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흐는다

[스크랩] 김해김씨 계보

오늘행복스마일 2018. 12. 27. 15:10


김해 김(金)씨 삼현파(三賢派) 이야기

 

- 가락국 시조대왕 존영 -

- 가락국 시조황후 존영 -

김수로왕은 가락국의 시조

 
 <삼국유사>에 전해지는 신화에 의하면 42년에 가락국의 북쪽 구지봉에 6개의 황금알이 하늘에서 떨어졌는데, 반나절 만에 이 알이 모두 사람으로 변하여 6가야국의 왕이 되었다고 한다. 수로는 그 가운데의 한 사람으로 키가 9척이나 되며, 제일 먼저 사람으로 변했기 때문에 수로라는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 그는 금관 가야국의 왕이 되어 관직을 정비하고 도읍을 정하여 국가의 기틀을 확립하였다. 인도 아유타 국의 공주인 허황옥을 왕비로 맞았다고 하며, 199년까지 158세를 사는 동안 그가 이룬 업적도 많았다고 한다.
김해 김씨의 시조이며 능은 경남 김해에 있다.

 

 삼현파(판도판서공파)

  
이조 이십이대 정종대왕(서기 1777년)께서 김해김씨(金海金氏)를 가리켜 삼한갑족(三漢甲族)이라 하시며 절효(극일), 탁영(일손), 삼족당(대유) 세현인을 가리켜 청도 三賢이라 하였으며, 한 집안에서 四代間에 三賢人이 났다는 일은 古來로 드문 일인고로 이로 인해 삼현파(三賢派)로 정하였다 한다.
수로왕이 즉위 7년에 아유타국(현재 인도 중부지방의 고대국가)의 공주인 허황옥(許黃玉, 33~189.3.1)을 왕비로 맞이하여 10남 2녀를 낳았는데 맏아들은 김씨로 왕통을 잇고 두 아들은 왕비의 간곡한 요청으로 왕비의 성인 허(許)씨(태인 허씨)를 주었다. 그리고 나머지 7아들은 불가에 귀화하여 하동 7불이 되었다고 한다. 또한 허씨에서 갈라져 나온 인천 이씨가 있으며 세 성씨가 다같은 혈족이라며 종친회도 '가락중앙 종친회'로 하였다. 김해 김씨의 중시조는 수로왕의 12세손인 김유신(金庾信)장군이다. 김유신은 가락국 마지막 왕인 구형왕의 증손이며, 할아버지는 신라의 장군이며 각간(角干)인 김무력(武力)이고, 아버지는 무열왕의 장인이며 당대의 이름난 장군인 김서현(舒玄), 어머니는 진흥왕의 동생인 숙흘종(肅訖宗)의 딸 만명(萬明)이다.

[ 계파 ]

계파는 금녕군파를 비롯한 142개파가 있으며 김유신의 직계종파인 3개파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 경파(京派 - 영견, 영서, 영정, 영순) : 고려의 김목경(牧卿)을 중시조로 한다.

§ 사군파(四君派 - 극조, 완, 여수, 세기) : 목경의 동생 김익경(益卿)이 중시조다.

§ 삼현파(三賢派 - 극일, 일손, 대유) : 김관(管)을 중시조로 한다.

삼현파(三賢派 : 판도판서공파)의 일세조(一世祖)인 관(管)은 고려에서 판도판서(版圖判書)를 역임하고 학교(學校)를 건설하여 유학(儒學)을 진흥시키는 등 나라에 많은 공(功)을 세웠으며, 그의 현손(玄孫) 극일(克一)은 효행(孝行)으로 이름을 떨쳤다. 극일(克一)의 아들 맹(孟)은 세종(世宗) 때 문과(文科)에 올라 집의(執義)를 지냈으며, 밤에 용마(龍馬)의 꿈을 꾸고 세 아들을 낳아 준손(駿孫)·기손(驥孫)·일손(馹孫)으로 이름을 지었는데 이들 3형제가 모두 빼어나서 <김씨삼주(金氏三珠)>로 일컬어졌다. 1486년(중종 17)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한 일손(馹孫)은 일찍이 당대의 거유(巨儒) 김종직(金宗直)의 문하에서 글을 읽고 김굉필(金宏弼)·정여창(鄭汝昌) 등과 친교를 맺었으며 춘추관(春秋館)의 사관(史官)으로 있을 때 전라 감사(全羅監司) 이극돈(李克墩)의 비행을 사초(史草)에 썼다가 그의 원한을 사게 되었다. 연산군(燕山君)이 등극하여 [성종실록(成宗實錄)] 을 편찬할 때 공교롭게도 이극돈(李克墩)이 당상관(堂上官)으로 참여하여 사초(史草)를 살피게 되니 일손(馹孫)의 스승인 김종직 (金宗直)이 쓴 조의제문(弔意帝文 : 세조의 왕위찬탈을 비난한 글)을 실은 것이 발견되어, 이극돈이 노사신(盧思愼)·윤필상(尹弼商)·한치형(韓 致亨) 등과 함께 연산군에게 알려 무오사화가 일어나 일손(馹孫)은 권오복(權五福)·권경유(權景裕)· 이 목(李 穆) 등과 함께 참수(斬首) 당하였고, 김종직(金宗直)은 부관참시(剖棺斬屍 : 죽은 뒤 에 큰 죄가 드러나 무덤을 파고 관을 꺼내어 시체를 베거나 목을 잘라 거리에 내거는 일)되었다. 일손(馹孫)의 강직한 기개와 재능은 후일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울렸고, 중종조(中宗朝) 영의정(領 議政) 남 곤(南 袞)은 말하기를 "세상에 다시 탁영(濯纓 : 김일손의 호)같은 이가 또 나올 수 있을 까. 그의 문장(文章)을 물에다 비하면 탁영은 강하(江河)와 같고 나는 개천에 지나지 못하다"라 고 일손(馹孫)의 짧은 생애를 애석하게 여겼다.
삼현(三賢)의 한 사람인
대유(大有)일손(馹孫)의 조카이 며 준손(駿孫)의 아들이다. 무오사화(戊午士禍)에 숙부(叔父) 일손(馹孫)이 참수당하자 부자(父子)가 함 께 호남(湖南)에 유배되었다가 중종(中宗) 때 풀려나와 평생을 강개한 지절(志節)로 살았으며, 3개월 간의 칠원현감(漆原縣監)을 마지막 벼슬로 사직하고 청도(淸道)의 운문산(雲門山) 속 삼족당(三 足 堂)에서 73세로 일생(一生)을 마쳤다. 일손(馹孫)의 증손(曾孫) 언유(彦諭)는 고양(高陽)에 살면서 지극한 효행(孝行)으로 명망이 높았고, 시(詩)와 글씨에도 뛰어났으며 특히 송설체(松雪體)에 능하여 공사(公私)의 비(碑)와 병풍·족자의 글씨를 많이 썼다. 언유(彦諭)의 아들 현성(玄成)은 광해군(光海君) 때 폐모론(廢母論)에 불참하여 면직되자 청빈하게 여생을 마쳤으며, 시·서·화에 모두 능했다.
삼현파 일세조(一世祖)인
관(管)은 고려 충선왕때 판도판서를 역임했고, 왕에게 간하여 불교를 배척하고 유학을 진흥시키는 등 많은 공을 세웠으며, 조선에서는 그의 5세손 극일(克一)이 유명했다. 극일(克一)은 일찍부터 세종때 조정으로 부터 효자정문이 세워졌고, 그의 둘째아들 맹은 세종때 급제하여 집의를 역임했고, 맹의 아들 3형제가 모두 과거에 올라 당대의 문장으로 이름을 날려 <김씨삼주>라 불리웠다. 이밖의 인물에는 심하(深河)의 전투에서 공(功)을 세운 조선의 명장 경서(景瑞)와 조선의 화가중에 제 일인자로 꼽히는 홍도(弘道)가 있다. [운서(韻書)]를 깊이 연구하여 중국어(中國語)에 능통했던 덕승(德承), 삼도 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 예직(禮直), 조선 풍속화의 조종(祖宗)이 유명했고, 충효정려(忠孝旌閭)를 사액(賜額)받은 진희(晋熙)와 <해동가요(海東歌謠)>를 남기고 [청구영언(靑丘永言)]을 편찬한 천택(天澤) 등이 명문거족(名門巨族)의 김해 김씨(金海金氏)를 빛냈다.

제목 : 김해김씨 연원과 역대인물

 

 

 김해김씨(金海金氏)의 연원(淵源)은 삼국유사(三國遺事)의 가락국기(駕洛國記)에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서기 42년 3월 가락국(駕洛國)의 아홉촌장(九村長)이 귀지봉(龜旨峯)에 모여 나라를 통솔할 군장(君長)을 얻기 위해 하늘을 향해 의식(儀式)을 올리자 한줄기 빛이 내려와 함께 달려가 보니 금합(金盒)에 여섯 개의 알(卵)이 담겨 있었다.

 이튼날 알 속에서 여섯동자(六童子)가 나왔는데 그 중 맨먼저 나온 동자를 수로(首露)라고 이름짓고 금합에서 태어났다 하여 성을 김씨(金氏)로 하니 그가 바로 김해김씨의 시조(始祖)인 김수로왕(金首露王)이시다.

 군왕이 된 수로왕은 나라 이름을 가락국(駕洛國)으로 정하고 인도,아유타국 에서온 허황옥(許黃玉)을 왕비(王妃)로 맞았다.

 그후 10대 구형왕(仇衡王)이 서기532년 신라에 양국(讓國)하고 상등(上等)의 위(位)와 가락국을 식읍(食邑)으로 받았으며, 그의 아들 세종(世宗) 과 무득(武得) 무력(武力) 모두가 각간(角干)을 역임(歷任)했다.

 무력(武力)공의 아들 서현(舒玄)공은 백제(百濟)와 여러번의 전투에서 공을세워 소판(蘇判) 대량주도독(大良州都督)을 역임하고 629(眞平王51)년 고구려 낭비성(高句麗,娘臂城)을 함락시키고 각간(角干)으로 제수받았으며 공의 둘째딸 문희(文姬)는 태종,무열왕비(太宗,武烈王妃)가 되었다.

 구형왕의 증손(曾孫)이고 서현공의 아들 유신(庾信)은 신라,무열왕과 함께 삼국통일의 대업(大業)을 달성한 명장(名將)으로 무열왕의 딸 지소부인(智炤夫人)과 혼인했다.

 김해는 경상남도 남동부(南東部)에 위치하는 고장으로 고대국가인 여섯가야(六加耶)중 금관가야(金官加耶)가 종주국(宗主國)이였으나 서기532년 신라에 병합된 후 금관군(金官郡) 또는 금관소경(金官小京)이라 불리웠다. 김해김씨는 신라김씨의 알지계(閼智系)와 함께 우리나라 김씨의 양대산맥(兩大山脈)을 이루어 명문거족(名門巨族)으로 변성하여 왔다. 특히 김해김씨는 족세(族勢)가 크게 번창해짐에 따라 148여파로 분파(分派)되었으며 그 중에서 금녕군파(金寧君派=京派)와 감무공파(監務公派=四君派), 판도판서공파(版圖判書公派=三賢派), 문경공파(文敬公派)의 후손들이 가장 많다.

 각파별 대표적인 인맥을 살펴보면 금녕군파(경파)의 중조(中祖)인 목경(牧卿)이 고려 충정왕(忠定王)때 금녕군(金寧君)에 봉해졌다. 목경의 맏아들 보(普)는 공민왕(恭愍王)이 세자(世子)로 연행(燕行;국가의 사절로서 중국의 북경에 감)할 때 시종(侍從)한 공으로 충근량절보리공신,수시중(忠勤亮節輔理功臣,守侍中)에 이러렸고 목경(牧卿)의 6대손(6세손) 영견(永堅;吏曹參判) 영서(永瑞;橫城縣監)·영정(永貞;大司憲知敦寧府使)·영순(永純;石城縣監) 4형제가 빼어났으며 숙종(肅宗)때 명신(名臣) 김우항(金宇杭)은 영정(永貞)의 후손으로 1713년(숙종 39) 우의정(右議政)에 올랐다.

 감무공파(監務公派)에서는 중조(中祖)인 익경(益卿)의 손자 진문(振門)이 고려말에 예의판서(禮儀判書)를 거쳐 대제학(大提學)에 올랐으나 조선이 개국하자 관직을 버리고 이 색(李 穡)·박자검(朴自儉)등과 함께 은거하여 절의(節義)를 지켰으며, 그의 둘째 아들 추(錘)는 도총관(都摠管)을 넷째 아들 석(錫)은 찬성사(贊成事)를 지냈다. 막내 조(요)는 세종때 집현전,수찬(集賢殿,修撰)을 거쳐 예조판서(禮曹判書)에 올랐으며, 직제학(直提學)을 역임할 때 장영실(蔣英實)과 함께 간의대(簡儀臺)·자격루(自擊漏)·혼천의(渾天儀) 등을 만든 것으로 전한다.

특히 세종대왕(世宗大王)께서 그에게 평소의 소원을 묻자 "백년동안 날마다 어탑(御榻;임금이 앉는 제구)을 모시고 금규화(金葵花) 앞에 진퇴를 엎드려 묻기를 원합니다"라고 대답한 것으로 「필원잡기(筆苑雜記)」에 전한다.

 한편 진문(振門)의 5대손(5세손) 극희(克禧)가 명사수로 이순신(李舜臣) 장군의 막하에서 전공을 세우고 한산도 싸움에서 전사했으며, 그의 조카 완(完;학천군 극조의 아들)은 역전의 명장으로 이름을 날렸다. 임진왜란 때 남원대첩(南原大捷)에 공을 세웠던 그는 1624(仁祖 2) 이괄(李适)의 난을 평정(平定)할 때도 창성,방어사(昌城,防禦使)로 길마재 결전에서 공을 세우고 진무3등공신(振武3等功臣)에 올라 학성군(鶴城君)에 봉해졌으며, 그의 아우 우(宇)는 병자호란 (丙子胡亂)때 벽동성(碧潼城)을 사수했던 명장(名將)으로 이름이 높았다.

우(宇)의 아들 여준(汝峻)은 볼모로 잡혀가는 소현세자(昭顯世子)와 인평대군(麟坪大君)을 호종(護從)한 18장사(壯士)의 한 사람으로 심양(瀋陽)에 갔을 때 옥하관(玉河關)에서 세자(世子)를 소리내어 울렸다는 <월명비안(月明飛雁)>의 노래를 읊어 더욱 명성을 떨쳤으며, 그의 용력에 힘을 뽐내며 목숨을 건 결투를 신청해 온 청나라 장수 우가(禹巨)의 코를 문질러 이김으로써 병자호란의 굴욕과 인질로 잡혀가는 세자를 호종하는 비애 등 백성들의 원한을 풀었다고 한다.

그후 세자가 돌아와 즉위한 다음에도 이 슬픈 기쁨과 옥하관의 달밤 일을 못잊어 과거의 시제(詩題)에 <월명비안(月明飛雁)>의 노래를 자주 출제하였다 한다.

   판도판서공파(版圖判書公派;三賢派)의 중조(中祖)인 관(管)은 고려에서 판도판서(版圖判書)를 역임하고 학교를 건립하여 유학을 진흥시키는 등 나라에 많은 공을 세웠으며, 그의 현손(玄孫) 극일(克一)은 효행으로 이름을 떨쳤다.

 극일(克一)의 아들 맹(孟)은 세종 때 문과에 올라 집의(執義)를 지냈으며, 밤에 용마의 꿈을 꾸고 세 아들을 낳아 준손(駿孫)·기손(驥孫)·일손(馹孫)으로 이름을 지었는데 이들 3형제가 모두 빼어나서 <김씨삼주(金氏三珠)>로 일컬어졌다.

 1486년(中宗17)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한 김일손(金馹孫)은 일찍이 당대의 거유(巨유) 김종직(金宗直)의 문하에서 글을 배우고 김굉필(金宏弼)·정여창(鄭汝昌)등과 친교를 맺었으며 춘추관(春秋館)의 사관(史官)으로 있을 때 전라감사(全羅監司) 이극돈(李克墩)의 비행을 사초(史草)에 썼다가 그의 원한을 사게 되었다.

 연산군(燕山君)이 등극하여「성종실록(成宗實錄)」을 편찬할 때 공교롭게도 이극돈이 당상관(堂上官)으로 참여하여 사초(史草)를 살파게 되니 김일손(金馹孫)의 스승인 김종직(金宗直)이 쓴 조의제문(弔義帝文;세조의 왕위 찬탈을 비난한 글)을 실은 것이 발견되어 이극돈이 노사신(盧思愼)·윤필상(尹弼商)·한치형(韓致亨) 등과 함께 연산군에게 알려 무오사화가 일어나 김일손은 권오복(權五福)·권경유(權景裕)·이목(李穆) 등과 함께 참수(斬首) 당하였고, 김종직은 부관참시(剖棺斬屍;죽은 뒤에 큰 죄가 드러나 무덤을 파고 관을 꺼내어 시체를 베거나 목을 잘라 거리에 내거는 일)되었다.

김일손의 강직한 기개와 재능은 후일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울렸고, 증종조(中宗朝) 영의정 남 곤(南袞)은 말하기를 "세상에 다시 탁영(濯纓;김일손 의 호)같은 이가 또 나올수 있을까. 그의 문장(文章)을 물에다 비하면 탁영은 강하(江河)와 같고 나는 계천에 지나지 못하다."라고 김일손의 짧은 생애(生涯)를 애석하게 여겼다.

 삼현(三賢)의 한 사람인 김대유(金大有)는 김일손의 조카이며 김준손의 아들이다. 무오사화(戊午士禍)에 숙부 김일손이 참수당하자 부자(父子)가 함께 호남에 유배되었다가 중종(中宗)때 풀려나와 평생을 강개한 지절(志節)로 살았으며, 3개월 간의 칠원현감(漆原縣監) 을 마지막 벼슬로 사직하고 청도의 운몬산(雲門山) 속 삼족당(三足堂)에서 73세의 일생을 마쳤다.

 김일손의 증손 언유(彦諭)는 고양(高陽)에 살면서 지극한 효행으로 명망이 높았고, 시(詩)와 글씨에도 뛰어났으며 특히 송설체(松雪體)에 능하여 공사의 비와 병풍·족자의 글씨를 많이 썼다.

 언유의 아들 현성(玄成)은 광해군(光海君)때 폐모론(廢母論)에 불참하여 면직되자 청빈하게 여생을 마쳤으며,詩·書·畵에 모두 능했다.

그밖의 인물로는 심하(深河)의 전투에서 공을 세운 김경서(金景瑞)장군과 소전공(少佺公)김덕승(金德承;春秋館編修官). 예직(禮直;三道 水軍統制使) 홍도(弘道; 朝鮮風俗畵의 祖宗) 진희(晉熙;忠孝旌閭를 賜額받은) 외 <해동가요(海東歌謠)>를 남기고 「청규영언(靑丘永言)」을 편찬한 김천택(金天澤)등이 명문거족의 김해김씨를 빛냈다.

2000년 통계청의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김해김씨는 남한에 총 892,328가구, 4.125,861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歷代人物(역대인물)

 

김무력(金武力);

 가락국 제10대 구형왕(仇衡王)의 셋쩨왕자이다. 나라가 신라에 병합되여 553(眞興王14)산라국.아찬(阿찬)으로 신주군주(新州軍主)가 되었고 이듬해 백제의 관산성(管山城) 싸움에서 백제군사 삼만여명을 도륙(屠戮)하고 백제,성왕(百濟,聖王)을 사료 잡았다. 위와같은 전공으로 신라국(新羅國) 최고의 벼슬인 각간(角干) 까지 승차하였다.  

 

김서현(金舒玄);

김무력의 아들이다. 대량주,총관(大良州,總管)으로서 백제와 여러번 싸워 소판(蘇判) 대량주,도독(大良州,都督)등을 역임하고 629(眞平王51) 고구려 낭비성(娘臂城)을 함락(陷落)시키고 각간(角干)에 올랐으며 그의딸 문희(文姬)는 신라왕족 김춘추(金春秋)에게 출가한후 김공께서 신라,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에 등극함으로서 김문희는 문명왕후가(文明王后) 되었다.

 

김유신(金庾信);

 595(진평왕17)-673(문무왕13)때의 인물이다.   아버지 김서현(金舒玄)과 신라왕족 만명부인(萬明夫人;갈문왕의 손녀이고 肅歇宗의딸)의 장남으로 태어나 609(眞平王31) 15세에 화랑이되고 따르는 무리인 용화향도(龍華香徒)를 거느리면서 화랑정신(花郞精神)으로 심신(心身)을 단련하였다. 629(진평왕51)년 중당(中幢)의 당주로서 낭비성(娘臂城) 전투에 출전하여 고구려군을 크게 물리치고 압량주,군주(押梁州,軍主)가 되었으며 644(善德女王 1)반역을 꾀하는 비담(毗曇)과 염종(廉宗)을 제거하고 무산성(茂山城),감물성(甘勿城)에 친입한 백제군(百濟軍)을 격퇴하였다. 648(眞德女王 2) 백제의 대량주(大良州)를 쳐부수고 12성(城)을 함락시킨 공으로 이찬(伊찬)이 되고 상주,행군,대총관(尙州行軍大總管)에 올랐으며, 다음해인 649년에 다시 친입하는 백제군을 도살성에서 쳐부수었다. 654(진덕여왕 8)년 왕이 후사없이 죽자 김춘추(金春秋)를 왕으로 추대하였다. 660년(武烈王 7) 상대등(上大等)이 되어 당나라,소정방(唐나라,蘇定方)과 연합하여 백제국을 멸망시키고 신라국이 삼국통일(三國統一)의 기반을 튼튼히 하였다,

663(文武王 3)년 백제의 부흥군을 토벌하고 665(문무왕 5)년 당나라에서 봉상정경,평양군,개국공(奉常正卿,平壤郡,開國公)에 봉해졌다.

668(문무왕 8) 대총관(김유신)이 고구려 정벌에 나설떼 문무왕께서는 "공은 나라의 보배인데 적진으로 갔다가 예측하지 못한일이 발생하면 이나라의 장래를 누구와 의론하겠소 공은 성내에 머물러 나라를 지키게 하시오 은연중 장성(長城)과 같아 근심이 없을 것이오" 말씀 하시므로 직접 출전하지 못하섰다.

고구려를 정벌하고 태대각간(太大角干; 그때의 신라최상 관직이 角干 뿐이였는데 김유신을 위하여 大角干직과, 太大角干직을 설관 하였다)에 승차하고 삼국을 통일한후 당나라 지원군을 돌려보내고 고구려를 완전히 평정하엿다 673(문무왕13)에 죽으니 유해는 금산원(金山原)에 장사 지냈고 835(흥덕왕10)에 흥무왕(興武王)으로 추봉(追封)되었으며 경주 서악서원(西岳書院)에 주백으로 모시고 춘추로 제향을 받을고 있을뿐만 아니라 국내곳곳에 12개 사우를새위 지방마다 유림에서 춘추제향을 받들고 있다.

 

 김흠순(金欽純)

 혹은 흠춘(欽春)으로 전하는 김유신공의 동생이다. 진평왕때 화랑이 되고 660(무열왕7)년에 백제를 정벌할 때 헝인 김유신공을 도와 전공을 세웠으며 662(문무왕2)년에는 내사지성(內斯只城)에 있는 백제군사를 격파하였다 또한 663년(문무왕3)에는 백제의 거열성(居烈城)과 거물성(居勿城) 및 사평성(沙平城)을 공락하여 항복을 받았고 668년에는 당나라 군사와 함께 고구려를 정별할 때 대당총관(大幢總管)이 되어 크게 공을세위 각간(角干)이 되었다. 문무왕이 흠순각간을 제상으로 삼으니 나라가 편안하여 현상(賢相)으로 명성(名聲)을 뗄쳤다.

 

김삼광(金三光)

김유신의 큰아들.당(唐)나라에 살면서 좌무,위익부,중랑장(左武衛翊府,中郞將)이 되어 당나라 장군 유인궤(劉仁軌)와 함께 고구려를 정벌하였다.

 

김원술(金元述)

일찍이 화랑이 되었다. 법민왕이 고구려의 백성을 받아 들이고 백제의 옛지역을 차지하니 당나라 고종이 크게노하여 장수들에게 신라군사를 토벌하라고 명하였다. 이떼 왕은 장군 의복(義福)등을 출전시켜 대방(帶方)들판에서 방어 하였으나 패하였다 원술은 이싸움에서 죽음을 각오하였으나 담릉(淡凌)의 만류로 패잔병의 대열에 끼어 도라오니 그의 부친 김유신은 "원술은 왕명을 욕되게 하였을뿐 아니라 가훈 도한 저버렸으니 참(斬)하는 것이가하다."하였다 그려나 왕이 용사(容赦)하였으나 원술은 부끄럽고 후회되어 아버지의 면전에 머물지 못하고 전야(田野)에 숨어살다가 부친상을 당하여 어머니께 뵈옵기를 청하자 어머니의 말씀인즉 "부인은 삼종(三從)의 의(義)가있으니 자식의 뜻을 따르는 것이 마땅하나 원술은 이미 그 애비에게 자식이 되지 못하였으니 내가 어찌 그의 어머니가 될 수 있으라"하시고 뵈옵기를 거절하였다 전갈을 받은 원술은 탄식하면서 "담릉(淡凌) 때문에 죽을 기회를 놏쳤도다" 하고 태백산으로 입산하였다 그후 당나라 군사가 매소천성(買蘇川城)을 공격하므로 원술은 전날의 부끄러움을 씻고자 힘것싸워 전공을 세웠으나 부모에게 용서받지 못하였다는 것으로 부담 스럽게 여겨서 벼슬길에 복귀하지 않고 일생을 맟쳤는데 그에 자손들은 진주김씨(晉州金氏)로 관행을정했다.

 

김반굴(金盤屈)

김흠순의 아들 660(武烈王7)년 황산벌 싸움에서 백제의 계백장군이 거느리는 결사대에 의해 전세가 불리하자 흠순장군께서 아들인 반굴에게 "신하가 되어 임금님게 충성하고 자식이 부모에게 효도하며 위험을 보고 목숨을 바치는 것이 충효인 것이다."하시자 반굴은 홀로 적진속에 뛰어들어 전사하였다. 그려자 신라군의 사기가 충천하여 백제군을 섬멸하자 太宗武烈王은 金盤屈을 급찬(級찬)에 추서(追敍)하였다.

 

김윤중(金允中)

 김유신의존자; 신라 성덕왕때의 장군이다 대아찬(大阿찬)으로 왕의 총애를 받자 왕족들이 질투하였다. 733년(성덕왕32)에 당나라가 사신을 보내 발해를 공격할것을 요청하였다. 그때김윤중을 장수로 지명되고 그에아우 김윤문(金允文)등 3명의 장수와 함께당나라 군사와 연합하여 발해를쳤다.

김영윤(金令胤);김반굴의 아들이다. 공은 세가(世家)에 성장하여 명예로서 자부하였다 684년(신문왕4) 고구려의 잔당 실복(悉伏)이보덕성(報德城)을 의거하여 배반하니 왕은 토벌하라 명령하고 공을 황금서당,보기감(黃衿誓幢步騎監)으로 삼았다. 전선으로 떠날 때 남긴 유언에는 "내가 이번출전으로 종족이나 민족에게 굳은 소리를 남기지 않겠다"하였다. 가잠성(가岑城)에 도착한바 적군은 완벽한 진을치고 싸움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때 우리군의 장수들은 적의 동태를 파악한후 텀을보아 싸우자하고 하고 감망할 때 김영윤 장군은 싸움에는 전진만이 있을뿐이라 호통치며 적진에 뛰어들어 격열하게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이를 보고받은 왕은 목매어 말씀하시기를 "부자(父子)의 의열(義烈)이 가상하다" 하시고 관작을 추서하고 유족에게 상을 후이 내렸다.

 

김 암(金 巖);

김윤중의 손자 암(巖)은 천성이 총명하고 민첩하여 젊어서 이찬(伊찬)이 되어 당나라에 들어가 숙위(宿衛)가 되었다. 혜공왕때 귀국하여 사천대박사(四天大博士)가 되고 양주,강주,한주(良州,康州,漢州)3주의 태수를 역임하고 집사시랑(執事侍郞) 패강,진두상(浿江鎭頭上)이 되어 가는곳 마다 백성들을 가족처름 보살폈다. 778년(혜공왕14)에 왕명으로 일본국을 방문한즉 일왕이 어질음을 알고 억류하려 하였는데 당나라 사신 고학림(高鶴林)이 김암을 보고 매우 방가워하니 왜인들의 생각에 김암은 당나라 까지 알려저 있는 인물로 짐작하여 감히 만류의 뜻을접고 본국으로 정중히 귀국할 수 있도록 도왔다

 

김심희(金審希);

854(문성왕16)-923(경명왕7) 9세에 혜목산(慧目山)의 원감대사(圓鑒大師)로부터 도(道)를 배우고 888(진성여왕2)년 송계(松溪)에서 포교하였다.진례성(進禮城:김해)에 봉림사(鳳林寺)를 세우고 도를 말하니 그때 효공왕이 사신을 보내어 법력을 빌어 기원하였다. 918년(경명왕 2) 경명왕의 청으로 왕궁에 들어가 국사에 추존하고 법응대사(法膺大師)의 호를 받았다. 923년(경명왕 7) 봉림사에서 70세로 죽으니 경명왕은 진경대사(眞鏡大師)라 중시(贈諡)하고 탑호(塔號)를 보월능공(寶月凌空)이라 하였다. 근세까지 탑비가 봉림사에 전해 있었는데 왜구들이 서울에 옴겨둔 것을 현재는 국립박물관에 이전되었다.

 

김원현(金元絃):

김경신(金敬臣)의 아들이다. 고려 충열왕 때 문과, 광정대부(匡靖大夫)첨의평리(僉議評理)상호군(上護軍)이다. 충선왕 때 양산방어사(梁山防禦使)로서 왜적을 물리친 공이 있어 신라,박제상(新羅,朴提上)임진왜란 때 절사한 양산군수,박영규(梁山郡守,朴英圭)와 함께 양산춘추원(梁山春秋園) 장충단(奬忠壇)에 삼조의열(三朝義烈)로 배향, 양산 군민이 춘추로 재향을 받든다. 이때부터 세칭 김해 김씨,무리문중(김해시,한림면,퇘래리,퇴은)이일어났다.김방려;(金方礪)김원현의 손자다. 자는 汝用,호는 築隱.일찍이 문과에 급제하여 백당재(栢堂材:사헌부 사간원의 총칭)에 들어갔고 성격이 강직하여 세상사람들과 뜻이 맞지 않았다. 계묘년(1363:공민왕 12) 난리(德興君의 난동)때는 교주도(交州道:오늘의 강원도 회양중심 5도의 하나)에서 징병의 일을 잘하여 공민왕이 그 뛰어난 재주를 사랑하였고, 그해 재상,전녹생(宰相,田祿生)과 절동, 방국진(浙東,方國珍)에게 사신으로 가서 그곳 사람들의 칭송을 받았으며, 당대의 명사 김원소(金元素), 장저(張저), 유인본(劉仁本) 등과 교우하였다. 1375년(우왕1)이첨(李詹),전녹생(田祿生),정몽주(鄭夢周)등과 이인임(李仁任)의 친원정책을 배척하다가 장류(杖流)되었고 뒤에 봉순대부 판종부사사(奉順大夫,判宗簿寺使)에 이르렀다. 묘는 김해 덕도(부산,북구 강동동)에 있는데 1729년(5) 김해부사 홍덕망(洪德望)에게 현몽하여 조부 김원현, (金元絃)그 아들김순생(金荀生)등 3대의묘를,찾았다.

 

김보(金普);

김목경(金牧卿)의 아들이다. 고려 공민왕 때의 문신. 호,죽강(號,竹岡). 충정왕 때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가 되고, 공민왕이 세자로 원나라에 있을 때 판도판서(版圖判書)로서 시종(侍從)한 공으로 즉위한 후 충근양절광보공신(忠勤亮節匡輔功臣)의 호를 받고 첨의평리(僉議評理)에 임면되었으며, 공민왕의 측근으로 친족들을 요직에 앉혔지만 모친상을 당하자 그와 권세를 다투던 김용(金勇) 일당의 간계로 강제로 3년상을 입게 되어 벼슬에서 물러났다가 모친상이 끝나자 김해부원군(金海府院君)에 봉해졌다. 금후 대역죄로 몰린 기철(奇轍)의 일당으로 몰려 유배(流配)되었지만 신돈(辛旽)이 집권하자 좌시중(左侍中)을 역임하고 충근양절동덕보리공신(忠勤亮節同德輔理功臣)되었다. 뒤에 신돈에게 국정을 맡기는 것이 부당하다고 상소하여 신돈의 미움을 받고 파직되었다. 시호는 충간공(忠簡公)이다. 이때부터 김해 김씨 경파 문중이 크게 일어났다.

 

김유(金庾; ?1386우왕12)

 고려 공민왕 때의 무신. 김해출신. 공민왕때의 홍건적을 평정하고 서울을 수복한 공으로 2등공신이 되고 흥왕사(興王寺)에서 일어난 김용(金勇)의 난을 평정하여 1등공신에 책록되었다. 그후 원나라에 사신으로 갔을 때 원에서 공민왕의 아들이 없어서 충선왕의 아들 덕흥군(德興君)을 왕으로 세우려고 하자 이를 반대하고 돌아와 밀직부사(密直副使)에 추성,익조공신(推誠,翊祚功臣)의 호를 받았고 다시 지문하성사(知門下省事)가 되었다. 이때 탐라의목호(耽羅의牧胡)가 민란을 일으키자 삼도조전원수(三道助戰元帥)가 되어 이를 토벌하는 데 종군했다. 우왕의 유모 장씨의 옥사에 연루되어 합포에유배(合浦에 流配)되었다가 곧 풀려 찬성사(贊成事)가 되었고 성절서(聖節使)로 명나라에 해로를 거쳐 갔으나 기일내에 도착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대리에귀양(代理에 歸鄕)갔다가 3년후 정몽주(鄭夢周)가 명나라 황제의 생신하절사(生辰賀節使)로 갔을 때에 석방되어 함께 돌아왔으나 이인임(李仁任)의 미움을 사 청주에 귀양갔다가 다시 풀려났으나 1386년(우왕 12)가산을 몰수 당하고 또다시 순천으로 유배도중 경천역(敬天驛)에서 죽었다.

 

김저金佇;?1389(공양왕1)

대호군파 중조(大護軍派中祖). 시중,최영의생질(侍中崔塋의甥姪). 오랫동안 최영의 수족처럼 활약했다. 대호군으로 1389년(창왕1) 최영의 족당인 전,부령,정득후(前,副令鄭得厚)와  여흥(驪興)에 유배된 우왕을 만나 예의판서 곽충보(郭忠輔)와 접선, 이성계(李成桂)를 죽이라는 밀령을 받고 곽충보와 모의하여 팔관회(八關會)날에 거서할 것을 결정했으나 곽충보가 밀고하여 순군옥(巡軍獄)에 갇혀 이성계에 의하여 피살되었다.

 

김순생(金荀生;順生);

金方礪의 아들이다. 일찍이 여택제(麗澤齊)에 들어갔고 1362년(공민왕11) 문과에 올라 지청도 군사(知淸道郡事)에 이르렀다.

 

 

朝鮮時代 人物(조선시대 인물)

 

김조(金요 ?1455(세조1)

초명은 빈(빈), 자는子和, 호는拙齋. 1411년(태종11)문과에 급제하고 1416년 (태종16) 문과 중시에 아원(亞元). 1434년(세종16)直殿으로 갑인자 주조(甲寅字鑄造)에 참여했다. 1477년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으로 정조사(正朝使), 1451년(문종1)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로 사은부사(謝恩副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세종실록>의 편찬에 참여했고 예조판서(禮曹判書)를 지냈다. 시호는 공간공(恭簡公)이다.

 

김극일(金克一);

김관(金管)의 현손(玄孫)이다. 성품이 지극히 효성스러워서 어머니를 위해서는 종기를 빨고, 아버지를 위해서는 곱똥을 맛보았다. 전후 여모살이 6년을 했는데, 한 호랑이가 무덤 곁에서 새끼를 젖 먹이매, 극일이 제사지내고 나머지를 먹이며 가축을 기르둣이 하였다. 아버지에게 천첩(賤妾) 두 사람이 있었는데, 아버지의 생시와 같이 섬겼고, 그들이 죽어서는 期年服을 입엇다. 天順 甲申年(1464)에 이 일이 임금에게 들리어 정문하였다. 청도 자계서원에 배향되었다. 이때부터 김해 김씨 삼현파 문중(청도군 화양면 백곡리)이 크게 일어났다.

 

김계희(金係熙);

金順生의 아들이다. 자는晦叔, 호는退隱. 世宗乙卯(1435)에 生員探花郞, 辛酉(1441)에 문과에 올라 예문관 검열에 들어갔으나 부모가 연로하여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니 당시 집현전 학사들이 한강까지 나와서 송별하고 시로 읊으니 太虛亭 崔恒(뒤에 영의정)은 "청운의 뜻은 백운의 뜻을 빼앗지 못하더라",(靑雲未奪白蕓思) 집현전 校理 魯山李永瑞는 "어버이 떠나 벼슬 하는 이 몇 사람인가 마는(離親 仕宦知多少)강위의 가을 바람에 홀로 그대만을 보내네"(江山秋風獨送君)라 읊으니 모두가 조선명시다.

그때지은 퇴은정은 그의 손자金克儉, 증손金寬, 현손金庾信등이 모두 한람학사를 역임하여 세칭 한림정이라 부른다. 정자는 임진왜란때 소실되었으나 지금도 그 마을을 한람정이라고 칭하고 그 면을 한림면, 翰林亭驛, 한림중학교 등이 있다. 홍문관교리, 사헌부감찰, 경상도도사를 거쳐 나주목사가 되어 은혜로운 정치를 하여 학교를 크게 수리 했으므로 백성들이 그가 간 뒤에도 생각하였다., 그가 죽자 백성들이 어버이 상을 당한 것 같았고 寶(계)를 세워 제삿날이 되면 고을의 모든 사람들이 모여 明倫堂에서 제사를 지냈다. 1462년(世祖8)吏曹參判으로서 명나라 사신으로 다녀오고 漢城判尹을 지냈으며, 1463년(世祖9)에 仁順府尹에 이르렀다.

 

김호인(金好仁);

1430(世宗12)1491(成宗22)金琢의 4대손 자는乃克 호는梅岩. 文宗更午(1450)에 문과하여 부사, 충주목사를 역임하다. 이때부터 김해김씨 侍中公派 門中이 크게 일어났다.

 

김수광(金秀光);

김불비(金不比)의 아들이다. 文宗경오(1450)에 문과하여 사간원 헌남에 이르다. 등과시 三場末坐하여 왈 "三場壯元은 천하에 많으나, 삼장말좌는 천하에 없을 것이다."하였다. 이때부터 김해김씨 새티문중(김천시 마암면 장암리)이 크게 일어났다.

 

김자정(金自貞);

朝鮮成宗 때의文臣. 1453년(端宗1)문과에 급제하여, 1472년(성종3) 宣慰使로 충청·전라·경상도에 파견되었고, 1476년 承文院判校로 역시 선위사가 되어 쓰시마(對馬島)섬에 가서 삼포의 왜인을 刷還한 공을 치하했다. 1477년(성종 8) 再嫁禁止의 논의가 일어나자 예조참판 李克墩·한성부우윤 沈瀚등과 함께 幼弱한 과부인 경우에는 재가를 허락하자고 주장했고, 1481년(成宗12)盧思愼,姜希孟등과 함께 <여지승람>을 편찬했다. 1491년(성종22) 正朝使로, 1495년(연산군1)에는 正朝副使로 각각 명나라에 다녀와 工曹判書를 지냈다.

 

김적복(金積福);

김감(金鑑)의 7대손이다. 1454년(단종2) 문과에 급제하여 縣監을 지내고 요유문즁(평남 강동군 요유리)을 일으키다.

 

김극검(金克儉);(1439∼1499)

 김계희(金係熙)의 손자다. 자는士廉, 호는淡軒,乖崖(괴애)다. 1459년(세조5)에生員,進士에 모두 일등. 같은해 문과에 오르고 翰林을 거쳐 1466년(세조12)에 文科重試에 壯元, 拔英試에 3등에 올랐다. 慶尙都事, 梁山, 咸安郡守로서 치적이 있고, 도승지, 홍문관 副提學, 황해·전라 觀察使, 안동 대도호부사 名宦이 되었고 사헌부 대사헌이다. 그가 죽자 벼슬이 이품에 이르렀으나 집도 없고 저축도 없다고 하여 나라에서 크게 부의를 하고 서울에서 고향인 김해까지 안장을 하니 그 마을을 지금도 觀察使촌이라 부른다. 史臣의 평론에 "극검은 性行이 淸簡하여 사림이 복종한다."하였다.

 

김귀(金龜)

사정공(司正公) 김이형(金利亨)의 아들이다. 1466년(세조 12)문과에 급제하여 翰林, 사헌부지평, 僉正을 지내고 세칭 곡목문중(창원시 동면 화목리)을 크게 일으켰다.

 

김만호(金萬戶);

(金寶文의딸). 천성이 지극히 효성스러웠다. 아버지가 앓자 하늘에 맹세하여, "만약 하느님이 고쳐주시지 않는다면 저는 죽어 버리겠습니다."하더니, 아버지가 죽자 그 아우한테, "너는 살아서 어머님을 섬겨라. 나는 죽어서 아버지를 섬기겠다."하고는 스스로 목매어 죽으니, 1491년(성종 22)에 나라에 보고되어 집을 정묘하였다.

 

김일손(金馹孫);

1646(세조10)1498(연산군4). 金克一의 손자다. 자는季雲, 호는濯纓. 1486년(성종17) 문과에 급제하여 춘추관記事官이 되어 <성종실록>의 史草를 썼으며 전라도觀察使 李克墩의 비행을 直筆하고 헌납때 이극돈과 成俊이 새로 朋黨의 분쟁을 일으킨다고 상소하여 이극돈의 원한을 샀다. <성종실록>을 편찬할 때 앞서 스승金宗直이 쓴 <弔義祭文>을 史草에 실었는데 1498년(연신5) 이극돈을 비롯한 훈구파의 柳子光·尹弼商·盧思愼등이 그 일을 燕山君에게 고하여 무오사화를 일으켰다. 이에 金馹孫을 비롯한 영남학파의 여러 학자들이 처형을 당했다. 스승 金宗直을 닮아 詞章에 능했으며, 당시 고관들의 불의와 부패를 큐탄했다. 諡號는 文愍公이다. 청도의 자계서원 천안의 도동서원에 배향되었다.

 

김대유(金大有);

1479(성종10)1551(명종6). 김일손의 조카다. 자는天佑, 호는 三足堂, 提學金駿孫의 아들. 무오사화로 숙부 일손이 사형을 당할 때 아버지와 함께 호남에 유배되었다가 1506년(중종1) 풀려났다. 1519년(중종14) 賢良科에 급제하여 호조좌랑·칠원현감등을 역임했다. 기묘사화가 일어나 현량과가 罷榜되자 사임하고 청도의 산속으로 들어갔다. 청도의 紫溪書院에 祭享 되었다.. 저서:탁영연보

 

김유신(金庾信)또는 유신(有信);

 김극금(金克儉)의 손자다. 鄭希良의 文人. 胎夢때 흥무대왕이 一童子를 보내어 같은 이름으로 지었고 후손들이 김유신이라 부른다. 자는興老, 호는洛園. 1510(중종5)에 進士를하고 1516년(중종11)에 문과 장원에 오르다. 예문관 검열, 홍문관 수찬, 교리에 올랐으나 자문점마(咨文點馬;외국에 왕래하는 사신을 점검하는 의무)로서 평안도 郭山에 이르렀다가 동헌에서 대낮에 도깨비에게 가위눌려 까무라쳤다. 마치 거문고 줄과 같은 끈이 그의 배를 동여매는 것 같았다. 옆 사람들이 칼로 그 실끈을 배면 끊어졌다가 도로 이어져서 어찌할 도리가 없었는데 , 홀연히 밖에서 어떤 서생이 들어오자 도깨비는 공중에서 여자의 소리를 내면서 "鄭翰林은 그대의 일에 무슨 관계가 있기에 내가 누대의 원수를 갚으려 하는데 장난질인가"하였다. 서생은 郡守에게 청하여 대나무 통과 朱砂를 약간얻어, 종이 두장을 잘라서 그 위에 부적을 그려 하나는 대나무 통 바닥에 하나는 대나무 통 위에 얹어서 공중에 날려 보내니, 여자의 울부짖는 소리가 은은히 대나무 통속에서 나는데 처음에는 가까이서 들리다가 차츰 사라져가고 有信은 즉시 끼어났다. 서생은 말하기를 "지금은 비록 살았지만 오던 길로 다시 가서는 안된다."하며 가짜 널을 만들어 '金有信의 널'이라 쓰게 하고 큰길을 따라 가게 하였다. 또 有信은 변복을 시켜 황해도 수안 산골짝 길을 경유하여 서울로 돌아오게 하였다. 그 뒤 有信은 살긴 하여도 마치 넋을 잃은 사람 같다가 3년 만에 죽었다. 그 뒤 서생은 행방을 알 수 없다. 세상 사람들이 전하기를 서생은 鄭希良이고 有信은 新羅金庾信의 황생자이며 그 여자는 高句麗의 國母인 柳花夫人이라 불렀다. 그 후 김유신의 후손 또한 곤궁하였다고 한다. 과연 그 후 얼마가지 않아 宣祖 壬辰倭亂을 당하여 후손들은 고향을 떠나 유리 산재 하였다.

 

김련광(金鍊光);

1524(명종19)1624(인조2)版圖判書公 金添劒의 8대손이다.자는彦精 호는松巖 1555(명종10)문과에 급제하여 여려직을 거쳐 창평군수가 되고 淮陽府使로 있을떼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군인과 관리들은 모두 도망갔지만 공은 성문앞에 정좌하여 적에게 참살당했다. 지식이 해박하여 詩文에능했으며 후일에 禮曺參判에 추증되고 開城의 崇節祀에 배향하고 있다

 

김경서(金景瑞)

1564(명종19-1624인조2)초명은 應瑞, 자는聖甫, 무과에 급제, 1588년(선조21) 감찰이 되었으나 집안이 미천한 탓으로 파직되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다시 기용되어 평양 방위전에서 守灘將으로 大洞江을 건너는 적병을 막은 공으로 평안도 防禦使가 되었다. 이듬해 7,700의 병력으로 李如松의 明軍과 함께 平壤城을 탈환, 1594년(선조27) 경상도 방어사에 전직되었다. 이해 남한 일대에 도적이 횡행하자 都元帥 權慄의 명으로 이를소탕, 그 공으로 이듬해 경상도 兵馬節度使에 승진되었으며, 1618년(광해군10) 평안도 병마절도사가 되었다. 이때 建州衛의 後金을 치기 위해 명나라의 援兵要請이 있자 평안도 병마절도사로 副元帥가 되어 元帥姜弘立과 함께 출전했다. 이듬해 深河地方에서 전공을 세웠으나 富車에서 패전한 뒤 姜弘立이 아군을 이끌고 금나라 군대에 항복하여 함께 포로가 되었다가 몰래 敵情을 記錄하여 본국에 보내려 했으나 姜弘立의 고발에 의해 사형되었다. 우의정에 추증대고 시호는 襄毅公이다.

 

김완(金完);

1577(선조10)1635(인조13). 中祖 金鍊의 6대손이다. 자는子具. 무과에 급제하여 경상방어사의 막하로 있다가 남원에서 전공을 세웠다. 1615년(광해군 7) 觀武才試에 급제하고, 1624년(인조2) 昌城防禦使로 있을때 李适의 난을 만나 元帥張晩의 선봉장으로 안현에서 반군을 격파, 振武功臣으로 鶴城君에 피봉되고 황해병사를 지냈다. 시호는 襄武公이다. 이때부터 김해김씨 四君派門中(전남 영암군 서호면 몽해리)이 크게 일어났다.

 

김덕승(金德承);

1595(선조28)1658(효종9)자는可久,호는少전·巢睫·義禁府都事 盡善의 아들. 1617년(광해군 9) 문과어ㅔ 급제하여 승문원 부정자로 등용되었다. 經史와 韻書를 깊이 연구하여 중국어에도 능통했으며, 漢學敎授를 겸하였다. 禮曹正郞·相禮등을 거쳐서 司僕寺正이 되었다. 서화에도 솜씨가 뛰어났다.

 

김예직(金禮直);

자는文伯, 임진왜란 때 白衣從軍으로 왕을 의주까지 호송하였다. 무과에 급제하여 포도대장·통제사를 역임하였다. 1618년(광해군10)에 光海君이 仁穆大妃를 폐위하려고 하자 이를 극간하다가 파직되었다. 仁祖反正후에 임금께 죄를 청하였으나 仁祖는 禮直을 매우 가상히여겨 오히려 상을 내렸다. 시호는 毅憲公이다.

 

김우항(金宇杭);

1649(인조27)1723(경종3). 金德承의 손자다. 자는濟仲, 호는甲峰. 1682년(숙종7) 문과에 급제, 1689(숙종15) 기사환국 뒤 관계를 떠났다. 그 후 1694년(숙종 20) 폐비 민씨가 復位하자 주로 侍講院에서 司書를 보다가 전라도 관찰사를 지내고, 1713년(숙종39) 右議政을 역임, 1722년(경종2) 金一鏡의 私親追尊論에 반대하다가 辛壬士禍 때 화를 입었다. 시호는 忠靖公이다.

金華重;자는士雄, 호는眉泉. 1687(숙종7) 문과에 오르고 현감을 거쳤다. 수는88세로 세칭 김해김씨 미우리 문중(예천군 보문면 미호리)을 크게 일으켰다.

 

김홍도(金弘道);

1745(영조21)? 자는士能, 호는檀園·西湖. 戶曹參判 姜世晃의 천거로 도화서 화원이 된 후 王世孫의 肖像畵를 그렸고, 1781(정조5) 御眞畵師로 正祖를 그렸다. 1795년(정조19) 新昌縣監이 되었다가 곧 사임하고 이듬해 왕명으로 용주사의 <父母恩重經>삽화로 판화를 그렸다. 풍속화에 있어서는 諧謔·풍자를 조화하여 서민적인 풍취를 그렸고, 당시의 화단에 고착된 무력한 중국 北畵樣式을 탈피, 대담하게 南畵樣式을 시도하여 신선핱 조형미를 완성하였다. 作品으로는:雙雉圖·群仙圖·神仙圖屛風 등

 

김양기(金良驥);

자는千里, 호는肯園, 金弘道의 아들. 아버지의 재질을 닮아 山水畵 屋木을 잘그렸다. 作品:月前吹笙圖·古木疎林圖

 

김제준(金濟俊);

1786(정조10)1839(헌종5).자는信明, 敎名은 아그나티우스, 金大建의 아버지. 충남 당진출신.1839년 己亥迫害때 아들을 마카오로 留學보냈다 하여 國事犯으로 체포되어 殉敎했다.

 

김대건(金大建);

1822(순조22)1846(헌종12).우리나라 최초의 神父. 세례명은 앙드레이고, 兒名은 再福이다. 천주교 신자인 아버지는 기해사옥 때 순교하였다. 1836년(헌종2) 프랑스神父 모방에게 영세받고, 예비 신학생으로 뽑혀 충남 내포에서 상경하여 譯官 劉進吉에게 中國語를 배운후, 모방神父의 주선으로 중국으로 귀국하던 劉方濟(中國神父)를 따라 최방지거·최도마와 함께 마카오의 파리 外邦傳敎會에 가서 신학을 비롯한 프랑스어·중국어·리틴어 등을 배우다가 미카오의 민란때문에 마닐라로 피란하여 매스트르 神父문하에서 신학과 철학을 연구했다. 1842년(헌종8) 수업을 끝마치고 6개월간 프랑스 함대제독 세실의 통역을 하다가 기해박해(:1829 헌종 5)이후 천주교도에게 박해가 계속되고 있는 故國에 밀입국하여 의주를 거쳐서 서울로 오다가 감시가 심하여 몽고로 갔다가 재입국을 기도했지만 실패했다. 1845년(헌종 11) 다시 혼자서 국경을 넘어 서울에 잠입하여 위축된 敎勢擴張에 진력하였다. 5개월 후에 프랑스 외방전교회 지원을 받기 위해 쪽배를 타고 상해에 가서 金家港神學校에서 한국인 최초의 神父職을 받고, 萬堂聖堂에서 처음으로 미사를 집례하였다. 1846년(헌종8) 5월에 선교사의 입국과 주청 선교부와의 통신연락에 필요한 비밀항로를 개척하기 위해 登山地方을 답사하다가 체포되어 6회에 걸친 혹독한 고문 후 선교사와 심부들 ·교우에게 보내는 유서를 쓰고 25세로 노량신 새남터에서 사형을 당해 殉敎하였다. 1857년(철종 8) 敎皇廳에서 可可者로 선포되고, 1925년 교황청에서 다시 諡福式이 거행, 韓國 全聖職團 大主保로 정해지고, 교황 비오 11세에 의해 福者位에 올랐다.

출처 : 사단법인 국제휘초타검도연맹
글쓴이 : 휘초타 김형석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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