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흐는다

[스크랩] 태봉제국조 선종궁예 [善宗弓裔-摩震國]

오늘행복스마일 2018. 12. 27. 14:59

    태봉제국조 선종궁예 [善宗弓裔-摩震國]

 

  오랜 세월 동안 한반도의 최소 약소국가로서 이웃 백제와 가우리(고구려)

핍박으로 불안한 생존을 영위해야 했던 신라는 비록 이민족(異民族) ()나라

의 도움을 받긴 했지만, 결국 강력한 고구려와 백제(百濟)를 멸망시켰다.

  그러나 백제인들의 지속적인 저항에 시달려야 했고, 북쪽으로부터의 위협과

바다건너 일본의 침략으로 단 하루도 편할 날이 없었다. 언제나 불안 속에서 살

아야 했던 신라인들은 그 마음을 달래 보려고 불교에 매달려 전국적으로 사찰을

건립해보기도 하였지만 결국 국력만 낭비하는 결과를 초래했고 백성들의 불만은

날로 커져만 갔다.

  대백제전(對百濟戰)을 전개할 때만 해도 유신(金庾信)과 김인문(金仁問)

관계는 원만하였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김유신 가문은 몰락했고,

열왕(武烈王) 직계 자손들만의 일족 체제가 유지되어 갔다. 그러다가 혜공왕(

恭王) 96각간(角干)의 난(768)이 일어났고, 이후 귀족들의 난()이 연속적

으로 발생하였다.

  신라 하대에 들어와서는 김주원(金周元)김경신(金敬信)이 치열한 왕위 쟁탈

전을 벌였다. 그러다가 양파가 타협하여 김경신이 왕위에 올라 원성왕(元聖王)

되었고, 김주원은 강릉을 중심으로 하는 지배권을 인정받아 명주군왕(溟洲郡王)

에 오르니, 이로부터 신라는 분열의 불꽃이 번지기 시작하였다.

  그 뒤 우후죽순처럼 일어난 지방의 호족(豪族)들은 그들의 지배하에 있는 백성

들을 마음껏 수탈하며 각각 자신들의 세력을 키우는데 정신이 없었다. 따라서 살

기가 힘들어진 지방민들 중 특히 옛 백제와 가우리(고구려) 유민들 사이에서는

반정부 분위기가 고조되었다.

  이러한 분위기를 감지한 중앙정부는 사태의 심각성에 비추어 이들의 구심점이

될 수 있는 옛 백제와 가우리 왕족의 후예들을 철저히 감시하게 되었다. 그 때

① 당노(唐奴)들을 끌어들여 제 형제들을 멸망시킨 신라는 그 후 이 땅을 영구

점령하려는 당노들의 흉계를 간파하였다. 그리하여 가우리 다물 운동에 열중하던

고안승을 끌어들였고, 당의 음모를 분쇄한 후 그 보답으로 겨우 공주(公主) 하나

를 그에게 시집보내고 왕성(王姓)인 김씨 성을 하사하였다그 후 고안승의 족자

(族子) 대문(大文) 등을 금마저에 두었다가 모반 혐의를 씌워 몰살시키고 말았다.

  대가우(大高句麗-渤海) 명종 경황제(明宗景皇帝) 천복(天福) 9, 5 15:

이 때 금성에는 가우리의 왕족 보덕왕(報德王) 고안승(高安勝)①의 후손들이 김

(金氏) 성으로 살고 있었는데 고씨의 후예로서 한 사내아이가 태어났다그가

바로 궁예(弓裔)로서 후삼국의 한 축인 마진국(摩震國), 태봉국(泰封國)을 세우

게 된다.그런데 금성 정부는 옛 가우리인들의 구심점이 될 수 있는 이 아이까지

죽이려고 하였다.

  그 때 궁예의 어머니가 아이(궁예)를 다락 위에서 던졌는데 이 때 미리 대기

하고 있던 유모가 떨어지는 아이를 받으면서, 그만 한쪽 눈을 유모의 손가락에

찔려 애꾸눈이 되고 말았다. 유모는 아이를 안고 깊은 숲 속으로 도망쳐 안성에

있는 칠장사로 숨어 들어갔고 거기서 아이를 훌륭하게 키워 냈다.

  이 아이는 숨어 살아야 했기 때문에 본성인 고()씨도 쓸 수 없었고 또 그의

선조가 신라 정부로부터 받은 김씨 성도 쓸 수가 없었다. 따라서 유모의 성을

따라 궁()씨로 불렀다. 궁예(弓裔)란 선사자(善射者: 활을 잘 쏘는 사람)라는

뜻이 있다.

  궁예는 열 살이 되자 세달사(世達寺)로 들어가 중이 되었고 선종(善宗)이라는

법명(法名)을 받았다. 궁예는 가우리 유민들을 모아 나라 잃은 설움을 일깨워

주는 한편 열심히 무술을 연마하며 잃어버린 옛 왕국을 다시 일으키려는 꿈을

키워갔다.

  그는 작은 무리를 이끌고 죽주(竹州)의 기훤(箕萱)을 찾아가 대사()를 의

논하였다. 그러나 기헌은 마음이 편협하고 오만하여 그 인물됨이 따를만하지 못

하였다. 실망한 선종은 기훤의 부하 중 원회(元會)와 신훤(申煊) 등을 포섭하여

북원(北原:原州)의 양길에게 갔다.

  양길(梁吉)은 선종의 인품에 반하여 그를 크게 환영하였다. 비로소 장수의 대

우를 받고 군사를 나누어 받게 된 선종은 곧 치악산(雉岳山, 原州)의 석남사(

南寺)를 본영으로 삼은 뒤 주천(酒泉), 내성(奈城, 寧越), 울오(鬱烏), 어진현

(御珍縣) 등을 공격하여 모두 점령하였다.

  진성여왕 8, 선종은 다시 출병하여 명주(溟州, 江陵)를 공격하였다. 이 때

군사 3,500명을 14대로 나누고 김대검(金大黔), 모흔(毛昕), 장귀평(長貴平),

장일(張一) 등을 사상(舍上, 部長)으로 삼았다. 명주를 점령한 선종궁예는 이어

서 성천(성川, 華川), 부약(夫若: 金化), 금성(金城, 金化郡), 철원성(鐵圓城,

鐵原) 등을 차례로 탈취하였다.

  그러자 패서(浿西, 禮成江 以北地域)의 많은 호족들이 스스로 찾아왔는데 그

때 송악군(松岳郡-開城)의 성주(城主) 왕건(王建)도 스스로 선종을 찾아왔다.

궁예는 대단히 기뻐하며 왕건에게 철원태수(鐵原太守)의 벼슬을 제수하였다.

  왕건을 얻은 궁예는 승령(僧嶺, 連川), 임강(臨江, 長湍), 인물현(仁物懸,

)을 공취하고, 송악군(松岳郡)을 도성(都城)으로 정한 다음, 계속하여 공암

(孔巖, 金蒲), 검포(黔蒲), 혈구성(穴口城, 江華)을 공취하였다.

  이때 양길(梁吉)은 여전히 북원(北原)에서 국원(國原, 忠州) 30여성을 호

령하고 있었는데 궁예가 양길의 말을 듣지 않는다는 이유로 양길이 쳐들어오자

마침내 궁예는 양길의 대군을 매복전으로 크게 격파하여 오히려 양길의 넓은

영지를 흡수 통합하여 버렸다.

  또 서기 899 2, 왕건을 정기대감(精騎大監)으로 삼아 양주(楊洲), 견주

(見州)를 접수하였고, 계속하여 광주(廣州), 충주(忠州), 당성(唐城), 청주(

), 괴양(槐壤, 傀山) 등을 모두 평정하였다.

  신라 효공왕(孝恭王) 5, 궁예는 가우리의 원한을 갚겠다고 선언하고 드디어

스스로 왕위에 올랐다. 효공왕 8년에는 국명을 마진(摩震), 연호를 무태원년(

泰元年)이라하여 당당한 독립 황국임을 만천하에 선포하였다.

  한반도의 대세력으로 성장한 궁예는 철원(鐵原)을 서울로 삼고, 연호를 다시

성책원년(聖冊元年)으로 고쳤다. 이때 패서(浿西:黃海+平安) 13진으로 분정

하고, 정부의 조직을 새롭게 개편하였다. 개천(開天) 4809: 서기 911, 국명

을 태봉국(泰封國)으로, 연호를 수덕만세-원년(水德萬歲-元年)으로 다시 고쳤다.

  스스로를 미륵불(彌勒佛)이라 칭하며, 머리엔 금책(金色의 모자)을 쓰고 방포

(方袍, 僧服)를 입었다. 태자를 청광보살(靑光菩薩), 막내 왕자를 신광보살(

光菩薩)이라 하였다.

  그가 외출할 때는 항상 비단으로 꼬리를 장식한 백마(白馬)를 탔으며 동남 동

(童男童女)들에게 번개(幡蓋: 깃발과 우산)와 향과 꽃을 들려 앞에서 인도하게

하였고, 또 비구승 200여명에게는 범패(梵唄)를 부르며 그의 뒤를 따르게 하였다.

  개천(開天) 4811: 서기 913년에는 왕건을 시중(侍中)으로 삼았고, 서기 914

년에는 연호를 또다시 고쳐 정개원년(政開元年)이라 하였으며 왕건을 백강장군

(百舡將軍)으로 승진시켰다.

  궁예는 신라를 멸망시키고 옛 가우리를 다시 세운다는 강한 의지의 표현으로

신라를 멸도(滅都)라 부르며 극도의 배타 정책을 폈다.

 

[궁예에 대한 의문]

  지난 2001년 태조왕건의 일대기를 다룬 대하드라마가 방영되면서 역사 속에 묻

혔던 태봉국[泰封國:후고구려] 궁예弓裔에 대한 시각이 새롭게 부각된 계기가 되

었다. 더 이상 종전의 기록과 관념 속에 의한 "애꾸눈 폭군"의 모습이 아닌 개혁

을 꿈꾸었던 진정한 "군주"의 모습으로 묘사되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궁예에 대한 수 많은 오해와 풀리지 않는 의문들이 한꺼번에 일소되지

는 못했다. 대하드라마에서도 궁예를 폭군으로 다루며 단지, 궁예가 폭군이 된

과정을 정신에 이상이 있다는 것을 원인으로 하고 있다. 또 그 원인의 깊은 뿌리

는 궁예가 신라왕실로부터 버림받은 신라왕자이기에 그렇다고 단정을 지었다.

  그러나 그것이 과연 진실일까... 역사란 항시 승자의 입장에 의해서 쓰여지는

것이다. 승자가 의도하는 바에 따라 승자의 행위를 정당화시키기 위해 패자의 모

든 것을 소멸해 버린다. 즉 패자에게 어떤 변명을 할 기회도 주지 않고 일말의

명분도 승자라는 이름으로 역사에 남기지 않는다. 하지만 그 흔적의 꼬리는 어떻

게든 남게 되어 있다.

  궁예도 태조왕건太祖王建에게 찬탈당한 후 패자가 된 후 역사 속에서 철저히

왜곡되어지고 폄하되었으며 결국은 후세들에게까지 폭군으로 기록된 일종의 피해

자라 할 수 있다. 사실 궁예가 정신병 때문에 폭군이 되었다라는 그 모든 오해와

의문의 실마리는 어쩌면 궁예의 혈통에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궁예는 삼국사기의 정사에 따르면 신라 제47대 헌안왕[혹은 제48대 경문왕]

서자로 5 5일 단오절에 태어났다고 한다. 태어나면서부터 벌써 이가 나 있고

이상한 기운이 감돌아 일관들이 분주히 천문을 살펴 관찰한 후 장차 나라를 해칠

존재로 규정하여 왕에게 보고하니 왕은 궁예를 죽일 것을 명하였다.

  그러나 궁예의 어머니인 경문왕의 둘째 왕비가 이를 불쌍히 여겨 궁예를 살리

기 위해 다락밑으로 던져서 유모가 아래에서 받다가 그 손가락이 궁예의 눈을 건

드려 궁예가 애꾸눈이 되었다고 한다.

  훗날 궁예는 세달사의 승려가 되는 등 수 많은 인생의 우여곡절을 겪고 태봉국

을 건국하고 황제가 된 후 부석사에 신라 헌안왕의 초상화에 칼을 던져 난도질을

하였다고 한다. 이는 신라에 대한 반감과 경멸을 극명히 보여주는 것으로서 이

문제로 인해 궁예가 패륜아이자 정신병자로 취급당하는 결정적인 사건이 된다.

  그러나 그것이 자신을 죽이려 했던 아버지에 대한 증오심 때문에 행해졌다고

보기에는 설득력이 부족하다. 초상화에 칼을 던져 난도질을 했다는 것은 그 복수

심이 보통의 것이 아니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솔직히 궁예가 신라왕의 혈통을 타

고난 신라왕자라는 뚜렷한 증거는 없다. 그냥 설일 뿐이다.

  훗날 승자가 역사를 다시 쓸 때에 승자의 행위를 정당화하고 그것을 관철화하

기 위해 조작한 감도 없지 않아 있다. 즉 궁예를 신라왕자로 설정하여 생부生父

의 초상마저 난도질한 그야말로 극악한 패륜아이다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의도

는 아닐까... 게다가 궁예가 할거하여 새 왕조건국의 정통성과 명분을 고구려高

句麗에 초점을 두었다는 것은 어떤 비밀을 암시해 주는 것으로 추측된다.

  궁예는 아예 나라 이름을 고구려라 하였다는 것은 그가 정말 신라왕실의 혈통

일까라는 갖은 궁금점을 낳게 한다. 사실 당시 궁예가 흐트러진 민심을 모으기

위해 송도지방을 중심으로 고구려의 부활을 내걸었다는 것은 설득력이 부족하다.

왜냐하면 그때까지도 고구려의 뒤를 이은 대진국[발해]가 건재해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궁예가 진정 고구려의 후예가 아니고서는 그렇게까지 고구려의 계승을

인용하고 자처할 필요는 없다. 더욱이 놀라운 것은 궁예弓裔의 이름자체가 상당

히 고구려적이다. 궁예의 뜻을 풀이하자면 문자 그대로 활의 후예, 즉 활을 잘

쏘는 주몽의 후예가 되는 것이다.

  주몽은 고구려 초대 열제烈帝이기도 하거니와 부여를 위시한 동이에서 명궁수

를 일컫는 칭호이기도 하다. 또한 동이란 이동방인야夷東方人也[이는 동쪽에 사

는 사람이다.] 유군자불사지국有君子不死之國[군자가 죽지 않는 군자가 있는 나

라이다] 라는 중국 설문의 풀이처럼 우리민족의 옛이름이었다.

  우리 민족은 군자국이라는 칭호와 함께 활쏘기에도 뛰어나기도 하였다. 그래서

동이의 이夷는 大와 弓의 합성어가 된다. [동이를 그냥 단순히 큰 활을 잘 쏘는

동쪽의 민족이라고 보기에는 어렵고 동쪽의 활을 잘 쏘는 큰 나라라고 해석하는

것이 합리적이지 않을까 한다.]

  그 동이를 종가宗家로 계승하여 국통의 맥을 이었던 나라가 바로 고구려였으며

고구려인들은 자라면서부터 동이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활쏘기를 습득하였다.

시조가 활을 잘 쏘았던 주몽이기도 하기에 그러한 조상의 위업을 받들어 활쏘기

를 매우 중요시 하였다. 그런 점에서 주몽의 후예라는 이름을 가진 궁예는 신라

왕실의 혈통이 아닌 고구려인이라는 설은 매우 강한 신빙성을 가진다.

  더욱이 그것을 보여주는 유력한 기록까지 있다. 바로 태백일사 고려국 본기편

이다. 고려국 본기에 의하면 궁예는 보덕국왕 안승의 먼 후예라고 했다. [泰封

國王弓裔 其先平壤人 本報德王安勝之 遠裔] 안승이라는 사람은 고구려 최후의

열제인 28대 보장제의 아들로서 고구려의 국운이 기울어가던 669 2, 고구려

4천호를 이끌고 신라에 투항했다.

  안승의 귀순을 환영한 신라는 안승을 보덕국왕에 봉했으며 문무왕의 질녀를

아내로 삼게 하였다. 그 후 보덕국왕 안승은 소판이라는 봉작과 함께 김씨성을

하사받고 경주에 거주하게 되었다. 안승이 김씨성을 하사받은 것은 신라 귀족에

편입되었다는 의미가 있다. 아무튼 궁예는 그러한 안승의 후예이고 고구려황실

의 혈통을 이어받았다.

  훗날 그가 신라왕자로 둔갑할 수 있었던 것은 선조가 하사받은 김씨성 때문일

것이다. 한편, 궁예가 태어나자마자 신라왕에 의해 죽임을 당할뻔한 이유는 신

라가 고구려 계열의 부활을 두려워했다는 강한 증거를 나타내고 있다. 탄생의

순간부터 범상치 않은 궁예가 쓰러진 고구려를 고구려 황족의 혈통으로 다시 재

건할 것이라는 예측을 가지고서 궁예를 죽이려 했을 것이다.

  신라로서는 후환거리가 될 인물이었기에 아예 살해를 계획하였다. 그러나 다행

히도 유모의 도움으로 궁예는 살아남게 되었으며 장성 후 유모에게 신라왕자가

아닌 자랑스런 고구려의 후예임을 전해 들었을 것이다. 이는 매우 합당하고 자연

스러운 설이라 할 수 있다.

  그러한 연유에 따라 궁예는 신라조정을 상대로 봉기하게 되었으며 급기야 불구

대천의 원수 신라를 멸도滅都라 하며 위협하는 태봉국을 건국할 수 있게 된 것이

. 태봉국 건국 후 궁예는 고구려의 옛 광영을 되찾기 위해 군사를 정비하고 민

심을 살피는 등 강한 개혁의지를 드러냈다. 또한 왕건을 일찍이 등용하여 국토를

확장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개혁 단행 과정에서 호족들과 심한 갈등을 빚었으며 그것은 그를

폭군으로 몰아버린 하나의 요인이 되었다. 궁예에 의해 견제받는 호족들은 왕건

이 덕망이 높고 무예가 출중하다는 이유로 왕건을 앞세워 반정을 일으킨 후 왕건

을 황제로 추대하였다. 그와 동시에 왕건을 그토록 신임했던 궁예는 왕건에게 배

반당해 쫓겨난 후 명성산 일대로 도망하여 항전 끝에 최후를 맞이하였다.

  그러나 왕건이라는 승자의 역사에는 반정 발발 후, 궁예는 미복차림으로 도망

을 갔으며 평강지역에 이르러 배가 몹시 고파 보리이삭을 훔쳐먹다가 이를 발각

한 백성들에게 맞아 죽었다라고 기록되어 있을 뿐이다.

  또한 왕건이 반정을 하게 된 이유는 백성들을 위해 의로움 때문이라고 역사는

기록하고 있다. 이것은 진정 궁예를 철저한 악인과 폭군으로 묘사하여 왕건의

행위를 정당화하기 위한 왕건이 세운 새 나라의 작업이었다.

  게다가 또 하나의 고구려황실의 혈통을 이어받았다고 하는 왕건이 궁예가 자

신의 일가친척이라는 것을 후세에서 알게 되면 불의한 자로 인식될 수 있기 때

문에 궁예의 혈통마저 바꾸었을 것이다.

  옛 선조의 복수를 위해 투항한 신라인들을 모조리 몰살하고 말년에는 황후와

두 아들을 죽인 비운의 고뇌를 가진 궁예..... 그의 복잡한 심정을 이해해주는

것이야말로 조작되고 왜곡된 역사를 바로 잡는 일은 아닐까... 우선적으로 그

의 혈통을 바로 잡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궁예는 고구려의 혈통으로서 고구려의 뒤를 이어 태봉국을 건국했다. 그것은

그가 팔관회를 개최했다는 것에서 그가 고구려 혈통임을 알 수 있다. 팔관회란

단순히 불교의 행사가 아니라 고구려를 지탱했던 신교정신의 맥을 이어 하늘의

옥황상제께도 제사지내며 그 은혜를 찬양한 제천의식이었다. 즉 팔관회의 궁극

적 목적은 신과 인간이 하나가 되는 신인합일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그러한 정신은 민족의 태동에서부터 시작되었고 고구려가 동이의 큰 형으로서

그 맥을 잘 이어받았다 할 것이다. 고구려에게 있어 제천의식과 천손이라는 관

념은 매우 절대적이었고 상징이었다. 궁예는 바로 이러한 토대를 가진 고구려

혈통으로서 고구려를 계승하였던 것이다. 즉 궁예의 태봉국 건국은 그 정통성

이 매우 정당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미륵불을 이용하여 드높은 이상세계를 건설하겠다는 그의 꿈은 개혁

을 반대하는 호족세력에 의해 폄훼되며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그는 가장 혼란

한 시대에 태어나 가장 비운한 삶을 살았었다. 잃어버린 망국의 후예로서 외로

운 길을 달리며 고구려의 화려한 부활을 꾀했던 황제 궁예..... 그는 이제 폭군

이 아닌 고구려와 발해의 국통을 이어받은 당당한 태봉국 초대 황제로 거듭나야

할 것이다.

                   [134154]님의 궁예에 대한 다른 자료입니다.

 

<의문점>

  1. 김씨라면 아무나 신라 왕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니죠. 고구려가 서기 668

     에 망하고 궁예는 서기 870년 경에 태어난 사람인데 신라 왕손이 아니고서

     는 고구려 멸망 후 200년 후에 태어난 왕자에게 왕위를 물려줄 수 있겠습

     니까?

  2. 활을 잘 쏜다는 이유로 고구려 후손이라는 점이 그렇네요. 안성 칠장사에

     가면 궁예가 왕궁을 빠져 나와 10살까지 머물면서 활쏘기를 연습하던 활터

     가 지금도 남아 있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한을 품고 활쏘기 연습을 한다면

     누구나 신궁이 될 수 있지 않을까요?

  3. 고려국 본기를 찬한 사람은 조선 연산군에서 중중 때까지 학자인 이맥입니다.

  4. 신라 말기에는 왕이 서로 되기 위해 형제나 숙부 등을 죽이는 왕위 싸움이

     많아서 경문왕이 죽고 첫째 부인의 소생이 왕이 되자마자 둘째 부인의 아들

     을 죽이고자 했다는 설이 옳은 것 같네요.

    - 궁예는 경문왕이 오래 살았으면 왕이 될 수 있었겠으나 일찍 승하하여서

      비록 (용덕)태자였지만 나이가 기껏해야 5 살 미만으로 너무 어렸으므로

      왕이 될 수 없었음.

  5. 순천김씨 족보에도 궁예가 헌안왕의 아들로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왕위를

     이을 수 있는 신라 왕실이라는 것은 틀림없네요.

  6. 가장 중요한 사실은 왕건의 지지 세력은 개경을 중심으로하는 세력이지만

     그것에 끝까지 저항했던 궁예 지지 세력은 충주를 비롯한 충청도 지역 장군

     들입니다. 고구려 후손들이 아니란 얘기지요.

 

종친 현덕 이병완님글펌

출처 : OUTSIDER
글쓴이 : 溪山 이항훈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