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 조선의 혼이 지다
2005년 11월 『태종, 조선의 길을 열다』를 시작으로 저널리스트의 시선과 필치로 조선 왕조 중 후대가 반드시 주목해야 할 왕을 선정해 그들의 ‘리더십’을 본격 분석하는 "이한우의 군주열전 시리즈" 마지막 권 『정조, 조선의 혼이 지다』이다.
『정조, 조선의 혼이 지다』는 18세기 ‘조선의 르네상스’를 연 임금으로 평가되는 정조를 『실록』을 재점검하는 정공법으로 탐구하고 있는 역사서이다. 저자는 개인적 행(幸)·불행(不幸)이 국가적 문제로 확대되었을 때 어떤 결과가 빚어지는가를 화두로 정조 탐구를 시작한다.
정조의 즉위 첫마디는 “나는 사도세자의 아들이다”였다. 반역을 꾀하는 사도세자(아들)와 정권을 내줄 수 없는 영조(아버지), 그리고 눈앞에서 생부의 죽음을 목격한 정조(손자), 이 비극의 가족사는 조선 후기 최고의 군주라 일컬어지는 정조의 정신적 토대가 된다. 저자는 정조의 개혁과정을 살펴보며 ‘보수(保守)의 정도(正道)를 회복하는 개혁’을 행했다고 평가한다. “최후의 중세인일 수는 있어도 최초의 근대인에는 도달하지 못했다”고 바라보며 정조에게 비판의 시선을 가하고 있는 역사서이다.
조선후기에 태평성대를 일군 성군으로 묘사된 정조에 대해 이야기하려 한다. 정조는 많은 업적을 남겼지만 그에 못지 않게 신하들과의 갈등도 많았다. 정조가 집권한 시절이 당파 갈등의 절정이 아니었나 싶다. 세손시절부터 죽음을 무릅쓴 고비를 여러 번 넘겨야 했던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 또한 당쟁의 희생양으로 목숨을 잃어야 했다. 이런 불우한 환경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세손 정조는 가슴속 한 구석에 한이 서려있었을 수도 있다. 그는 집권하여 자신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라고 선언을 한다. 영조는 아들 사도세자를 죽인 후에 정조를 일찍 요절한 장남 효장세자의 대통을 잇게 한다. 이런 영조의 결정에 정조는 반기를 들었을 수도 있다. 아니면 맺힌 한이 겉으로 드러난 행동으로 볼 수도 있다. 정조가 집권하자마자 이런 선언은 단순히 넘길 문제가 아니었다. 사도세자 죽음과 관련되어 피바람이 휘몰아칠 수 있는 대목이었기 때문이다. 사도세자의 죽음과 관련된 여러 가지 설이 있기는 하지만 그 중 한가지는 사도세자가 노론과 맞섰기 때문이라는 말도 있다. 영조의 말대로라면 광증이 심각해져 나라를 보존하기 위해 아들을 죽였다고 하는데 그 실상을 파악하기란 쉽지가 않다. 단순히 한가지 사실만으로 그 때의 사건을 단정짓기는 석연치 않은 점이 많다. 이 책에서는 정조의 정치적 한계를 이야기한다. 아버지 사도세자의 그늘에서 집권기간 내내 벗어나지 못했다고 가혹한 혹평을 한다. 수원화성 건설도 사도세자와 연관이 있고 어머니 혜경궁 홍씨 집안을 가혹하게 처벌한 것도 사도세자의 죽음과 관련이 있다. 또한 정조의 왕위 계승을 반대하는 세력이었던 정후겸 등도 제거한다. 비단 보복성의 조치만 취한 것은 아니다. 정조 개인을 살펴보면 학문적 깊이가 세종대왕에 버금갈 정도로 학습과 훈련이 잘 되었다고 한다. 즉위하면서 개혁과 대통합을 위한 탕평책을 시도했으나 절반만 성공했다는 평가도 있다. 이유는 그가 죽은 뒤로 집권한 노론 벽파에 의해 모두 폐기되었고 끝까지 개혁을 완수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는 정조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도 존재한다. 사도세자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한 한계 때문에 집권시기 내내 그의 정책에 발목을 잡히게 된다. 안타까움과 그의 개혁이 성공했다면 조선의 위상은 어떻게 변했을지 모른다. 조선이 외세에 대항할 수 있는 내공을 쌓을 절호의 기회를 잃어버린 것일 수도 있다. 정조의 집권시기는 우리민족에 있어서 굉장히 중요한 시기였다. 나라가 한 단계 도약하거나 퇴보하거나 결정하는 시기인데, 우리는 퇴보를 선택하게 된다. 이 때문에 우리는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적 사실들을 겪게 된다.
저 : 이한우(LEE, HAN-WOO, 李翰雨)
1961년 부산에서 태어나 고려대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 철학과 석사 및 한국외국어대 철학과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뉴스위크 한국판』 『문화일보』를 거쳐 『조선일보』에서 논설위원을 지낸 뒤 문화부 학술 및 출판 담당 기자로 일했다. 독일 뮌헨에서 연수를 하던 중 이론보다 한 사회의 ‘기본’의 중요성에 주목하면서 대한민국의 뿌리, 조선의 뿌리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 이런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7년에 걸쳐 『조선왕조실록』을 완독했고, 그 성과를 묶어 『태종 조선의 길을 열다』 등 ‘이한우의 군주열전(전6권)’ 시리즈를 펴냈다.
태종과 세종의 정치 철학에 영향을 준 송나라 학자 진덕수의 『대학연의』를 번역하여 국내에 소개하기 위해 본격적으로 한문 공부를 시작했다. 한문 공부를 위해 사서(四書)의 해설을 겸한 번역서를 집필했고 5년에 걸친 작업은 『논어로 대학을 풀다』 등 ‘이한우의 사서삼경(전4권)’ 시리즈로 완성됐다. 경전 공부로 단련된 한문 지식을 기반으로 『대학연의(상?하)』를 출간했다. 이 책으로 인해 ‘리더십’에 새로이 눈떴고, 사대부의 심신 수양서가 아닌, 군주의 리더십 함양의 필독서로써 『논어』에 접근하기 시작했다.
지금은 언론인의 길을 접고 ‘논어등반학교’를 열어 일반인을 상대로 『논어』를 강의하며 『한서』와 『조선왕조실록』 등을 현대인의 눈높이에 맞도록 번역하고 있다. 이것은 단순한 고전 번역이 아니라 지난 100여 년간 단절된 한문 번역 문화를 온전히 되살림과 동시에 우리 고전에 담긴 살아 있는 정신을 되살리는 일이다. 그 밖의 저서로는 『조선을 통하다』 『슬픈 공자』 『왜 조선은 정도전을 버렸는가?』 『고려사로 고려를 읽다』 등이 있으며, 역서로는 『역사의 의미』 『해석학적 상상력』 『해석학이란 무엇인가』 등이 있다.
책속으로
정조가 즉위하는 날 “나는 사도세자의 아들”임을 선포하고서 이를 실현하기 위해 첫 번째로 취한 가시적 조치는 영조의 장례를 위해 설치한 빈전도감·국장도감·산릉도감을 책임지는 총호사 신회를 즉위 열흘 만인 3월 19일 파직한 것이다.
바로 다음날 정조는 할아버지보다는 아버지 쪽으로 방향을 잡은 자신의 마음을 다잡기라도 하듯이 할아버지의 상중(喪中)임에도 불구하고 사도세자의 존호(尊號)를 올려 ‘장헌(莊獻)’이라 하고, 사도세자가 묻혀 있는 수은묘의 봉호(封號)를 ‘영우원(永祐園)’, 사당을 ‘경모궁(景慕宮)’이라 바꿨다. 격을 한 단계 높이려는 것이었다.
정조는 서둘렀다. 3월 23일 사헌부 대사헌으로 전격 임명한 이계의 청을 받아들이는 형식을 취해 3월 25일 정후겸을 함경도 경원으로, 추종세력인 윤양후와 윤태연을 각각 경상도 거제도와 전라도 위도로 귀양 조치했다. 당초 이계는 정후겸을 비롯해 화완옹주와 핵심 추종세력들을 모두 처형할 것을 청했다. 그러나 정조는 아직은 때가 아니라며 속도조절의 필요성을 언급한다. “공손하게 입을 다물고 있어야 하는 때라 많은 말을 할 수 없다. 정후겸은 멀리 귀양 보내고 옹주는 이미 사제(私第-궁궐 밖의 집)로 나갔으므로 논할 것이 없다.” ---2장 과거청산, 보복의 칼을 휘두르다 중에서
정조의 탕평 의지는 당연히 일찍부터 시작됐다. 집권하자마자 폭풍우처럼 휘몰아쳤던 척리제거로 어느 정도 안정기반을 확보했다고 ‘착각’한 정조는 즉위년 9월 22일 색목(色目-당파)의 분쟁을 엄격하게 금하는 하교를 발표했다. 척리제거 못지않게 색목철폐 또한 세손 시절부터 정조가 구상했던 정국운영의 중대한 원칙이었음을 보여준다.
정조는 일단 당쟁의 큰 뿌리를 송시열과 윤증의 충돌에서 찾았다. ‘회니논쟁’이란, 회덕에 살았던 송시열과 니산에 살았던 윤증이 윤증의 아버지 윤선거의 묘갈명을 송시열이 써준 문제로 충돌하면서 노론과 소론이 결정적으로 갈라지게 된 사건을 뜻한다. 정조는 뒤에 보게 되겠지만 한편으로는 철두철미한 송시열주의자였다. 참고로 숙종은 말년의 정치적 필요에 따른 노론 수용을 제외한다면 전반적으로 소론 지지자였다. 영조의 경우 탕평을 했다고는 하지만 태생부터 경종을 지지했던 소론과는 뜻을 합칠 수 없었다.
---5장 가까스로 틔운 개혁의 물꼬 중에서
소위 ‘문체반정(文體反正)’이라 부르는 사건이 본격적으로 조정을 뒤흔드는 사안으로 불거진 것은 그로부터 5년 후인 임자년(1792년 정조 16년)이었다. 이때는 정조의 개혁의지가 가장 강할 때였다. 그해 10월 19일 정조는 사신으로 청나라에 가는 박종악과 대사성 김방행을 접견한 자리에서 패관문체의 심각성을 지적하였다. 그리고 그들에게 귀국할 때 수행원들이 패관문체로 된 책을 반입하지 않도록 철저하게 관리 감독할 것을 명한다. 정조는 박지원 등으로부터 시작된 패관문체와 새로운 글쓰기가 문풍을 비속하게 만들고 있다고 보고 있었다. 게다가 탁월한 지식인답게 정조는 “문풍(文風)과 세도(世道)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꿰뚫고 있었다. 세도를 바로 잡는 데 온 정력을 쏟았던 정조로서는 근치(根治)를 위해서는 문풍을 바로 잡아야 한다고 보고 있었던 것이다.
사신으로 떠나는 신하들에게 정조는 느닷없이 “성균관의 시험지 중에 만일 한 글자라도 패관잡기에 저촉되는 것이 있으면 그것이 아무리 주옥 같을지라도 빼버리고 그 사람의 이름을 확인하여 다시는 과거를 보지 못하게 할 것”을 명했다. 실제로 그런 일이 있었던 것이다. 얼마 전 유생 이혹이 정조가 내린 제목에 응해 올린 글에서 패관소설체로 썼다가 처벌당했다.
---7장 혁명보다 어려운 개혁 : 천주학의 도래와 문체반정 중에서
물론 정조의 삶은 많은 사람들에게 동정심을 불러 일으키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그런 동정심 때문에 실패한 군주를 성군(聖君)으로 추앙하는 것은 지나치다. 역사를 보는 데 동정심이 파고들 공간은 없다.
정조는 이름 그대로 바른 임금이고자 했다. 그러나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생각과 말만 무성했다. 『정조실록』은 그 어떤 시대보다 읽어내기가 쉽지 않았다. 정조의 말이 워낙 현란했기 때문이다. 비판적 해독을 거듭하면서 읽어야 했다. 그의 시대는 한마디로 외화내빈(外華內貧)이었다. 그런데 200년이 지난 지금 여기저기서 다시 정조를 이야기한다. 착잡하다. 그들의 이야기 또한 결국은 외화내빈으로 판명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태종·세종·성종·선조·숙종 그리고 이번에 정조가 마무리됐다. 세종의 위대함이 새삼 크게 와닿는다.
수신제가에 성공했으나 치국평천하에 좌절하다
정조는 조선의 국운을 어떻게 좌우했는가?
국가의 개혁과 인간적 고뇌 사이에서 갈등한 비운의 군주
거듭되는 역모 속에 일궈낸 탕평·초계문신·장용영·화성건설도
서학과 북학의 유입이 가져온 극심한 가치관의 혼란에는 무력했을 뿐!
새 시대의 비전보다 과거로의 회귀를 지향한 리더의 최후를 되돌아본다
‘임금과 스승은 하나’라는 ‘군사(君師)’로서 학문과 정치를 동시에 아우르겠다는 의욕은 넘쳤으나 경연에 불성실해 빈축을 사고, 현란한 언변으로 신하들에게 혼란을 준 정조는 임금 중 최초로 안경을 썼지만 그외 신문물 탐구에는 무심했고, 탕탕평평을 외치면서도 자기편이 될 만한 인물로만 인재풀을 구성했다. 게다가 집권 24년 중 절반은 아버지 복수에, 나머지는 그 뒷수습에 급급했다.
외화내빈(外華內貧). 정조 자신이나 그를 높이 평가하는 후대까지 이 한마디로 일갈하는 저자라 해도 정조가 수신제가에 성공적이었다는 데 이견은 없다. 다만 국왕이 반드시 갖추어야 할 치국과 평천하의 경지에까지는 도달하지 못했음을, 학문적으로 우수하다고 해서 성군(聖君)으로 평가해서는 안 됨을 주장한다.
사실 정조 시대는 정치적으로 안정적이지 못했다. 즉위 1년째 임금이 머물던 존현각에 영조 추종세력이 침범했고, 5년째 정조에게 아들이 없는 것을 틈타 역모가 이뤄졌으며, 6년째 『정감록』 등의 예언서가 성행하면서 임금이라는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행태가 발견되었다. 게다가 8년째에는 선왕들을 모신 사당관리가 임금을 욕하는 쪽지를 적어 돌려 발각되고, 10년째 외아들 문효세자가 죽은 직후 종실인 이담이 의문의 죽음을 당해 또다시 논란에 휩싸였다.
집권하자마자 과거를 청산하겠다며 어머니 홍씨 집안이나 할머니 정순왕대비의 친족을 제거함으로써 혈육들을 내쳤으나, 개인적인 복수의 칼날이 무뎌질 집권 15년째 반(反) 척신의 원칙을 버리고 혈육을 우의정으로 제수했다. 게다가 연이어 터진 역모들, 그리고 과신(過信)했던 청년 신하 홍국영의 무소불위 행태, ‘개혁의 기수’로 들어앉힌 채제공 등 탕평하지 못한 인사(人事)를 벌이면서도 탕평정책을 부르짖다 집권 10년째 실패를 인정했다.
사도세자의 묘소를 현륭원으로 꾸리고, 제2의 신도시로 화성을 건설함으로써 정순왕대비와의 권력다툼 양상을 초래했고, 이는 마침내 백성을 궁핍하게 하고 국가재정을 고갈시켰다는 평가를 받는 근거가 된다. 인재양성기관으로 설립한 규장각으로 영조의 서얼허통 정책을 이었으나 백성들이 왜 천주학과 예언사상의 파도에 휘말려 반란을 꾀하는지, 왜 선비들이 북학에 몰두하는지를 알아보려 하지 않았고, 변화하는 백성의 마음을 다독이거나 새 시대의 비전을 제시하려는 움직임도 없었다.
저자의 의견은 최근의 ‘정조 열광’ 상황에서 어쩌면 매우 부적절할지 모른다. 공중파 TV는 그의 일생을 드라마로 형상화해 영웅시하고, 케이블 TV나 각종 책들은 ‘『실록』에 존재하지도 않는’ 정조암살설을 들고 나와 역사를 왜곡하는 데 일조하는 때이기에 더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하지만 역사란 사실(事實)을 사실(史實)로 기록한 것이라는 데서 저자는 지금이야말로 정조를 제대로 봐야 하는 때이며, 개인적 원한이 국가정책을 좌우하는 형국을 띠어서는 안 됨을 확인시킨다.
‘대한민국 리더십의 뿌리를 찾아서’ 역대 조선왕들을 선정해 리더십을 본격 분석하는 <이한우의 군주열전>은, 리더로서의 자질과 품격을 두루 갖춘 군왕으로 그 누구도 세종을 따르지 못했음을 밝히며 이제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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