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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영지주의(靈知主義, Gnosticism)

오늘행복스마일 2018. 12. 25. 22:08


영지주의(靈知主義, Gnosticism)

 

 

 

 

 






 

 

영지주의(靈知主義, Gnosticism)는 고대에 존재하였던 혼합주의적 종교 운동 중 하나로, 다양한 분파가 존재하지만 전반적으로 불완전한 신인 데미우르고스가 완전한 신의 영(프네우마)을 이용해 물질을 창조하였고, 인간은 참된 지식인 그노시스를 얻음으로써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구조를 지닌다.

 

1945년에 나그함마디 문서가 발견되고 그 이후 이들 1차 문헌들을 토대로 영지주의가 현대의 학자들에 의해 새로이 조명되기 이전에는 영지주의에 대한 연구는 영지주의를 논박하는 기독교 교부들의 논서들을 토대로 이루어져야 했다. 이들 논서들에서 영지주의는, 정통파 기독교에서 세력을 얻지 못하는 좌절을 겪은 배교자들이 창시한, 타락된 형태의 교의를 가진 기독교의 한 이단인 것으로 대체로 서술되고 있다. 반면, 현대의 연구에 따르면 영지주의는 교의 체계가 다양하여 특정 한 종교 분파 또는 단체로 묶을 수 없으며 기원 또한 기독교로 국한할 수 없다는 것이 밝혀졌다. 그러나 영지주의 종교 운동이 가장 활발히 전개된 시기는 기독교가 태동하던 기원후 1세기부터 3세기까지의 시기로 기독교와 밀접한 관련 하에 전개되었다.

 

정통파 기독교와 영지주의의 본질적인 차이는 정통파 기독교에서는 구원이 "믿음(신앙 · faith)"을 통해 가능하다는 견해를 가진 반면 영지주의에서는 구원이 "(gnosis 그노시스)"을 통해 가능하다는 견해를 가진 것에 있다.

 

 

영지주의는 나스티시즘(영어: Gnosticism)을 뜻에 따라 번역한 것으로, 음을 따라 그노시스파 또는 그노시즘이라고도 한다. '영지주의자' · '영지주의파' 또는 '영지주의적'이라고 번역되는 나스틱(Gnostic)이라는 낱말은 그리스어로 '신비적이고 계시적이며 밀교적인 지식 또는 깨달음'을 뜻하는 그노시스(γνσις gnosis)로부터 따온 것으로, 이 낱말은 고대의 영지주의 종교 운동의 반대자들이 이 운동에 속하는 사람 또는 단체를 지칭하는 용도로 주로 사용되었다. 당시에 이 종교 운동의 분파들 중 기독교 계통에 속한 사람들은 자신들을 단순히 기독교인이라 불렀다. "나스티시즘(Gnosticism)"이라는 낱말은 고대에 존재하였던 이 종교 운동을 특별히 가리키기 위해 현대 학자들이 '나스틱(Gnostic)'이라는 낱말로부터 만든 말이다. 한글 번역어인 '영지주의(靈知主義)'라는 낱말이 어떻게 성립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려진 바가 없다. '영지(靈知)'의 문자 그대로의 뜻은 '영적 지식', '영적인 앎' 또는 '영 즉 프네우마(Divine Spirit)를 아는 것'이다.

 

영지주의 운동은 특정한 한 형태로 전개된 것이 아니라 다양한 형태로 전개되었다. 영지주의는 다양한 신앙 체계들로 구성되어 있었지만, 물질 우주는 데미우르고스라고 불리는 불완전한 하위의 신이 최고신의 스피릿, 즉 프네우마의 일부를 사용하여 창조한 세계라는 가르침에 대해서는 분파와 무관하게 대체로 견해가 일치하였다. 이 교의에서, 데미우르고스는 종종 아브라함 계통의 종교의 신이나 그리스 신화의 제우스와 동일한 신으로 생각되며, 최고신으로부터 발출되어 형성된 상위의 세계인 플레로마나 지고한 존재인 최고신을 뜻하는 신성(神性)과는 대비된다.

 

데미우르고스에 대한 견해는 분파 사이에 큰 차이를 보였다. 어떤 분파는 데미우르고스가 악의 물질적 화신이라고 주장한 반면, 다른 어떤 분파는 최고신에 비해 불완전한 선한 신적인 존재일 뿐이라는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특히, 바실리데스파는 데미우르고스에 대해 다른 분파들과는 더 뚜렷이 구분되는 견해를 가졌다. 이 견해에 따르면, 데미우르고스는 불완전한 선한 신적인 존재일 뿐만 아니라, 예수의 복음에 기뻐하고 이를 받아들여 스스로를 최고신이라 주장했던 이전의 무지를 반성하고 우주의 전 체계 속에서의 진정한 자신의 자리를 찾아가는 겸손한 존재였다.

 

영지주의 운동은 헬레니즘 철학 · 유대교 · 기독교와 영향을 주고받았다. 학자들은 대체로 영지주의가 이원론적인 종교 운동이었다고 보고 있으나, 한편, 가장 유력했던 영지주의 분파인 발렌티누스파를 비롯한 후대의 영지주의 운동들에서는 일원론적인 세계관을 가졌다. 데미우르고스에 대한 다양한 견해와 함께 이러한 세계관의 다양성은 영지주의 운동에 여러가지 다양한 입장들이 서로 공존하였다는 것을 나타내는 지표로 간주되기도 한다.

 

영지주의자들과 정통파 기독교인들과의 가장 큰 차이점은 믿음이 아니라 앎(그노시스)이 구원의 수단이라고 여겼다는 것에 있었다. 영지주의 운동가들은 그노시스를 통해 인간의 참된 기원이 지고한 신성(神性)에 있다는 것을 깨닫고, 이 깨달음을 통해 인간의 성품 중 영적 요소는 물질계를 벗어나서 자유롭게 된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영지주의 운동에서는 그노시스를, 영적 요소가 물질계의 속박으로부터 해방된 상태를 얻고자 할 때, 반드시 갖추어야 하는 필수적인 요인이자 구원의 수단이라 여겼다.

 

 

한편, 다른 하나의 큰 차이점으로, 많은 영지주의자들이 윤회를 믿었다. 정통파 기독교의 교부로 알렉산드리아파를 대표하였던 오리겐에 따르면, 유력한 영지주의 분파 중의 하나였던 바실리데스파의 창시자인 바실리데스는 사람이 구원을 성취하지 못하고 죽었을 때 받는 유일한 벌은 이 세상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라고 가르쳤다. 또한 오리겐은, 바실리데스가 가르친 윤회의 교의로 인해, 악한 행위를 하면 죽어서 지옥에 가게 된다는 두려움을 가지게 하여 결과적으로 사람들로 하여금 선한 행위를 하게 만드는 '유익한 두려움'이 사라져 버리게 되었다고 불만을 제기하였다.

 

영지주의 운동가들은 인간을 정신(영혼)과 물질(육체)의 두 요소로 구성된 존재가 아니라 영 · 정신(영혼) · 물질(육체)의 세 요소로 구성된 존재로 보았으며, 이에 따라, 현재의 영적 발달 정도에 따른 구분으로, 인간을 영적인 인간(Pneumatics) · 정신적인 인간(Psychics) · 물질적인 인간(Hylics)의 세 부류로 구분하였다. 이 구분에 따라, 영지주의자들은 자신들이 이 세 부류 중 구원을 성취할 가능성이 가장 큰 영적인 인간의 부류에 들어가며, 다른 기독교인들, 즉 당시의 로마 가톨릭교회의 교인들은 정신적인 인간의 부류에 들어간다고 주장하였다. 영지주의자들은 이들 세 부류의 사람들 중 영적인 인간과 정신적인 인간만이 그노시스를 가질 수 있으며, 물질적인 인간은 이번 생에서 그노시스에 도달할 수 없을 것이라 여겼다. 그 이유는 물질적인 인간은 물질에 너무 몰입해 있으며 따라서 더 높은 차원의 실체가 있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할 것이라고 보았기 때문이었다.

 

예수에 대해서도 영지주의자들은 여러 견해를 가졌다. 다수의 영지주의자들은 예수를 지상의 인류를 구원할 수단인 그노시스를 인류에게 가져다 주고 가르치기 위하여, 지복(至福)의 플레로마를 떠나 고통이 가득 찬 물질계에 탄생하는 희생을 기꺼이 감수한 존재로, 지고한 존재의 물질적 화신이라 여겼다. 반면 노쯔림과 만다야교 등의 일부 영지주의자들은 예수를 "거짓 메시아"라고 생각했다. 이들은 세례자 요한을 특히 중시하였는데, 이들은 예수가 세례자 요한이 위탁하여 맡긴 가르침들을 타락시켰다고 생각하였다. 어떤 영지주의 가르침에서는 예수가 아니라 아담과 이브의 셋째 아들인 셋이나 마니교의 창시자인 마니를 메시아(구세주)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나그함마디 문서에 포함된 영지주의 문헌들 중의 하나인 이집트 복음서에서는 아담과 이브의 셋째 아들인 셋이 예수의 전생들 중의 하나라고 보고 있는데, 물질계라는 감옥으로부터 사람들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셋이라는 메시아로 화신하였던 것처럼 동일한 목적을 위해 다시 예수라는 메시아로 화신하여 나타난 것이라고 보고 있다. 또한 영지주의자들은 예수의 생애에 대해서도 정통파 기독교와는 다른 견해를 주장하였는데, 예를 들어, 현존하는 대표적인 영지주의 성전(聖典)들 중의 하나인 피스티스-소피아에 따르면, 예수는 십자가에 못박히고 부활한 다음 하늘로 승천하여 지상을 완전히 떠난 것이 아니라, 이 일시적 승천 후 다시 지상으로 와서는 지상에서 자신의 제자들을 11년간을 더 가르쳤는데 그 가르침은 첫 번째 신비(First Mystery)를 완전히 알 수 있게 하는 가르침(그노시스)이었다고 전하고 있다.

 

오랫동안 많은 학자들이 영지주의 운동은 기독교의 한 분파로서 시작되었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예수 탄생 이전, 즉 서력기원의 몇 세기 전에도 영지주의 체계의 자취가 존재하였다는 다른 학설이 제기되었다. 영지주의 운동은 3세기에 이르기까지 로마 제국과 고트족의 점령지, 또 사산 조 페르시아의 영토 등, 지중해 세계와 중동으로 전파되고 발전하였다. 그러나 니케아 공의회와 여타 다른 칙령들을 통해 로마 가톨릭교회가 로마 제국의 국교가 되었고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이 파괴되는 등의 일이 있었던 4세기에는 가톨릭교회의 탄압으로 그 세력이 크게 위축되었다. 이 시기에 영지주의 문헌들의 거의 대부분이 파괴되어 사라졌으며, 영지주의 반대자들이 영지주의를 논박하기 위한 문헌의 근거 자료로 소수의 단편들만이 살아남았다. 나그함마디 문서가 발견된 1945년까지 영지주의 연구자들은 이러한 2차 자료들을 토대로 추론에 근거한 연구를 하는 수밖에 없었다. 4세기 이후에는 많은 수의 영지주의자들이 이슬람교로 개종하였으며, 남아 있는 유럽의 영지주의자들도 알비 십자군의 활동으로 인해 그 수가 크게 감소하였다. 그러나 소수의 만다야교 공동체들이 현대에도 남아 있다.

 

영지주의 사상은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유럽과 북아메리카에서 있었던 많은 밀교적 · 신비주의적 운동의 철학에 큰 영향을 끼쳤다. 이들 중 일부는 자신들을 고대에 있었던 영지주의 운동의 부활 또는 연속이라고 생각한다. 1945년에 발견된 나그함마디 문서에 포함된 영지주의의 1차 문헌들은 영지주의와 초기 기독교에 대한 학자들의 이해에 있어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영지주의의 특징과 체계

 

주요 특징

 

영지주의 체계는 다음과 같은 전형적인 특징들을 가진다.

 

 

지고한 모나드적 근원

 

영지주의자들은 심원하고 무한한 지고한 모나드적 근원 또는 신성(神性)이 존재한다고 믿는다. 이 지고한 존재 또는 최고신은 모나드, 플레로마 또는 비토스 등으로도 불린다. 나그함마디 문서에서 발견된 대표적인 영지주의 문헌들 중 하나로 오늘날의 학자들에 의해 가장 중요한 영지주의 문헌으로 평가받고 있는요한의 비밀 가르침에서는 이 지고한 존재에 대해 예수가 다음과 같은 가르침을 요한에게 전했다고 말하고 있다:

 

 

모나드는 그것을 지배하는 그 어떤 것도 없는 그런 군주이다. 모나드는 최고신으로서, 만물의 아버지로서, 만물 위에 거주하는 불가시의 존재로서 존재한다. ... 모나드는 한계 지을 수 없는데 모나드를 한계 지을 수 있는 그 무엇도 모나드 이전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 모나드는 순수하고 신성(神聖)하며 오염이 없는 무한한 빛이다. ... 모나드는 완전 · 축복 · 신성(神性) 속에 존재하지 않는다. 모나드는 이것들을 훨씬 뛰어넘은 존재이다. 모나드는 유(: 유형)도 무(: 무형)도 아니다. 모나드는 큰 것도 작은 것도 아니다. 모나드는 이런 크기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거나 또는 이런 특질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 이는 모나드가 광대무변(廣大無邊, vastness)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나드는 무한한 단순성을 가지고 있다. 모나드는 아이온들을 낳는 아이온이며, 생명을 주는 생명이며, 축복을 주는 축복이며, 지식을 주는 지식이며, 선을 주는 선이며, 자비와 구원을 주는 자비이며, 은총을 주는 은총이다.

— 마이클 발트슈타인 & 프레드릭 비세 공역, 렌스 오웬스 편집.

요한의 비밀 가르침(The Apocryphon of John), 긴 버전. 2015103일에 확인.

 

하위신들의 발출

 

영지주의 체계에 따르면 지고한 모나드적 근원으로부터 발출을 통해 나타나는 하위의 신적인 존재들인 아이온들이 있다. 이들은 신이지만 동시에 자신들이 분리되어 나온 근원인 지고한 신성의 속성들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신적인 존재들의 점차적인 발출은 전체 구조의 하부로 내려갈수록 그 존재들이 궁극적인 근원으로부터 점차적으로 멀어지는 것으로 이해되는데, 이에 따라 아래로 내려갈수록 신성의 구조에 불안정성이 초래된다고 여겨지기도 한다.

 

물질계의 창조신인 데미우르고스

 

영지주의 체계에는 물질계, 즉 물질로 이루어진 우주를 창조하는, 지고한 존재와는 별개의, 독립적 창조자인 데미우르고스가 있다. 이는 환영이자 유일한 근원으로부터 가장 늦게 분리되어 나온 존재이다. 이 두 번째 신은 하위의 신이며, 열등하거나 거짓된 신이다. 많은 영지주의자들은 이 창조신을 플라톤주의자들이 사용하던 그리스어 낱말에서 따와 '데미우르고스'(demiourgós, 그리스어: δημιουργός)라 불렀다. 데미우르고스의 원래 의미는 공공 작업자를 뜻하며, 작업 또는 에너지, 숙련된 작업자, 대중의 신, 또는 거짓 신을 뜻하기도 했다.

 

데미우르고스의 탄생은 우주에, 특히 물질계와 관련하여, 어떤 의도하지 않은 커다란 부정적인 사건이 일어나 신성의 구조 즉 우주의 구조에 이전에 없었던 큰 불안정성 또는 무질서가 생겼다는 것을 의미한다. 특히 '지혜(소피아)'에 큰 문제가 생겼다는 것을 의미한다. 요한의 비밀 가르침에서는 데미우르고스의 탄생을 다음과 같이 신화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아브라삭스(Abraxas)와 크누피스(Chnuphis): 아브라삭스가 새겨진 보석의 앞면과 뒷면

 

그리고 에피노이아(Epinoia: Thought, 생각, Purpose, 목적, 의도; 소피아의 영 즉 에센스)의 소피아(Sophia: 지혜)[...]가 나타나게 되었다. 그리고 [...] 불완전하고 소피아의 모습과는 다른 어떤 존재가 소피아로부터 나왔다. 이 존재가 불완전하고 소피아와는 다른 모습이었던 이유는 소피아가 이 존재를 그녀의 배우자 없이 (, 불균형의 상태에서) 창조하였기 때문이었다. 이 존재는 자신의 어머니를 닮지 않고 (, 균형된 지혜의 존재가 아니고) 그녀와는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소피아가 자신의 욕구의 결과물을 보았을 때, 이 존재는 사자의 얼굴을 한 뱀(lion-faced serpent: 크누피스, 옆의 그림 참조, cf. 레온토세팔린)의 모습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이 존재의 두 눈은 섬광을 발하는 번갯불과 같았다. 소피아는 그녀 자신으로부터 떨어지게끔 이 존재를 바깥으로 내던져버렸다 (, 플레로마에 거주할 자격이 없으므로 데미우르고스가 플레로마에서 물질계로 내쫓겼다). 이것은 불멸의 존재들 중 그 어느 누구도 이 존재를 보지 못하게 하기 위한 것이었는데 소피아가 이렇게 한 것은 그녀가 이 존재를 무지 속에서 (, 배우자 없이, 불균형의 상태에서) 창조하였기 때문이었다.

 

— 마이클 발트슈타인 & 프레드릭 비세 공역,

렌스 오웬스 편집.

요한의 비밀 가르침(The Apocryphon of John),

긴 버전. 201328일에 확인.

 

데미우르고스의 성격

 

이 부분의 본문은 데미우르고스, #데미우르고스입니다.

 

영지주의에서 묘사되는 데미우르고스는 플라톤의 티마이오스국가에 나오는 존재들과 유사성이 있다. 티마이오스에서 데미우르고스는 중심적인 존재이며, 물질계를 창조하는 자애로운 창조자로 물질적인 한도 내에서 우주를 자애롭게 만드는 작업을 행하는 존재로 묘사된다. 국가에서 소개되는 소크라테스의 영혼에 대한 묘사에서 욕망이 사자의 모습으로 묘사되고 있는 대목은 영지주의에서 데미우르고스가 사자의 형상으로 묘사되는 것과 유사하며, 이러한 묘사와 관계가 있는 국가의 구절들이 나그함마디 문서 중에 있는 주요한 영지주의 문건들 중 하나에서 발견되었다. 이 문서에서는 데미우르고스를 사자 얼굴을 한 뱀으로 묘사하는 문장도 존재했다. 이러한 형상을 이알다바오트(Ialdabaoth),사마엘(아람어: sæmʕa-ʔel, 눈먼 신) 또는 사클라스(Saklas: sækla, 어리석은 자)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는 데미우르고스가 때때로 지고한 신성에 대해 무지하며, 어떤 경우에는 신성에 반대되기도 한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국가에서 묘사되는 데미우르고스는 악의적인 존재이다.

 

영혼의 장애로서의 데미우르고스

 

전제적인 신으로써 데미우르고스는 불완전한 물질 세상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고통을 초래하였으며, 제우스와 같은 비아브라함적 종교의 창조주나 야훼와 같이, 실존하지 않으며 누스로서의 인간의 마음이 만들어낸 생각 또는 착각이다. 두 번째 창조주는 필요하지도 중요하지도 않기 때문인데, 왜냐하면 만물은 영원하거나 발출되며 따라서 창조되지도 파괴되지도 않기 때문이다. 데미우르고스는 전형적으로 아르콘이라 불리는 일군의 동료 지배자들을 창조하여, 이들로 하여금 물질계를 주재하게 하며, 어떤 경우에는 물질계로부터 상위의 세계로 올라가려는 영혼을 가로막는 장애물로 존재하게 한다.

 

영혼의 장애로서의 물질성

 

위와 같은 이유로, 물질계는 결함이 있거나 오류의 산물인 것으로 판단되지만, 그 구성 물질들이 허용하는 한도 안에서는 선할 수 있다. 이 세상은 일반적으로 더 높은 수준의 실재 또는 의식의 열등한 시뮬라크르이다. 이 세상의 열등함은 회화, 조각 또는 수공예 작품이 어떤 대상을 모방한 것일 때의 기술적인 열등함과 견줄 수 있다. 특정한 다른 경우에 물질의 존재에 대한 견해는 부정적인 의미로 더 금욕주의적인 경향을 보인다. 이러한 견해는 물질성과 인체 자체가 악하며, 의도적으로 만들어져 그 주인을 옥죄는 감옥으로 인식하는 극단적인 견해로 발전하기도 한다.

 

인간의 현 상태에 대한 신화적·시적 묘사

 

이러한 상태는 신격이 물질계로 내려와 특정한 인간의 육체에 기거한다는 신화적이고 우주적인 드라마로 설명된다. 신격은 구원에 이르는 각성의 과정을 거쳐 상위의 세계로 올라갈 수 있다. 따라서, 개인의 구원이란 개인에 내재하는 신성의 복원이라는 것이며, 영지주의 운동의 가장 중요한 혁신은 개인의 구원을 우주적으로 중대한 사건으로 끌어올린 것이었다.

 

위의 특징들은 시리아와 이집트의 영지주의 운동만을 묘사하는 것으로 한정된다. 이는 마니교와 만다야교 등 페르시아 지역에서 있었던 영지주의 운동이 고유의 종교 양식을 가진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사실 '영지주의 운동'이라는 용어는 시리아와 이집트의 영지주의 운동만을 일컬으며, 페르시아 지역의 영지주의 운동은 마니교라고 칭하는 경우가 많다.

 

영지주의에 대한 위의 개념들은 최근 도전에 직면해 있지만, 이 개념을 통한 영지주의 이해는 다른 것에 비해 가장 보편적이면서 영지주의를 구성하는 현상에 대한 의미있는 논의에 유용한 것임을 스스로 보여주었다. 특히, 신앙과 독립적이며 더 뛰어난 지식인, 영지주의의 핵심 관념인 그노시스는 기독교를 불완전하게 받아들인 많은 사람들로부터 환영받았다. 그 예로, 발렌티누스주의의 신봉자들은 신앙을 '어떤 교의 체계를 진실이라고 받아들이는 행위로서 그 성질상 주로 지적이거나 감성적인 행위'로 생각하였다. 영지주의자들은 다양한 시대에 걸쳐 활동하였다. 이들은 알렉산드리아에서 기원했던 것으로 보이며 4세기까지는 초기 기독교인들과 공존하였다. 영지주의자들에게는 고정된 교회 행정 조직이 없었기 때문에, 종종 새로운 종교가 생겨나거나 이미 존재하는 종교와 영지주의가 뒤섞이는 일이 일어났다. 이러한 현상에 대해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는 "...하드리아누스 재위 시기에 이단 교의들의 창시자들이 나타났다. 그리고 이들은 안토니누스 피우스 시기까지 남아 있었다." 고 말했다.

 

1세기 후반부터 2세기까지의 기간 동안의 영지주의 운동과 정통파 기독교 사이의 관계는 영지주의의 주된 교리를 더 깊이 이해하는 것에서 필수적인 도움을 주는데, 부분적으로는 나그함마디 문서의 발견 이전에 영지주의에 대해 알려진 지식의 대부분은 초기 기독교 교부들의 요약문과 논설에만 남아있다는 사실 때문이다. 이레나이우스는 자신의 논문 이단 교리에 대한 반박에서 영지주의 운동이 모든 도덕률을 개인의 변덕에 맡기고 있으며 어떤 고정된 형태의 신앙 규칙을 만드는 것도 불가능하게 한다고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영지주의의 분파 중 하나인 카인파는 기독교의 다른 교리보다 더 위대하고 숭고한 지식을 전한다고 주장하였으며 카인이 지고한 신으로부터 권능을 받았다고 믿었다. 2세기의 교부들 중 하나이며 알렉산드리아 교회의 최초의 주요 인사였던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는 자신이 영지주의적 기독교인이면서도 자신의 저서 스트로마타를 통해 바실리데스와 발렌티누스의 추종자들을 비판하였다. 그의 비판에 따르면, 이들의 주장은 세례의 유효성을 부정함으로써 이 성스러운 예식에 부여된 선물인 믿음에 어떠한 가치도 부여하지 않았다.

 

이원론과 일원론

 

영지주의 체계들은 대체로 전형적인 이원론적인 성격을 가졌다. 다시 말해, 영지주의자들은 세상이 두 개의 근본 원리 또는 실체로 구성되어 있다거나, 두 개의 근본 원리 또는 실체를 통해 세상을 설명할 수 있다는 견해를 가졌다. 이에 관해 한스 요나스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영지주의의 주요한 특징은 (두 개의 근본 원리 또는 실체가) 신과 세상의 관계를 지배하고, 따라서 (두 개의 근본 원리 또는 실체가) 인간과 세상의 관계를 지배한다는 급진적 이원론이다." 위와 같은 견해를 통해 살펴볼 때, 영지주의의 교의는 마니교의 급진적 이원론으로부터 고전 영지주의 운동의 완화된 이원론에 이르는 이원론의 전 영역을 포괄하고 있었다. 발렌티누스주의의 경우, 이전에 이원론에서 사용되었던 용어들로 표현되어 있으나, 일원론에 가까웠던 것으로 강력하게 추측된다.

 

 

급진적 또는 절대적 이원론

 

급진적 이원론, 또는 절대적 이원론은 동등한 권능의 두 신적인 힘의 존재를 전제한다. 마니교는 빛과 어둠이 각자 자신의 영역에 있으면서 서로 공존하고 있었으나, 어둠의 영역이 자행한 혼란스러운 행위 때문에 두 영역이 갈등에 휘말리게 되었으며, 이 결과 빛의 영역의 일부 요소가 어둠의 영역에 갇히게 되었다고 보며, 물질 우주가 창조된 목적은 마침내 빛의 영역이 어둠의 영역에 대해 승리를 거둘 때까지 어둠의 영역에 갇혀 있는 요소들을 빼내는 느린 과정을 시행하기 위해서라고 생각한다. 마니교는 조로아스터교의 한 분파인 주르반교 로부터 이러한 이원론적인 신화 또는 교의를 이어 받았다. 주르반교에서는 영원한 영인 아후라 마즈다가 자신의 안티테제인 앙그라 마이뉴와 우주적인 전쟁을 벌이고 있으며 이 전쟁은 최종적으로 아후라 마즈다의 승리로 끝날 것이라고 생각한다.

 

만다야교의 창조 신화에서는 지고한 빛의 존재가 발출물들을 점차적으로 발출하였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발출물들이 점차적으로 발출되면서 그만큼 점차적으로 타락해갔으며 최종적으로 어둠의 신인 프타힐이 출현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프타힐은 물질 세계를 창조하는 데에 관여하였으며 이 이후 물질 세계를 지배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일반적으로, 특히 페르시아의 영지주의 학파들에서 발견되는 영지주의적 사고는 물질 세상이 어둠의 힘들이 주입시킨 일종의 악의적인 독극물에 해당하며, 어둠의 힘은 그 안에 갇힌 빛의 원소들이 어둠 속에서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다시 말해 이들이 술에 취한 것과 같은 정신착란 상태에서 무지한 상태에 그대로 놓여 있게 하기 위해 이를 계속 주입하고 있다는 믿음을 포함한다.

 

완화된 이원론

 

완화된 이원론(Mitigated Dualism)에서는 서로 대립하는 두 원리들 중의 어느 하나가 어떤 방식이건 간에 다른 하나보다 열등하며 또한 그보다 하위에 있다. 세트파(Sethians)와 같은 고전 영지주의 운동들에서는 물질 세상은 자신들의 헌신의 대상인 참된 신이 아니라 하급의 신에 의해 창조된 것이라고 보았다. 이들은 영적 세상은 물질 세상과는 완전히 다른 세계인 것으로 여겼다. 영적 세상은 참된 신과 함께 하는 아주 광대한 영역인데 깨달음을 얻은(enlightened) 사람들이 거주하는, 영혼의 진정한 고향이라고 여겼다. 이러한 입장을 가진 결과, 해당 영지주의자들은 세상에 있는 동안 자신들이 자신의 진정한 고향에서 떨어져 있다는 예리한 소외감을 느끼고 표현하였다. 또한, 자신들이 가졌던 견해의 논리적 귀결로서, 이들 영지주의자들이 추구하였던 목표는 자신들의 영혼이 물질 세상이 부여하는 제한을 극복하여 빛의 세계(Pleroma = 플레로마)로 되돌아가는 것이었다.

 

제한적 일원론

 

제한적 일원론(Qualified Monism)에서는 두 번째 원리 또는 실체가 신적인 존재인가 아니면 반쯤 신적인 존재인가 하는 점에서 논쟁의 소지가 있다. 영지주의 신화의 발렌티누스주의의 버전에 들어 있는 여러 내용들을 살펴보면, 발렌티누스주의는 우주를 이원론적인 관점이 아니라 일원론적인 관점에서 이해하고 있었다는 것을 시사한다. 일레인 페이절스(Elaine Pagels)'발렌티누스주의는 [...] 이원론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다'라고 하였다. 한편, 쉬오에델(Schoedel)'발렌티누스주의와 이와 유사한 영지주의자들의 교의를 해석함에 있어서 표준이 되는 요소는 이들이 근본적으로 일원론에 속한다는 인식이다'라고 하였다. 발렌티누스주의와 이와 유사한 영지주의자들의 신화들에서는 데미우르고스의 악의성이 완화되어 있다. 데미우르고스에 의해 창조된 물질 세상이 결함을 가지게 된 것은 데미우르고스가 도덕적으로 타락했기 때문이 아니라 데미우르고스로서는 알고 있지 못한 상위의 원리들 또는 존재들에 비할 때 데미우르고스가 상대적으로 불완전하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견해를 가졌기 때문에, 발렌티누스주의자들은 물질적 현실에 대해 세트파보다는 보다 덜한 경멸감을 가지게 되었다.

 

발렌티누스주의의 전통은 물질 세상을 신으로부터 독립된 영역이나 실체로 보지 않았으며, 데미우르고스가 가진 '인식 능력 자체의 결함 또는 오류(error of perception)'에 기인하여 발생된 창조물이라고 보았다. 이러한 점은 물질 세계의 창조라는 행위 속에서 신화적으로 그리고 시적으로 상징되어 있다.

 

도덕 및 의식(儀式)

 

영지주의자들의 도덕성에 대한 문제는 동시대인들의 주장들이 담긴 문헌들을 면밀히 살펴봄으로써만 해결될 수 있다. 많은 기독교 저술가들이 몇몇 영지주의 교부들은 물질적 욕망들을 꺼리낌 없이 탐닉하면서 이와 동시에 물질 세상을 의도적으로 피할 것을 주장한다고 비난하였다. 그러나 기독교 저술가들의 이러한 주장들이 정확한 것인지는 의심할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다.

 

원천 문헌들 속에 들어 있는 증거들에 따르면, 영지주의자들의 실천 윤리는 기본적으로 그리고 대체적으로 금욕주의적이었다. 그리고 영지주의자들의 금욕주의적인 태도는 성적 행위들과 음식과 관련하여 가장 뚜렷하게 나타났다. 많은 영지주의 수도사들은 자발적으로 음식, , 또는 생활에 필수적인 것들 없이 지내곤 하였다. 영지주의자들의 이러한 금욕주의적 태도는 영지주의 운동을 이단으로 보고 이에 관한 글을 썼던 이단 연구자들에는 곤란한 문제거리가 되었는데, 그 이유는 이러한 금욕주의적 태도는 자신들이 선호하고 지지하는 태도였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기독교 교부들은 자신들의 신학적 반대자들의 행위들에 대해 지지를 표명해야 하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현대의 몇몇 영지주의 옹호자들의 추론에 따르면, 기독교 교부들은 이러한 상황을 피하기 위하여 충분한 증거 없이 영지주의자들을 자유분방주의(libertinism, 방탕주의)라고 비방함으로써 자신들로서는 곤란한 문제를 피하는 이단 연구자들이 공통적으로 취하는 접근법을 사용하였다. (몇몇 경우, 과도하게 근거 없는 주장을 펼치곤 하였다. 카인파를 참조하시오.) 또는 이단 연구자들은 영지주의자들의 금욕주의는 성경에 대한 잘못된 해석에 기반한 금욕주의라고 설명하거나, 또는 간단히 이들의 금욕주의적인 태도는 사기일 뿐이라고 설명하였다. 에피파니우스의 '아르콘주의(Archontics)'에 대한 글에는 이러한 한 예가 들어 있다. "이들 중 어떤 사람들은 방탕과 유흥으로 자신의 몸을 마친다. 다른 사람들은 수도사라는 가면을 쓰고 겉으로 단식하는 체하거나 일종의 금욕을 행하고 있음을 과시하여 단순한 사람들을 속인다."

 

성적인 행위와 음식을 제외한 다른 것들에 대해서는, 영지주의자들은 덜 금욕적인 태도를 취하였고, 바른 행동으로 나아감에 있어 보다 중용적인 접근법을 취했다. 프톨레마이오스(Ptolemy: fl. c. 180)플로라에게 보낸 편지에는 각 개인은 자신의 도덕적 경향과 이성적 판단에 따라 금욕적인 행위를 해야 한다는 일반적인 금욕주의를 제시하고 있다:

 

 

신체적인 외적인 단식을 우리의 추종자들도 행하곤 합니다. 왜냐하면 이성로고스(logos)적인 판단과 태도를 가지고서 단식을 하게 되면 단식은 영혼에게도 어떤 이익을 가져다 주기 때문입니다. 단식은 결코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강제로 하게 하거나, 또는 관습에 따라 하거나, 또는 특별한 날이어서 하거나 할 일은 아닙니다. 단식을 이러한 것들을 위해 특별히 마련된 지정된 행위라고 여겨서는 안 될 것입니다.

— 프톨레마이오스, 플로라에게 보낸 편지

 

위 인용문은 영지주의자들의 견해가 당시의 정통파 기독교, 즉 가톨릭 교회의 견해와는 완전히 달랐다는 것을 보여준다. 당시에 가톨릭 교회는 기독교인들이 취할 바른 행위는 사도들을 통해 교회의 주교들에게로 전해진 가톨릭 교회라는 중앙집권적인 권위에 의해 관리되고 제정되는 것이 가장 좋다는 견해를 가졌다. 반면, 영지주의자들은 개인의 내면적인 경향 또는 판단이 가장 중요하다는 입장을 가졌다. 또한 이 인용문에는 의식(儀式)은 비록 그 제정 의도가 아무리 좋은 것이라 할지라도 외적으로 취해야 하는 행위가 개인의 내면적인 동기와 일치되지 않은 경우 아무런 의미나 효과가 없다는 인식이 들어 있다. 이러한 영지주의적인 견해는 성경에 대한 개개인의 해석을 중시하는 개신교의 관점들에 반영되어 있으며, 그리고 개신교의 개인주의적인 관점에도 반영되어 있다

 

영지주의자들이 자유분방주의의 입장을 가졌고 또 이를 행하였다는 비난은 이레나이우스의 저작들이 그 시원지이다. 이레나이우스는 시몬 마구스가 도덕적 자유주의 학파, 즉 무도덕주의(amoralism)를 창시했다고 말하였다. 그리고 이레나이우스는 시몬 마구스를 영지주의의 시원자라고 하였다. 그리고 시몬 마구스는, 사도행전 8:9-24에서 나오는, 사도 성 베드로로부터 사제로서의 신권(神權)을 부여하는 성품성사(聖品聖事)의 권위를 돈으로 사려 했던 사람이라고 말하였다. 영지주의가 자유분방주의를 취했다는 주장과 관련하여, 이레나이우스는 시몬 마구스가 자신과 그의 부인인 헬렌을 믿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바른 행위들'을 하기 때문에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시몬 마구스 자신의 '권능(grace, 은총)'에 의해 구원받게 된다고 주장하였으며, 따라서 이제 더 이상 성경의 예언자들의 말이나 도덕적인 권고를 쫓아 스스로를 힘들게 할 필요가 없으며 '각자 하고자 원하는 대로' 마음대로 자유로이 행하면 된다고 주장하였다고 말하고 있다.

 

시몬 마구스가 자신의 부인인 헬렌에게 특히 집착하였다는 점을 제외하고는, 그가 실제로 행했다고 하는 어떤 방탕한 행위도 알려진 바가 없다. 그리고 전형적으로 상대를 헐뜯는 말이나 글에서 보듯이, 헬렌은 매춘부라고 일컬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시몬 마구스의 추종자들이 결혼을 하였으며 자식들을 가졌다는 명확한 증거가 진리의 증언(Testimony of Truth)이라는 나그함마디 문서에서 발견된 문헌에 들어 있다. 이 증거에 따를 때, 시몬 마구스를 비롯한 영지주의자들이 금욕주의자를 가장하면서 방탕한 생활을 하였다는 비난은 그 근거가 희박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발렌티누스주의자들에 대해 이레나이우스는 이들이 시몬 마구스의 최종 계승자들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이들은 음식에 관해서는 느슨한 입장을 가졌으며('우상들에게 바친' 음식을 먹었으며), 성적으로 난교를 행하였으며('육체의 욕망에 지나치게 몰두하였으며'), '자매들'로 받아들인다는 미명 하에 여러 명의 부인을 두는 죄를 저지른다고 말하였다. 마지막 사항에 대해, 마이클 앨런 윌리엄(Michael Allen Williams)은 타당성이 있어 보이는 주장을 펼쳤는데, 그는 이레나이우스가 한 말은 대체적으로 맞는 말이지만 이레나이우스는 그런 모습이 나타나게 된 원인에 대해서는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고 주장하였다. 마이클 앨런 윌리엄은 종교 단체의 구성원들이 함께 살면서 서로를 '형제' 또는 '자매'라고 부르는 것이었을 수 있으며 또한 이들은 서로 친숙하게 지내지만 성적인 교제를 가진 것은 아닐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이러한 균형된 태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점점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하게 되었고 그 결과 이레나이우스가 비난하는 일이 일어나게 되었을 수도 있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이레나이우스는 발렌티누스주의자들이 신방의식(Bridal Chamber)이라는 의식을 행한다고 말하였다. 이레나이우스는 이 의식에서는 성교가 행해졌는데, 발렌티누스주의자들은 이 성교는 플레로마를 구성하는 시즈지들(syzygies)의 쌍들의 활동과 유사한 것이라고 주장한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발렌티누스(c.100 - c.160/180)가 가톨릭 교회에 비해 보다 남녀평등적인 입장을 가졌으며 성별에 대해 보다 덜 엄격한 생각을 가졌지만(발렌티누스는 여성이 사제가 될 수 있게 하였다), 신방의식(Bridal Chamber)에서 실제로 성교를 행하는 의식이 있었는지 혹은 인간의 성행위를 단순히 은유적인 의미의 상징으로 사용했을 뿐인지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카르포크라테스파(Carpocratians)에 대해서도, 이레나이우스는 거의 같은 내용을 말하고 있다:

 

 

이들은 무모함에 빠져서는 사악하며 (반종교적이며) 불경한 것이라 할지라도 그 무엇이건 행할 수 있으며 또 그런 힘이 있다고 주장한다 ... 이들은 행위란 인간의 관점에서 볼 때 선이나 악일 뿐이라고 말한다.

 

이 말에서는 개인의 행위와 그 개인이 한 영지주의 체계를 준수함으로써 받게 되는 권능(grace, 은총)을 구별하고 있음이 다시 감지된다. 이것이 모든 영지주의자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태도인지, 아니면, 단순히 이레나이우스가 영지주의 분파에 상관없이 무차별적으로 사용하는 비난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전체적으로 볼 때, 영지주의자들은 금욕주의적 태도를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이 말은 영지주의자들의 금욕주의적 태도가 표리부동한 행위라는 이단 연구자들의 비난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일 수는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영지주의자들이 무도덕적인 자유분방주의의 입장을 가졌고 또 이를 행하였다는 유사한 비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라는 것을 의미한다. 나그함마디 문서에는 방종하거나 탐닉하지 말고 절제하고 금욕할 것을 권하는 굉장히 많은 구절들이 있다. 그렇기는 하지만, 영지주의 운동들은 근본적으로는 '두 가지 길이라는 고대로부터 내려온 태도'를 취한 것으로 보인다. '이 태도는 바른 것을 행할 것인지 아닌지의 결정을 개인의 노력에 맡기고, 바른 것을 행하는 노력을 한 사람에게는 그에 따른 보답이 있을 것이며 그런 노력을 등한히 한 사람에게는 그에 따른 벌이 있을 것이라고 말하는 태도이다.'

 

 

역사

 

 

시리아-이집트의 영지주의 역사

 

벤틀리 레이턴(Bentley Layton)은 자신의 저서 영지주의 경전(The Gnostic Scriptures, 1987, 런던, SCM Press)의 서문에서 다양한 영지주의 운동들 사이의 관계를 개략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이 모델에 따르면, 고전 영지주의(Classical Gnosticism)와 토마스파(The School of Thomas)는 발렌티누스보다 시대적으로 앞선 분파들이었으며 발렌티누스의 사상의 형성과 발달에 영향을 끼쳤다. 발렌티누스는 알렉산드리아와 로마 두 곳에 자신의 영지주의 학교를 설립하였다. 벤틀리 레이턴은 발렌티누스를 대 영지주의 개혁가이자 영지주의의 발전에 있어 초점이 되는 인물이라고 하였다. 자신이 태어난 곳인 알렉산드리아에 거주하던 동안 발렌티누스는 영지주의 교사인 바실리데스를 만났으며 그의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발렌티누스파는 기원후 초기 몇 세기 동안 번영하였다. 발렌티누스의 생존 시기는 기원후 100~160/180년경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기원후 388년에 작성된 이단 목록에 발렌티누스가 포함되어 있다. 이는 아마도 발렌티누스가 아니라 그의 후예들을 의미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아주 많은 사람들이 발렌티누스파를 따랐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발렌티누스파의 핵심적인 신화의 여러 버전들이 알려져 있다. 그리고 "외부인들의 보고에 따를 때 발렌티누스파가 활발한 지적 활동을 했다는 것은 분명하다". 발렌티누스의 제자들은 자신의 스승으로부터 받은 가르침들을 더 정교하게 만드는 작업을 하였는데, 이는 발렌티누스파가 활발한 지적 활동을 했다는 또 다른 증거가 된다. 예를 들어 프톨레마이오스를 통해 지금까지 전해져 내려오는 영지주의 신화 버전이 있다. 하지만 발렌티누스의 제자들이 어떤 부분들을 수정하였으며 얼마나 수정하였는지에 대해서는 원본에 해당하는 자료가 존재하지 않으므로 현재의 자료들로서는 알 수가 없는 상태이다.

 

발렌티누스파는 여러 시리아-이집트 영지주의파들 중에서 가장 정교하며 가장 철학적으로 엄밀한(dense) 형태의 분파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은 발렌티누스파가 다른 분파들이 자신들의 추종자들을 끌어들이는 것을 금했다는 의미가 아니다. 당시에 많은 사람들이 바실리데스파를 따랐으며 바실리데스파는 이집트에서 4세기까지 존속하였다.

 

시모네 페트리먼트(Simone Petrement)는 자신의 저서 분리된 신(A Separate God)에서 영지주의의 기원은 기독교라고 주장하였다. 그녀는 발렌티누스파가 바실리데스파보다는 후대의 분파이지만 세트파보다는 선대의 분파라고 주장한다. 시모네 페트리먼트의 주장에 따르면, 발렌티누스는 초기의 헬레니즘화된 교사들의 반()유대교적 성격이 보다 완화된 형태의 교의를 가졌다. 그 예로, 발렌티누스파에서는 유대교의 신 즉 구약 성경의 신에 해당하는 데미우르고스를 악한 존재라기 보다는 무지한 존재인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고 시모네 페트리먼트는 주장하였다.

 

 

책상에 앉아 글을 쓰고 있는 마니교 사제들: 소그디아어(Sogdian)로 글이 새겨진 서판이 가운데에 있다. 타림 분지의 코초(高昌, Khocho, 고창)에서 발견된 사본

페르시아의 영지주의의 역사

 

쿠르트 루돌프(Kurt Rudolph)는 자신의 저서에서 고대 이란 지역, 즉 페르시아의 영지주의파는 시리아-이집트의 나스틱파와는 다른 전통이라는 견해를 주장하였다. 그에 따르면 기원후 5세기에 사산 제국(226~651) 시대의 페르시아에서 마니교(fl. 3~8세기)를 금하였지만 그 때는 이미 마니교가 동쪽과 서쪽으로 널리 퍼진 상태였고 다른 지역으로의 계속적인 확산을 막기에는 이미 늦은 시기였다. 서쪽으로는, 마니교의 가르침은 시리아, 북아라비아, 이집트 그리고 북아프리카로 전파된 상태였고, 예를 들어, 북아프리카에서 태어났던 아우구스티누스는 373~382년 동안 마니교의 신자였다. 이 후 마니교는 시리아로부터 계속 확산되어 팔레스타인, 소아시아 그리고 아르메니아로 전파되었다. 기원후 4세기의 로마와 달마티아에서 마니교인들이 있었다는 증거가 있으며 또한 골과 스페인에도 마니교인들이 있었다는 증거가 있다. 마니교는 로마 제국의 특권 계급들과 논객들로부터 공격받았다. 하지만 마니교는 기원후 6세기까지 널리 믿어지고 있었으며, 중세의 바오로파(Paulicians: fl. 650~872), 보고밀파(Bogomils: b. 927-970) 및 카타리파(Cathari: b. 11세기, fl. 12~13세기)의 출현에도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마니교는 결국 가톨릭 교회에 의해 이단으로 단죄되어 완전히 사라지게 되었다.

 

쿠르트 루돌프의 설명에 따르면, 기독교와 조로아스터교에 의한 종교적 독점 상태가 발생기의 이슬람교(b. 7세기)에 의해 깨뜨려지고 있던 상황에 힘입어 마니교(fl. 3~8세기)는 동쪽에서 크게 번성할 수 있었다. 이슬람교의 정복기(Muslim conquests: 632~732)의 초기 시기 동안 마니교는 페르시아(지금의 이란)에서 신자들을 끌어들일 수 있었는데 이들 대부분은 교육받은 계층의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마니교가 가장 번성한 곳은 중앙 아시아였는데, 마니교는 지금의 이란을 통해 중앙 아시아로 전파되었다. 중앙 아시아에서 마니교는 기원후 762년에 위구르 제국(742~848)의 국가 종교가 되었다.

 

 

로마 제국(기원전 27~기원후 476/1453) 시대의 달마티아(Dalmatia)

 

 

기원후 800년 경의 지정학적 상황과 위구르 제국(Uyghur Empire, Uyghur Khaganate, 중국어 간체: 回纥, 정체: 回紇(회홀): AD 742~848)

 

주요 분파들과 성전(聖典)

 

한 분류법에 따르면 영지주의 학파들은 크게 '동부' '페르시아'의 학파들과 '시리아-이집트'의 학파들로 나눌 수 있다. 페르시아의 학파들은 이원론적인 경향성이 더 뚜렷한데, 이는 페르시아의 조로아스터교의 주르바니즘파(Zurvanist)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시리아-이집트 학파들은 페르시아 학파들보다는 더 일원론적인 견해를 가졌다. 이러한 대체적인 경향성들과는 달리 일원론와 이원론을 모두 포함하는 학파들도 있었다. 이런 예외적인 학파들로는 카타리파(Cathars: AD 11세기에 시작. fl. 12-13세기), 보고밀파(Bogomils: AD 927-970에 시작), 그리고 카르포크라테스파(Carpocratians: fl. AD 2세기)가 있는데, 이들은 자신들만의 독특한 분류에 속한다.

 

 

페르시아의 영지주의

 

 

AD 1년의 파르티아 제국(Parthian Empire: BC 247 - AD 224)

페르시아 학파들, , 고대 이란 지역의 학파들은 바빌론을 중심으로 하는 서페르시아 지방에서 나타났다. 시대적으로 파르티아 제국(BC 247 - AD 224)에 해당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이 학파들의 문헌들은 원래는 당시 바빌론에서 말할 때 사용하던 언어인 아람어 방언들로 쓰여졌다. 페르시아의 영지주의는 나스틱 사상들 중 가장 오래된 사상에 속한다고 믿어지고 있다. 대부분의 연구자들은 페르시아의 영지주의 운동들은 그들 자신의 고유한 종교들이며 기독교나 유대교에서 유래한 종교들이 아니라고 보고 있다.

 

만다야교

 

이라크 남부와 이란 남서쪽의 후제스탄 주에는 지금도 소수의 만다야교 신자들이 있으며, 이들은 오늘날에도 만다야교의 수행과 의식을 행하고 있다. 이 나스틱 그룹에게 붙여진 '만다야교(Mandaeanism)'라는 이름은 '만다 드-헤이이(Mandā d-Heyyi)'라는 낱말에서 유래하였는데 이 말의 대체적인 뜻은 "생명의 지식(Knowledge of Life)"이다. 만다야교 나스틱 운동의 정확한 기원은 알려져 있지 않다. 하지만, 최종적으로, 세례자 요한이 만다야교에서 핵심적인 인물이 되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그 이유는 세례가 만다야교의 중심적인 신앙 체계의 일부를 이루고 있으며 또한 강조되고 있기 때문이다. 비록 만다야교와 기독교 간에는 어떤 연결점들이 있기는 하였으나, 만다야교인들은 마니교인들과 마찬가지로 모세나 예수나 무함마드를 믿지 않았다. 따라서 만다야교의 신앙 체계와 수행들은 모세, 예수, 무함마드에서 기원하는 종교들과 공통되는 부분들이 거의 없으며, 따라서 만다야교와 이들 종교들이 혼동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원래의 만다야교 경전들 중 상당한 양이 현대에까지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만다야교의 경전은 겐자 라바(Genzā Rabbā)라고 알려져 있다. '겐자 라바'의 문자 그대로의 의미는 '대 보물(Great Treasure)'이며 1862, 700여 페이지로 되어 있다. 겐자 라바의 일부 내용들은 AD 2세기에 필사된 것으로 학자들에 의해 확인되었다. 또한 기도 정전(Canonical Book of Prayer)이라고도 불리는콜라스타(Qolastā)라는 성전(聖典)세례자 요한의 서(The Book of John the Baptist)라고도 불리는 시드라 드-이아히아(Sidra ḏ-iahia)라는 성전(聖典)이 있다.

 

마니교

 

마니교(摩尼教, Manichaeism)는 예언자 마니(摩尼, Mani: AD c.210-276)에 의해 창시된 종교로, 완전히 독립적인 종교 운동이었으며 지금은 거의 완전히 사라진 종교이다. 마니교의 문헌들 또는 성전(聖典)들은 대다수가 완전히 상실된 것으로 여겨졌었는데, 일단의 문헌들이 발견되어 마니교를 재조명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이 문헌들은 쾰른 마니 코덱스라고 부른다. 쾰른 마니 코덱스는 현재 독일의 쾰른 대학에 소장되어 있다. 쾰른 마니 코덱스는 예언자 마니의 생애에 대한 내용들과 그의 가르침들과 주장들에 대한 상세한 설명으로 이루어져 있다.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련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니교는 여러 유대교와 기독교 분파들 중 그 어느 분파와도 신앙 체계와 수행 체계가 일치하지 않았다고 믿어지고 있다. 이는 마니가 다음과 같이 말한 것에서 잘 드러난다:

 

 

"참된 신은 물질 세상 즉 물질 우주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그러므로, "모세와 (모세의 율법을 따르는) 유대인들과 유대인들의 사제들과 이야기하였던 존재는 다름 아닌 바로 어둠의 군주였다. 그러므로, (지금 시대의) 기독교인들, 유대인들, 그리고 이교도들이 이 신을 숭배할 때, 이들은 (모세와 모세의 율법을 따르는 유대교 사제들이 빠졌던) 동일한 오류 속에 빠지게 된다. 왜냐하면 이 신은 그 자신이 그들모세와 모세의 율법을 따르는 유대교 사제들에게 가르쳤던 욕정(欲情, lusts) 속에서 이들지금 시대의 기독교인들, 유대인들, 이교도들이 길을 잃고 타락하도록 이끌기 때문이다."

 

시리아-이집트의 영지주의

 

시리아-이집트의 영지주의 학파들은 자신들의 견해들 중 많은 부분을 플라톤주의로부터 끌어와서 발전시켜 자신들의 견해로 만들었다. 시리아-이집트의 영지주의에서는, 전형적으로, 원초의 모나드적 근원으로부터 일련의 발출물들이 발출되어서 창조가 이루어지며 마침내 이 발출 과정의 마지막 단계에서 물질 우주가 창조된다는 창조론 또는 우주발생론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창조론의 논리적 귀결로서, 시리아-이집트의 영지주의자들은 악은 물질이라는 관점을 가졌는데, 이 관점은 악을 선과 동동한 힘을 가진 선에 반대되는 독립적인 힘 또는 원리라고 보기 보다는 악은 선에 비할 때 현저하게 열등한 힘이며 영적인 앎과 선의 결핍이라고 보는 경향성을 가졌다. 이러한 견해를 가진 시리아-이집트의 영지주의자들은 ''''"무언가를 설명하거나 묘사할 때 사용하는 '상대적인' 용어들"로 사용했다고 말할 수 있다. 이것은 시리아-이집트의 영지주의자들이 선과 악 사이에서 상대적인 곤란과 혼란에 처해 있는 인간이라는 존재를 설명하거나 묘사할 때 선의 원리 또는 근원으로터 극히 멀리 떨어져 있는 상태를 ''이라고 언급했으며, 또한, 악을 언급함에 있어 인간은 '악한 성품을 태어나면서부터 가지고 있다는 컨셉트'를 주장하지 않으면서도 악에 대해 설명을 했던 것에서 알 수 있다.

 

아래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시리아-이집트 영지주의자들 중 많은 분파들이 기독교와 관련된 원천 문헌들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많은 시리아-이집트 영지주의자들이 자신들을 칭할 때 기독교인이라 불렀다. (동방 기독교(Eastern Christianity), , 발칸반도, 동유럽, 소아시아, 중동, 북동아프리카 및 인도의 정통파 기독교 교회들이나 로마 가톨릭 교회와는 아주 달랐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자신들을 기독교인들이라 불렀다.)

 

시리아-이집트 영지주의의 성전(聖典)들에 속한 문헌들의 대다수는 나그함마디 문서에서 발견되어 현대에 알려졌거나 확인된 문헌들이다.

출처 : 오디오와 컴퓨터
글쓴이 : 관운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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