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나라의 천주교 박해 기간 중에 치명한 많은 순교자들 중 왕족 출신으로 철종의 조부가 되는 은언군(恩彦君, 李彦, 1755~1801)의 부인 송 마리아( ?~1801, 철종의 조모)와 그의 아들 상계군의 부인 신 마리아( ?~1801, 철종의 큰어머니)가 있다. 그들의 입교와 순교의 내용은 천주교의 왕실 전교 상황을 잘 설명해 주고 있다.
1795년 주문모(周文謨, 1752~1801, 야고보) 신부가 서울에 도착하여 관원의 눈을 피해 지하 전교 활동을 하고 있을 때 국왕 정조에게 서제가 되고 철종에게는 조부가 되는 은언군이 있었다. 이복형제 정조는 은언군의 처 송씨에서 낳은 장남 상계군이 홍국영과 같이 반역을 꾀하였다는 주장을 하는 벽파의 우두머리 대왕대비의 간청에 못 이겨 상계군을 자결케 하고 1786년 은언군은 강화로 유배 보냈다.

그래서 몰락으로 잃은 아들의 슬픔과 역모로 몰려 강화로 유배된 남편에 대한 비탄 속에 송씨와 며느리 신씨는 흉가라고 부르는 양제궁(良女+弟宮)에서 비운을 안고 살았다. 이 궁은 전동(石+專洞, 현 종로구 송현동 근처)에 있었는데, 당시 사람들은 역적의 폐궁(廢宮)이라 불렀다고 한다.
여회장 강완숙 골롬바는 절망 속에 살던 그녀들에게 새로운 희망과 기쁨을 갖게 해 주었으며, 그녀의 도움으로 주 신부가 폐궁으로 찾아가 두 부인에게 각각 마리아라는 세례명으로 세례를 주었다. 또한 두 부인은 한국 천주교회의 첫 교리 연구 단체인 명도회에도 가담하여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였으며, 때때로 주 신부를 초청하여 설교를 듣고 그들에게 딸린 시비(侍婢)들도 입교케 하였다.
다행히 궁 옆에 열심한 교우 홍 안토니오가 살고 있었으므로 주 신부는 안토니오의 집 담벽을 뚫고 쉽게 드나들 수 있었다. 그 후 주 신부의 헌신적 노력으로 조선의 교세가 늘어갔지만, 날로 심해지는 박해로 많은 교우들이 고난을 당하고 있는 것을 불쌍히 여긴 주 신부는 1801년 3월 12일에 의금부에 자수하였다. 모진 고문으로 폐궁의 궁인 서경의(徐景儀)가 고백하여 왕의 서숙모인 송 마리아와 그의 며느리 신 마리아가 세례를 받은 사실이 드러났다. 그 궁인은 배교한 후 풀려나왔다.

이로 인하여 사교에 물들고 흉측한 외국인과 상종하면서 국법을 어긴 대죄와 설상가상으로 폐궁까지 끌어들여 숨긴 죄는 마땅히 극형으로 다스려야 한다는 김 대비의 완강한 청으로 송 마리아와 신 마리아 고부는 1801년 3월 17일에, 강화도로 귀양가 있던 은언군은 같은 해 5월 30일에 사약을 받았다.
본래 철종의 조부인 은언군과 송 마리아의 묘는 진관외동 산 18번지에 있었는데, 일제 때 다른 곳으로 이장되고 묘 앞에 큰 비각만 남아 있다가 1950년 전쟁 때 소실되었다. 그 이후 진관내동 흥창사에 은언군 묘비가 옮겨져 있다가 다시 1989년 9월에 절두산 성지로 옮겨졌다.

이 비의 비신 앞면에는 흥창사(興昌寺)란 사찰명과 개창주(開倉主) 부부의 이름과 생년월일이 적혀 있다. 그런데 비신 뒷면을 보면 페인트칠이 벗겨진 자리에 ‘은언군...(恩彦君...)’ 글자와 비문 맨 마지막에 ‘崇禎紀元後四辛亥八月 日立(숭정기원후사신해팔월 일립)’이란 글씨가 보인다. ‘崇禎紀元後四辛亥’는 1851년에 해당한다.
묘의 위치가 분명하지 않지만 이곳에 게재하는 이유는 조선 왕실의 첫 순교자이기 때문에 역사적으로 그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와 한국의 모든 순교자들이시여,
● 저희를 위하여 빌어 주소서.
○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와 한국의 모든 순교자들이시여,
● 우리나라의 모든 정치인들을 위하여 빌어 주소서.
■ 찾아가는 길

■ 순례지 정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