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흐는다

[스크랩] 유네스코 등재 세계문화유산 화성

오늘행복스마일 2019. 1. 2. 23:54


■ 목 디스크 수술이 잘 되어서 침대에만 누워 있던 다리 근육을 강화 시키기 위하여 수원 화성을 한바퀴 돌면서 자세히 성곽을 살펴 보았다.  수원 화성이  아름다운 성인줄 알았지만 정말 아름다운 성이였다....■


수원화성(華城)


사적 제3호. 수원화성은 1796년에 축성된 읍성의 하나이다. 그러나 다른 지방 읍성들과의 차이점은 정조가 양주에 있던 사도세자의 능인 영우원(永祐園)을 화산(花山: 지금의 화성시 안녕동에 있는 융건릉)으로 옮겨 명칭을 현륭원(顯隆園)으로 고쳤으며 능행을 위한 행궁을 화성 안에 건축하였다는 점이다.




정조는 1789년(정조 13)에 사도세자의 무덤인 영우원(永祐園)을 수백 년간 수원도호부가 있던 화산(花山)으로 옮겨 현륭원(顯隆園)이라 개명(改名)하고 수원 도읍을 새 장소인 지금의 팔달산 아래로 옮기도록 하였다. 그리고 수원부로 부르던 고을 명칭을 화성(華城)으로 고쳐 부르도록 하였다. 이때부터 줄곧 수원은 화성이란 이름으로 사용되었으나 1895년 지방 관제개편 과정에서 다시 수원군으로 고쳐 부르게 되었고 지금은 수원시로 불리고 있다.


수원부를 옮기고 정조 17년(1793)부터 화성 축조가 본격적으로 준비되어 이듬해 정월부터 시작해 2년 반 만인 1796년에 완성을 보게 되었다. 성벽 전체 길이는 당초 정약용이 생각했던 4㎞보다 늘어난 5.4㎞ 정도이다. 성곽 시설에서도 적대나 누조, 공심돈, 포루 등과 같이 다른 성곽에서는 볼 수 없는 새로운 시설이 많이 도입되었다.


성벽은 돌로 쌓았으며 높이는 지형에 따라 차이가 있으나 4∼6m 정도이고 성벽 위에는 1m 정도 높이의 여장을 두고 여장에는 총안을 뚫었다. 성벽은 위로 올라가면서 배가 안으로 들어가는 규형(圭形) 쌓기를 기본으로 했다. 성벽에는 4개의 성문을 두었고 암문 5개를 설치해 통행토록 하였다. 성벽으로 둘러싸인 중앙에는 행궁이 자리 잡았다. 화성이 위치한 지세는 서쪽에 팔달산이 있고 그 반대쪽인 동쪽에도 나지막한 구릉이 있으며 이 동서 경사지 사이를 북에서 남으로 개천이 흐르고 그 주위에 약간의 평지가 펼쳐진다. 화성을 비롯해 우리나라 성은 자연지세를 이용해 불규칙한 형태로 쌓아나가는 것이 특징이다.


성문은 동서남북에 4개가 있는데 북문이 장안문이고 반대 남쪽이 팔달문이다. 동서에 청룡문과 화서문이 있다. 남북문은 중층문루로서 도성문루에 버금가는 규모와 형태를 갖고 있다. 암문은 깊숙하고 후미진 곳에 적이 알지 못하는 출입구를 내서 사람이나 가축이 통행하고 양식을 나르는 통로이다. 화성에는 모두 5곳에 설치되어 있으며 대개 벽돌을 많이 사용했고 원여장 등의 특수한 장식적인 모습을 볼 수 있다. 암문에는 보통 건물을 세우지 않지만 서남암문에만 예외적으로 포사를 설치했다. 이외에도 수문 2곳, 적대 4곳, 노대 2곳, 공심돈 3곳, 봉돈 1곳, 치성 8곳, 포루 10곳, 장대 2곳, 각루 4곳, 포사3곳 등의 시설이 있다.

의의와 평가

화성 축성은 정조의 개혁적 정치노선과 당시 실학을 바탕으로 한 합리적 사상 및 자유시장경제체제가 만들어낸 근대적 생산방식에 의한 건축공사였다는 것이 특징이다. 또한 화성 축성을 계기로 한국 근대건축이 시작되었다는데 의의가 있다.






경기도청 벚꽃 길




수원 화성관광 안내소



수원 성곽


수원 성곽 산책길

삼치






























불취무귀


불취무귀(不醉無歸)

취하지 않은 사람은 집에 못 간다


조선의 왕들 중 정조는 술을 굉장히 좋아했다. 특히 서민들이 즐겨마시는 탁주를 좋아했으며 주안상에는 기름진 고기 안주 보다는 민초들이 먹는 소박한 푸성귀 안주를 즐겼다. 근엄한 왕이 아니라 백성들과 술잔을 기울이며 그들의 말을 귀담아 듣겠다는 인간 정조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정조는 어느날 과거시험에 합격한 성균관 유생들을 창덕궁 희정당으로 초대한 후 “옛 사람들은 술로 취하게 한 뒤에 그 사람의 덕을 살펴본다고 하였다. 오늘 취하지 않은 사람은 결코 돌려보내지 않겠으니 각자 양껏 마시도록 하라” (정조실록)고 했다. ‘불취무귀(不醉無歸)’ 정조의 건배사로 유명한 글귀다. 정조의 이 말은 “백성 모두가 풍요로운 삶을 살면서 술에 마음껏 취할 수 있는 그런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어 주겠다”는 의지를 표현 한 것이다.

이와함께 ‘불취무귀’라는 글귀에는 심각한 붕당 간 대립을 완화하려는 정조의 고육지책이 숨어있기도 하다. 정조는 당시 노론과 서론이 서로 대립각을 세우며 ‘당색이 다르면 조문(弔問)도 하지 않는다고 할 정도로 서로를 원수보듯 해 주요 국책사업이 번번이 무산되는 지경이었다.

정조는 어떤 식으로든지 갈라진 사람들의 마음을 하나로 묶어야 했고 술자리는 그러한 의미로 마련된 것이었다. 정조는 여러 붕당의 젊은 유생들을 한 자리에 모이게 해 왕이 친히 내린 술을 마시고 서로 어우러지게 하는 계기를 만들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이러한 정조의 노력에도 붕당간 협력은 잘 이뤄지지 않았다.








백선행(白善行)    1848(헌종 14)∼1933. 여성 사회사업가.


생애 및 활동사항

경기도 수원에서 백지용(白持鏞)의 장녀로 출생하여 어려서 평양 중성(中城)에 옮겨 살았다. 7세에 부친을 여의었으며, 편모 김씨(金氏) 슬하에서 자라며 효행이 남다른 가운데 14세 때 안재욱(安裁煜)과 가정을 이루었다. 그러나 2년 만에 남편이 세상을 떠나자 친정으로 돌아와 홀어머니를 모시고 온갖 궂은 삯일을 도맡아 하면서 청상과부로 재산을 모으기 시작했다.


어머니 마저 여읜 뒤 더욱 근검절약하며 억척스러운 과수로 화장을 제대로 하는 일도 없이 불철주야 천한 일을 하여 큰 돈을 모아들였다. 그 뒤 평양 근교인 강동군(江東郡) 만달면(晩達面) 승호리(勝湖里) 일대의 광대한 황무지를 사들여 1900년대에 일본인 시멘트생산업자 오노다[小野田]에게 넘기면서 굴지의 평양 갑부가 되었다.


만달산(晩達山) 자체가 시멘트 원료인 석회 석산이었던 관계로 막대한 치부를 하게 되자 자선사업에 희사할 뜻을 굳혔다. 1908년 첫 공익사업으로 대동군(大同郡) 용산면(龍山面) 객산리(客山里) 솔뫼다리[松山橋]를 돌다리로 새로 부설하여 ‘백선교(白善橋)’라 이름하게 되었다.


1919년 3·1운동에 충격을 받고 1924년 모든 재산을 사회사업에 바치기로 공식발표한 뒤 당시 30만 원의 거금을 출연하여 평양 일대의 각급학교 지원의 육영사업과 시민들을 위한 문화시설로 대공회당(大公會堂)을 신축하였다. 대동강 옆의 이 웅대한 석조건물은 ‘백선행기념관’이라 하여 평양의 명소로 지목되었다.


1925년 광성소학교(光成小學校)에 1만 4000여 평과 숭현여학교(崇賢女學校)에 전답 2만 6000평을 기증하여 재단법인의 기초를 세우는가 하면, 1927년 미국선교사 모펫(Moffet, S. A., 馬布三悅)이 설립한 창덕소학교(彰德小學校)에도 부동산을 내놓아 교육재단을 만들도록 주선, 기백창덕보통학교(紀白彰德普通學校)로 발전시켰다.


이처럼 민족교육에 헌신하는 한편, 근우회(槿友會) 평양지회의 사회활동에도 도움을 주었다. 그러나 보다 보람 있는 봉사사업의 소망을 품고 평양사회의 지도자 조만식(曺晩植)과 뜻을 같이하여 일본인들의 공회당인 평양 부민관보다 큰 민간문화운동의 집회장으로 도서관 겸용의 공회당 신축을 위한 백선행기념관 재단법인을 설립하였다.


이 재단법인의 재단이사장을 맡으면서 조만식·오윤선(吳胤善)·윤주일(尹柱逸), 그리고 최경렴(崔敬濂)을 이사로 하여 1927년 3월 10일 연광정(練光亭)이 올려다 보이는 대동문가에서 기념관 기공식을 하고, 3층의 화강암 건물을 지어 이듬해 9월 준공, 1929년 5월 7일 성대한 개관식을 거행하였다.

329평 대지 위에 연건평 총 324평의 백선행기념관 1층에는 1,0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공회당, 2층에는 500명 수용의 집회실과 응접실·회의실·오락실 시설을 하고, 3층에는 도서관시설도 완비하였다.


1931년 12월 동상 건립이 추진되어 기념관 앞에 백선행동상이 1932년에 세워졌고, 이 무렵 숭현여학교와 광성보통학교에도 기념비가 세워졌다. 86세로 죽었으며 여성으로는 최초로 사회장이 엄수되었다.






남수문(南水門)은 북수문과 마찬가지로 교량과 수문의 역할, 비상시에는 군사시설로 활용할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 정조 18년 2월 28일 공사에 착수했다가, 이듬해 11월까지 공사를 중단되었다가 다시 공사를 재개하여, 1796년 (정조 20년) 1월 16일에 홍예가 이루어졌다.


남수문은 화홍문과 마주서서 물줄기의 흐름을 인도하도록 설계되어 있으며, 석축으로 9칸의 홍예를 틀고 철전(鐵箭)을 설치하여 잠가두는 것이 화홍문의 제도와 같았다. 남수문은 9개의 홍예문 위에는 통로를 만들고 여장을 높이 쌓았는데, 돌기둥 8개가 돌다리를 떠받들게 되어 있다. 또한 장포(長?)라는 전돌로 만든 긴 포를 설치했는데 길이는 수문의 다리와 같고 폭은 다리의 3분의 2로 해서, 이 안에 수백 명이 들어갈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다. 또 이곳에는 많은 포혈을 설치하여 군사시설로서도 활용할 수 있도록 하였다.


수원시는 수원 화성이 1997년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뒤 남수문 복원을 위해 지난 2004년 남수문터에 대한 발굴조사에 나섰고, 2010년 9월부터 복원공사에 들어갔다. 2010년 6월 공사를 시작한 남수문 복원사업은 길이 29.4m, 너비 5.9m, 전체 높이 9.3m로, 수문 아래쪽은 9칸 홍예수문(무지개다리)을 연결한 형태이고 수문 위쪽은 전돌을 이용해 원형 복원됐다













동남각루[편집]


동남각루(東南角樓)는 남수문 바로 옆에 있으며,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으며 성벽이 꺾인 모퉁이에 있어서 주위를 관찰하기가 쉽다. 1796년 (정조 20년) 7월 25일에 준공되었다













포루(砲樓)와 포루(?樓)[편집]

포루(砲樓)는 포병용 진지로 벽돌로 짓고 포루(?樓)는 보병용 진지로 치성 위에 지은 목조 건물이다.




봉돈(烽墩)[편집]

봉돈


봉돈(烽墩)은 불을 비추어 행궁을 수비하고 성을 수비하며 주위를 정찰하여 사태를 알리는 군사 및 교통상의 신호 시설물이다. 봉돈은 화성 동문의 서남쪽에 있으며, 5개의 연기구멍을 갖추어 신호를 보낼 수 있도록 되었다. 1796년 (정조 20년) 6월 17일에 완공되었다.


성벽 일부를 밖으로 돌출시키고 하층은 석축으로 쌓고, 위는 전축으로 성벽보다 높이 쌓아 위쪽에 여장을 두었다. 내부는 3층의 계단식으로 만들어서 가장 높은 곳에 5개의 횃불 구멍인 화두(火竇)를 설치하였다. 여장 3면에는 포혈 18개를, 그 아래 3면 벽성(?城)에는 총안 18개와 누혈(漏穴) 1개를 뚫었다.


밤에는 불, 낮에는 연기로 신호를 보냈다. 평상시에는 남쪽의 첫째 것에만 사용을 했다. 나머지 4개는 긴급한 일이 없으면 횃불을 들거나 연기나게 하지 않았다. 적이 나타나면 2개, 경계에 접근하면 3개, 경계를 침범하면 4개, 그리고 적과 접전시에는 5개의 봉화를 올렸다.












동포루[편집]

동포루(東砲樓)는 봉돈의 근처에 위치하고 있으며, 1796년 (정조 20년) 7월 16일에 준공되었다. 포루는 3중층으로, 정면 1칸, 측면 3칸의 규모이다. 하층과 중층의 벽은 돌출부 3면을 전축했고, 성내측면은 석축으로 했으며, 외부의 포혈과 총안을 두었다. 상층 여장의 타구(?口) 및 전안(箭眼)은 서포루와 비슷하다



치(稚)[편집]

동이치

치는 철(凸)자 모양으로 성벽 밖으로 돌출시켜, 좌우 방향에서 접근하는 적을 방어하기 위한 방어 시설물 중 하나이다. 치라는 이름은 '꿩'이란 뜻으로 본래 꿩은 제몸을 숨기고 밖을 엿보기를 잘한다는 까닭에서 그 이름을 땄다. 화성에는 남치(南稚), 용도일·이치, 서일치(西一稚), 서이치(西二稚), 서삼치(西三稚), 동일치(東一稚), 동이치(東二稚), 동삼치(東三稚) 등이 있다.




동일포루[편집]

동일포루(東一?樓)는 창룡문 남쪽에 위치하고 있다. 건물은 1796년 (정조 20년) 7월 10일에 준공되었다. 포루는 정면 1칸, 측면 3칸의 중층으로 3량의 우진각지붕을 갖추었다. 하층 주위의 3면은 여장으로 둘려져 있고, 원근총안(遠近銃眼)을 내었다. 상층 동측 2칸은 마루를 갈고 1칸은 통 2층으로 하여 목조 사다리를 설치하였다







창룡문(蒼龍門)은 성의 동문이다. 이름은 음양오행설에서 푸를 '창'자가 동쪽을 의미한다는 데에서 이름이 유래하였다. 한국전쟁 당시 크게 소실된 것을 1978년 복원하였다. 홍예의 크기만을 놓고 볼 때는 장안문보다 더 크다.


서남으로 행궁과 1,040보 떨어져 있고, 안팎으로 홍예를 설치하였는데, 안쪽은 높이가 16척 너비가 14척, 바깥쪽은 높이가 15척 너비가 12척, 전체 두께는 30척이다. 안쪽 좌우의 무사는 각각 아래 너비가 30척 높이 18척 5촌이며, 좌우의 와장대(臥長臺)는 길이가 각각 20척이고 돌계단은 각각 14층이며 너비는 9척이다. 바깥쪽 좌우 무사의 너비는 각각 25척 높이는 18척이며, 안팎 홍예 사이의 좌우 무사는 높이가 각각 17척, 양쪽 선문 안은 쇠로써 빗장을 설치하였다.


창룡문을 건축한 분들의 이름이 성벽에 기록되 있다. 19명이 이  문을 만들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동장대[편집]

동장대(연무대)

동장대(東將臺)는 성의 동쪽 동북공심돈과 동암문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 1795년 (정조 19년) 7월 15일에 공사 착수, 8월 10일에 상량, 8월 25일에 장대 건물을 완공하였다.


이 장대의 지형은 높은 곳은 아니지만 사방이 트여 있고, 등성이가 험하게 높이 솟아 있는 곳으로 동쪽 구릉인 선암산(仙巖山)의 요지이자 성중에서 지휘소를 설치하기에 딱 좋은 장소이다. 3단으로 쌓은 대가 있고, 3층의 대에서는 총수(銃手)가 숨어서 쏘기에 편리하게 시설되어 있다. 한가운데 좌우에 와장대(臥長臺)를 설치하고, 흙을 판판하게 해서 돌로 깔아 하대에서 말을 타면서도 장대에 올라 갈 수 있도록 하였다. 장대 건물은 정면 5칸, 측면 9칸의 익공식(翼工式) 단층의 팔작기와지붕이다. 건물 주변에는 터를 동서로 80보, 남북으로 240보로 넓이를 잡아 조련장(操鍊場), 일종의 훈련장 같은 것을 닦아 놓았다.


동북노대

동북노대(東北弩臺)는 창룡문과 동북공심돈의 중간에 자리 잡고 있다. 정조 20년 4월 14일에 완공되었다.



동북공심돈[편집]


동북공심돈(東北空心墩)은 창룡문의 근처에 있는 공심돈으로, 서북공심돈과 남공심돈과 달리 성벽을 쌓은 안쪽에 건조되었다. 이 공심돈은 동심원 형태의 건축물이다.

높이는 17척 5촌(5.42m), 바깥 원 둘레 122척(38m), 벽돌로 된 부분의 두께 4척(1.24m), 안쪽 원 둘레 71척(22m), 내원과 외원 사이에 가운데 4척 5촌(1.39m)의 공간을 비워두고, 내부에는 나선형의 계단을 설치하였고 2층 덮개판으로 둘렀다. 아래 층 높이는 7척 3촌, 가운데 층 높이는 6척 5촌인데, 모두 군사들의 몸을 숨길 수 있게 하였다. 아래층 공심에서 나선형의 벽돌 계단으로 윗층의 집을 이르기 때문에 '소라각'이라고도 불린다.

남공심돈(南空心墩)은 팔달문의 동치(東稚) 위에 있는 공심돈으로, 1795년 (정조 19년) 10월 18일에 완공하였다. 현재 미복원 상태이다.






















암문(暗門)[편집]

암문은 성 깊숙한 곳에 적이 찾지 못하도록 설치를 해서 사람이나 가축이 통과하고 군수품을 조달하기 위한 일종의 비밀의 문이다. 화성에는 동암문, 북암문, 서암문, 남암문, 서남암문 등의 5개의 암문이 있다. 하지만 남암문은 그 지역이 시가지화되면서 인멸되고 지금은 미복원 상태이다.

동암문[편집]

동암문

동암문(東暗門)은 동북포루와 동장대의 중간에 있다. 성벽은 안쪽으로 굽어져 들어가 북암문과 같은 형태이다. 안쪽 너비는 7척 높이는 8척이고 바깥은 너비가 6척, 높이가 7척 5촌이다. 1796년 (정조 20년) 3월 25일에 홍예가 이루어졌다.

















북암문[편집]

북암문

북암문(北暗門)은 동암문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곳에 있으며, 방화수류정 근처에 있다. 그 근처는 약간 골짜기진 곳이라서 밖에서 찾기가 어렵다. 안쪽은 너비가 4척 6촌 높이가 6척 5촌이고, 바깥쪽은 너비가 4척 높이가 6척이다. 1795년 (정조 19년) 2월 23일 에 홍예가 이루어졌다.










각루(角樓)[편집]

각루는 성곽 부분 가운데 높은 구릉을 택하여 누각 모양의 건물을 세워, 주위를 감시하고, 가끔은 휴식을 즐길 수 있는 정자처럼 다기능성이 있는 건축물이다. 화성에는 동북각루, 서북각루, 동남각루와 서남각루 등 4개의 각루가 설치되어 있다.

동북각루 (방화수류정)[편집]


동북각루(東北角樓)는 화홍문 바로 옆에 있으며, 용연이라는 연못 위에 있다. 화성의 시설물 중에서도 아름다워 '방화수류정'이라고도 한다. 1794년 (정조 18년) 9월 4일에 공사 착수, 10월 7일에 상량했으며, 10월 19일에 완공했다. 2011년 3월 3일 보물 제 1709호로 지정되었다.












화홍문(華虹門)은 성의 북수문이다. 화홍문은 화성의 북동쪽에 위치하고 있는데, 홍수를 대비하여 수원천 북쪽에 세워진 수문이다.


1794년 (정조 18년) 2월 28일 공사에 착수하여 8월 3일에 상량이 이루어지고, 이듬해 1795년 (정조 19년) 1월 13일 문루가 준공되었다. 북수문에는 물이 흐를 수 있도록 7개의 홍예문이 있고, 남수문과 달리 북수문 위에는 누각이 있다. 누각은 전면 3칸, 측면 2칸의 누마루 형식으로 하고 초익공(初翼工)의 겹처마이며, 지붕은 5량 팔작지붕의 형태이다. 누각을 설치해서 홍예에서 쏟아지는 장쾌한 물보라와 주변 환경이랑 잘 어우러져서 수원8경의 하나로 '화홍관창(華虹觀漲)'이라고 불릴 만큼 아름다운 경관을 조성해 놓았다.


화홍문의 누각은 평상시에는 수문 및 교량으로서, 비상시에는 군사시설로 활용할 수 있도록 총안과 포혈을 갖추어 설계된 실용성이 있고 아름다운 외관이 조화된 화성 성곽의 대표적인 시설물 중 하나이다. 소요된 건축 비용은 30,940냥 4전 3푼으로, 장안문 및 팔달문 다음으로 많이 소요되었다



















장안문(長安門)은 화성의 북문이자 정문이다. 보통 성(城)의 남문을 정문으로 삼으나, 그러나 화성은 임금을 가장 먼저 맞이하는 북문인 장안문이 정문이다. 잘 다듬은 화강암으로 쌓은 석축에 홍예문을 냈고 그 위에 정면 5칸 측면2칸의 다포 양식으로 이루어진 중층의 문루가 세워져있다.


또한 가운데에 홍예문이 나있는 벽돌로 쌓은 옹성이 있으며, 양옆에 다른 성벽보다 높이가 약간 높은 두개의 적대가 설치되어 있다. 장안문의 이름은 중국의 옛 왕조인 전한(前漢), 수(隋), 당(唐)나라의 수도였던 장안(현재의 시안 시) 에서 따온 것으로 이는 당나라 때의 장안성처럼 화성 또한 융성한 도시가 되라는 정조의 뜻이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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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달문(八達門)은 화성의 남문으로, 사방팔방으로 길이 열린다는 뜻이다. 현재는 좌우의 성벽이 헐려 길이 생기고 건물들이 들어서면서 번화가가 형성되었다. 축대 위로 누각이 서 있는데 2층으로 지어져 매우 높게 보인다. 돌로 쌓은 무지개 모양의 문은 왕의 행차 시에도 가마가 드나들 수 있을 만큼 널찍하게 내고 위에는 정면 5칸 측면 2칸의 중층 문루를 세웠다.


문루 주위 사방에는 낮은 담을 돌리고 바깥쪽으로는 반달형 옹성, 좌우에는 적대 등 성문 방어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시설을 두었다. 옹성은 우리 나라 성곽에서 일찍부터 채용되었던 방어 시설로서 한양도성흥인지문, 전주성풍남문 등에서도 볼 수 있는데, 팔달문의 옹성은 규모와 형태 면에서 한층 돋보인다. 또한 팔달문은 도성의 문루처럼 우진각 형태의 지붕과 잡상 장식을 갖춘 문루로서 규모와 형식에서 조선 후기 문루 건축을 대표한다.

1964년 9월 3일 보물 제 402호로 지정되었다.




공심돈(空心墩)[편집]

공심돈은 적이나 주위의 동정을 살피기 위하여 지은 망루와 같은 곳이다. 남한산성에도 설치가 되어 있지만 성제상으로 돈의 내부가 비어 있도록 설계된 것은 화성이 처음이다. 중국의 병성인 '성서'(城書)에는 공심돈을 "벽돌로 3면에 섬돌을 쌓고 그 가운데를 비워 둔다. 가운데를 2층으로 구분하여 널빤지로 누(樓)를 만들고 나무사다리를 이용하여 위아래에 공안을 많이 뚫어서 바깥의 동정을 엿볼 수 있게 한다. 불랑기나 백자총들을 발사하여도 적으로서는 화살이나 총탄이 어느 곳에서부터 날아오는지를 모르게 되어 있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서북공심돈(西北空心墩)은 화서문 북치(北稚) 위에 있으며, 1796년 (정조 20년) 3월 10일에 완공한 공심돈이다.


성곽과 전축 및 누각 모두 거의 축조 당시의 완형(完形)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치의 높이는 15척(4.25m)이며 서북 2면에 각각 현안(懸眼) 두 개를 내었고, 그 위에 벽돌을 사용하여 네모지게 높이 쌓고 그 속을 비게 하였다. 벽축의 높이는 18척(5.58m)이고, 아래의 네모난 넓이는 23척(7.13m) 위의 줄어든 네모난 넓이 21척(6.51m)이다. 내부는 3층으로 꾸며 2층과 3층 부분은 마루를 깔았고, 사다리를 설치하여 위아래로 이동할 수 있도록 하였다. 돈대의 꼭대기에는 포사를 지었으며, 돈대 외벽에는 총안, 포혈(砲穴) 등을, 상층의 벽면 위쪽 판문(板門)마다 각각 전안(箭眼)을 뚫었다.


아래층 내면에는 벽돌로 홍예를 튼 작은 문을 내어 출입하도록 하였다. 서북공심돈의 성벽 높이는 약 5m이고, 전축 부분은 성 위에서 5.14m, 처마 높이는 성 위에서 도리 밑까지 6.27m이다. 2011년 3월 3일 보물 제 1710호로 지정되었다






화서문(華西門)은 성의 서문이다. 동남으로 행궁과 460보 떨어졌으며, 홍예와 문루의 제도는 모두 창룡문과 같다. 다만 좌우의 돌 계단을 꺾이게 해서 층을 만들었다. 안쪽 좌우의 무사는 아래 너비가 각각 9척이고, 바깥 쪽은 너비가 각각 22척 2촌이다.


홍예문 사이 좌우의 무사는 높이가 각각 18척이고 수문청은 문의 남쪽 가장자리에 있다. 서옹성의 제도는 동옹성과 같은데 높이는 11척, 안쪽 둘레는 76척 정문에서 36척 떨어져 있으며 바깥 쪽 둘레는 110척이다. 안과 바깥 면 모두에 평평한 여장을 설치하고 외면에는 방안 총혈 19개의 구멍과 활 쏘는 구멍 6개를 뚫었다. 나머지는 모두 동옹성과 같다.

1964년 9월 3일 보물 제 403호로 지정되었다









서북각루[편집]

서북각루(西北角樓)는 화서문 옆에 있으며, 동남각루와 마찬가지로 높은 곳에 위치해 주위를 관찰하기가 쉽다. 1796년 (정조 20년) 7월 9일에 완공되었다.







장대(將臺)와 노대(弩臺)[편집]

장대는 성곽 일대를 조망하면서 군사들을 지휘하던 일종의 지휘소 같은 곳이다. 화성에는 서장대(西將臺)와 동장대(東將臺) 두 곳이 있다.

노대는 성 가운데서 쇠뇌를 쏠 수 있도록 높이 지은 시설물이다. 접근하는 적을 공격할 수 있다. 화성에는 서노대(西弩臺)와 동북노대 두 곳이 있다.

서장대 (화성장대)와 서노대[편집]

서장대(화성장대)

서장대(西將臺)는 화성의 군사지휘본부로서 '화성장대(華城將臺)'라고도 불린다. 팔달산의 정상에 자리 잡고 있다. 1794년 (정조 18년) 8월 11일 공사에 착수, 9월 16일에 상량하고, 9월 29일에 완공됐다. 화성장대(華城將臺)라는 편액은 정조가 직접 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서장대에서는 성 전체가 한눈에 들어와, 화성 일대는 물론 이 산을 둘러싸고 있는 100리 안쪽의 모든 동정을 파악하고, 그 자리에서 군사들을 지휘할 수 있는 위치이다. 이 곳에는 장대석으로 대를 쌓고 세 벌의 계단을 마련하고 그 위에다 또 한 단의 대를 놓고, 또 그 위에다 2층지붕의 건물을 세웠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중층 누각으로서 상층은 정면과 측면이 각각 1칸의 모임지붕으로 되어 있다.

서노대

서장대 바로 뒤에 서노대(西弩臺)가 서있다. 서노대는 서장대의 서북쪽에 동향하여 성 한가운데서 다연발 활인 쇠뇌를 쏘기 위하여 높이 지은 곳으로 정팔각형꼴로 전벽돌을 쌓아놓았고 계단 부분은 트이게 하였다





정조 대왕의 친필 글씨 "화성장대" 이다....







서암문[편집]

서암문(西暗門)은 팔달산 서장대 근처에 있는 암문으로, 입구가 꺾여 있어서 찾기 힘들다. 안쪽의 너비는 5척 6촌, 높이는 7척 7촌이고, 바깥쪽은 너비 4척 1촌, 높이는 7척 2촌이다. 정조 20년 6월 18일에 홍예가 이루어졌다. 문의 안의 높이는 높고 밖은 낮아 안에 계단을 설치해서 계단으로 내려가서 성 밖으로 나갈 수 있도록 되어 있다.


서암문은 북암문이나 동암문과 같이 성곽을 깊게 하여 암문을 설치하면 지형상 쉽게 발견될 수 있으므로 암문이 옆으로 틀어 앉혀져 있어서 암문을 쉽게 발견되지 못하도록 되어 있다. 암문의 안팎에다 평여장(平女牆)을 설치하였다.







출처 : 지리산
글쓴이 : 김응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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