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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우리궁궐 이야기 시리즈 [경복궁 마지막 편]-경복궁의 후원 칠궁 이야기-

오늘행복스마일 2019. 1. 2. 11:45

 

          경복궁의 후원은 과연 어디에 있나?

 

 

경복궁 후문에서 바라본 경복궁의 후원지(청와대 정문)

 

 

 

   [태원전]의 동북쪽 花階 담장 너머 언덕위로는 연륜이 깃든 소나무, 느티나무, 상수리나무, 살구나무, 쪽동백 나무들이 우람하게 늘어서 있고 그 사이로 경복궁의 북문인 [신무문(神武門)]이 우람하게 올려다 보인다. [태원전] 동측세답방에서 언덕을 올라 일각문을 나서면 [집옥재]로 들어가는 광임문(廣臨門)이 코앞에 맞 닥 드린다. 닫힌 공간에 사방으로 샛담과 문뿐이다. 큰길처럼 길게 뻗은 공간의 남쪽에는 유형문(維亨門)이 북쪽에 [신무문]이 올려다 보인다. [신무문]은 경복궁의 4대문 중 광화문과 함께 일반인이 출입할 수 있는 문이다. [신무문] 밖은 청와대 경내이다. 그리하여 2006년 이전까지는 청와대의 보안과 경비 때문에 [신무문]은 금단의 문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정해진 절차만 걸치면 [신무문]으로 나가 청와대 방문은 물론 오랫동안 폐쇄되었던 [칠궁]을 관람할 수 있다.

 

 

 

오랜동안 금단의 문으로 접근이 어려웠던 신무문

 

 

  [신무문] 밖은 경복궁의 후원이었다. 후원은 또 하나의 담장으로 막혀 있었으므로 허락 없이 함부로 들어갈 수 없었다. [신무문]은 음기가 드세다 하여 평소에는 문을 닫아두었다. 그리하여 옛날부터 [신무문] 일대는 인적이 뜸한 곳이었다. 후원에서 왕의 親耕행사가 있거나 문무관의 시험 또는 왕이 공신들의 충성을 다짐하고 결속을 다짐하는 회맹단(會盟團) 등 특별한 행사가 있을 때 에만 [신무문]을 통해 출입이 허용되었다.

 

 

 

힘자랑 하던 사람들이 국면전환을 위해 출입하였던 신무문

 

 

 

  ‘神武’는 ‘뛰어난 武勇’이란 뜻이기도 하다. [신무문]은 동쪽 담장으로 [계무문(癸武門)] [광무문(廣武門)]을 거느리고 있다. 모두가 ‘武’자 돌림이다. 옛날부터 [신무문]은 힘자랑하던 사람들이 국면을 전환시키고자 할 때 은밀하게 드나들었던 곳이었다. 1519년(중종14년) 기묘사화 때 홍경주 등 훈구세력들이 왕의 밀명을 빙자하여 조광조와 사림파를 일망타진하기 위해 깊은 밤중에 이 문으로 들어와 참극을 벌이는 이른바 ‘신무의 난’이 일어난 곳이었다. 1979년 10.26 사건 때에는 1.21사태를 계기로 청와대 경비를 위해 [태원전] 지역에 주둔하였던 수도경비사령부 30경비단 지휘소에서 신군부 세력들이 군사반란을 모의하여 우리 현대사의

물줄기를 되돌린 현장이기도 하였다. 

 

 

 

 

경복궁 후원과 칠궁으로 들어가는 경복궁 북문

 

   [신무문]은 4대문 가운데 지대가 가장 높은 언덕바지에 자리하고 있다. 그래서 [신무문]에서 바라보면 [태원전] 구역의 검은 지붕들이 검푸른 파도처럼 넘실거리고 [집옥재]의 [팔우정] 2층 누각이 발아래 내려다보인다. 현무도(玄武圖)가 굽어보는 [신무문]의 홍예 안으로 백악의 산줄기 아래 청와대의 푸른 기와지붕이 쑥 들어온다. [신무문]을 나서니 바깥 석축에 담쟁이덩굴이 덮여 있어 고풍스럽다. 청와대의 경내로 변해버린 경복궁의 후원은 상상 속에 그려보고 청와대 서쪽 궁정동 동네 길을 돌아서 [칠궁(七宮)]을 찾았다. [칠궁]은 조선후기 임금 또는 추존 왕의 모후 중에 종묘에 배향되지 못하고 각 묘전의 재실에 흩어져 있던 7명의 후궁들의 신주들을 한데 모아 놓은 왕실의 또 다른 혼백들이 머무는 사당이요 작은 종묘라고 하겠다. 지금의 [칠궁]은 경복궁의 궁역을 벗어나 궐 밖 외지에 자리를 잡은 별궁 같은 착각이 든다. 그러나 이곳은 경복궁의 후원 경내의 신성한 장소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경복궁 후원(後苑) 터

 

 

 

신무문 밖 경복궁 후원 지역

 

  지금의 청와대 경내가 자리를 잡은 [신무문]밖은 본래 경복궁의 [후원(後苑)] 영역이었다. 경복궁을 처음 지을 때의 [후원] 공간은 궁성 안 교태전 북쪽의 [향원지] 부근 일대와 [신무문]밖 북악산 기슭 까지 포함되었다. 특히 지금의 청와대 지역은 경무대(景武臺)라 불렸다. 경무대지역은 북악산 산록에 위치하여 서울을 한눈에 굽어볼 수 있으며 풍수지리 적으로도 吉地라 하여 예로부터 중요시 해 왔다. 고려 왕조에서는 이곳에 남경 행궁을 짓기도 하였다. 경복궁과 경무대 사이에는 지금처럼 높은 담장도 없었으며 나지막한 목책과 작은 문이 있었을 뿐이었다. 세종 때에 이르러 궁궐과 경무대 후원 사이에 돌로 담장을 쌓고 문을 만들어 북성문이라 하였으며 [신무문]이라 칭한 것은 성종 때였다.

  처음 경복궁을 창건 할 당시에는 궁궐 안 후원도 넓었기 때문에 [신무문] 밖 경무대 지역은 실제 [후원]으로 이용되지 않았다. 다만 초기에는 이곳 후원에 상림원(上林苑)이라 하여 색다른 풀과 나무를 옮겨 심고 진귀한 새와 짐승을 놓아길렀다고 한다. 그러나 세종은 진귀한 꽃이나 새를 좋아하는 것은 백성의 정서에 어울리지 않는다하여 상림원의 草花를 없애고 새와 짐승을 풀어주었다. 대신 후원에서 이따금씩 어영군이 훈련을 할 때나 과거 시험장 또는 임금이 농사의 모범을 보이는 親耕 지역으로 이용되었을 뿐이었다.

 

 

 파란만장한 우리나라 근대역사의 현장 경복궁 후원 경무대(청와대)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까지 이 지역에는 자미당, 취로정, 선원전 등 10채의 건물과 정자가 있었을 뿐인 한가한 공간이었다. 영조 때에는 백악의 남서쪽 기슭 후원에다 후궁의 신분에 머물렀던 어머니 숙빈 최씨를 추모하기 위한 사당을 세워 [육상궁]이라 하였다. 고종 때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궁궐 안 [후원] 지역은 차츰 거주공간으로 바뀌어 갔다. [교태전]과 향원지 사이에 각종 전각들이 들어서고  향원지 북쪽에 [건청궁]이 들어서면서 궁성 안 [후원]공간은 사실상 없어져 버렸다. 이에 따라 실질적인 [후원]의 위치도 지금의 청와대 경내 쪽으로 옮겨가게 되었다.

 

   경복궁 중건 후 [신무문] 밖 경복궁 후원지역에는 융문당(隆文堂), 융무당(隆武堂), 경무대(景武臺)를 비롯하여 오운각 옥련정 등 232칸의 건물들이 들어서게 되었고 내농포(內農圃)와 경농재(慶農齋)가 있었다. 흥선 대원군은 경복궁 후원 둘레에 담장을 두르고 서쪽에는 추성문과 금화문, 동쪽에는 춘생문을 설치하였다. 융문당과 융무당 건물은 과거 시험을 치르는 곳이며, 경무대는 왕이 군사훈련을 참관하던 시설이었다. 내농포는 왕이 농사에 모범을 보이던 친경의 현장 이었으며, 경농재는 친경 때 왕이 잠시 머무르는 곳이었다. 이외에도 [후원]에는 금군 초소인 수궁막(守宮幕)과 숙소, 마구간 등이 있었다고 전한다.

  그러나 일제가 1927년 경복궁에 조선총독부 청사를 세우면서 경무대 지역에 남아 있던 융무당, 경농재 등 모든 시설을 헐어내고 그 자리에 총독 관저를 지었다. 일제가 물러간 뒤, 총독관저는 미군정 사령관 하지 중장이 사용하다가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함께 대통령 관저로 사용하였으며 관저 이름도 옛 이름을 살려 ‘景武臺’라 하였다. 경무대는 4.19혁명이 일어난 뒤 ‘靑瓦臺’로 이름을 바꾸었으며, 1993년에는 옛 관저를 철거하고 지금의 청와대 건물이 들어서게 되었다. 철거된 옛 청와대 관저 터는 옛날 이 자리에 있었던 守宮에서 이름을 따와 [수궁터]라 부르고 있다.

 

 

 

 

            칠궁(七宮)

 

  

칠궁 안으로 들어가는 내삼문

 

 

 

   칠궁(七宮)은 청와대 서쪽 궁정동에 위치하고 있다. 이곳은 경복궁 후원의 서남쪽 구역으로 본래는 [육상궁] 터였다. [육상궁]은 영조 어머니 숙빈 최씨의 사당을 짓고 제사를 올리던 곳이다. 1908년 고종 때에 각 묘전의 재전을 간소하게 하기 위해서 각 곳에 흩어져 있던 임금이나 추존 된 왕의 어머니의 신주들이 봉안 된 사당 다섯 곳을 [육상궁]으로 옮겨와 합사하고 [육궁]이라 고쳐 불렀다. 그 후 고종의 후궁이었던 영친왕의 어머니 엄귀비의 사당을 이곳에 함께 세워 [칠궁]이라 부르게 되었다. [칠궁]에는 육상궁을 비롯하여 저경궁, 대빈궁, 연호궁, 선희궁, 경우궁, 덕안궁 등 7곱 개의 사당이 자리하고 있는 조선왕실의 작은 종묘라 할 수 있다.

   

 

조선왕실의 작은 종묘 칠궁 권역

 

 

 

 [육상궁(毓祥宮)]은 영조의 생모 숙빈 최씨(崔淑嬪)의 사당이다. 영조는 즉위하면서 생모인 최씨가 후궁 출신이었기 때문에 국가적인 봉사(奉祀)의 은전을 받지 못하게 되자 경복궁 후원에 사당을 짓고 직접 제사를 올렸다. 처음에는 숙빈묘(淑嬪墓)라 하였다가 그 후 육상묘로 이름을 바꾸면서 이곳에 영조의 화상을 봉안하고 육상궁으로 승격하였다. 숙빈 최씨는 폐비가 된 인현왕후를 받드는 과정에 숙종의 승은을 입어 연닝군(영조) 낳았다. 숙빈 최씨의 묘는 파주시 광탄면 소령원(昭寧園)에 묻혔다. .

  [저경궁(儲慶宮)]은 광해군 때 서인들의 반정으로 임금이 된 인조의 할머니 인빈 김씨(仁嬪金氏) 사당이다. 인빈 김씨는 14세 때 선조의 후궁이 되어 40여 년간 선조의 지극한 사랑을 받았다. 인빈 김씨는 광해군 때 별세하여 남양주시 진접읍 순강원(順康園)에 묻혔다.

  [대빈궁(大嬪宮)]은 경종의 어머니 희빈 장씨(禧嬪張氏)의 사당이다. 장씨는 숙종의 사랑을 받아 왕자 윤(명종)을 낳았으며 노론의 반대를 물리치고 원자로 책봉됨에 따라 희빈에 올랐다. 기사환국(숙종 15년)으로 남인이 집권하면서 인현왕후를 물리치고 왕비가 되었으며, 갑술환국으로 인현왕후가 복권되자 5년 만에 희빈으로 되돌아가게 되었다. 그 후 인현왕후를 저지했다는 탄핵을 받고 사사되었으나 옥산부 대빈(玉山府大嬪)으로 추봉되어 서오능 대빈묘(大嬪墓)에 묻혔다. 

 

 

경종의 모후 희빈 장씨의 사당 [대빈 궁]

 

 

 

  [연호궁(延祜宮)]은 영조의 아들 효장세자의 어머니 정빈 이씨(靖嬪李氏)의 사당이다. 영조는 원비였던 정성왕후에게서 원자를 기대하기 어렵게 되자 후궁인 정빈 이씨가 낳은 아들을 효장세자로 삼았다. 효장세자가 열 살 때 죽고 뒤를 이은 사도세자마저 희생(임오화변)되자 정조가 효장세자의 아들로 즉위하여 진종으로 추존하였다. 정빈 이씨의 묘는 파주시 광탄면 수길원(綏吉園)에 묻혔다.

  [선희궁(宣禧宮)]은 정조의 할머니이며 사도세자의 어머니 영빈 이씨(映嬪李氏)의 사당이다. 영비 이씨는 영조의 사랑을 받아 사도세자를 낳았으며 비통함속에서도 외아들  사도세자의 죽음(임오화변)을 의연하게 견뎌냈다. 영빈 이씨의 묘는 연세대학교 구내의 수경원(綏慶園)에 안장되었다가 고양시 서오능으로 옮겨 갔다. 영빈 이씨는 후궁 제일의 의식으로 장례를 치렀으며 ‘義烈’이란 시호를 내려 종로구 신교동 국립농아학교 교정에 선희궁(宣禧宮)이란 이름으로 사당을 세웠다가 순종 때 이곳 육상궁으로 옮겼다.

  [경우궁(景祐宮)]은 순조의 생모이며 정조의 후궁 수빈 박씨(綏嬪朴氏)의 사당이다. 수빈 박씨는 정조의 후궁으로 간택되어 순조를 낳았으며, 의빈 성씨의 소생 문효세자의 뒤를 이어 왕세자에 책봉되어 11살의 나이에 즉위하게 되었다. 평소 성품이 온화하고 예절이 바르고 검소하여 현빈(賢嬪)이라 하였다. 수빈 박씨의 무덤은 남양주시 진접읍 휘경원(徽慶園)에 안장되었으며 종로구 계동(옛 휘문하교 터)에 경우궁(景祐宮)이란 이름으로 사당을 세웠다가 순종 때 지금의 위치로 옮겨지게 되었다. 경우궁은 갑신정변 때 고종이 잠시 피신하기도 하였던 현장이었으나 지금은 그 자리에 현대빌딩이 들어서 있다.

  [덕안궁(德安宮)]은 영친왕의 생모이자 고종의 후궁 순헌황귀비(純獻皇貴妃)의 사당이다. 귀비 엄씨는 명성황후의 시위상궁으로 있던 중 승은을 입었으나 강제 출궁 당해 있다가 을미사변 후에 다시 입궁하여 아관파천을 단행하였다. 그 후 영친왕을 낳아 귀인에 이어 순비로 책봉되었으며 다시 순헌황귀비의 칭호를 받았다. 귀비 엄씨는 일본에 인질로 끌려간 영친왕을 그리다 승하하여 동대문구 청량리 영휘원(永徽園)에 묻혔으며 지금의 조선일보 자리인 서부학당 자리에 사당을 짓고 덕안궁(德安宮)이라 하였다가 1929년에 칠궁으로 옮겨가게 되었다.

 

 

출처 : 길벗샘물
글쓴이 : 호랑나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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