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영화의 제작비 다이어트가 한창인 요즘, 각각 160억 원과 110억 원의 막대한 제작비가 투자된 두 편의 블록버스터 <해운대>와 <국가대표>에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7월23일 개봉한 <해운대>는 개봉 9일 만에 300만 명의 관객을 덮치는 '쓰나미 흥행'을 거두고 있다. <국가대표>는 '스키 점프'의 박진감을 살려냈다는 호평을 받으며 날아오를 준비를 하고 있다. 1999년 <쉬리>가 '한국형 블록버스터'를 성공시킨 이후 10년, 그 진화 과정을 살펴본다.
* 각 연도별 스크린 수, 서울 및 전국 관객 수는 영화진흥위원회 자료 참조.
글 | 박혜은(영화 칼럼니스트), 구성 | 네이버영화
<쉬리>부터 <해운대>까지, 한국형 블록버스터의 진화
10년 전 <쉬리>, 한국형 블록버스터의 시작
<쉬리>의 제작비는 30억 원, 관객 수는 전국 582만 명. 지금 기준으로 보면 중소 규모의 제작비지만, 1999년 당시 한국영화 평균 제작비가 15억 원 수준이라는 걸 감안하면, 요즘으로 치면 100억 원대의 제작비 규모였다. 관객 수 역시 상영 조건을 감안하면 현재의 1천 만 명과 맞먹는다.
조금 과장을 보태면, 한국영화의 역사는 <쉬리>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고도 말할 수 있는데, 기획과 제작, 배급과 극장 등 영화계 내부 상황은 물론, 국가 기관과의 협조, 로케이션 지원, PPL의 활성화 등 외부적 시스템의 변화에도 <쉬리>는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가장 큰 변화는 "우리도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에 비견할 만한 대작 영화를 만들 수 있다"는 자신감이었다. 당시 <쉬리>의 조연출을 맡았던 전윤수 감독은 <쉬리>가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를 보면서 '이젠 한국에서도 저런 규모의 영화가 나올 때가 됐다' '한국영화도 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 당시 최고의 스태프가 모여 실력 발휘를 한 결과"라고 말한다. 최초로 '한국형 블록버스터'라는 수식을 사용한 영화는 <퇴마록>(98)이었지만, 진정한 '한국형 블록버스터'는 <쉬리>부터였다.
<쉬리> (99)
7년 전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 블록버스터의 비싼 수업료
<공동경비구역 JSA> (00)
<비천무> (00)
화재에 맞서는 소방관들의 '재난 액션' <리베라 메> 역시 서울 관객 53만 명으로 이익을 남겼다. 비슷한 소재와 규모의 <싸이렌>은 참담한 흥행 실패를 거두었지만, 영화계는 여전히 '블록버스터'에 희망을 걸었다.
<화산고> (01)
마치 도미노의 연쇄 반응처럼, 2002년엔 더 큰 규모의 블록버스터 영화가 더 크게 무너졌다. "만약 일제 강점기가 끝나지 않았다면?"이라는 역사적 상상력에서 출발한 SF 액션 블록버스터 <2009 로스트 메모리즈>는 서울 관객 86만 명을 기록했지만, 제작비 80억 원을 생각하면 크게 만족할 만한 성적이 아니었다. 하지만 다른 영화들의 상황은 더욱 처참했다. 제작비 64억 원의 SF 액션 <예스터데이>는 서울 관객 12만 명, '한국의 <인디아나 존스>'를 노렸다는 제작비 80억 원의 액션 어드벤쳐 <아 유 레디?>는 서울 관객 2만 명, 한국 영화사상 최초로 제작비 100억을 넘긴 SF 판타지 액션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은 서울 관객 5만 명을 기록하는 재앙을 낳았다.
문제는 '이야기'였다. 컴퓨터그래픽의 새로운 시도, 대규모 세트, 해외 로케이션 등 '스펙터클'에만 집중한 채 허술한 이야기는 간과한 블록버스터들은 줄초상이 났다. 제작비 규모가 곧 흥행 성적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2000년부터 2002년까지 3년간, 한국영화계는 값비싼 수업료를 지불하며 이 간단한 교훈을 얻은 셈이다.
5년 전 <실미도> <태극기 휘날리며>, 역사를 품은 블록버스터의 대성공
2003년에도 블록버스터의 붕괴는 계속됐다. 지하철이라는 공간에서 새로운 액션을 보여주겠다던 <튜브>는 제작비 73억 원을 쏟아 부었지만 전국 관객 47만 명에 그쳤고, 제작비 76억 원의 SF 판타지 액션 <내츄럴 시티>는 전국 관객 22만 명으로 주저앉았다. 최민수와 조재현이 맞붙은 제작비 80억 원의 무협 액션 <청풍명월>은 전국관객 54만 명을, 제작비 130억 원의 SF 애니메이션 <원더풀 데이즈>는 전국 관객 22만 명을 기록했다.
자성의 목소리는 이미 2002년부터 터져 나오고 있었다. SF와 판타지와 액션을 섞은 변별성 없는 블록버스터 기획을 지양하고, 몇 년 새 급격히 치솟은 마케팅 비용을 감축하면서 시장성을 키워야 한다는 반성이었다. 특히 <쉬리>와 <공동경비구역 JSA>의 성공을 교과서 삼아 관객의 관심을 불러일으킬 '특수한' 한국적 요소가 필요하다고 입을 모았다. 이때 약속이라도 한 듯, 한국사를 소재로 한 두 편의 블록버스터가 나타났다. 한국영화계의 흥행 기준을 '1천 만 관객' 수준으로 격상시킨 <실미도>(03)과 <태극기 휘날리며>(04)가 탄생한 것이다.
2003년 12월24일에 개봉한 <실미도>는 제작비 110억 원이라는 규모보다, 정치적으로 민감한 소재인 북파 공작 부대의 실화를 재구성했다는 점에서 큰 관심을 불러 모았다. 감춰졌던 근대사에 대한 궁금증과 '강우석 표 남자 영화'에 대한 신뢰, 안성기 설경구 정재영 허준호 등 배우들의 탄탄한 연기와 감동 코드에 대한 입소문이 맞물려 흥행에 가속도가 붙었고, 꿈의 숫자 '1천 만 관객' 동원에 성공한 것이다.
<실미도>의 흥분이 가시기도 전에 2004년 2월5일 <태극기 휘날리며>가 개봉해 흥행 폭격을 이어갔다. 제작비 190억 원을 들여 <라이언 일병 구하기>(98)에 대적할 만한 한국전쟁 블록버스터를 만든다는 소식은 몇 년 전부터 화제를 모았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한국의 최첨단 특수효과 경연장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태극기 휘날리며>는 1950년대를 재현한 시대극이자, 전쟁 액션으로 합격점을 받았다.
두 영화의 성공 뒤엔, 지난 3년 동안 충무로가 치른 값비싼 수업료가 있었다. <실미도>와 <태극기 휘날리며>는 각각 철저한 프리프로덕션으로 제작비 누수를 막았고, 비주얼 스펙터클의 완급을 조절해 꼭 필요한 부분에 집중하는 노하우를 발휘했다. 특수효과나 컴퓨터그래픽은 과시되지 않았고, 이야기를 도와 영화에 몰입할 수 있는 수준에서 최대한 티 나지 않게 영화에 녹아들었다. 특히 두 영화가 가장 집중했던 건, 한국 관객이 한국영화에서만 만날 수 있을 '새로운 이야기'였다. <쉬리>와 <공동경비구역 JSA>를 이어 '한국사를 품은 블록버스터'가 더 거대한 모습으로 진화한 것이다.
3년 전 <괴물>, 탄탄한 이야기의 스펙터클
<실미도>와 <태극기 휘날리며>가 '1천 만 관객'을 넘어서면서 '한국형 블록버스터'는 안정기에 접어든 것처럼 보였다. 2004년부터 제작비 규모 100억 원 대의 영화들이 매해 2편 이상 제작됐고, 소재와 장르도 다양해졌다. 눈에 띄는 건 '전기 블록버스터'의 출현이다. 일본의 전설적인 재일교포 레슬러 역도산의 전기 영화 <역도산>(04), 한국 최초의 여류 비행사 박경원의 도전기를 그린 <청연>(05), 16세기 최고의 기생 황진이의 러브스토리 <황진이>(07)는 각각 100억 원 이상의 제작비를 투자한 '전기 블록버스터'다.
<역도산> (04) <청연> (05) 2005년의 블록버스터 기대작은 제작비 102억 원의 '비주얼 무협 판타지' <형사 Duelist>와 제작비 200억 원의 해상 액션 <태풍>이었지만 승자는 제작비 88억 원의 '착한 전쟁 영화' <웰컴 투 동막골>과 40억 원 대의 '소박한' 제작비로 완성한 사극 <왕의 남자>였다. <형사 Duelist>는 전국 120만 명, <태풍>은 전국 400만 명의 관객을 모은 데 비해, <웰컴 투 동막골>은 전국 관객 800만 명 이상, <왕의 남자>는 전국 관객 1천200만 명이라는 초유의 흥행을 기록하며 당시 한국 박스오피스 1위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비주얼 vs 이야기'의 승부에서 관객들이 '이야기'의 손을 들어준 것이다. 가장 새로운 볼거리는 총 제작비 200억 원의 '김치 웨스턴'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이 발굴했다. 일제 강점기의 만주를 배경으로 보물을 찾는 세 '놈'의 모험을 다룬 이 영화는, 전국 관객 670만 명의 흥행 성적을 기록했다. 제작비에 비하면 만족할 만한 결과는 아니지만, 전형적인 판타지나 SF, 시대극의 틀을 완전히 벗어난 새로운 시도라는 점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다. <해운대> (09) <국가대표> (09)
제작비와 이야기의 완성도는 반비례일까? 이 궁금증을 해소해 준 영화는 <괴물>(06)이다. 한국에선 거의 볼 수 없었던 '괴수 블록버스터'의 외양을 띈 <괴물>은 '이야기의 스펙터클'로 1천300만 관객을 집어 삼켰다. 할리우드 컴퓨터그래픽 기술을 도입해 창조한 괴생명체의 비주얼은 비록 아쉬운 점이 있었지만, 괴물에게 납치된 딸을 찾는 가족의 모험과 현대 사회의 문제점을 교묘히 연결시킨 이야기는 단연 압도적이었다. 봉준호 감독의 치밀한 이야기와 송강호 박해일 변희봉 등 연기파 배우들의 앙상블은, 그간 덩치 큰 블록버스터에서 볼 수 없었던 세심한 감정선마저 구축해 관객을 몰입시켰다. 올해 여름 <해운대> <국가대표>, 한국 블록버스터의 도전
2008년은 새로운 볼거리를 탐험하는 블록버스터의 도전이 이어졌다. 주된 관심사는 '과거'였다. <신기전>은 제작비 103억 원을 들여 세계 최초의 로켓포 '신기전'을 세상에 알렸고, 총 제작비 96억 원의 <모던보이>는 1930년대 경성의 화려한 시절을 되살려냈다. 고려 시대를 배경으로 제작비 102억 원의 <쌍화점>은 왕과 무사의 비극적 사랑을 그리며 전국 관객 400만 명을 기록했다.
그리고 올해, 한국 블록버스터는 또 한 번 새로운 목표에 도전했다. 휴먼 재난 영화 <해운대>는 제작비 160억 원으로 부산 앞바다에 메가 쓰나미를 일으켰고, 스포츠 영화로는 최고의 제작비인 110억 원이 소요된 <국가대표>는, 첨단 촬영 기법을 사용해 '스키 점프'의 날아오르는 매력을 확인시킨다.
설경구 하지원 박중훈 엄정화 등 탄탄한 캐스팅과 할리우드 컴퓨터그래픽 기술력으로 무장한 <해운대>는 '한국적인 재난 영화'로 승부수를 띄웠다. 영웅 중심의 할리우드 재난 영화와는 달리 가족을 지키기 위한 소시민들의 사투를 보여주는 것. 윤제균 감독의 특기인 '전반부의 코미디와 후반부의 감동'이 유감 없이 발휘됐다.
장르는 다르지만 <해운대>와 <국가대표>는 공통점이 있다. 지금껏 한국영화가 도전하지 않았던 새로운 소재를 발굴하고, 휴먼 드라마와 코미디가 섞인 이야기에 꼭 필요한 장면에서 압도적인 스펙터클을 가미했다는 점이다. 이것은 과거 10년의 한국 블록버스터 역사를 겪으며 얻은 교훈일 것이다. 따뜻한 가슴, 똑똑한 머리의 경제적 블록버스터로 진화한 '한국 블록버스터'. 이들의 도전이 '블록버스터급' 흥행으로 이어질지 기대가 모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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