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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고종황제의 가계도

오늘행복스마일 2019. 1. 2. 10:34

                 고종황제의 가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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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광무태황제  [1852~1919]

<흥선대원군의 적2남>

 

초휘 재황. 아명(兒名) 명복. 초자 명부 자 성림. 호 주연. 영조의 현손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둘째 아들. 비)는 여성부원군 치록의 딸 민씨 .

 

1863년(철종 14) 12월 철종이 후사 없이 승하하자 조대비의 전교로 12세에 즉위하였다.

 

새 왕의 나이가 어리므로 예에 따라 조대비가 수렴청정하였으나, 대정을 협찬하게 한다는 명분으로 정권은 대원군에게 넘어가 이로부터 대원군의 10년 집정시대가 열렸다. 순종황제로부터 태황제(太皇帝)의 칭호를 받고 덕수궁에서 만년을 보내다가 1919년 1월 21일 일본인에게 독살된 것으로 전해진다. 고종의 재위 44년은 민족의 격동기로서 실질적으로 국운(國運)과 명운을 함께 하여, 양위 3년 후에는 나라를 빼앗기는 비운을 맞았다. 능은 금곡(金谷)의 홍릉(洪陵)이고, 저서에 《주연집(珠淵集)》이 있다.

 

 

 

 

명성황후민씨(明成皇后) [1851 ∼ 1895]

이름은 자영. 여흥 민씨 여성부원군(驪城府院君) 민치록(閔致祿)의 딸이고, 어머니는 한산 이씨 규년의 딸이다. 1851년 9월 25일 경기도 여주 근동면 섬락리의 사저에서 태어났다.

여덟살의 어린 나이에 부모를 여의고 혈혈단신으로 자랐다. 흥선대원군의 부인이자 고종의 어머니인 여흥부대부인 민씨의 천거로 왕비로 간택되어 1866년(고종 3) 한 살 아래인 고종의 비로 입궁하였다.
명성황후가 왕비로 간택된 것은 외척에 의하여 국정이 농단된 3대(순조·헌종·철종) 60여 년간의 세도정치의 폐단에 비추어 외척이 적은 여흥부대부인 민씨의 집안에서 왕비를 들여 왕실과 정권의 안정을 도모한 흥선대원군의 배려에 의해서였다.

소녀시절부터 집안일을 돌보는 틈틈이 《춘추(春秋)》를 읽을 정도로 총명했으며, 수완이 능란한 명성황후는 수년 후부터 곧 왕실정치에 관여하여 흥선대원군의 희망과는 달리 일생을 두고 시아버지와 며느리 간의 정치적 대립으로 각기 불행을 겪어야만 했다.
명성황후와 흥선대원군 사이가 갈라진 것은 궁녀 이씨(영보당 귀인 이씨)의 몸에서 태어난 왕자 완화군(完和君)에 대한 흥선대원군의 편애와 세자책립 공작 때문이라 하나, 그 배후에는 명성황후를 중심으로 한 노론(老論)의 세력과 새로 들어온 남인(南人)과 일부 북인(北人)을 중심으로 한 세력간의 정치적 갈등이 작용했다.
명성황후는 갖은 방법으로 흥선대원군을 정계에서 물러나도록 공작하여 마침내 흥선대원군의 정적인 조성하(趙成夏)를 중심으로 한 신정왕후 조씨(조대비)세력, 조두순(趙斗淳)·이유원(李裕元) 등 노대신 세력, 김병국(金炳國)을 중심으로 한 안동김씨 세력, 대원군의 장자 재면(載冕)과 형 이최응(李最應) 세력 및 최익현(崔益鉉) 등 유림세력과 결탁하고, 최익현의 대원군 규탄 상소를 계기로 흥선대원군을 하야하게끔 하여 양주(楊州) 곧은골(直谷: 직곡)에 은퇴시켰다.

대원군의 실각 후, 명성황후는 척족을 앞세워 정권을 장악하고 고종을 움직여 근대일본과 강화도조약을 맺고 일련의 개화시책을 승인했다.
1882년 민씨 정부의 정책에 불평을 품어온 위정척사파와 흥선대원군 세력이 봉량미(俸糧米) 문제로 폭동을 일으킨 구군인(舊軍人)의 세력을 업고 쿠데타를 감행하자, 명성황후는 재빨리 궁중을 탈출하여 충주목(忠州牧) 민응식(閔應植)의 집에 피신하였다.
이곳에서 비밀리에 고종과 연락하는 한편, 청국에 군사적 개입을 요청하여 청국군을 출동하게 하고 일시 정권을 장악했던 흥선대원군을 청국으로 납치하게 하였으며, 다시 민씨세력이 집권하도록 암약하였다. 그러나 이때부터 명성황후는 친청사대(親淸事大)로 흐르게 되어 개화파(開化派)의 불만을 사게 되었다.
1884년 급진개화파의 갑신정변이 일어나 잠시 개화당 정부에 정권을 빼앗겼으나 곧 청국세력의 도움으로 다시 정권을 장악하였다. 이때부터 명성황후는 왕궁에서 외교적 국면에 매우 민첩하게 대응하며 정치적 수완을 발휘하였다.
1885년에 거문도사건(巨文島事件)이 일어나자 묄렌도르프(Mo"llendorf, P. G.)를 일본에 파견하여 영국과 사태수습을 협상하면서 한편으로는 러시아와도 접촉하게 하였고, 또한 청국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흥선대원군의 환국을 묵인하면서 유연성 있는 접촉을 유지하였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으로 조선의 정국이 얽혔을 때 조선에 적극적인 침략공세를 펴게 된 일본은 갑오경장에 간여하면서 흥선대원군을 내세워 명성황후 세력을 거세하려고 공작하였다. 명성황후는 일본의 야심을 간파하고 일본이 미는 개화세력에 대항하였다.
그러나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고 한반도에 진주한 군사력을 배경으로 조선 정계에 적극 압력을 가하게 되자, 사세가 불리해진 명성황후는 친러정책을 내세워 노골적으로 일본 세력에 대항하였다. 삼국간섭(三國干涉)으로 일본의 대륙침략의 기세가 꺾이게 되자, 조선 정계의 친러 경향은 더욱 굳어졌다.
이에 일본공사 미우라(三浦梧樓)는 일본의 한반도침략정책에 정면 대결하는 명성황후와 그 척족 및 친러 세력을 일소하고자 일부 친일정객과 짜고, 1895년 8월에 일본군대와 정치낭인(政治浪人)들이 흥선대원군을 내세워 왕궁을 습격하고 명성황후를 시해한 뒤 정권을 탈취하는 을미사변의 만행을 저질렀다. 이때 명성황후는 나이 45세로 일본인의 손에 살해되고 시체가 불살라지는 불행한 최후를 마쳤다.
이때의 정부는 친일정책을 펴 폐비조칙(廢妃詔勅)을 내렸다. 10월 10일 복위되어 태원전(泰元殿)에 빈전을 설치하고 숭릉(崇陵) 우강에 능호를 숙릉(肅陵)이라 하여 국장을 준비하였다.
그후 1897년 명성황후(明成皇后)로 추책되고 난 뒤 11월 양주 천장산(天藏山) 아래 국장되어 홍릉(洪陵)이라 하였다. 1919년 고종이 죽자 2월 미금시 현재의 위치로 이장되었다.

소생으로는 4남 1녀를 낳았으나 모두 일찍 죽고 순종만이 장성하였다.

 

 

 

` 순헌황귀비 엄씨(純獻黃貴妃)[1854 ~ 1911]
한미한 선비인 영월 엄씨 엄진삼(嚴鎭三)의 딸로, 1854년 6월 6일에 태어났다.

1861년 궁인으로 입궐하여 명성왕후전에서 임금을 모시고 호위하는 상궁인 시위상궁(侍衛尙宮)이 되었다.

고종이 아관파천을 하였을 때 고종을 모셔 후궁이 되었고, 1897년 9월에 왕자(영친왕 은)를 낳자, 바로 그날로 선당의 당호를 받았고 귀인에 책봉되었다. 1901년(광무 5)에는 비(妃)에 진봉되고, 1903년(광무 7)에는황비(皇妃)에 책봉되었다.

귀비 엄씨는 신교육에 관심이 많아 1905년(광무 9)에는 양정의숙(養正義塾)을, 1906년(광무 10)에는 진명여학교(進明女學校)를 설립하였으며, 명신여학교(明新女學校, 현 숙명여자중˙고등학교)의 설립에도 거액을 기부하는 등 근대교육 발전에 크게 공헌하였다.

한편 귀비 엄씨는 1900년(광무 5) 꿈에 나타나 집을 지어달라고 간청한 7구의 석불(보물 제985호 청주 용화사 석불상)을 위하여 1902년에 용화사를 세웠다고도 전하여진다.

 1911년 7월 20일 사망하였고, 순헌(純獻)이라 시호(諡號)를 올리고, 8월에 양주 천수산(天秀山)에 무덤을 만들고, 원호(園號)는 영휘라 하였다. 위패는 서울시 종로구 궁정동에 있는 칠궁(七宮, 德安宮)에 봉안되어 있다.

소생으로는 황태자(영왕) 은이 있다.

 

 

 

` 영보당 귀인 이씨(永保堂)

이름은 순아. 궁인으로 입궐하였다가 상궁으로 있을 때 고종의 아들(완화군 선)을 낳아 숙원에 책봉되었으며 후에 귀인에 책봉되었다. 고종보다 연상이었으며 아들 완화군이 죽자 정신 이상을 일으켰고, 실어증에 걸려 말을 못하고 평생 외롭게 살다가 사망했다.

 

 

 

` 귀인 장씨

덕수 장씨. 궁인으로 입궐하였다가 상궁의 지위에 올라 명성황후 민씨의 시종 노릇을 하다 고종의 후궁이 되었다. 명성황후는 자신의 궁녀인 장씨가 고종의 아들을 낳은 것을 알고, 궁밖으로 내쫓았다. 처음에는 숙원에 봉해졌다가 후에 귀인에 책봉되었다.

소생으로는 의왕(의화군) 강이 있다.


` 보현당귀인 정씨(普賢堂)
해주 정씨. 궁인으로 입궐하였다가  왕자 우를 낳고 귀인에 봉해졌다.


` 복녕당 귀인 양씨(福寧堂)[1882 ~ 1929]

충주 양씨 언환의 딸. 1893년 궁인으로 입궐하였다가 덕혜옹주를 낳고 귀인에 봉해졌다.

 


` 광화당 귀인 이씨(光華堂)[1887 ~ 1970]
이름은 완흥(完興). 유복한 중인계급의 집안에 태어나서 1899년 경복궁 지밀의 세수간 나인으로 입궐하였다가 왕자 육을 낳고 귀인에 봉해졌다. 
고종이 죽자 같은 처소 후배였던 삼축당 김씨와 함께 덕수궁에서 나와 나라에서 지어준 사간동(司諫洞) 집에서 아래윗집 울타리를 트고 50여 년을 친형제와 같이 살다가 사망했다. 광화당과 삼축당은 금곡릉(金谷陵) 경내의 발치에 아래위로 나란히 묻혔다.

 


` 내안당 귀인 이씨(內安堂)
궁인으로 입궐하였다가 딸을 낳아 1880년(고종 17) 1월에 숙원에 봉해졌다. 후에 소의로 진봉되었다가 다시 귀인으로 승격되었다.


` 삼축당 상궁 김씨(三祝堂)[1890 ~ 1972]
안동 김씨. 이름은 옥기(玉基). 아버지의 심한 외도로 어머니가 고생하는 것을 보고 홀로 독신이 될 각오로 지낼 것을 결심하고 있던 차에 친척의 연줄로 1912년 경복궁 세수간 나인으로 입궐하였다.

고종의 가장 어린 후궁으로 총애를 입었으나, 후사를 얻지 못하여 후궁의 첩지는 받지 못했다.

고종이 죽자 궁에서 나와 같은 처소 선배였던 광화당 이씨와 함께 살다가 사망했다.

 

` 정화당 상궁 김씨

안동 김씨. 명성황후를 시해한 일본은 고종황제에게 속히 왕후를 맞아 들일 것을 요구했고, 친일파들이 나서서 안동 김씨 가문의 처녀를 간택했다. 그러던 중 아관파천이 있게 되고 조정내 친일파들이 색출되어 처형되고, 일본의 영향력은 다소 누그러졌다. 그리하여 왕후로 간택되어 입궁만 기다리던 김씨는 상황이 급변하자, 왕의 거부로 입궁을 거부당했다.

조선병합 이후 일본은 종종 김씨의 입궁을 강요해 고종을 난감하게 했다. 그러던 중 순종의 비인 순정효황후 윤씨의 숙부 윤덕영이 고종에게 일본으로 가 천황에게 인사를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고종은 윤덕영의 협박에 후계자인 황태자 척을 일본으로 보내기로 하고, 대신 마흔이 넘도록 아직 시집도 가지 못하고 있던 김씨를 입궐하도록 했다.
그러나 김씨는 정당한 왕후로써가 아닌 후궁으로 입궐하였고, 정식 후궁의 첩지도 받지 못했으며 고종의 사랑도 받지 못했다. 김씨는 끝까지 자신은 왕후로 간택되어 입궁한 몸이므로 왕후라고 주장하며, 귀비 엄씨에게 인사조차 가지 않아 궁중 사람들에게서 평판이 좋지 못했다.

고종이 죽은 뒤 정화당이라는 당호를 받고 일제로부터 나오는 연금을 받으며 살다 죽었다.

소생은 없다.


 

` 상궁 서씨

소생은 없다.


` 상궁 김씨

이름은 충연. 소생은 없다.

 

 

 

<적장남> 왕자[1871 ~ 1871] - 명성황후 민씨 소생

생후 4일만에 쇄항증으로 사망.

 

<적2남> 순종 - 명성황후 민씨 소생

 

<적3남> 왕자 [1875 ~ 1875] - 명성황후 민씨 소생

생후 14일만에 사망.

 

<적4남> 왕자[1878 ~ 1878] - 명성황후 민씨 소생

생후 105일만에 사망.

 

<적장녀> 왕녀[1873 ~ 1873] - 명성황후 민씨 소생

생후 222일만에 사망.

 

 

 

<서장남> 완친왕 선(完親王 土善)[1868 ~ 1880] - 영보당 귀인 이씨 소생

1876년 8월 완화군(完和君)에 책봉되었으나, 명성황후 민씨의 견제로 궁궐에서 살지 못하고 사저에 나가 살았다. 고종은 완화군을 불쌍히 여겨 끊임없이 돈과 쌀을 보내 보살폈지만, 1880년 홍역으로 어린 나이에 사망했다.

흥선대원군은 명성황후가 고종과 가례를 올린지 얼마 되지도 않은 시점에 태어난 완친왕을 세자로 세우려 하였다. 그런 흥선대원군을 명성황후는 원망했고, 여기서부터 명성황후와 흥선대원군의 대립구조가 형성되었다.

완친왕은 고종이 황제가 된 뒤에 완친왕에 추존되었다. 

 

<서2남> 의친왕 강(義親王堈)[1877 ~ 1955] - 귀인 장씨 소생

호는 오산(吾山). 1877년 3월 30일 북부 순화방 사재감(北部 順化方 司宰監) 상패게 자하동에 있는 숙의 범씨(철종의 후궁, 영혜옹주의 생모)의 궁에서 태어났다.
명성황후는 자신의 궁녀인 상궁 장씨(귀인 장씨)가 고종의 아들을 낳은 것을 알고, 궁밖으로 내 쫓았고 이후 10여 년 후에 귀인 장씨가 별세하자 의왕은 외삼촌으로부터 학문과 서예를 배우면서 유년시절을 보냈다.

하지만 명성황후는 왕세자(순종) 다음에 낳은 대군들이 모두 유아시절에 죽고, 왕세자 역시 몸이 허약해 후사가 걱정되자 1891년(고종 28) 강을 의화군(義和君)으로 봉하고, 1893년 10월 29일 연안 김씨 사준(金思濬)의 딸과 가례를 올리게 했다.

1894년 내의원과 사옹원 제조로 임명되었고, 9월에는 보빙대사(報聘大使) 자격으로 일본에 파견되었다. 1895년 8월 25일에는 특파대사의 자격으로 영국 · 프랑스 · 독일 · 이탈리아 · 오스트리아 등 유럽 각국을 순방하고 귀국하였다. 1899년에는 미국으로 유학을 갔고 버지니아주 로아노크대학교에서 공부를 하였다.
1902년 미주개발회사(美洲開發會社)에서 모집한 이민에 합류, 하와이로 건너가 1년간 영어학교에서 영어를 배우고 1903년 샌프란시스코로 건너갔다. 안창호(安昌浩)를 만나 그의 권고로 학업을 단념하고 안창호 · 정재관(鄭在寬) 등 동지들과 함께 1904년 공립협회(共立協會)를 창립, 1905년 11월 그 기관지 <공립신문(共立新聞)>을 창간하여 주필이 되었다. 1907년 초에 안창호와 신민회(新民會)를 창립하기로 하여 먼저 안창호를 귀국시키고 뒤이어 귀국하여서 양기탁(梁起鐸)을 중심으로 국내 동지들과 함께 1907년 4월 서울에서 국권회복을 위한 비밀결사인 신민회를 조직하였다. 몇달 뒤에 바로 러시아령 블라디보스톡으로 건너가서 정재관과 함께 신민회 블라디보스톡지회를 설립하였다.
1909년 2월 신민회의 합법적 외곽단체로서 미주에서 종래의 공립협회를 확대, 개편하여 재미주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가 조직되자 이에 보조를 맞추어 정재관과 함께 재로대한인국민회(在露大韓人國民會)를 조직하여 각 지방에 지회를 설치하며 독립사상을 고취하였다. 블라디보스톡에서 동지들과 함께 <해조신문(海潮新聞)>을 창간하여 편집 · 논설기자로 활동하고, <대동공보(大東共報)>로 제호를 고친 뒤에 그 편집책임을 맡았다. 1909년 10월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처단계획이 대동공보사에서 수립될 때 이에 참석하였으며, 안중근(安重根)이 이토 포살을 특공대로 자원하여 하얼빈에 나갔을 때 안중근과 대동공보사 사이의 연락을 담당하였다. 안중근의 의거가 성공한 뒤에는 안중근을 위한 영국인 변호사를 구하기 위하여 북경에 파견되어 활동하였다.
<대동공보>가 일본영사관의 압력으로 정간되자 시베리아의 치타로 가서 <정교보(正敎報)>라는 신문을 발행하여 독립사상을 고취하였다. 1919년 9월 러시아령에서 파견한 강우규(姜宇奎)의 일본총독 사이토(齋藤)에 대한 폭탄투척사건이 일어나자 그 연루자로 지목되어 일본의 파견경찰에 잡혀 서울로 압송되어 50일간 투옥당한 뒤 석방되었다. 1919년말 석방되자 바로 상해로 탈출하여 안창호를 만나서 임시정부에 참여, 의정원(議政院) 의원 · 부의장 · 의장을 역임하였다. 안창호가 중심이 된 흥사단운동에도 참가하여 흥사단 원동지방위원회(遠東地方委員會)를 설치하였다.
일본의 세력이 양츠강일대에까지 뻗치게 되었으므로 상해를 떠나 남중국으로 가서 샤먼(廈門)에서 강연을 하다가 일본경찰에 납치되어 평양으로 호송되어 징역 3년 형의 언도를 받고 복역하였다. 출옥하자 다시 탈출하여 중국 푸젠성(福建省)으로 가서 활동하다가 1945년 8 · 15광복을 맞았다. 임시정부의 요청으로 대만에 있는 한국동포들에 대한 선무단(宣撫團)의 단장이 되어 대만에 갔다가 1946년 귀국하였다. 1962년에 건국훈장 국민장이 수여되었다.
미국에 있을 때인 1900년 8월 17일에 의친왕으로 진봉되었다.
서울 사가에서 궁핍한 생활을 하다가 1955년 사망했고, 묘소는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원당동 서삼릉 내 어머니 귀인 장씨의 묘옆에 있다. 묘 조성 당시 6 · 25전쟁이 끝난 혼란시기 였기에 가매장 형태로 모셔졌고, 나중에 별세한 의친왕비는 홍유릉 부속림에 홀로 묻히였다.

1973년 영친왕비 마사코(방자方子)가 의왕 묘소 이장 허가를 정부에 요청, 당시 문화재 관리국에서 장례비 일체와 이장허가를 받았으나 여건이 여의치 않아 이장을 못하고 있던 중 미국에서 생활해 온 의친왕의 5녀인 해경여사가 형제들과 함께 종약원의 협조로 1996년 11월 29일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 홍유릉 부속림에 의친왕비와 합장하였다.

부인 의친왕비는 연안 김씨 사준의 딸로 이름은 수덕이다. 김씨 소생은 없으며 다른 부인 13명 중 당호가 내려진 6명의 부인들에게서 13남 9녀를 얻었다.

 

<서3남> 의민황태자 영친왕 은(懿愍皇太子 英親王垠)[1897 ~ 1970] - 귀비 엄씨 소생

1900년 8월, 형 의친왕과 함께 영친왕에 봉해졌고 1907년에 황태자에 책봉되었으나 12월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통감에 의하여 유학이라는 명목으로 일본에 인질로 잡혀갔다. 1910년 국권이 상실되자 순종이 폐위되어 이왕(李王)이 되니, 황태자였던 영친왕 역시 단순히 왕세제로 격하되었다. 1920년 4월 일본 황실의 내선일체 융합정책에 따라 일본왕족 나시모토(梨本宮)의 맏딸인 마사코(방자方子)와 정략결혼하였다.
1926년 순종이 승하하자 형식상으로는 왕위 계승자가 되어 이왕이라 불렸으나 일본에 머문 채 귀국하지 못하였다. 일본에 강제체류하는 동안 철저한 일본식 교육을 받았으며, 일본 육군사관학교·육군대학을 거쳐 육군중장을 지내기도 하였다. 1945년 광복이 되어 환국하고자 하였으나 국교단절 및 국내정치의 벽에 부딪혀 귀국이 좌절되었다. 한편, 일본의 패망으로 인하여 황족으로서의 특권을 상실하고 재일한국인으로 등록하여 1963년까지 일본에서 간고한 나날을 보냈다. 그 뒤 1963년 11월 당시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의 주선으로 국적을 회복하고, 이방자 여사와 함께 귀국하였다. 그러나 귀국 당시 뇌혈전증으로 인한 실어증으로 시달리고 있었으며, 그가 오래도록 꿈꾸어 온 불우한 이웃을 돕고자 하는 뜻을 이루지 못하고 별세하였다.
생전에 부인 이방자 여사와 함께 1966년에 심신장애자 재활원인 자행회(慈行會), 1967년에는 그의 아호를 빌린 신체장애자훈련원인 명휘원(明暉園)을 설립하여 사회에 봉사 하였다. 영왕의 사회봉사의 정신은 사후에도 이방자 여사에 의하여 1971년 영왕기념사업회, 정신박약아교육시설인 자혜학교(慈惠學校), 1982년 신체장애자교육시설인 명혜학교(明惠學校) 설립 등으로 계승되었다.

부인 영친왕비 마사코(방자方子)와의 사이에서 진(晋)과 구(玖) 두 아들을 두었으나 맏아들 진은 어려서 죽고 둘째 아들 황세손(皇世孫) 구는 현재 종약원의 총재로 추대되어 서울 특별시 종로구 부암동에서 거주하고 있다.
능은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 홍유릉 내 영원(英園)이며, 1989년 4월 30일 영친왕비와 합장하였다.

 

<서4남> 왕자 육(堉)[1914 ~ 1915] - 광화당 귀인 이씨 소생

어린 나이에 일찍 사망.

 

<서5남> 왕자 우(瑀)[1915 ~ 1916] - 보현당 귀인 정씨 소생

어린 나이에 일찍 사망.

 

<서장녀> 왕녀 - 내안당 귀인 이씨 소생

일찍 사망.

 

<서2녀> 왕녀 문용(文鎔)[1900 ~ 1987] - 상궁 염씨 소생

정식 옹주에 책봉되진 못했고, 광복 후 황녀에 봉해졌다.

1900년 12월 3일 태어난 문용은 태어나면서부터 비운의 첫발을 내디게 되었는데, 당시 귀비 엄씨의 질투로 인해 종실인 학부대신 이재곤의 주선으로 경북김천으로 피해 9살까지 숨어 살아야 했고, 10살 때 어머니 상궁 염씨와 가까이 지내던 상궁 임씨가 서울로 데려와 창경궁 앞 원남동의 한 여염집에서 살면서 궁중예법과 법도를 배우게 됨으로써 자신의 신분을 알게 되었다. 그후 진명여고에 진학하여 신학문을 배우고, 1916년 우국지사 김한국의 아들과 결혼과 결혼하였으나, 남편은 일본유학 중 사별하고 돌박이 아들마져 잃게 되었다.
해방이 되자 좌익활동을 하던 시동생이 생활비를 대준 것이 문제가 되어 간첩으로 몰려 옥살이와 피신, 또한번의 옥살이를 10여년 끝에 1970년 출옥하게 되었다.
이같은 사실은 74년 작가 유주현에 의해 <황녀>라는 제목으로 방영되자, "황녀다, 아니다." 시비가 적지 않았으나 종실 이만용(李滿鎔)등의 증언으로 옹주가 확실하다고 알려지게 되었다.

정식으로 옹주에 책봉된 적은 없고, 광복 후 황녀에 봉해졌다.


<서3녀> 덕혜옹주(德惠翁主)[1912 ~ 1989] - 복녕당 귀인 양씨 소생

1912년 5월 25일에 태어난 덕혜옹주는 1917년 정식으로 황적에 입적하였다.

일제에게 딸을 빼앗기기 싫었던 고종에 의해 1919년 황실의 시종 김황진의 조카 김장한(金章漢)과 약혼하였다. 그러나 1925년 4월 30일 '황족은 일본에서 교육시켜야 한다'는 일제의 요구에 의해 강제로 일본으로 끌려갔다. 이어 일본의 학습원을 마친 뒤, 1930년 봄부터 몽유증 증세가 나타나기 시작하면서 영친왕(환태자 은)의 거처로 옮겨 치료를 받았다. 증세는 조발성치매증으로 진단되었다고 하나 의심스러운 점이 많다. 병세는 이듬해 좋아졌다.
1931년 5월 8일 대마도 도주의 후예인 백작 소 다케유키(종무지宗武志)와 강제 결혼해 딸 마사에(정혜正惠)를 낳았다. 그러나 결혼 후에 병세가 더욱 악화되어 이후 계속 병상생활을 하다가 1953년 다케유키와 이혼하였다. 하나 있는 딸마저도 결혼에 실패하고 바다에 몸을 던져 자살하는 비극을 겪었고 1945년 해방 후 이승만의 반대로 한국에 오지 못하다가 1962년 1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의 배려로 귀국했다.귀국할 때까지 조선의 마지막 황녀로서 비극으로 일관된 삶을 살았다.
귀국 후 낙선재에서 살았는데, 한국에서의 생활도 순탄하지 않아 귀국 20년 만인 1982년이 되어서야 호적이 만들어졌고, 결국 실어증과 지병으로 고생하다 1989년 4월 21일 창덕궁 낙선재 내 수강재에서 세상을 떠났다. 유해는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金谷洞)에 있는 홍유릉(洪裕陵)에 묻혔다.

 

# 문용옹주 : 고종의 수양딸. 황실계보에 오르지 못했으며, 학계 황족모두에게 인정 받지 못하고있습니다.

 

출처: 우리황실사랑회

출처 : minoksigi
글쓴이 : 미녹시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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