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에서 여성으로는 유일하게 황제가 된 측천무후는
일개 궁녀에 불과했었다.
측천무후는 태종이 죽은 후 당시 관례에 따라
다른 궁녀들처럼 비구니가 되었지만,
태종의 아들인 고종과의 은밀한 관계 덕분에 다시 궁으로 돌아오게 된다.
다시 궁으로 돌아온 그녀는 고종의 사랑을 한 몸에 받으며 승승장구했다.
하지만 측전무후의 야심은 끝이 없었다.
왕황후가 자신의 아이를 보러 왔다가 돌아가자,
생후 몇 개월도 채 되지 않은 자신의 딸을 목 졸라 죽였다.
왕황후를 모함하기 위하여 자식을 도구로 삼은 것이다.
측전무후는 결국 황후를 끌어내리고 자신이 황후의 자리를 차지했다.
황후가 된 측천무후는 고종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천후라는 칭호를 사용하기 시작하면서부터는 실권은
사실상 측천무후에게 있었다.
황태자를 책봉하는 일에서도 고종은 허수아비에 불과했다.
측천무후는 자신에게 복종하지 않으면 자신의 친아들이라도
죽이고야 말았다.
황태자를 몇 번이나 갈아치운 끝에 여덟 번째 아들 단이
황제에 올랐다.
측천무후는 황제가 된 아들의 성을 자신의 성으로 바꾸고,
당나라 이름을 주나라로 바꾸며 자신이 최고 황제라고 선포했다.
측천무후는 냉철했다.
그간 악명 높은 ‘악녀’들이 질투 등의 사사로운 감정에 의해 움직였다면,
이 여인은 철저하게 권력을 위해 움직였다.
또한 측전무후는 인재등용에 탁월한 능력이 있었다고 한다.
신분제도에 대하여 한(恨)이 서려있었던 것일까,
그녀는 신분보다 능력을 우선시 했다고 한다.
당시로서는 상당히 파격적인 시도였을 것이다.
역사는 그녀를 권력에 눈이 멀어, 친자식도 살해하는
냉혹한 여인으로 기억하지만,
비천한 궁녀가 황제에 오르기까지 겪었을 수 많은 역경에 대해서는
아무도 언급하지 않는다.
측천무후는 신분차별, 성차별이 만연한 사회가 만들어낸
폐해가 아닐까 싶다.
신분제도가 없어진 지금 우리 사회를 돌이켜 볼 필요가 있다.
‘신분제도’ 가 얼굴만 바꾼 채, 여전히 존재하고 있지는 않은지 말이다.
청나라를 망하게 한 장본인, 서태후.
몰락한 관리의 딸로 태어나 16세에 궁녀가 된 서태후는
눈에 띄는 외모를 지니고 있었다.
그녀가 함풍제의 눈에 들어 후궁으로 간택된 후부터
그녀는 거대한 운명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된다.
함풍제의 본처 ‘동태후’가 있었지만 그녀에게는
아이가 없어서 함풍제가 죽은 뒤 서태후의 아들이
왕위에 오르게 된다.
하지만 서태후의 아들 동치제는 동태후를 더 좋아했고
황후 간택 문제에서 조차 동태후의 선택을 따랐다.
서태후는 그 ‘억울함’을 사치스러운 생활로 보상받으려 했다.
그녀의 사치스러움은 말로 형용할 수가 없을 정도였다.
그 단적인 예가 바로 이화원이다.
이화원의 인공호수는 바다를 연상케 할 만큼이니
동양의 ‘마리 앙투아네트’ 라는 칭호가 걸맞겠다.
이 여인은 오로지 자신의 ‘사치’를 위하여 청일 전쟁 중에
함대를 만들 돈을 빼돌리는 엽기적인 행각을 벌였고,
국고를 탕진하여 청나라를 파국으로 치닫게 했다.
이 뿐만 아니라, 나라는 몰락하건 말건 외간 남자를 궁에 들여
부적절한 관계를 맺고 자기 눈에 거슬리는 사람은 곧바로 죽여버렸다.
결정적으로 시대착오적인 정책으로 청나라를 궁지에 빠지게 하면서
역사는 그녀에게서 완전히 등을 돌렸다.
서태후에 대한 평가는 중국 내에서도 극과 극을 달린다.
일각에서는 서태후를 비극적인 삶을 살아온 ‘외로운 여인’ 으로
보기도 하지만 청나라를 망친 장본인으로 악녀의 화신이라는
평가가 대부분이다.
한 나라를 좌지우지 했지만, 녹록하지 않았을 이 여인의 개인적인 삶은
아무도 기억해주지 않는다.
날마다 진수성찬을 즐기고 값비싼 옷을 입었지만,
어쩌면 그녀는 정말로 외로웠을 수도 있겠다.
역사의 평가가 때로는 너무나 잔혹하다.
ㅡ모셔온글 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