕코너는 롯데백화점으로 변했는데

그 옆으로 청량리 민자역사를 엄청난 규모로 짓고 있다.

 

청량리 역에서 500 미터 정도 동쪽에 떡전교 사거리가 있다.

 

 

사진: 떡전교 사거리

 

떡전거리 는 우리나라 곳곳에 있었다.

수원 아래 병점도 이 떡전거리를 한자로 쓴 것이니,

수원에서 떠나 병점까지 걸어 오면 출출해져서 떡과 막걸리를 사 먹었던 것이다.

흥인문에서 여기 떡전거리가 대략 10리니 떡 사먹고 싶었겠다.

 

팻말에 시조사 삼거리리란 안식교에서 내는 잡지-시조사(時兆社) 건물이

전에 이 일대 랜드마크 이었던 데서 붙은 이름이다.

 

떡전교에서 오른 쪽으로 꺾어 야트막한 언덕을 오르면 바로 서울 시립대고

학교 뒤에 배봉산이 있으니 시립대는 동쪽 기슭이고 위생병원은 서쪽이다.

 

 

서울 시립대

 

인터넷을 찾아 보면 영우원 자리로 전부 서울 시립대를 지목한다.

그러나 거기까지로 구체적으로 서울 시립대 어디에 있었는지는

조사한 사람이 없는 것 같다… 또는 필자가 아직 찾지 못했다.

 

 

 

사진 : 서울시립대에서 본 배봉산

 

서울 시립대 안에는 영우원과 관련 된 그 어떤 표지판도 없다.

정문 경비원도 처음 듣는다 하고, 학생들에게 물어도 고개를 젓고

한 학생만 사도세자와 자기 학교에 대하여 뭔 이야기를 들은 것도 같은데요 할 뿐이다.

 시립대 구내를 몇 십 년 째 산책한다는 한 시민도 사도세자 관련 표지판은 본 적이 없다고 한다.

 

 

 

배봉산에 이르는 산줄기는 다음과 같다.

 

 

백두대간이 금강산 북쪽에서 나온 가지 하나가 한북정맥(漢北正脈)이다.

한북정맥은 강원도, 경기도를 휘감아 서울 근처에 와서 불암, 수락, 도봉을

지나 삼각산에 맺힌다.

 

 

 

사진: 구글로 본 배봉산

 

 

삼각산에서 줄기 하나가 칼바위 능선으로 내려와 화계사(花溪寺),

수유리 고개(水踰峴)를 지나, 오패산을 지나고 장위동고개를 넘어 석관동,

천장산을 지나 배봉산에 이른다.

 

 

나중 정조(正祖)가 흉지(凶地)라고 아버지 무덤을 수원으로 옮기지만

뒷산은 한북정맥과 이어지고, 앞에 있는 물은 의정부 불곡산 발원

중랑천이니 제법 산수가 배합되어 그런대로 왕실 능원이 들어설 만 했다.

그러하기에 인근 천장산 아래 전 중앙정보부자리에 사도세자의 큰아버지

경종(景宗)의 의릉(懿陵)을 썼던 것이다.

 

 

 

 

 

배봉산에 올라가 산세를 살펴 내가 지관이라면 어디에 썼을까? 하고

궁리해 보아도 풍수에 대하여 워낙 아는 것이 없어 감이 잡히지 않는다.

 

배봉산 서쪽은 서울 시립대,  동쪽은 위생병원인데

물을 앞에 둔 위생병원 쪽이 아니었을까? 하는 짐작을 해 볼 뿐이다.

 

 

 

사진: 배봉산 공원 지도

 

만일 서울시립대 구내라면 아래 사진의 위치가 적당했을 것 같다.

 

 

 

 

 

 

영우원(永祐園)

 

정조는 즉위하자마자 수은묘 (垂恩墓)를 영우원(永祐園)으로 승격시킨다.

 

 

실록 정조 즉위년(1776 병신) 3월 20일

 

사도세자(思悼世子)의 존호(尊號)를 추후 하여 올려 ‘장헌(莊獻)’이라 하고,

수은묘의 봉호(封號)를 ‘영우원(永祐園)’이라 하고, 사당을 ‘경모궁(景慕宮)’

이라 하였다. 후략(後略)

 

 

 

다시 13년 뒤 1789년 (정조 13년) 현륭원(顯隆園)

 

1762년 영우원에 사도세자를 묻은 지 27년 뒤인 1789년 (정조 13년)

정조는 수원을 현재 위치로 이전(移轉)하고, 원래 읍치(邑治)가 있던

화산(花山) 밑으로 아버지 산소를 옮기며 이름을 현륭원(顯隆園)으로 바꾼다.

 

 

융릉(隆陵)

 

다시 100 년 뒤 1899년 광무 3년

사도세자를 장조(莊祖)로 추존하니 비로소 능이 붙어 융릉(隆陵)이 되었다

 

 

사도세자의 영우원이 옮겨가 파묘가 된 땅에는 정조 후궁으로

순조(純祖)를 낳은 수빈 박씨 (綏嬪 朴氏)의 산소 휘경원(徽慶園)이 들어왔다.

지금 휘경동 이름은 이 휘경원에서 나왔다.

휘경원은 철종 14년 (1864) 남양주 진접읍 부평리로 천장(遷葬)했다.

%EA%B8%80%EC%9D%98%20%EB%82%98%EB%A8%B8%EC%A7%80%20%EB%B6%80%EB%B6%84%EC%9D%84%20%EC%93%B0%EC%8B%9C%EB%A9%B4%20%EB%90%A9%EB%8B%88%EB%8B%A4.
출처 : 구룡초부
글쓴이 : 구룡초부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