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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오토 1세 - 신성로마제국을 이룩한 황제

오늘행복스마일 2018. 12. 27. 15:15

오토 1세

신성(神聖)로마제국은 10세기 말부터 19세기 초까지 844년 동안 유지된 제국이다. 그러나 황제권이 제국 전역에 속속들이 미치는 명실상부한 황제국가는 아니었다. 그 이름을 통해 로마제국을 계승한 기독교 제국을 표방했지만 실제로는 상징적 이름에 불과했다. 그러나 중세에서 근대에 이르기까지 유럽 역사에서 하나의 유력한 세력으로 자리 잡았던 신성로마제국을 이룩한 오토 1세는 비전(vision)과 능력에서 분명 탁월한 군주였다.

 

 

공국(公國)과 형제의 계속되는 반란을 진압하여 안정의 기틀을 놓다

오토 1세는 작센 공 하인리히 1세와 링겔하임의 마틸다 사이에서 태어났다. 초년의 생애는 자세히 알려져 있지 않으나 부왕(父王)을 따라 종군했던 것으로 보이며 아헨에서 936년 즉위했다. 오토 1세는 부왕과 달리 공국들에 대한 지배권을 확실히 하고자 한 탓에 즉위 초부터 공국들이 반발했다. 이복형 탕크마르와 바바리아공 에베르하르트가 작센의 많은 귀족들과 함께 반란을 일으켰지만, 오토 1세는 938년 두 차례의 전쟁을 통해 반란을 진압했다. 추방당한 에베르하르트는 오토 1세의 동생 하인리히와 함께 939년 다시 반란을 꾀했다. 프랑스왕 루이 4세에게 충성을 서약한 로렌공(公) 질베르도 합세했고 루이 4세도 반란을 지원했다. 오토 1세는 일진일퇴의 공방 끝에 루이 4세의 주력군을 물리쳤고, 오토 1세를 따르는 콘라트 쿠르츠볼트 공이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941년 오토 1세와 하인리히는 어머니의 중재로 화해했으며, 이듬 해 오토 1세는 루이 4세로부터 로렌 지방의 종주권을 인정받고 프랑스에서 병력을 철수했다.


 

하인리히는 나중에 다시 한 번 형을 암살할 음모를 꾸몄지만, 오토 1세는 동생을 용서해주었다. 반란을 막기 위해 오토 1세는 가까운 친척들을 중요한 공국의 지배자로 임명했고, 충성을 서약한 동생 하인리히를 바바리아공으로 삼았으며, 혼인 정책을 통해 주요 공국들을 안정시켰다. 전란의 와중에도 938년 작센의 람멜스부르크에서 대규모 광맥이 발견되었다. 오토 1세는 광산에서 나온 은, 구리, 납 등의 광물을 재정 기반으로 삼을 수 있었고, 이후 수백 년 동안 람멜스부르크 광산은 유럽의 주요 광물 자원 공급지 역할을 했다. 오늘날 이 광산 구역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돼 있다.

 

 

신성로마제국의 탄생, 오토 1세 황제가 되다

 


반란을 진압하고 프랑스 지역에서까지 위세를 떨친 오토 1세는 이제 슈바벤, 바이에른, 부르고뉴, 롬바르디아 등 남부 지역으로 세력을 확장하기 시작하여 937년 부르고뉴를 점령하고 951년에는 이탈리아의 롬바르디아를 차지했다. 그러나 아들 리우돌프가 반란을 일으켰다. 오토 1세와 잉글랜드 공주 사이에서 태어난 리우돌프는 부왕이 부르고뉴 출신 아델하이트와 재혼하자 상속권의 위협을 느꼈던 것이다.

 

오토 1세는 955년 반란을 진압하고 사실상 리우돌프가 끌어들인 마자르족 세력도 레히펠트 전투에서 물리쳤다(리우돌프는 항복하여 아버지의 용서를 받았다). 오토 1세는 960년 엘베강 중류와 오데르강 중류 사이의 지역에 거주하던 슬라브족까지 복속시켰다.

 

오토 1세는 다시 이탈리아에 주력할 수 있게 되었다. 이탈리아에서는 베렝가리오 2세가 교황 요한 12세와 대립하고 있었다. 급기야 베렝가리오 2세가 교황을 공격하자 교황은 오토 1세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오토 1세는 교황의 요청에 응해 로마로 진군하여 베렝가리오 2세를 물리치고 사실상 이탈리아를 장악했다. 그리고 962년 교황으로부터 황제의 관을 받아 제위에 올랐다. 신성로마제국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교황 요한 12세는 오토 1세에게 받은 특권을 남용했다. 오토 1세는 쫓겨난 베렝가리오 2세와 내통하려 한다는 혐의로 963년 요한 12세를 폐위시켰다. 이로써 요한 12세는 황제가 폐위시킨 최초의 교황이 되었다.

 

  

교회의 권위를 장악해 통치권을 강화시키다

오토 1세의 중요한 통치 전략은 자신이 임명한 주교와 수도원장 등을 통해 교회권을 장악하고, 교회의 권위(사실상 자신의 권위)와 조직을 통해 세속 귀족들을 약화시키는 것이었다. 오토 1세는 교회권을 장악하기 위해 교회와 수도원의 재산권을 제한시켰다. 군주의 특허장이 없으면 교회와 수도원이 건물을 지을 수 없게 했고, 교회 재산 관리인을 별도로 임명하여 교회 토지에서 나온 농산물과 그 밖의 수입을 관리하게 했다. 이러한 일련의 정책을 통해 오토 1세는 독일 교회의 상층부를 사실상 제국의 관료기구처럼 부릴 수 있었다. 그러나 오토 1세 자신처럼 강력한 군주라면 또 모를까, 그렇지 못한 많은 후계 군주들은 이러한 전략을 효과적으로 펼치기 힘들었다.

 

오토 1세가 교회권을 모조리 자신의 것으로 만들려 한 것은 아니었다. 오토 1세의 군사력의 주요 기반은 공국들 가운데 가장 강력했던 작센의 군대와 함께, 주교들이 보내주는 병력이었다. 당시 주교들은 사실상 독립적인 공국에 가까운 영지(領地)를 차지하고 그 안에서 세속 통치권까지 행사했다. 주교들은 오토 1세가 요구할 때마다 병력을 보냈고, 오토 1세는 새로 정복한 부르고뉴 지방을 운영할 권리를 주교들에게 맡기는 등 주교와 교회의 협력에 보답했다. 오토 1세의 이런 정책에 따라, 독일 지역에서는 왕권과 교회권의 연대와 협력이 그 어느 지역보다 강하게 되었지만, 이후 교황권이 강화되면서 세속 군주와 교회의 대립 양상이 점차 커져갔다.

 

 

제국 그러나 제국이 아닌


962년 오토 1세가 황제로 즉위한 뒤 프란츠 2세가 제위에서 물러난 1806년까지 844년 동안 신성로마제국이 유지되었다. 고대 로마 제국의 계승 측면을 부각시키기 위해 ‘로마’라는 이름을 붙였고, 기독교회와의 일체성을 나타내기 위해 신성(神聖)이라는 수식어를 붙였으며, 황제 국가라는 정체성을 표방한 셈이다. 그러나 오토 1세 시대부터 신성로마제국이라는 명칭이 사용된 것은 아니었다. 11세기경에는 로마 제국, 12세기경부터 신성 제국, 그리고 13세기 이후부터 신성로마제국이라는 명칭이 쓰였다. 16세기 이후에는 ‘독일 민족의 신성로마제국’(Heiliges Römisches Reich Deutscher Nation)이라는 이름도 쓰였다.

 

 

신성로마제국이라는 이름은 현실이기보다는 이념이자 상징에 가까웠다. 어떤 의미에서는 지도 속에만 존재하는 기묘한(?) 제국이었다. 그 전성기 판도는 오늘날의 독일 전역, 오스트리아, 체코, 벨기에, 슬로베니아, 룩셈부르크, 리히텐슈타인, 스위스, 네덜란드의 일부, 프랑스의 일부, 이탈리아 북부에 이르는 드넓은 영역에 걸쳐 있었지만, 한 번도 내부적으로나 대외적으로 단일한 주권과 통치권을 행사한 적이 없었다. 사실상 독립적인 수많은 공국과 왕국의 느슨한 연방체에 가까웠던 것이다.

 

 

오토 시대의 르네상스


요한 12세를 몰아내고 오토 1세가 즉위시킨 레오 8세가 965년 세상을 떠났다. 이에 오토 1세는 요한 13세를 교황으로 즉위시켰지만 로마인들은 요한 13세를 쫓아냈다. 오토 1세는 다시 이탈리아로 진격해 로마는 물론 남부의 비잔티움 제국 영역까지 진출했고, 비잔티움 제국과 협상하여 972년 자신의 아들 오토 2세와 비잔티움의 공주를 결혼시켰다. 서방의 새로운 로마 제국과 동방의 로마 제국 사이에 이루어진 정략혼인이었다. 이듬해 오토 1세는 세상을 떠났다.

 

오토 1세 치세의 신성로마제국은 오늘날 독일 지역을 중심으로 한 유럽의 중동부 지역에 안정을 가져왔고 이후 유럽에서 하나의 유력한 세력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오토 1세와 그 후계자들이 이룩한 정치적 안정 속에서 문예 부흥의 기운도 일어났다. 오토 1세가 세우거나 재건한 수도원 학교를 중심으로 라틴어에 기반을 둔 기독교적 문화가 비교적 흥성했고, 채식(彩飾) 사본 제작이나 전례서(典禮書) 편찬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라틴어 운율에 따른 우화나 기독교적 요소와 세속적 요소가 혼합된 라틴어 문학도 등장했고, 비잔티움 제국과의 교류에 영향 받은 새로운 건축과 예술도 싹텄다. 이러한 전반적인 기풍을 가리켜 오토 르네상스 또는 오토 왕조의 르네상스(Ottonian Renaissance)라 일컫기도 한다.

주제로 인물 엮어보기짧은 문예부흥기를 이끈 군주

오토 1세 오토 1세
신성로마제국을 이룩한 황제
샤를마뉴 샤를마뉴
(742~814) 프랑크 국왕으로 문화를 장려하여 카롤링거 르네상스를 이끌었다.
프랑수아 1세 프랑수아 1세
(1494~1547) 프랑스 국왕으로 고전 고대의 학예에 심취하여 인문주의 발전에 힘썼다.
프리드리히 1세 프리드리히 1세
(1657~1713) 초대 프로이센 국왕으로 학예를 애호하고 과학아카데미를 창설했다.
정조(正祖) 정조(正祖)
(1752~1800) 조선 제22대 국왕으로 규장각을 중심으로 문예부흥을 이끌었다.

 

 

 

표정훈 / 저술가, 번역가
글쓴이 표정훈씨는 서강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한 뒤 번역, 저술, 칼럼과 서평 집필을 하고 있다. 이를 위해 2만 권의 장서를 갖춘 서가를 검색하는 데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낸다. 한국 예술종합학교에서 강의했으며 [중국의 자유 전통], [한 권으로 읽는 브리태니커] 등 여러 권의 책을 번역하고 [탐서주의자의 책], [책은 나름의 운명을 지닌다] 등 여러 권의 책을 썼다.

 

 

 

인물사 연표

유럽, 아메리카 아시아, 아프리카 한국

654년

김춘추 태종무열왕 즉위

660년

김유신 백제 사비성 함락

660년

의자왕 백제 멸망

661년

원효/의상 당나라 유학

663년

흑치상지 당나라의 장수가 됨

676년

문무왕 신라 삼국통일

690년

측천무후 최초 여황제 즉위

698년

대조영 발해 건국

756년

양귀비 안사의 난

727년

혜초 [왕오천축국전] 저술

800년

샤를마뉴 서로마 황제의 부활

828년

장보고 청해진 설치

894년

최치원 진성여왕에게 시무 10조 올림

900년

견훤 후백제 건국

901년

궁예 후고구려 건국

918년

왕건 고려 건국

962년

오토 1세 신성로마제국 수립

979년

송태조 조광윤 송나라 중국 통일

958년

광종 과거제도 시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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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최철상의 역사교실
글쓴이 : 미스터빈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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