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흐는다

[스크랩]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이하응(李昰應) 墓所

오늘행복스마일 2019. 1. 3. 13:58

가 .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이하응(李昰應)

 

흥선대원군 이하응(서1820∼1898)은 영조의 고손자인 남연군(南延君) 이구(李球)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에게 학문을 배운 그는 1843(헌종 9)년 흥선군에 봉해졌다.  자는 시백(時伯), 호는 석파(石坡). 대원위대감(大院位大監)이라고도 불렸다.

 

이하응은 왕족이었지만,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 아래에서 불우하게 지냈다. 당시 똑똑한 왕족을 죽이기까지 하는 안동 김씨들의 권세로부터 살아남기 위하여, 이하응은 불량배들과 어울리며 거지처럼 구걸 행세까지 하면서 안동 김씨들의 눈길에서 벗어났다.

 

이하응은 당시 임금이었던 철종에게 아들이 없자, 대왕대비인 신정왕후(神貞王后) 조씨(趙氏)와 만나 둘째 아들인 명복(命福)을 후계자로 삼겠다는 약속을 받았다.

1863년 철종이 죽고 신정왕후 조씨에 의해 명복이 왕위에 올라 고종이 되자, 이하응은 일약 대원군이 되었다.

 

어린 高宗을 대신하여 나라를 다스린 대원군은 먼저 안동 김씨 세력을 몰아내고 당파를 초월하여 인재를 뽑았다. 부패한 관리들을 몰아내었고, 국가 제정을 낭비하고 당쟁의 원인이 되는 많은 서원(書院)을 없애버렸다.

이어 『육전조례(六典條例)』,『대전회통(大典會通)』등을 펴내 법률제도를 확립하여, 나라의 기강을 세웠다.

 

大院君은 1873년 고종을 대신해 대원군이 나라를 다스리는 것이 부당하다는 최익현(崔益鉉)의 탄핵을 받고 물러났다. 이에 성장한 고종이 나라를 직접 돌보았다. 대원군은 이때부터 세력이 커진 며느리 명성황후(明成皇后)와 점차 사이가 나빠졌다.

대원군은 임오군란(壬午軍亂)으로 다시 정권을 잡았으나, 명성황후의 요청에 의해 청나라에 붙잡혀 갔다가 3년 뒤인 1885년 귀국하였다. 대원군은 1895년 을미사변(乙未事變)으로 명성황후가 죽자, 잠시 또 정권을 잡았다.

 

흥선대원군은 안동 김씨의 세도로 부패한 정권을 바로잡고 왕실의 위엄을 세우기 위해 많은 개혁을 펼쳤다. 하지만 쇄국정책으로 철저히 외국과의 교류를 막아, 서양의 앞선 문물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흥선대원군은 문인화(文人畵) 중에서 난을 잘 친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의 난은 흔히 `석파난(石坡蘭)`이라고 불리는데, 석파는 대원군의 아호(雅號)이다. 석파난은 가늘고도 여리게 끊어질 듯 이어지는 특징을 지닌다. 그런데도 오히려 다른 화가들이 그린 난들에 비해 난 잎이 더 길다. 아주 힘찬 필력에서 나온 솜씨인데, 그의 일생과 관련하여 결코 꺾이는 일 없는 끈질긴 생명력이 엿보인다.

 

나 . 흥선대원군 李昰應墓所

 

1 . 위치 : 경기 남양주시 화도읍 창현리 산22

 

마석 사거리에 못 미처서,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의 묘소를 가리키는 팻말이 보이는 오른편 산기슭을 따라 가면  아파트가 끝나는 지점에 묘역을 알리는  표지판과 차량 금지판이 가로막고있다.

이곳에서 걸어가야 하지만 우리 일행은 시간이 없어 관리인에게 양해를 받고 차로 묘지 입구까지 갈수있었다.  

 

2 . 형상론

입구에는 `흥원(興園)`이라고 쓴 작은 비가 세워져 있다.  흥원은 덕흥대원군의 능원(陵園)이란 뜻이다. 의미(意美)란 분이 쓴 `국태공원소(國太公園所)`란 비도 있다. 이 또한 대원군의 능원이란 뜻이아닐까?.

 

흥선대원군의 묘는 1898년에 경기도 고양군 공덕리에 처음 조성되었다. 지금의 마포 공덕동 즈음으로 짐작되며, 풍수지리에 관심 많던 그가 손수 잡은 곳이었다고 한다.  어떤 자리였는지 매우 궁금한데, 지금은 자취를 찾을 수 없지만   그토록 명당에 집착한분의 유택지라 상당히 좋은 자리였음을 증명해주는 사실은,  朝鮮이 패망한 뒤, 일제는 1906년 파주군 대덕리로 이장하였다가, 1966년 다시 현 위치로 이장하였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알수있다.  

 

墓域 앞에 섰다.  曲墻 안 봉분의 좌우에는 石羊이 한 마리씩 섰다. 상석 앞 좌우로는 망주석, 문인석, 石馬가 주욱 늘어섰다. 마주보는 문인석 가운데에는 장명등이 우뚝하다.

墓域으로 오를 때 본 神道碑의 흔적처럼, 망주석에도 총탄 자국이 남아있는 것은 동족 상잔의 흔적이라 생각된다. 

墓域은 그옛날 大院君의 위세에 비하면 너무나 초라하며 격세지감을 느끼게한다. 유택자리 역시 龍脈이나 주위의 砂며 특히나 靑龍白虎의 허전함은,  위세 당당하던  대원위대감(大院位大監)의 뒷모습을 보는듯 수난과 좌절의 마지막 몸부림속의   고요라 해야할까?

 

전순의 人作과  得水의 還包는?.   案山은 보는 사람에게 포근함과 안도감을 주어야 하는데,  龍脈은 혈地 우측으로 내려가는데,  아마도 過龍處를 깎아 모양나게 만든 人作 幽宅이라 보여진다.

그러나 案山넘어 숲을 이룬 아파트는 아직도 그 옛날의 위세를 보는 듯 빽빽이 나열하여 이곳을 향하고 있지 않는가?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 ,   대원위대감(大院位大監) !!! .......당신은 시대의 개혁자 일까?,  아니면 그 반대일까?.

1863년흥선 대원군 집권이래 조선의 전통 사회는 커다란 변화와 존립의 위기를 맞이하여 안으로는 세도 정치의 폐단이 극에 달하여 무능한 양반 지배 체제에 저항하는 민중 세력의 성장과 일본과 서양 열강의 침략 세력이 밀려오는 와중에있었다.

 

 高宗의 즉위와 함께 정치적 실권을 장악한 흥선 대원군은 실추된 왕권을 회복하고 국가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하여, 세도가문을 몰아내고, 인재를 고르게 등용하며,경복궁을 중건하고, 붕당의 온상인 600여 개소의 서원 가운데 47개만 남기고 철폐 정리하고, 삼정을 개혁하여 국가재정을 확충하고, 민생을 안정시는데 어느 정도 기여하였으나 어쩔수없는 전통 체제 안의 개혁이라는 한계를 갖고 있었다.

 

결국 외세의 침투를 막기위하여 국방력 강화, 통상 수교 요구를 거절, 천주교 탄압 등으로  프랑스와 미국의 침략을 받았으며, 병인양요(1866)와 신미양요(1871)등으로 일시적인 침략을 저지하는 데는 성공하였으나 오히려 조선의 문호 개방을 늦추는 결과를 가져왔다.

결국 흥선 대원군이 물러나고 개화론자들의 대두로 문호개방의 여건인 "운요 호 사건" 을 계기로 1876년에 일본과 "강화도 조약" 을 맺어 처음으로 문호를 개방하는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인 조약으로  이후 경제적 침략의 발판이되는 불평등 조약이 되었다.

 

19세기의 파란만장한 역사 소용돌이 속에 살아온 흥선 대원군!!...

그 숫한 사건들의 실마리를 풀기위하여 조용히 "石坡蘭"이라 불리는 石坡를 그리며 잎을 길게 더 길게 그리소서.

 

      < 대원군>

"본래 대원군이란 말은, 임금의 아버지 가운데 왕위를 거치지 못한 분을 이르는 칭호이다. 우리 역사에 대원군은 세 분이 있다. 지금 우리가 찾는 흥선대원군 외에도,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과 전계대원군(全溪大院君)이 따로 있다.

덕흥대원군은 선조의 아버지로, 선조가 즉위한 뒤에 사후 추존된 인물이다.

전계대원군은 철종의 아버지로, 그 또한 사후에 대원군에 추존된 인물이다."

 

출처 : 태극풍수지리연구회
글쓴이 : 雲祥김명기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