原本/『 3 번 의친왕 홀(hole)』
『한양파인컨트리클럽』 의 코스는 서삼릉의 권역(圈域)과
임계(臨界)하고 있고, 특히 한양파인cc 『 3 번 홀(hole)』 의 좌측 50m 지점에는 의친왕(義親王)의 묘(墓)가 있었고, 귀인
장씨(貴人 張氏,生歿미상)의 묘(墓)도 왼쪽 옆에 있었다.
의친왕(義親王) 이강(李堈,1877-1955)은 범숙의궁(范淑儀宮)에서
태어났고 조선조 고종황제의 아들로서 조선의 제27대 왕 순종(純宗,1874-1926)의 3살 년하의 동생이고 영친왕
이은(李垠,1897-1970)의 20세 년상의 형(兄)이다.
의친왕 이강(李堈)의 친모(親母)는 범숙의(范淑儀)의
시위상궁(侍衛尙宮)으로 있던 중에, 고종(皇帝)의 승은(承恩)을 입어 의친왕을 출산하였고 명성황후(明成皇后,1851~1895)의 미움과 박해로
왕자와 함께 궁궐(宮闕)밖으로 쫓겨나 젊은 나이에 한(恨)을 품고 요절(夭折)한 궁중나인 덕수장씨(德水張氏)이다.
의친왕 자신도
영친왕 이은(李垠)의 생모인 순헌황귀비(純獻皇貴妃) 엄씨(嚴氏,1854-1911)의 견제와 국권피탈(國權被奪,1910)이후에는 인격이나
서열(序列)로 비추어 볼 때 황태자(皇太子)로 책봉될 수 있었지만 조선총독부의 음모로 황태자 책봉의 기회는 물론 공족(公族)의 작위도 박탈
당하고 국내여행의 제한을 받는 등 박해가 많았다.
일제(日帝)는 식민사상을 떠 올리고 민족사관을 말살하기 위하여 조선왕족과
만백성(萬百姓)사이를 이간(離間)하는데 의친왕 이강(李堈)에 대하여 각종 모함과 음해로 여론 동원하고, 시종일관(始終一貫) 의친왕을
폄하(貶下)하며 박해와 탄압을 했다.
의친왕 이강(李堈)은 일본의 게이오의숙(慶應義塾)을 거쳐 1899년 도미(渡美)하여 1901
년 부터는 버지니아 주 세일럼의 로노크 대학교(Roanoke College)에서 수학후에 귀국, 1906 년 적십자사 총재에 취임했다.
경술국치(1910)이후 독립운동에 다방면 관계하고 특히 1919 년에는 민족대표 33 인과 조선민족대동단 명의로 독립선언서를
공포하면서 일제하의 식민지배의 부당과 3.1운동의 진압에서 일본군의 무자비함을 고발하며 민족의식의 고양(高揚)과 평생을 독립운동에
헌신(獻身)했다.
근년(近年)에 이르러 상해임시정부와 함께한 의친왕(義親王,1877-1955)의 독립운동의 자료가 밝혀지고
일제(日帝)로부터 종속(從屬)을 강요받았으나 끝내 거부하고 항일정신(抗日精神)를 굽히지 않음을 재평가되고 있다.
민족사관에 의한
조선인의 기개(氣槪)로 투쟁한 황족 의친왕(義親王)은 가례(嘉禮,1893.12.6)는 안국동별궁이고 사세(辭世,1955.8.16)는
성락원(성북동)이고 1996년까지 한양파인cc 3 번홀의 좌측에 있었음이 코스공사에서 알려지게 되였다.
민족사관(民族史觀)에
의한『민족의 '얼'』 의 고취(鼓吹)는 역사를 올바로 이해하는데 중요할 뿐 아니라 앞으로의 문화 발전에 바탕이 되기 때문에 『3 번홀』을
『도그레그 홀(dogleg hole)』로 건설하고 난이도를 가하여 도전의식(挑戰意識)을 불러오게 하였다. 아울러
클럽은
일제강점기(日帝强占期)때의 항일정신과 민족적 주체 의식을 고취시키고 자주독립의 기반을 마련하려고 헌신한 의친왕을 숭모함과 『민족의 '얼'』이
무엇인지 귀감(龜鑑)으로 삼기 위하여 한양파인cc의『3 번홀』을 『3번 의친왕 홀(hole)』로 호칭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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