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미 (김명자) 영화배우
출생1940년 (만 76세), 대덕구 신탄진동
신체160cm
학력경희대학교 언론정보대학원 언론정책과정 수료 외 1건
데뷔1957년 영화 '황혼열차'
수상2016 제7회 대한민국 대중문화예술상 은관문화훈장 외 12건
사이트팬카페
양 력: 1940년 2월 9일 04:00
음/평: 1940년 1월 2일 04:00 여자
시 일 월 년
壬 壬 戊 庚
寅 午 寅 辰
己 庚 辛 壬 癸 甲 乙 丙 丁 대운: 역행
巳 午 未 申 酉 戌 亥 子 丑
81 71 61 51 41 31 21 11 1.5
대운 시작: 1세 5월 16일
현재 나이: 78 세 (2017년 丁酉년)
현재 대운: 午
사주 출처: 인터넷
1940년 대전 출생, 본명 김명자, 8남매 중 4녀, 대전여중·덕성여고 중퇴
1957년 덕성여고 3학년 재학 중 김기영 감독의 눈에 띄어 ‘황혼열차’로 데뷔. 김 감독이 김지미라는 예명을 지어줌.
1958년 홍성기 감독의 청춘물 ‘별아 내 가슴에’로 일대 센세이션 . 홍 감독과 첫 결혼. 딸 출산함.
1961년 ‘춘향전’(홍성기), ‘장희빈’(정창화), ‘5인의 해병’(김기덕) 등 출연. ‘춘향전’은 신상옥 감독, 최은희 주연의 ‘성춘향’과 동시 개봉. 흥행 고배.
1962년 홍성기 감독과 이혼, 홍성기 감독과 결혼생활이 파국을 맞음. 어린 아내의 치솟는 인기에 비해 남편의 활동은 주춤했던 게 큰 이유였다. 당시 상황에 대해 홍 감독은 “하루벌이를 하는 지게꾼 신세”, 김지미는 “어차피 맞을 소나기”라고 기억했다. 편당 30만원의 출연료를 받던 김지미는 집 두 채 값인 600만원을 남편의 제작비로 대주었으나 재기를 돕진 못했다. 게다가 김지미는 바쁜 스케줄로 일주일에 한두 번 집에 들어가는 상황이었다.
1963년 동료 배우 최무룡과 재혼, 최무룡과 재혼했으나 최무룡이 기혼남이라 간통죄로 고소됨. 김지미가 집을 팔아 위자료를 마련해 최무룡의 부인 강효실에게 건네주며 소 취하에 이른 것으로 알려진다.
1967년 ‘빙점’(김수용), ‘춘희’(정진우), ‘서울은 만원이다’(최무룡 감독), ‘육체의 길’(조긍하) 등 출연.
1969년 최무룡과 이혼, ‘이조여인 잔혹사’(신상옥)로 아시아영화제 여우주연상 수상. 김지미는 최무룡과의 사이에 1남 1녀를 낳았으나 어려서 아들을 잃었다. 최무룡이 한·일 합작영화 ‘고안’의 개봉 불발로 빚더미에 앉는 등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는 가운데, 69년 두 사람은 갈라섰다. 그 유명한 “사랑하기 때문에 헤어진다”는 말을 남기고서다.
1974년 ‘토지’(김수용)로 파나마국제영화제 여우주연상, 대종상 여우주연상 수상1975년 ‘육체의 약속’(김기영)으로 대종상 여우주연상
1976년 가수 나훈아와 결혼
1982년 가수 나훈아와 이혼.
1985년 ‘길소뜸’(임권택)으로 대종상 여우주연상, 시카고 영화제 세계 평화메달상 수상
1986년 지미필름 창립. 창립작 ‘티켓’ 주연. 백상예술대상 연기상 수상
1991년 11월 심장 내과의 이종구 박사와 네 번째 결혼을 함
1992년 마지막 출연작인 ‘명자 아끼꼬 쏘냐’(이장호) 제작·주연
1995~2000년 제 18, 19대 한국영화인협회 이사장
1997년 보관문화훈장
1998년 스크린쿼터 사수 범영화인 비상대책위원회 공동위원장
1999년 영화진흥위원회 위원
2000년 대종상 영화제 영화발전공로상, 영평상(영화평론가협회상) 공로상 수상
2002년 이종구 박사와 이혼함. 도미. 두 딸 홍경임(61년생)·최영숙(68년생)과 거주
2010년 제15회 부산국제영화제 김지미 회고전 ‘그녀가 허락한 모든 것-스타, 배우, 그리고 김지미’ 개최. 영화인복지재단 ‘영화인 명예의 전당’ 헌액. 도록집 『화려한 여배우 김지미』 출간
2017년 데뷔 60주년 기념식 거행.
21세부터 담배를 피움.
신성일씨의 회고 - 성격이 솔직하고 화끈한 김지미는 젊은 시절부터 먹여 살려야 할 식구가 많았다. 한 30~40명쯤 되지 않았나 싶다. 그 식구를 다 먹여살렸다는 점에서 훌륭한 여인이다.
어느 기자의 회고 - 김지미를 보면 세 가지 이유로 깜짝 놀란다. 첫째, 스크린에서보다 더 예뻐서다. 둘째, 걸걸한 목소리다. 셋째, 생각보다 키가 작다(1m60㎝)’는 옛 글이 있더군요(그녀는 지금도 전성기 때 몸매를 유지하고 있다. 70년대까지 걸걸한 목소리는 후시 녹음이니 낭랑한 성우가 대신했다).
데뷔 60년 김지미 “700개 인생 살았지만 만족 못해”
[중앙일보] 입력 2017.06.30
“혼이 있는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는 배우 김지미. 그는 배우뿐만 아니라 영화제작자, 영화인협회 이사장 등으로도 활동했다. 영화계 복귀에 대해선 “이젠 주변을 돌아볼 시간”이라고 답했다. [연합뉴스]
1960, 70년대를 풍미한 ‘한국의 엘리자베스 테일러’. 충무로의 간판스타였던 그는 80년대 이후에는 영화제작자로도 변신했다. 57년 김기영 감독의 ‘황혼열차’로 데뷔해 올해로 데뷔 60주년을 맞은 ‘한국영화계의 여걸’ 배우 김지미(77)씨 얘기다.
그의 필모그래피 자체가 한국영화사이기도 한 그답게 공식 출연작은 370편(한국영상자료원). 그러나 그는 29일 간담회에서 “여러 군데에서 기록이 엇갈리는데 아마 두 배는 될 거다. 700편은 찍은 것 같다”고 말했다.
‘매혹의 배우 … ’ 특별전 개막
17세 때 명동서 김기영 감독에 발탁
60, 70년대 ‘한국의 리즈 테일러’로
“공식 출연 370편이지만 두 배는 돼”
80년대 이후엔 영화제작자 활약도
데뷔 60주년을 기념해 열린 이날 기자간담회에서 김씨는 “영화 주인공으로 700가지의 인생을 살았다고 볼 수 있다. 안 해본 역할이 없다”며 “하지만 만족한 작품이 없다. 인생은 영원히 만족이 없는 것 같다”고 말했다.
김씨는 고등학생 때인 17세에 서울 명동에서 김기영 감독의 눈에 띄어 발탁됐다. 그는 “영화배우가 어릴 때부터 꿈인 사람도 많지만 나는 그런 생각은 한 번도 안 해봤다”며 “명동 옛 시공관 자리 옆에 배꽃다방이라는 곳에 아버지를 만나러 가는 길에 김기영 감독이 나를 봤던 것 같다”고 말했다.
덕성여고 3학년이던 그는 극 중 반대에 부딪히는 사랑을 하는 ‘지미’ 역으로 출연했다. 연기 경험이 없었지만 서구적인 외모로 단연 눈길을 끌었고, 예명 역시 이 영화에서 따왔다.
60년대는 그의 전성기였다. 여배우 트로이카(문희·남정임·윤정희)의 청초한 아름다움에 비교해 원숙미를 갖춘 팜므파탈로 자리를 잡았다. 멜로 드라마뿐 아니라 시대극, 미스터리물, 액션 등 장르를 가리지 않았다.
이날 간담회에서 김씨는 “동시에 20~30 작품씩 걸려있을 때도 있었다. 여기서 끝나면 저리로 감독·스태프가 다함께 옮겨 가서 영화를 찍었다”고 당시를 기억했다.
빼어난 외모로 주목받았지만 단지 수동적인 여배우 위치에 만족하지 않았다. 김지미는 “나는 60년 동안 배우답게가 아니라 영화인답게 살았다”며 “얼굴에 화장하고 누가 선택해줄 때를 기다려 주어진 역할만 하는 게 아니라 영화제작자, 영화인협회 이사장을 지낸 것도 그 때문”이라고 말했다.
영화제작자로의 변신은 85년 영화사 지미필름을 창립하면서다. 김씨는 “70년대 들어 심의와 검열이 강화되면서 심의에서 무사통과될 만한 영화, 깡패 영화나 유흥가를 떠도는 여자들의 얘기가 주를 이루는 혼이 없는 영화가 만들어졌다”고 돌아봤다.
85년 영화사 지미필름을 세운 그는 임권택 감독과 함께 속초에 들렀을 때 목격한 다방 아가씨들의 열악한 현실을 주제로 한 영화 ‘티켓’을 제작했다. 역시 “검열과 싸운 끝에 나온 영화”다.
그는 “그렇다고 후배 여배우들에게 제작을 권하지는 않는다. 고통과 희생을 다른 사람에게 전이시키면 안 되지 않나”라고 덧붙였다.
현재 김씨의 마지막 출연작은 ‘명자 아끼꼬 쏘냐’(1992, 이장호 감독)다. 대종상 여우주연상을 두 번 수상하고, 파나마국제영화제에서도 여우주연상을 받은 그는 스스로 쉽게 만족하는 편은 아니다.
김지미는 “지금껏 어느 작품이든 항상 후회가 뒤따랐다”고 말했다. “촬영하고 시사회에서 처음 보면 부족한 점이 너무 많다. 왜 저 장면을 저렇게 했을까, 조금 더 열심히 할 걸 그랬다고 생각한다”는 설명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완성된 작품은 아직까지 한 작품도 없다”고 말했다. 또 본인을 두고 “철이 안 들었다”고도 했다. “배우로서 연기도 부족했고, 완성됐다고 생각을 안 하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최근 국내 영화들에 대해서도 비판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다. 김지미는 “요즘 영화들은 오로지 흥미 위주고 관객 입맛에만 맞추다보니 액션 위주, 혼이 없는 영화들이 많다”고 했다. 또 “재미있는 영화에 이어 교육영화, 예술영화 같은 작품을 많이 생산해서 관객 폭을 넓혀줬으면 하는 게 바람”이라고 덧붙였다.
배우 강수연은 잡지 ‘영화천국’에서 “김지미 선배님께서 작품으로, 나아가 영화계로 돌아오셨으면 하는 바람을 갖고 있다”고 했지만 김지미는 “60년 동안 열심히 뛰었으니 이제 주변을 돌아볼 시간”이라고 했다.
미국에 거주 중인 그는 “손자들, 자식들, 친척들과 많은 시간을 보내며 상당히 행복하게 보낸다”며 “그동안 인생 전부를 영화와 같이 보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서울 상암동 한국영상자료원은 김씨의 주요 출연작을 상영하는 ‘매혹의 배우, 김지미’ 특별전을 연다. 29일 개막식에 이어 개막작으로 ‘티켓’을 상영했고 다음달 12일까지 ‘토지’ ‘춘희’ ‘장희빈’ 등 20여 편을 상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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