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종황제의 가계도
고종광무태황제 [1852~1919] <흥선대원군의 적2남>
초휘 재황. 아명(兒名) 명복. 초자 명부 자 성림. 호 주연. 영조의 현손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둘째 아들. 비)는 여성부원군 치록의 딸 민씨 .
1863년(철종 14) 12월 철종이 후사 없이 승하하자 조대비의 전교로 12세에 즉위하였다.
새 왕의 나이가 어리므로 예에 따라 조대비가 수렴청정하였으나, 대정을 협찬하게 한다는 명분으로 정권은 대원군에게 넘어가 이로부터 대원군의 10년 집정시대가 열렸다. 순종황제로부터 태황제(太皇帝)의 칭호를 받고 덕수궁에서 만년을 보내다가 1919년 1월 21일 일본인에게 독살된 것으로 전해진다. 고종의 재위 44년은 민족의 격동기로서 실질적으로 국운(國運)과 명운을 함께 하여, 양위 3년 후에는 나라를 빼앗기는 비운을 맞았다. 능은 금곡(金谷)의 홍릉(洪陵)이고, 저서에 《주연집(珠淵集)》이 있다.
명성황후민씨(明成皇后) [1851 ∼ 1895] 이름은 자영. 여흥 민씨 여성부원군(驪城府院君) 민치록(閔致祿)의 딸이고, 어머니는 한산 이씨 규년의 딸이다. 1851년 9월 25일 경기도 여주 근동면 섬락리의 사저에서 태어났다. 여덟살의 어린 나이에 부모를 여의고 혈혈단신으로 자랐다. 흥선대원군의 부인이자 고종의 어머니인 여흥부대부인 민씨의 천거로 왕비로 간택되어 1866년(고종 3) 한 살 아래인 고종의 비로 입궁하였다. 소녀시절부터 집안일을 돌보는 틈틈이 《춘추(春秋)》를 읽을 정도로 총명했으며, 수완이 능란한 명성황후는 수년 후부터 곧 왕실정치에 관여하여 흥선대원군의 희망과는 달리 일생을 두고 시아버지와 며느리 간의 정치적 대립으로 각기 불행을 겪어야만 했다. 대원군의 실각 후, 명성황후는 척족을 앞세워 정권을 장악하고 고종을 움직여 근대일본과 강화도조약을 맺고 일련의 개화시책을 승인했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으로 조선의 정국이 얽혔을 때 조선에 적극적인 침략공세를 펴게 된 일본은 갑오경장에 간여하면서 흥선대원군을 내세워 명성황후 세력을 거세하려고 공작하였다. 명성황후는 일본의 야심을 간파하고 일본이 미는 개화세력에 대항하였다. 소생으로는 4남 1녀를 낳았으나 모두 일찍 죽고 순종만이 장성하였다.
` 순헌황귀비 엄씨(純獻黃貴妃)[1854 ~ 1911] 1861년 궁인으로 입궐하여 명성왕후전에서 임금을 모시고 호위하는 상궁인 시위상궁(侍衛尙宮)이 되었다. 고종이 아관파천을 하였을 때 고종을 모셔 후궁이 되었고, 1897년 9월에 왕자(영친왕 은)를 낳자, 바로 그날로 선당의 당호를 받았고 귀인에 책봉되었다. 1901년(광무 5)에는 비(妃)에 진봉되고, 1903년(광무 7)에는황비(皇妃)에 책봉되었다. 귀비 엄씨는 신교육에 관심이 많아 1905년(광무 9)에는 양정의숙(養正義塾)을, 1906년(광무 10)에는 진명여학교(進明女學校)를 설립하였으며, 명신여학교(明新女學校, 현 숙명여자중˙고등학교)의 설립에도 거액을 기부하는 등 근대교육 발전에 크게 공헌하였다. 한편 귀비 엄씨는 1900년(광무 5) 꿈에 나타나 집을 지어달라고 간청한 7구의 석불(보물 제985호 청주 용화사 석불상)을 위하여 1902년에 용화사를 세웠다고도 전하여진다. 1911년 7월 20일 사망하였고, 순헌(純獻)이라 시호(諡號)를 올리고, 8월에 양주 천수산(天秀山)에 무덤을 만들고, 원호(園號)는 영휘라 하였다. 위패는 서울시 종로구 궁정동에 있는 칠궁(七宮, 德安宮)에 봉안되어 있다. 소생으로는 황태자(영왕) 은이 있다.
` 영보당 귀인 이씨(永保堂) 이름은 순아. 궁인으로 입궐하였다가 상궁으로 있을 때 고종의 아들(완화군 선)을 낳아 숙원에 책봉되었으며 후에 귀인에 책봉되었다. 고종보다 연상이었으며 아들 완화군이 죽자 정신 이상을 일으켰고, 실어증에 걸려 말을 못하고 평생 외롭게 살다가 사망했다.
` 귀인 장씨 덕수 장씨. 궁인으로 입궐하였다가 상궁의 지위에 올라 명성황후 민씨의 시종 노릇을 하다 고종의 후궁이 되었다. 명성황후는 자신의 궁녀인 장씨가 고종의 아들을 낳은 것을 알고, 궁밖으로 내쫓았다. 처음에는 숙원에 봉해졌다가 후에 귀인에 책봉되었다. 소생으로는 의왕(의화군) 강이 있다.
충주 양씨 언환의 딸. 1893년 궁인으로 입궐하였다가 덕혜옹주를 낳고 귀인에 봉해졌다.
고종의 가장 어린 후궁으로 총애를 입었으나, 후사를 얻지 못하여 후궁의 첩지는 받지 못했다. 고종이 죽자 궁에서 나와 같은 처소 선배였던 광화당 이씨와 함께 살다가 사망했다.
` 정화당 상궁 김씨 안동 김씨. 명성황후를 시해한 일본은 고종황제에게 속히 왕후를 맞아 들일 것을 요구했고, 친일파들이 나서서 안동 김씨 가문의 처녀를 간택했다. 그러던 중 아관파천이 있게 되고 조정내 친일파들이 색출되어 처형되고, 일본의 영향력은 다소 누그러졌다. 그리하여 왕후로 간택되어 입궁만 기다리던 김씨는 상황이 급변하자, 왕의 거부로 입궁을 거부당했다. 조선병합 이후 일본은 종종 김씨의 입궁을 강요해 고종을 난감하게 했다. 그러던 중 순종의 비인 순정효황후 윤씨의 숙부 윤덕영이 고종에게 일본으로 가 천황에게 인사를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고종은 윤덕영의 협박에 후계자인 황태자 척을 일본으로 보내기로 하고, 대신 마흔이 넘도록 아직 시집도 가지 못하고 있던 김씨를 입궐하도록 했다. 고종이 죽은 뒤 정화당이라는 당호를 받고 일제로부터 나오는 연금을 받으며 살다 죽었다. 소생은 없다.
` 상궁 서씨 소생은 없다.
이름은 충연. 소생은 없다.
<적장남> 왕자[1871 ~ 1871] - 명성황후 민씨 소생 생후 4일만에 쇄항증으로 사망.
<적2남> 순종 - 명성황후 민씨 소생
<적3남> 왕자 [1875 ~ 1875] - 명성황후 민씨 소생 생후 14일만에 사망.
<적4남> 왕자[1878 ~ 1878] - 명성황후 민씨 소생 생후 105일만에 사망.
<적장녀> 왕녀[1873 ~ 1873] - 명성황후 민씨 소생 생후 222일만에 사망.
<서장남> 완친왕 선(完親王 土善)[1868 ~ 1880] - 영보당 귀인 이씨 소생 1876년 8월 완화군(完和君)에 책봉되었으나, 명성황후 민씨의 견제로 궁궐에서 살지 못하고 사저에 나가 살았다. 고종은 완화군을 불쌍히 여겨 끊임없이 돈과 쌀을 보내 보살폈지만, 1880년 홍역으로 어린 나이에 사망했다. 흥선대원군은 명성황후가 고종과 가례를 올린지 얼마 되지도 않은 시점에 태어난 완친왕을 세자로 세우려 하였다. 그런 흥선대원군을 명성황후는 원망했고, 여기서부터 명성황후와 흥선대원군의 대립구조가 형성되었다. 완친왕은 고종이 황제가 된 뒤에 완친왕에 추존되었다.
<서2남> 의친왕 강(義親王堈)[1877 ~ 1955] - 귀인 장씨 소생 호는 오산(吾山). 1877년 3월 30일 북부 순화방 사재감(北部 順化方 司宰監) 상패게 자하동에 있는 숙의 범씨(철종의 후궁, 영혜옹주의 생모)의 궁에서 태어났다. 하지만 명성황후는 왕세자(순종) 다음에 낳은 대군들이 모두 유아시절에 죽고, 왕세자 역시 몸이 허약해 후사가 걱정되자 1891년(고종 28) 강을 의화군(義和君)으로 봉하고, 1893년 10월 29일 연안 김씨 사준(金思濬)의 딸과 가례를 올리게 했다. 1894년 내의원과 사옹원 제조로 임명되었고, 9월에는 보빙대사(報聘大使) 자격으로 일본에 파견되었다. 1895년 8월 25일에는 특파대사의 자격으로 영국 · 프랑스 · 독일 · 이탈리아 · 오스트리아 등 유럽 각국을 순방하고 귀국하였다. 1899년에는 미국으로 유학을 갔고 버지니아주 로아노크대학교에서 공부를 하였다. 1973년 영친왕비 마사코(방자方子)가 의왕 묘소 이장 허가를 정부에 요청, 당시 문화재 관리국에서 장례비 일체와 이장허가를 받았으나 여건이 여의치 않아 이장을 못하고 있던 중 미국에서 생활해 온 의친왕의 5녀인 해경여사가 형제들과 함께 종약원의 협조로 1996년 11월 29일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 홍유릉 부속림에 의친왕비와 합장하였다. 부인 의친왕비는 연안 김씨 사준의 딸로 이름은 수덕이다. 김씨 소생은 없으며 다른 부인 13명 중 당호가 내려진 6명의 부인들에게서 13남 9녀를 얻었다.
<서3남> 의민황태자 영친왕 은(懿愍皇太子 英親王垠)[1897 ~ 1970] - 귀비 엄씨 소생 1900년 8월, 형 의친왕과 함께 영친왕에 봉해졌고 1907년에 황태자에 책봉되었으나 12월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통감에 의하여 유학이라는 명목으로 일본에 인질로 잡혀갔다. 1910년 국권이 상실되자 순종이 폐위되어 이왕(李王)이 되니, 황태자였던 영친왕 역시 단순히 왕세제로 격하되었다. 1920년 4월 일본 황실의 내선일체 융합정책에 따라 일본왕족 나시모토(梨本宮)의 맏딸인 마사코(방자方子)와 정략결혼하였다. 부인 영친왕비 마사코(방자方子)와의 사이에서 진(晋)과 구(玖) 두 아들을 두었으나 맏아들 진은 어려서 죽고 둘째 아들 황세손(皇世孫) 구는 현재 종약원의 총재로 추대되어 서울 특별시 종로구 부암동에서 거주하고 있다.
<서4남> 왕자 육(堉)[1914 ~ 1915] - 광화당 귀인 이씨 소생 어린 나이에 일찍 사망.
<서5남> 왕자 우(瑀)[1915 ~ 1916] - 보현당 귀인 정씨 소생 어린 나이에 일찍 사망.
<서장녀> 왕녀 - 내안당 귀인 이씨 소생 일찍 사망.
<서2녀> 왕녀 문용(文鎔)[1900 ~ 1987] - 상궁 염씨 소생 정식 옹주에 책봉되진 못했고, 광복 후 황녀에 봉해졌다. 1900년 12월 3일 태어난 문용은 태어나면서부터 비운의 첫발을 내디게 되었는데, 당시 귀비 엄씨의 질투로 인해 종실인 학부대신 이재곤의 주선으로 경북김천으로 피해 9살까지 숨어 살아야 했고, 10살 때 어머니 상궁 염씨와 가까이 지내던 상궁 임씨가 서울로 데려와 창경궁 앞 원남동의 한 여염집에서 살면서 궁중예법과 법도를 배우게 됨으로써 자신의 신분을 알게 되었다. 그후 진명여고에 진학하여 신학문을 배우고, 1916년 우국지사 김한국의 아들과 결혼과 결혼하였으나, 남편은 일본유학 중 사별하고 돌박이 아들마져 잃게 되었다. 정식으로 옹주에 책봉된 적은 없고, 광복 후 황녀에 봉해졌다.
1912년 5월 25일에 태어난 덕혜옹주는 1917년 정식으로 황적에 입적하였다. 일제에게 딸을 빼앗기기 싫었던 고종에 의해 1919년 황실의 시종 김황진의 조카 김장한(金章漢)과 약혼하였다. 그러나 1925년 4월 30일 '황족은 일본에서 교육시켜야 한다'는 일제의 요구에 의해 강제로 일본으로 끌려갔다. 이어 일본의 학습원을 마친 뒤, 1930년 봄부터 몽유증 증세가 나타나기 시작하면서 영친왕(환태자 은)의 거처로 옮겨 치료를 받았다. 증세는 조발성치매증으로 진단되었다고 하나 의심스러운 점이 많다. 병세는 이듬해 좋아졌다.
# 문용옹주 : 고종의 수양딸. 황실계보에 오르지 못했으며, 학계 황족모두에게 인정 받지 못하고있습니다.
출처: 우리황실사랑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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