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덕여왕, 굴욕을 견뎌내고 신라를 亡國 위기에서 구하다
兵之勝否, 不在大小, 顧其人心何如耳.
(병지승부, 부재대소, 고기인심하여이)
전쟁의 승부는 크고 작음에 달린 것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이 어떤가에 달려 있을 뿐이다.
―‘삼국사기(三國史記)’ 김유신열전(金庾信列傳) 상(上)
경주시 현곡면 나원리에 있는 진덕여왕릉
두 번째 여왕은 누구야?
“우리나라 첫 번째 여왕은 누구일까요?” 이 질문에는 웬만한 초등학생도 대답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럼 두 번째 여왕은?” 이 질문에서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머뭇거립니다. “진… 진성여왕 아니냐?”고 되묻는 분도 있고, “아, 그 이상한 파티 벌였다는 여왕?”이라며 미소를 짓는 분도 있습니다(이 분은 두 번째와 세 번째를 착각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정치·외교·군사·경제·사회통합 등 각 분야에서 총체적으로 실패했음에도 친위 세력이 실권을 잡아 ‘덕성과 지혜의 여왕’이란 칭송을 받았던 첫 번째 선덕여왕. 그리고 흔히 신라 망국(亡國)의 원흉이자 음란한 여왕이었던 것으로 인식되는 세 번째 진성여왕.
그 사이에 있었던 두 번째 여왕인 신라 제28대 진덕여왕(眞德女王·재위 647~654)의 이름은 좀처럼 기억되지 않기 일쑤입니다. 심지어 큰 인기를 끌었던 MBC 드라마 ‘선덕여왕’에서조차, 선덕여왕의 다음 대 왕이었던 진덕여왕 승만(勝曼)은 단 한 번도 등장하지 않습니다. ‘별 특징이 없어 보이거나 역사에서 인상적으로 등장하지 않는 군주’라는 얘기가 됩니다. 한편으로 이 여왕은 민족사관적인 견지에서 대단한 비판을 받는 인물이기도 합니다. 당나라를 일방적으로 칭송하는 ‘치당태평송(致唐太平頌)’을 자기 손으로 지어 바친 ‘사대주의의 원조’라는 것입니다
드라마 대왕의 꿈에 나온 진덕여왕(손여은 분)
'벼랑 끝’ 위기 속에서 즉위하다
진덕여왕이 즉위한 서기 647년, 신라는 건국 이래 최악의 위기를 맞고 있었습니다. 실로 망국(亡國)의 위기였습니다. 이미 지난 회에서 말씀드린 대로, 642년의 대야성 함락으로 백제군의 공세가 코앞에 이르렀고, 이후 선덕여왕이 추진한 황룡사 구층목탑 건립은 원래 목적이었던 민심 통합의 효과보다 재정적 손실과 건립비의 상당 부분을 맡았을 귀족층의 이반(離反)을 가져오는 것이었습니다.
고구려와 왜(倭)를 상대로 한 외교 노력도 성과를 거두지 못했고, 643년 당나라에 파견된 사신은 뜻밖에 당 태종(唐太宗)으로부터 “여자가 임금이 돼서 주변국의 업신여김을 받고 있으니 내 친척 중 한 명을 데려다 왕을 시켜라”는 ‘신라 체제 부정 발언’을 듣습니다
(이때 이런 말을 했던 당 태종은 자신의 후궁 중 한 명이 이로부터 47년 뒤에 중국 최초이자 마지막인 여성 황제로 즉위할 줄은 꿈에도 몰랐을 거라는 데 역사의 아이러니가 있습니다)
당 태종의 후궁이었으나 그의 아들 고종의 왕후가 되고
690년 중국 유일의 여황제로 즉위한 측천무후
이도학 한국전통문화대 교수는 바로 이 당 태종의 ‘여왕 폐위론’이 647년 상대등 비담(毗曇)의 난이라는 전대미문의 정변으로 이어졌다고 분석합니다.
일단 당나라는 신라에 ‘폐위론’의 후속 압박을 내놓지 못하는데, 그것은 당태종이 645년 대군을 일으켜 고구려를 침략했다가 안시성에서 패퇴했고, 한 쪽 눈을 잃을 정도(화살을 맞았다는 설과 눈병설이 있음)의 신산한 고생을 겪으며 연개소문의 추격을 피해 간신히 장안성으로 돌아갈 수 있었던 ‘대단히 좋지 않은 상황’이었기 때문입니다.
당 태종의 방안에 반발해 현 체제를 지키자는 ‘자립파’가 여왕 친위파인 김춘추·김유신 세력이며, ‘당 태종이 제시한 방안을 승인한 뒤 당나라에 의존해 신라의 멸망을 막자’는 ‘의존파’가 비담 세력이었다는 것입니다. 일부 민족주의 사학자들로부터 ‘사대주의자’라 비판받은 김춘추·김유신을 ‘자립파’로 분류하는 것이 뜻밖이지만, 적어도 이 시점의 상황은 그랬습니다.
643년부터 대립을 계속하던 ‘자립파’와 ‘의존파’ 사이의 세력 균형은 645년 11월에 비담이 최고 관직인 상대등에 오름으로써 일단 깨집니다. 의존파, 즉 반(反)여왕파가 득세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로부터 1년 남짓 지난 647년 1월, 비담은 돌연 반란을 일으킵니다. 선덕여왕은 반란 와중에 사망합니다(시해설·자연사설·쇼크사설이 있음). 자, 이제 ‘자립파’는 어떤 행동을 취할 것인가요? 그것은 ‘의존파’의 반란 명분에 정면으로 대항하는 것이었습니다. “또 여왕을 추대한다!” 비담 세력은 물론, 당나라의 의도대로 끌려가지 않겠다는 선언이기도 했습니다
비담이 난을 일으킨 명활산성에서 내려다 본 보문저수지
“풍만하고 아름다웠으며 키가 컸다”
내란이 채 끝나기 전에 왕위에 오른 진덕여왕 승만은 선덕여왕의 사촌 여동생이었습니다. ‘삼국사기’는 그의 외모에 대해 “생김새가 풍만하고 아름다웠으며, 키가 일곱 자(210㎝…란 얘긴데 그것보단 작았을 것이지만 상당한 장신이었을 것임) 였고 손을 내려뜨리면 무릎 아래까지 닿았다”고 기록했습니다. 사람들로 하여금 여장부로 인식하게 할 외모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진덕여왕은 오히려 선덕여왕보다도 즉위 전 제왕 수업을 길게 받았을 가능성이 큽니다. 선덕여왕 즉위 시점인 632년에는 여성으로서 신라 왕위에 오른 사람이 아무도 없던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한 번 여자가 왕위에 올랐다면 또 두 번 오르지 못하란 법이 없게 된 것입니다. 여자를 옥좌에 앉히더라도 성골(聖骨) 계승의 원칙을 지키느냐, 성골 중에서는 남자가 없으니 그 원칙을 깨느냐는 선택의 기로에서 전자(前者)를 선택한 것이므로, 선덕여왕이 병상에 누운 뒤에는 당연히 승만이 후계자로 떠올랐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진덕여왕은 ‘준비된 여왕’이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비담의 난이 실패한 것은, 동아시아 역사 전체의 흐름을 바꿔놓은 대사건이었습니다. 이후 나당연합과 통일전쟁을 수행하는 주체가 되는 김춘추·김유신 세력이 신라 정치의 주도권을 쥐었기 때문입니다. ‘삼국사기’ 김유신열전에는 비담 측의 군세에 압도당한 진덕여왕이 ‘두려워해 어쩔 줄을 몰랐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승패를 예측할 수 없을 정도의 비등한 공방전이 10일 넘게 계속되다가 김유신 측이 간신히 반란을 진압한 것입니다. 다시 이도학 교수의 표현을 빌면 “전통적 권위의 위광(威光)을 지닌 정치적 수반으로서의 신라 왕, 쟁란의 시대를 군사로서 직접 지배하는 김유신, 그리고 국가 존망에 깊이 관련되는 외교를 짊어진 김춘추의 3세력이 결합해, 신라 독자의 권력집중 방식을 성립시켰다”는 것입니다
김유신 영정
사후에 흥무대왕으로 추존되었기 때문에 왕관을 쓰고 있다
김유신의 ‘음주가무 작전’
7세기의 신라 역사에서 군사적인 반전(反轉)으로 보이는 기록이 나타나는 것이 바로 이때입니다. 선덕여왕 말기인 645년까지도 백제에게 일곱 개 성을 뺏길 정도로 군사적으로 밀리던 신라는, 진덕여왕 즉위 이후 반격의 기미를 마련합니다. 유명한 비령자·거진 부자(父子)의 전사 이야기가 담긴 대(對) 백제전 승전이 바로 진덕여왕 즉위년인 647년의 일입니다. 백제군은 지금의 무주·김천·구미로 추정되는 무산성·감물성·동잠성을 공격했다가 신라군의 방어망을 뚫지 못하고 퇴각했습니다.
다음 해인 648년, 김유신의 일화 한 토막이 등장합니다. 56세의 김유신은 압량주 군주(軍主·신라 지방행정구역인 州의 장관)로 있었는데, 마치 군사에 뜻이 없는 것처럼 술마시고 노래를 부르며 몇 달을 보냈다고 합니다. 마치 ‘삼국지연의’ 중 조조 앞에서 일부러 멍청한 사람처럼 행동한 유비의 위장술을 연상케 합니다. 대야성 함락 이후 이곳은 신라의 최전방 군사 거점이었습니다. 그곳 사람들이 뒤에서 욕을 했습니다. “이제 한번 전투를 해봄직한데 장군이 용렬하고 게으르니 어떻게 할 것인가!” 이 말을 들은 김유신이 여왕에게 달려가 고합니다.
“이제 민심을 살펴보니 전쟁을 치를 수 있습니다. 청컨대 백제를 쳐서 대야성 전투의 복수를 할 수 있도록 허락하소서!”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건드려도 되나?”
그런데 여기서 진덕여왕의 말이 대단히 인상적입니다.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건드렸다가 위태롭게 되면 장차 어떻게 하겠는가?(以小觸大, 危將奈何)”
백제가 대국이고 신라가 소국이라고요? 이것은 서기 6세기 진흥왕의 신라 중흥 이후로 신라가 삼국의 다크호스로 등장했다는 우리의 교과서적 상식을 무너뜨립니다. 한국사 교과서에 단골로 실렸던 이 무렵의 신라 지도는 우리에게 착시 현상을 불러일으킵니다
신라 진흥왕 이후의 지도
지도만 봐서는 도대체 ‘백제가 신라보다 큰 나라’라는 말이 성립이 되느냐는 말입니다. 신라 영토는 경상남북도와 충청북도, 경기도, 강원도, 함경남도 일부에까지 뻗쳐 있고, 백제 영토는 신라의 4분의 1에서 5분의 1 크기입니다. 그런데도 삼국시대 말기 두 나라 중에서 전쟁의 주도권을 쥔 쪽은 백제였습니다.
최근에는 경남 남해에서 삼국시대 말기 백제 귀족의 무덤이 발견되기도 했습니다. 7세기에는, 최소한 우리가 배웠던 저 지도보다는 백제의 판도가 훨씬 넓었던 것입니다. 멸망 당시 백제의 규모는 더욱 놀랍습니다. 무려 76만 호(戶)가 살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고구려 말기 인구는 69만7000호였으니, 기록만으로 놓고 보면 백제가 고구려보다 인구가 많은 나라였습니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설이 있습니다. 인구밀도가 높았다, 행정착오였다, 세금 수취 방식의 차이였다, 아니면 일각의 주장처럼 ‘바다 밖에 또 다른 백제가 존재했다’… ‘신당서’ 백제전과 ‘삼국사기’ 백제본기의 마지막에서 “백제 땅은 신라와 발해(!)가 나눠 가졌다”고 기록한 것도 상상의 나래를 펴게 하지만… 일단 이 얘기는 여기까지만 하기로 하겠습니다
겅남 남해군 고현면 남지리에서 벌굴된 백제 귀족의 은화관식(銀花冠飾)
7세기 백제영역이 지금의 경남지역까지 미쳤음을 보여주는 자료
진덕여왕의 우려 섞인 반응에 김유신은 이렇게 말합니다.
“전쟁의 승부는 크고 작음에 달린 것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이 어떤가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
그러면서 김유신은 중국 은(殷)나라의 폐주 주왕(紂王)의 고사를 인용합니다.
“주에게는 수많은 백성이 있었으나 마음과 덕이 떠났기 때문에 주(周)나라의 신하 10명이 마음과 덕을 합친 것만 같지 못했습니다. 이제 우리 백성은 뜻을 같이해 생사를 함께 할 수 있으므로 저 백제는 두려워할 바가 못 됩니다.” 이것은 ‘서경(書經)’ 태서(泰誓)편에 주나라 무왕(武王)이 “은나라의 주는 억조(億兆)의 이인(夷人·이것이 은나라가 동이족 나라라는 근거 중 하나로 인용되곤 합니다)이 있으나 그들은 이심이덕(離心離德·마음과 덕이 떠남)이며, 나는 난신(亂臣·여기서는 변변치 못한 신하 정도로 해석하는 것이 문맥에 맞습니다) 10명이 있는데 동심동덕(同心同德·마음과 덕을 같이 함)이다”고 한 말을 인용한 것으로, 김유신 및 당시 신라 지식층의 상당히 높은 지적 수준을 보여주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심 통합에 나섰다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647년 1월 비담의 난 이후 진덕여왕의 초기 민심통합 노력이 대단히 신속했으며, 조기에 일부 성과를 내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642년 대야성과 40개 성 함락, 645년 7개 성 함락으로 이어진 선덕여왕 말기의 심각한 군사적 위기 상황이 있었고, 설상가상으로 지배층의 분열과 상대등의 반란이 일어났습니다. ‘선덕여왕이 자기가 죽을 날을 미리 알았다’는 ‘삼국유사’ 기록으로 볼 때 선덕여왕은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아무런 기록 사항이 없는 646년에 이미 중병을 앓고 병석에 누운 상태였을 것입니다. 말년의 선덕여왕은 민심 통합책에 효과적으로 나설 수 없는 상황이었을 것이며, 설사 통합을 위해 노력했다고 해도(그러니까 황룡사탑이라는 전대미문의 대형 토목공사가 재정적 손실을 넘어설 만큼의 통합 효과를 가져왔다고 해도) 수도 서라벌에서 10일 이상 지속된 비담의 반란은 민심에 대단한 균열을 가져왔을 것입니다.
진덕여왕은 이 같은 상황을 빨리 수습하려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즉위한 지 열흘도 안 된 시점에서 비담 등 반란 연루자 30명을 신속히 참수했다는 기록에서는 새 여왕의 과단성을 엿볼 수 있습니다. 또한 참수된 사람이 30명에 그쳤다는 기록에서는 연루 정도가 약한 사람들에 대한 사면이 이뤄졌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후 압량주로 부임한 김유신이 ‘민심이 어느정도 통합됐다’고 판단한 것은, 새 여왕의 민심통합책이 어느 정도 성공할 기미를 보이고 있었다는 의미입니다.
군사를 일으키겠다는 김유신의 진언을 진덕여왕이 허락하자, 김유신은 백제를 공격해 큰 전과를 거둡니다. 이후로 백제·신라 양쪽 기록에는 계속 신라, 특히 김유신의 군사적 승리가 많이 기록됩니다. 하지만 단재 신채호가 ‘조선상고사’에서 지적한 부분 중 “당시 김유신의 전공에 대한 기록이 과장된 것으로 보인다”는 평에는 일리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삼국사기’ 기록만 보면 김유신의 연전연승으로 백제는 곧 무너져 망할 나라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신라가 자력으로 백제를 누를 수 있는 상황이었다면, 나당연합 같은 것은 굳이 필요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진덕여왕의 말에서 보이듯 스스로를 ‘소국’이라 여기고 여전히 망국의 위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쪽은 신라였습니다.
당 태종을 감동시킨 김춘추의 달변
이제 선덕여왕 때 고구려와 왜, 당나라에서 번번이 실패하기만 했던 외교적 노력에도 성과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선덕여왕 때부터 시작된 노력이 결실을 맺었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고구려·왜는 끝까지 실패했고, 도움을 요청한 당나라는 오히려 상대등 반란의 원인을 제공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진덕여왕 즉위년인 647년 원년, ‘여왕 폐위론’을 제시했던 당나라는 뜻밖의 행동을 합니다. 당 태종은 진덕여왕이 즉위하자마자 곧바로 사신을 보내 새 여왕을 ‘낙랑군왕’으로 책봉합니다. 황제가 주변국 군주를 ‘책봉’하는 전근대 동아시아의 관례를 따르면서, 외교적으로 여왕의 권위를 인정한 것입니다. 선덕여왕의 경우 즉위 3년 뒤에야 책봉이 이뤄졌던 것을 생각하면, 그리고 여왕의 통치를 못마땅하게 생각했던 당나라로서는 불과 4년만에 뭔가 커다란 변화가 생긴 것이었습니다. 도대체 왜?
'정관의 치'라는 태평성대를 이룬 것으로 평가되지만
고구려 침공에는 끝내 싱패한 당 태종(재위 626-649)
서기 645년, 당 태종이 안시성에서 고구려에게 뼈아픈 패전을 당했기 때문입니다. 신라가 ‘당나라의 도움 없이는 백제의 위협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판단한 것과 마찬가지로, 당나라는 ‘신라의 도움 없이는 결코 고구려 침공에서 성공할 수 없다’고 인식하게 된 것입니다. 바꿔 말하자면 신라는 고구려에 대해, 당나라는 백제에 대해 그렇게 결정적인 원한 관계는 없었던 것입니다.
진덕여왕 2년인 648년에 새로 당나라에 파견된 사신도, 이전처럼 ‘여왕 폐위론을 듣고도 아무 말 못하던 용렬한 인물’이 아니었습니다. 김춘추라는 신라의 실력자가 직접 파견됩니다. 만년의 당 태종도 신라 사신을 대우하는 태도가 크게 달라집니다. “춘추의 용모가 영특하고 늠름함을 보고 후하게 대우했고, 사사로이 만나 금과 비단을 매우 후하게 줬다”(삼국사기)는 것입니다. 김춘추의 언변도 대단히 설득력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신(臣)의 나라는 바다 모퉁이에 치우쳐 있으면서도 천자의 조정을 섬긴 지 이미 여러 해 됐습니다. 그런데 백제는 강하고 교활해 여러 차례 침략을 마음대로 했습니다. …만약 폐하께서 당나라 군사를 빌려줘 흉악한 것을 잘라 없애지 않는다면, 저희 나라 인민은 모두 사로잡히는 바가 될 것이고 산 넘고 바다 건너 행하는 조공마저 다시는 바랄 수 없을 것입니다.”
상대방을 띄워주고 실리는 다 챙겨
말만 떼 놓고 보자면 대단히 구차하고 비굴하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이것은 ‘원군 요청’을 목적으로 파견된 사절의 지극히 외교적인 수사(修辭)라는 점을 인식해야 합니다. 또한 약간의 과장은 있겠지만 이것은 실제로 당시 신라가 처한 군사적 위기를 토로한 것이기도 했습니다. 마침내 이 시점에서 당 태종은 백제 출병을 결심합니다. 그의 사망 1년 전의 일입니다
그런데 이미 ‘출병 허가’가 이뤄진 상태에서 김춘추는 아예 속옷까지 벗어주는 듯한 선물보따리를 더 내놓습니다.
①신라도 당나라의 예복을 입을 수 있도록 해 달라. 바꿔 말하면 아예 신라는 관리 복식까지도 당나라 스탠다드로 다 뜯어고치겠다. ②내 일곱 아들이 고명하신 폐하 곁을 떠나지 않고 숙위(宿位)할 수 있게 해 달라. 바꿔 말하면 나는 사사로이 당나라 땅에 내 아들들을 인질로 두고 가겠다. 당 태종이 크게 기뻐했고, 김춘추에 대한 신임이 더욱 두터워졌음은 두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김춘추의 이 두 가지 제안이 겉으로 보이는 것처럼 그렇게 ‘비굴한’ 것만은 아니었다는 데 역사의 묘미가 있습니다. 김기흥 건국대 교수의 분석에 따르면, ①당의 복식을 사용한다는 것은 당나라의 통치에 따른다는 정치·외교적 제스처인 동시에, 당나라가 신라를 야만의 나라로 보지 않고 복식을 같이 할 수 있는 상대로 여김을 보여주는 것이다. ②’숙위’란 황제의 곁에 머무르면서 그를 지키는 것이니 확실한 신임을 받는 자가 아니면 할 수 없는 것이다.
실제로 훗날 나·당 전쟁이 본격화된 국면에서, 숙위로 갔던 김춘추의 2남 김인문은 ‘인질로서 처벌받은’ 것이 아니라 ‘당나라의 주요 실력자 중 한 사람으로서 신라왕에 책봉’되는 상황을 맞게 됩니다. 그렇게 보면 김춘추는 약간 몸을 굽히는 듯 행동함으로써 당나라의 환심을 사는 동시에 오히려 당나라의 선진 문물 제도를 직수입하고, 자기 아들들을 당나라 정계에 영향력을 지닌 거물로 키운다는 온갖 공적·사적인 실리를 취한 것입니다. 스마트하다고 볼 수도 있고 클레버하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만, 보면 볼수록 감탄이 나온다는 것만큼은 분명합니다. 이건 무려 1300년 전의 일입니다!
여왕, 손수 비단을 짜고 그 위에…
이 모든 정치·외교·군사적인 성공이 사실상 진덕여왕과는 무관한, 실권자인 김춘추·김유신 세력의 성공으로 보는 시각도 있습니다. 하지만 하영애 경희대 교수는 조금 다른 말을 합니다. “아주 특별한 경우라도 정치적 리더십이라는 추진체 없이도 일정한 현상이 만들어질 수 있다는 것은 이론상으로는 가능할 뿐이나, 현실적으로는 드물다. …각종 문제를 해결해야 할 정치지도자로서 진덕여왕도 단순히 대리인이나 형식적이고 상징적인 대표가 아니라 각종 갈등과 문제의 구체적 해결을 담당하는 ‘최종 결정권자’(arbiter)로서 역할을 했던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최고 지도자로서의 리더십이란 것은 그렇게 ‘실권이 없었다’고 단번에 무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얘깁니다.
당 태종의 아들 고종(재위 649-693)
자, 이제 진덕여왕의 정치적 행동 중 가장 적극적인 동시에 논란의 표적이 되는 부분입니다.
‘삼국사기’ 진덕여왕 4년(650년)조.
그 전해 당 태종이 죽고 즉위한 새 황제인 당 고종을 위해, 여왕이 직접 비단을 짜고 오언(五言) 태평송을 지어 바칩니다. 그것이 그 유명한, 실명이 전해지는 한국 여성문학 중 가장 오래된 문학작품인,
‘치당태평송(治唐太平頌)’.
"大唐開鴻業 巍巍皇猷昌 止戈戎衣定 修文繼百王 統天崇雨施 理物體含章 深仁諧日月 撫運邁時康 幡旗旣赫赫 鉦鼓旣鎤鎤 外夷違命者 剪覆被天殃 淳風凝幽顯 遐邇競呈祥 四時和玉燭 七曜巡萬方 維嶽降宰輔 維帝任忠良 五三成一德 昭我唐家皇.”
"대당(大唐)이 큰 업을 열었으니 높은 황제의 운이 창성하다. 갑옷 입고 천하를 통일하니 전쟁이 그쳤고 글을 닦아 여러 임금들이 대를 이으셨다. 하늘의 명을 이어 자비를 베풀고 만물을 다스리니 그 아름다운 덕을 본받으리라. 그 인덕(仁德)은 일용(日用)에 부합하고, 세상을 어루만지는 덕은 때맞추어 평화롭게 하셨다. 그 깃발 빛나며, 북소리 크게 울리자 외적들은 천벌을 받았네. 순박한 풍속 나타나는 곳 먼 곳이나 가까운 곳이 모두 상서로운 일 아뢰어 오네. 사계절마다 임금의 덕이 조화되고 해와 달과 별들은 온나라 두루 도네. 당나라 산악의 정기가 주선왕 신보(申甫)를 낳았듯이 황제께서도 산악의 정기로 재상을 낳으시어 충성스럽고 선량한 이에게 정사를 맡기셨네. 삼황오제처럼 한결같은 덕을 이루셨으니 우리 당나라 황실의 국운이 밝고 밝도다"
진덕여왕이 지은 '치당태평송'의 삼국사기 기록 부분
굴욕을 견디고 스스로를 낮춘 리더십
고백컨대, 저는 국민학교 때 역사책에서 이 시를 읽고서 그만 책을 집어던졌습니다. 우리나라 여왕이 당나라 황제에게 직접 비단을 짜고 써서 전해 준 글로 보기에는 너무 수치스럽고 굴욕적이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세월이 흐른 지금에도 그것이 ‘수치스럽고 굴욕적이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그러나 ‘왜 그렇게 수치스럽고 굴욕적인 글을 지어 올렸느냐’는 것까지도 생각해야 한다는 점은 그때와 달라진 부분입니다. ‘민족사적인 관점에서 신라는 당나라를 끌어들여 동족을 공격하지 말아야 했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민족이라는 개념이 수입된 근대 이후의 시각입니다. 7세기의 신라인으로선 자국의 생존 여부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었을 것입니다. 커다란 위기 상황 속에서 위태롭게 즉위한 진덕여왕은 국가의 존속과 스스로의 정치적 성공을 위해 노력해야 했을 것입니다. 자칫 백제, 그리고 백제와 손을 잡은 고구려의 협공으로 망국의 위기에 놓은 현실을 타개해야 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평가할 수 있지 않을까요.
진덕여왕은 ‘굴욕을 견디고 스스로를 낮춤으로써, 나라를 망국에서 구한 지도자’였다고 말입니다.
두 번째 여왕의 리더십을 따져 보겠습니다. 진덕여왕의 재위 기간은 불과 만 7년이었습니다. 그 짧은 기간 동안 그는 신속한 정치적 안정과 사회 통합을 도모했고, 군사적으로도 백제의 공세를 어느 정도 방어한 뒤 역공을 시도하는 데까지 이르렀습니다. 군사적 연합을 위한 당나라와의 외교는 황제가 바뀐 뒤 스스로를 낮추고, 굴욕을 감내하면서 ‘비단을 짠다’는 고대(古代) 여성으로서의 특성을 살리는 여왕 스스로의 적극적인 행동을 통해서 지속시킬 수 있었습니다. 이 모두가 김유신과 김춘추라는 두 인재를 적재적소에 배치해 활용하는 용인술(用人術)의 성공이기도 했습니다. 그 이전 선덕여왕은 두 사람을 자신의 친위 세력으로 키우기는 했으나, 그들을 ‘적재적소에 배치’하지는 못했습니다. 김유신은 대야성에 없었고, 김춘추는 당나라로 파견되지 않았습니다. 진덕여왕이 자신을 내세우거나 드러내지 않았어도, 대규모 토목공사를 벌이거나 지나치게 불교나 승려에 의존하지 않았어도, 신기한 에피소드가 전해지지 않았어도, 누군가 그녀를 사모하다가 불귀신이 됐다는 전설이 없어도, 신라의 운명과 한국사 전체의 방향 전환이 그 짧은 진덕여왕대의 7년 동안 이뤄졌다는 정당한 평가를 받아야 할 것입니다. 설사 그 방향 전환이 ‘민족사적 견지’에서 반드시 긍정적인 방향이었다고 볼 수는 없더라도 말입니다.
앞서 진덕여왕의 물음에 대한 김유신의 대답을 다시 돌이켜 보겠습니다.
兵之勝否, 不在大小, 顧其人心何如耳.
(병지승부, 부재대소, 고기인심하여이)
전쟁의 승부는 크고 작음에 달린 것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이 어떤가에 달려 있을 뿐이다.
―‘삼국사기(三國史記)’ 김유신열전(金庾信列傳) 상(上)
전쟁 뿐 아니라 정치·외교와 온갖 정책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의 마음을 얻는 일’일 것입니다. 비록 단기간에 인기를 얻을 수 없는 정책이라 하더라도, 지속적인 소통을 통해서 대중을 설득하고 인심이 동요를 일으키지 않도록 끊임없이 노력해야 하는 것이 지도자에게 필요한 덕목입니다. 자신을 내세우지 않더라도, 때로는 국익을 위해서 자신을 낮추더라도, 반드시 그것을 하는 것이 국가에 정말 필요하다고 판단되는 것에 대해선, 스스로를 권위마저도 내던져야 하는 것이 진정한 리더십일 것입니다. 진덕여왕은 그 성공을 위해 조용한 길을 끈질기게 걸어갔습니다. 우리는 ‘신라 통일의 기틀을 이룬 여왕’으로서 지금까지 상식적으로 알던 것과는 좀 다른 인물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역사는흐는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선덕여왕의 인물들..실존 (0) | 2018.12.27 |
---|---|
[스크랩] 선덕여왕와 진덕여왕 (0) | 2018.12.27 |
[스크랩] 여왕실록② 진덕여왕 / 유석재 기자의 新천장지구 (0) | 2018.12.27 |
[스크랩] 여왕실록 2_신라를 구한 진덕여왕 (0) | 2018.12.27 |
[스크랩] 승만부인과 진덕여왕 (0) | 2018.12.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