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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역사 스페셜] 다시 쓰는 6.25 전쟁 - 거짓말

오늘행복스마일 2019. 2. 11. 09:06

[다시 쓰는 6·25 전쟁] 거짓말
남침하자마자 북침으로 허위 선전
김병륜 기자 lyuen@dema.mil.kr


6·25 남침 전쟁의 기획자들인 김일성·스탈린·마오 쩌둥(왼쪽부터).

  6월 25일 0시 북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와 내각의 공식 신문이었던 ‘민주조선’ 편집실로 낯선 손님 한 명이 찾아왔다. 잠깐 선잠이 들었던 민주조선의 편집간부 정명조 씨는 화들짝 놀라며 손님을 맞이했다. 마침 24일 초저녁에 노동당 중앙당 선전부에서 신문 인쇄를 시작하지 말라는 연락을 이미 받은 터였다.

 낯선 손님의 요구는 특이했다. 조용한 방으로 가자는 것. 정씨는 그 손님을 주필실로 안내했다. 방에 들어서서도 손님은 본론을 꺼내지 않았다. 손님은 자신의 당원임을 증명하는 노동당 당원증을 보여준 후 정씨의 당원증도 보여줄 것을 요구했다. 서로의 당원증 확인이 끝나자 봉인된 문서 하나를 내밀었다. 

 문서 안에는 “25일 금조 미명에 남한 군대가 북침했다. 인민군대는 불의의 침범을 받고 2㎞를 후퇴했다”는 놀라운 내용이 북한의 조선중앙통신발 뉴스로 적혀 있었다. 문서에는 신문의 제목을 활자 몇 호로 하라는 지시와 함께 ‘1면 머리기사로 실을 것’이라는 특별지시까지 빨간색 글자로 선명하게 적혀 있었다. 25일 새벽에 한국군이 북침했다는 뉴스가 4~6시간 전인 25일 0시에 이미 북한 관영 언론에 전달됐다는 이야기다. 

 6ㆍ25전쟁 전문가인 박명림 교수는 정씨의 이 같은 증언을 확인하기 위해 1950년 6월 25일자 민주조선을 수배했지만 결국 찾지 못했다. 전쟁 통에 제대로 보존되지 못했던 것. 하지만 박 교수는 정씨의 증언을 의심하지 않는다. 비슷한 증언을 북한 조선중앙방송위원장인 남봉식 씨도 남겼기 때문이다. 

 남씨는 이미 그해 6월 23일 노동당 중앙당 선전부장 박창옥으로부터 “3일 후 중요한 뉴스가 있을 것”이라는 언질을 받은 상태였다. 그날 이후 24시간 비상대기 상태로 퇴근도 하지 않던 남씨는 결국 25일 새벽 “남한군이 침공했으나 인민군이 반격해 반공격으로 넘어 가고 있다”는 김일성 명의의 방송을 북한 전역에 내보냈다. 이미 전쟁이 나기 전부터 북한의 관영 언론기관은 만반의 준비를 갖춘 상태였던 것이다. 

 한국의 입장에서는 황당하기 그지 없었다. 북한의 남침으로 위기에 빠진 것 자체도 괴로운 일인데 북한은 개전 책임까지 한국에 뒤집어 씌우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국 국방부 정훈국은 25일 낮 12시가 지나서야 북한군의 남침 사실을 공식 발표했다. 북한의 허위 선전은 그들의 기습만큼이나 교묘하면서도 신속했다. 이렇게 시작된 북한의 거짓말은 6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다. 북한의 입장은 시종일관 명확하다. 한국이 먼저 북침했다는 것. 어안이 벙벙할 정도로 당당한 이 북한의 거짓말은 한때 일부 외국 학자들도 속아 넘어갈 정도로 기나긴 생명력을 자랑했다. 

 ◆ 소련파의 증언 

 하지만 냉전시대의 종말과 함께 북한의 거짓말에 커다란 구멍이 나기 시작했다. 한때 북한 정권이나 북한군에 몸담았다 소련으로 망명한 인물들이 수십 년 만에 증언하기 시작한 것. 1990년 서울을 찾은 전 북한군 작전국장 유성철 씨는 북한군의 남침 계획이 어떤 경로를 거쳐 어떻게 작성됐는지 속속들이 증언했다. 유씨는 소련군 고문단의 주도로 작성한 ‘선제타격계획’이란 제목의 남침 계획을 북한군 총사령부에서 한국어로 번역했다는 사실을 증언, 남침 계획의 작성 과정을 처음으로 공개했다. 독소전에 참전하는 등 전투 경험이 풍부했던 소련군 고문들이 1950년 남침 작전계획을 작성했고, 러시아어를 할 줄 알았던 북한군 작전국장·공병국장·포병사령관 등이 이를 우리말로 번역했다는 것이 유씨의 증언이었다. 

 유씨의 증언을 시작으로 40여 년의 냉전 동안 꼭꼭 숨겨져 있던 공산 측 자료들이 봇물 터지 듯 공개되기 시작했다. 1994년 김영삼 대통령은 러시아의 옐친 대통령으로부터 6ㆍ25전쟁에 관련된 구소련 문서 216건 548쪽을 넘겨받았다. 옐친이 넘겨 준 문서는 러시아 대통령 문서고와 외무부 문서고에서 보관하던 자료들이었다. 

 옐친 문서에는 우리 정부가 원했던 러시아 국방부와 구 KGB 문서고 자료는 포함돼 있지 않았지만 6ㆍ25전쟁이 북한의 남침으로 시작됐음을 보여주는 문서가 일부 포함돼 있어 ‘6·25 북침설’이란 허위 주장은 이제 회복 불능의 타격을 입게 됐다. 

 ◆ 구소련 문서  

 북침설에 대한 보다 결정적 타격은 러시아 연구자들로부터 나왔다. 러시아 외교 아카데미 부원장이었던 예프게니 바자노프와 러시아 동양학 연구소 연구원이었던 나탈리아 바자노바 부녀는 현직 러시아 관료와 연구원이란 이점을 활용, 미공개 러시아 문서를 뒤져 1997년 자료집을 펴낸 것. 

 온창일 육군사관학교 명예교수가 “6ㆍ25전쟁이 어떻게 일어나고, 어떻게 진행됐고, 왜 그렇게 종결됐는지 이해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자료”라고 평했던 바자노프 문서에는 김일성과 스탈린이 어떻게 전쟁을 기획하고 협의했는지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다. 2000년에는 러시아 외무부 부설 국제관계대학의 학장인 A.V. 토르구노프가 6ㆍ25전쟁 관련 구소련 문서를 수집, 해제한 책을 펴냈다. 

 이상의 연구를 통해 공개된 문서 중 가장 적나라하게 남침 사실을 보여주는 문서는 두 건이다. 슈티코프 평양주재 소련 대사는 1950년 6월 16일 모스크바에 다음과 같은 전문을 보낸다. “세부 계획에 의하면 6월 25일 이른 새벽에 공격이 개시될 것임. 공격의 첫 단계에서 조선 인민군 부대들은 옹진반도의 국지 작전처럼 행동을 개시한 다음 주 공격을 서해안을 따라 남쪽으로 옮겨갈 것임. 두 번째 단계에서 서울을 점령하고 한강을 장악해야 함.”(폰드 3, 목록 65, 문서 830, 리스트 9-11)

 같은 달 21일자 보고는 더욱 노골적이다. “김일성은 정보 보고에 의하면 ‘남측은 인민군의 공격 사실을 세부적으로 알고 있다’고 본직에게 말하였음. 그 결과 남한은 군대의 전투능력을 강화하는 조치들을 취하고 있음. 방어선들이 강화되고 있으며, 부대들이 옹진 방면에 추가적으로 배치되고 있음. 이러한 상황 발생으로 김일성은 본래 공격 계획이 수정돼야 한다고 믿고 있음. 총공세의 서막으로 옹진반도에 대한 국지 작전 대신 6월 25일 전 전선에 거쳐 전면 공격을 가하자고 제안하고 있음.”(폰트 45, 목록1, 문서 348, 리스트 14-15)

 이상의 자료로 공산 측의 남침으로 6ㆍ25전쟁이 시작됐다는 사실은 이제 부정할 수 없는 진리가 됐다. 물론 아직까지 논쟁이 남아 있는 대목은 있다. 김일성과 스탈린 중 누가 개전을 주도했는가라는 주제는 여전히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러시아에서 공개한 구소련 자료들은 남침을 망설이는 스탈린을 김일성이 설득해 남침 결정을 받아내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당시 소련과 북한의 역학관계상 북한이 아니라 소련이 전쟁의 기획자라는 시각도 적지 않다. 소련 측이 자신의 책임을 경감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중국과 북한에 주된 책임을 돌릴 수 있는 문서만 선별적으로 공개했다는 비판을 하는 학자도 있다. 거짓말과 함께 시작된 전쟁은 아직까지도 우리에게 자신의 진짜 모습을 숨기고 있는 것이다. 

■ 노획문서로 본 북한의 남침 증거

‘아군의 공격 정면에는 적의 7보사 1보련이 방어한다’.1950년 6월 22일 북한 4사단이 예하 부대에 공격명령을 하달하는 전투명령 1호는 남침 사실을 보여주는 가장 구체적인 증거 중 하나다. 최고 비밀을 뜻하는 ‘극밀’이라는 표시가 붙어 있는 이 문서는 러시아어 필사본 2쪽, 등사판본 전투계획일람표와 함께 1950년 7월 16일 대전 근방에서 아군에게 노획됐다. 이 문서는 시작부터 아군의 ‘공격 정면’이라고 명시해 북한이 이미 22일 구체적인 남침 명령을 예하 부대에게 하달하고 있음을 입증하고 있다.

 이처럼 국군과 유엔군은 이미 6·25전쟁 중에 북한군의 남침 사실을 입증하는 북한군 문서들을 다수 노획했다. 1990년대 이후 소련 측 문서가 공개되기 전에도 북한의 남침 사실을 증명할 문서들은 적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90년대 이전까진 북한이 이들 문서에 대해 ‘조작’이라고 부인한 탓에 이들 문서가 그리 주목받지 못했으나 구소련 문서가 공개되면서 6ㆍ25전쟁 중 아군이 노획한 북한군 문서들도 다시금 주목받게 됐다. 

 이 밖에도 북한 총사령부 명의로 6월 18일자로 하달된 정찰명령 1호도 북한의 전투 준비 과정을 잘 보여주는 문서 중 하나다. 

미 국립문서보관소에서 보관 중인 1950년 6월 15일자 북한 531군부대 부대장이 작성한 명령서 ‘신관조제 작업에 관하여’는 “각 연합부대 포병부사단장 및 포병공급과장은 책임지고 현 보유 포탄 100%를 신관 결합시켜 사격에 지장이 없게끔 기술적으로 보장할 것”이라고 지시하고 있다. 보유 포탄 신관 100% 결합은 이미 이때부터 전쟁을 염두에 두고 있었음을 잘 보여준다. 

 역시 미 국립문서보관소에서 소장 중인 6월 24일자 북한 657군부대 제5과 공병정찰계획은 25일 새벽 3시 30분까지 북한강 부근 마평리의 지뢰원과 지뢰 종류를 확인하고 주변 소로와 협곡의 지뢰까지 확인할 것을 지시하고 있다.
출처 : P.A.M.T.E.C.P.
글쓴이 : 네오지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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