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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역사 스페셜] 다시 쓰는 6.25 전쟁 - 개전

오늘행복스마일 2019. 2. 11. 09:07

한국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6.25 전쟁 ... 역사의 한페이지를 돌아 보겠습니다. - < 이하  유용원의 군사세계 에서 발취 >


[다시쓰는6·25전쟁] 개 전
두 달 계속된 경계태세 해제하자 전쟁 발발
김병륜 기자 lyuen@dema.mil.kr
북한의 남침 사실을 보도한 조선일보 1950년 6월 26일자 1면.

  올해는 북한의 전면 남침으로 6·25전쟁이 시작된 지 60주년이 되는 해다. 6·25전쟁 당시 국가를 위해 목숨을 걸고 싸웠던 참전용사들을 기리고 역사의 교훈을 되새기기 위해 본지는 6·25전쟁의 큰 흐름을 되새겨 보는 ‘다시 쓰는 6·25전쟁’을 연간 기획으로 연재한다. 편집자 
 
‘화산이 폭발할 것이라는 사실은 누구나 알지만 언제 터질지는 아무도 모른다.’전쟁은 마치 화산과도 같다. 땅속 깊은 곳에서 마그마가 끓어오르면 약한 지진이 일어나고 아황산가스가 새어 나와 동물들이 죽기도 한다. 이런 징조를 토대로 전문가들은 화산 폭발 가능성이 높다고 예측할 수 있다. 하지만 화산이 정확하게 언제 폭발할지는 누구도 확언할 수 없다. 

 6ㆍ25전쟁도 그랬다. 육군본부 정보국은 이미 1949년 12월 전쟁 가능성을 경고했다. 유양수 전투정보과장 주도로 작성한 연말종합정보보고에는 “1950년 춘계에 북한이 38도선에서 전면 공격을 할 것”이라는 예측이 담겼다. 5월 무렵에는 위기설이 널리 퍼져 군뿐만 아니라 민간에서도 전쟁 가능성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군은 4월 27일부터 29일까지 대기태세, 4월 29일부터 5월 2일까지 경계태세, 5월 2일부터 3일까지 대기태세를 잇달아 발령했다. 5월 9일부터 27일까지 또다시 대기태세가 발령됐다. 총선거를 전후한 5월 27일부터 6월 2일까지는 한 단계 격상된 경계태세가 발령됐다. 6월 11일부터는 가장 높은 비상경계태세가 발령되면서 군의 긴장은 최고도에 달했다. 

 하지만 전쟁이 터진다는 구체적 징후가 더는 없다고 판단한 군 수뇌부는 6월 23일 24시부로 비상경계태세를 해제했다. 마침 6월 24일이 토요일이라 각 부대에서는 일제히 외출ㆍ외박을 실시했다. 4월 27일 이후 거의 45일 동안 계속된 대기ㆍ경계태세가 해제된 만큼 어느 때보다 많은 병력이 외출과 외박을 나갔다. 부대에 따라 외출ㆍ외박자의 비율에는 차이가 있었으나 결과적으로 전군의 삼분의 일가량이 병영을 비운 상태가 됐다. 

 하지만 육본 정보국 정보상황실 요원들의 판단은 조금 달랐다. 22일부터 23일까지 북한군의 움직임이 여전히 심상치 않았던 것. 22일 고랑포 북방의 북한군 1사단 예하 병력들이 38도선에 보다 근접한 곳으로 이동한 징후도 확인됐다. 춘천 방면에서도 자주포의 이동이 관측됐고, 철원에서도 북한군의 활발한 병력 움직임이 관측됐다. 

 전선 곳곳에서 이상한 징후가 나타나자 24일 오전 10시 육본에서 정보국 주도의 긴급회의가 열렸다. 정보국장 장도영 대령을 비롯해 작전국장과 군수국장 등이 참석한 이날 회의에서 육본 정보국 전투정보과 북한반 선임장교였던 김종필(당시 중위) 전 총리를 비롯한 정보국 요원들은 전선의 상황이 심상치 않다고 보고했다. 

 하지만 현 육본 각 참모부 참모부장 격에 해당하는 국장들의 반응은 미지근했다. 4월 이후 지속적으로 발령했던 대기태세와 경계태세를 해제한 지 겨우 하루가 지난 상황에서 또다시 경계태세를 발령하기가 쉽지 않았던 것일까.

당시 육본 정보국 소속이었던 이영근 씨는 1977년 증언을 통해 “당시 군 수뇌부들은 38선에 배치된 북한 경비대와 인민군이 서로 병력을 교대하는 것 정도로 가볍게 생각했다”고 24일 회의 분위기를 회고한다. 

 긴급 회의가 별다른 결과를 내지 못하고 끝난 가운데 24일 오후 3시 채병덕 총참모장(현재의 참모총장)이 육본 정보국장실을 방문, 전선 상황을 종합적으로 판단한 후 자신에게 결론을 보고하라고 지시했다. 이에 육본 정보국은 전 전선에 걸쳐 육군 첩보대(HID) 소속 첩보파견대를 38선에 투입시켜 현장 상황을 다시 한 번 체크하기로 했다. 

 장도영 당시 육본 정보국장은 2001년 펴낸 회고록에서 “24일 첩보대 김병계 소령에게 지시해 첩보장교가 지휘하는 5~6명으로 구성된 정찰반을 하나는 개성에서 계정으로, 또 다른 정찰반을 동두천에서 전곡으로 투입시켰다”고 증언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도 2006년 1월 펴낸 ‘6ㆍ25전쟁사 2권’에서 당시 첩보파견대 요원들이 옹진, 백천, 개성, 고랑포, 동두천, 포천, 강릉 등 총 7개조로 나눠 투입됐다고 설명한다. 

 당시 육본 정보국의 김종필 전 총리가 당시 중위 계급으로 정찰계획을 직접 기안했다는 주장도 있다. 김 중위가 작성한 정찰계획에 따라 김경옥 대위가 인솔하는 정찰조는 개성 방면을, 김정숙 대위가 이끄는 정찰조는 연천 방면을 정찰하려 했다는 것. 여하간 이들이 38도선 이북에서 현장 상황을 정찰한 후 보고를 보내오면 이를 토대로 구체적인 조치를 취하겠다는 것이 군 수뇌부의 판단이었다. 

 육본 정보국 소속 첩보대 요원들이 현지 정찰을 위해 이동하던 시점, 서울에서는 육본 장교클럽 신축 축하 파티가 열렸다. 파티 자체는 미 군사고문단 요원들도 참석하는 공식적인 모임이었던 만큼 채 총참모장을 비롯한 50여 명의 고급 장교들이 참석했다. 

공식 파티는 24일 밤 10시에 끝났지만 25일 0시를 넘겨 이어진 2차 비공식 모임까지 참석한 이들도 있었다. 

 6월 19일부터 추적추적 계속 내리던 비는 24일 오후가 되자 폭우로 바뀌었다. 정찰요원들이 폭우를 뚫고 전방에 도착했을 때쯤인 25일 0시를 고비로 빗줄기가 점차 약해져 보슬비로 바뀌었다. 전방의 빗줄기는 한결 부드러워졌지만 서울 삼각지에 자리 잡고 있던 육본 정보국 사무실의 긴장감은 점점 높아지고 있었다. 전방에서 올라오는 보고 내용이 갈수록 수상쩍었기 때문. 

 25일 새벽 1시 육본 정보국 상황실 일직 장교로 근무 중이던 김종필 중위에게 정보국 옹진파견대의 긴급 보고가 올라왔다. 국사봉 북쪽 능선에서 수 미상의 대병력 이동이 관측됐다는 내용이었다. 새벽 3시에는 문산 임진강 부근에서 북한군이 도하용 주정을 운반하고 있다는 보고가 올라왔다. 정보국 요원들의 걱정대로 전방에 무언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지고 있음이 분명했다. 

 운명의 25일 새벽 4시 경기도 연천 전곡 방면에서 침투하고 있던 육본 정보국 첩보대 요원들은 번쩍 번쩍하는 불빛을 보았다. “미리 조준해 놓고 일제히 사격하는데 처음에는 번쩍번쩍할 뿐 소리는 없어 마치 번개가 치는 것 같았다”는 것이 정보국 최학모 중위의 증언이다. 최 중위가 보았던 불빛은 바로 북한군 M1938 122㎜ 곡사포의 일제 사격 장면이었다. 

 하지만 그를 비롯한 그 누구도 그 불빛이 군ㆍ민간인 포함해 300만 명이 넘는 대규모 인명 피해를 발생시키는 비극의 출발점이라는 사실은 알지 못했다. 채 총참모장은 첩보대 요원들의 보고에 따라 경계태세 발령 등 조치를 결정하려 했으나 그에게 최종 보고가 올라가기도 전에 북한군 남침이 시작된 것. 육본 정보국 요원들이 그토록 우려하던 북한군의 전면 남침은 ‘누구나 예상할 수 있지만 누구도 날짜는 알 수 없는 화산 폭발’처럼 그렇게 시작됐다.   

 
‘6·25전쟁’ 어느 것이 올바른 용어인가?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이 38선을 넘어 불법 남침함으로써 일어난 전쟁은 공식적으로 ‘6·25전쟁’이라고 부른다. 과거에는 ‘6·25 사변’ ‘6·25 동란’ ‘한국전쟁’ 등 여러 용어가 혼용돼 왔다. 하지만 2004년 4월 교육인적자원부가 학계 전문가들의 감수를 거쳐 교과서 편수용어를 확정한 이후에는 ‘6·25전쟁’이 사실상 공식 용어로 사용되고 있다. 

‘국가유공자 등 예우 및 지원에 관한 법률’ 등 법률ㆍ행정명령ㆍ규칙은 물론이고 국방부가 간행하는 각종 공식간행물에서도 원칙적으로 ‘6·25전쟁’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6ㆍ25전쟁 연구의 중심기관인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가 펴내고 있는 전쟁사 시리즈도 1990년대까지 ‘한국전쟁’이라는 용어를 사용했으나 2004년 이후 ‘6·25전쟁’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도 같은 이유 때문이다. 

 ‘한국전쟁’이란 용어의 경우 한국에서 벌어진 수많은 전쟁 중에 유독 ‘6·25 전쟁’만을 ‘한국전쟁’이라고 부를 수 없다는 견해 때문에 교과서 용어로 채택되지 않았다. 하지만 외국에서는 여전히 ‘한국전쟁’(Korean War)이 일반적인 용어로 사용되고 있다. `사변'은 ‘전쟁 상태에 이르지는 않았으나 경찰 이상의 무력이 사용되는 난리’라는 의미가 있기 때문에 공식 용어로 채택되지 못했다.
출처 : P.A.M.T.E.C.P.
글쓴이 : 네오지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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