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상사 들어가는 해탈교. 입장료 천오백원.
解脫....
지리선상이
-천 오백원 주고 이 다리를 건너면 해탈하는 것이네~ 한다.
친구왈.
-건너가서 나오지 않으면 해탈이고 나오면 도로아미 타불이요..하하하
오늘... 다시 가서 푹 빠져보고 싶은 오후다.
실상사 앞으로.
84년도에 왔다 갔으니...24년이 흘렀네...
그때 중산리를 올라 백무동으로 내려서고 백무동에서 뱀사골 그리고 피아골로 가는 도중에 들린 곳인데..절이 많이 넓어졌다...^^
글 출처;지리산 실상사.
지리산 자락이 감싸 안은 듯 평화롭고 풍요로운 고을 남원시 산내면에 천년 고찰 실상사(實相寺)가 있다.
지리산의 북쪽 관문인 인월에서 심원, 달궁, 뱀사골 방면으로 향하다 보면 삼거리가 나오는데 여기서 왼쪽 마천방면으로 가다 보면 만수천(萬壽川)변에
호국사찰로 천 년의 세월을 버티고 지내온 실상사가 나타난다.
만수천과 뱀사골 방면에서 흘러내리는 물줄기가 만나는 지점이 산내면 면소재지, 즉 인월에서 뱀사골 방면으로 가다 보면 나타나는 삼거리 부근이다.
이 삼거리에서 동쪽을 향해보면 천왕봉이 손에 닿을 듯 눈 앞에 선하다. 그 발 아래 산내면 입석리 들판이 넓게 펼쳐지는데 그 곳에 실상사가 자리잡고 있다.
실상사는 지리산 깊은 계곡에서 흐르는 만수천을 끼고 풍성한 들판 한가운데 위치해 있으며 동으로는 천왕봉과 마주하면서
남쪽에는 반야봉, 서쪽은 심원 달궁, 북쪽은 덕유산맥의 수청산 등이 병풍처럼 둘러싸인 채 천년 세월을 지내오고 있다.
대부분 우리나라의 사찰이 깊은 산중에 자리잡고 있는데 비해 지리산 자락의 실상사는 들판 한가운데 세워져 있는 것이 특이하다.
지리산 사찰 중 평지에 자리한 절은 이 곳 실상사와 단속사가 있는데 단속사는 폐허가 된채 석탑만 남겨져 있는데 비해 실상사는 여전히 사찰 구실을 하고 있다.
천년사찰, 호국사찰로 잘 알려진 실상사는 신라 흥덕왕(興德王) 3년(서기 828년) 증각대사 홍척(洪陟)이 당나라에 유학, 지장의 문하에서 선법(禪法)을 배운 뒤 귀국했다가 선정처(禪定處)를 찾아 2년동안 전국의 산을 다닌 끝에 현재의 자리에 발길을 멈추고 창건했다.
증각대사가 구산선종(九山禪宗) 가운데 최초로 그의 고향인 남원시 산내면 입석리에 절을 세운 것이다.
증각대사의 높은 불심을 높게 기린 흥덕왕이 절을 세울 수 있게 해줬고 왕은 태자선광(太子宣光)과 함께 이 절에 귀의했다.
증각은 실상사를 창건하고 선종(禪宗)을 크게 일으켜 이른바 실상학파(實相學派)를 이루었고
그의 문하에서 제 2대가 된 수철화상과 편운(片雲)스님이 가르친 수많은 제자들이 전국에 걸쳐 선풍(禪風)을 일으켰다.
신라 불교의 선풍을 일으키며 번창했던 실상사는 그 이후 조선시대에 접어들면서 화재로 전소됐다가 3차례에 걸쳐 중수 복원돼 오늘에 이른다.
세조때(1468) 원인모를 화재로 전소됐다는 기록과 정유재란 때 왜구에 의해 전소됐다는 설이 동시에 전해지고 있다.
화재로 인해 실상사의 승려들은 숙종 5년(1680)까지 약 200년 동안 백장암에서 기거했으며 절에는 철불, 석탑, 석등 등만 남아 있었다 한다.
그러다가 숙종 때 300여 명의 수도승들과 함께 침허대사가 상소문을 올려 36채의 대가람을 중건했다.
또 순조 21년(1821) 의암대사가 두번째 중건을 했으며 고종 21년(1884)에 월종대사가 세번째 중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여기서 제3중창건을 하게 된 것은 고종 19년(1882) 어떤 사람들이 절터를 가로챌 목적으로 방화를 했기 때문이다.
또한 실상사는 6?25를 맞아서는 낮에는 국군, 밤에는 공비들이 점거하는 등 또 한차례의 수난을 겪게 됐는데 용케도 사찰만은 전화를 입지 않았다.
천년 세월을 보내오면서 호국사찰로 알려진 실상사에는 유독 일본, 즉 왜구와의 얽힌 설화가 많이 전해진다.
앞서 언급한 사찰의 전소원인을 정유재란 당시의 왜구에 의한 것으로 보고 있는 부분에서도 일본과 관련된 전설을 엿볼 수 있다.
또한 약사전의 약사여래불은 천왕봉을 정면으로 바라보고 있는데 천왕봉 너머에는 일본의 후지산이 일직선상으로 놓여져 있다 한다.
이 때문에 가람배치도 동쪽을 향해 대치령을 하고 옆으로 강이 흘러 대조적이다.
이 절에는 "일본이 흥하면 실상사가 망하고 일본이 망하면 실상사가 흥한다"는 구전이 있는데 이는 천왕봉 아래 법계사에서도 전해지고 있어 흥미를 끈다.
이를 증명하기라도 하듯 실상사 경내의 보광전 안에 있는 범종에 일본 열도의 지도가 그려져 있는데 스님들이 예불할 때마다 종에 그려진 일본열도를 두들겨 치고 있다.
이는 앞서 언급했듯 우리나라와 실상사가 흥하면 일본이 망한다는 구전에 의한 것으로 여겨진다.
스님들이 이 속설에 따라 범종의 일본지도를 많이 두드린 탓에 범종에 그려진 일본지도 중 훗카이도와 규슈지방만 제 모양으로 남아 있을 뿐
나머지 열도는 희미해져 가고 있다.
최근의 독도 영유권에 대한 일본의 망언이 있는 오늘날 한일관계를 두고 볼 때 보광전의 범종에 얽힌 사연이 갖는 의미는 우리에게 많은 점을 일깨워주기에 충분하다.
이 같은 전설과 구전들을 살펴볼 때 실상사는 일본에 대한 호국사찰이며 불교문화의 큰 도량임을 알 수 있다.
실상사에는 백장암과 서진암, 약수암 등의 암자가 있으며 이 곳에는 신라시대의 많은 문화유산들이 산재해 있다.
국보 제10호로 지정된 백장암 삼층석탑은 전형에 구애받지 않은 자유로운 설계를 하고 있어 통일신라를 대표하는 공예탑이기도 하다.
실상사의 문화유적은 보물급에는 수철화상능가보월탑(33호, 905), 수철화상능가보월탑비(34호), 석등(35호, 개산당시), 부도(36호, 고려), 삼층쌍탑(37호, 887년),
증각대사응료탑(38호, 861년 이후), 증각대사응료탑비(39호), 백장암석등(40호, 9세기 중엽), 철제여래좌상(41호, 개산당시), 청동은입사향로(420호, 1584년),
약수암목조탱화(421호, 1782년)등 11점이 보존되어 있다. 지방유형문화재로는 극락전(45호,1684년), 위토개량성책(88호, 토지대장), 보광전범종(138호, 1694년)등 3점이다.
중요민속자료는 실상사 입구의 만수천을 가로지르는 해탈교 양쪽에 세워져 있는 석장승 3기(15호)가 그것이다.
장승은 벅수라고도 하는데 보통 한 쌍으로 세워져 있으나 이 곳의 장승은 남녀를 판별할 수 없으며 만수천 양쪽에 원래는 4기가 세워져 있었다.
절을 향해 건너기 전에 세워진 한쌍의 돌장승 중 오른편 장승은 1936년 홍수때 떠내려 가고 없다.
잡귀를 막기위해 세워진 "상원주장군(上元周將軍)은 두 눈과 코가 크고 둥글며 머리에는 모자를 쓰고 손은 창을 든 것 같은 모습이며
"대장군(大將軍)"은 뒤에 만들어진 듯 이렇다 할 특징은 없다.
실상사에는 이렇듯 호국의 정신이 흐르며 찬란한 신라불교문화의 숱한 문화재가 잘 보존돼 있는 천년고찰이다.
1)홍척국사
국사의 법호는 홍척, 시호는 증각, 탑호는 응료이다. 그는 신라 헌덕왕 때 당나라 서당지장에게서 선종의 진리와 법을 이어받아 크게 도를 깨닫고 귀국하였다. 홍척국사가 귀국한 때는 흥덕왕이 즉위한 해로 선강태자가 상대등으로 있을 때이다. 왕과 태자는 그의 덕을 우러러 국사로 임명하였다. 그들은 신라의 골품제도의 모순을 극복하고자 했으며 양 선종의 혁명적 성격이 공감되었던 듯 싶다. 홍척국사는 실상산조사 혹은 남악조사로 불리웠다. 대표적인 제자로는 수철국사와 편운화상이 있고, 그 외 1천여 명의 제자가 있다.
(2) 수철화상
국사의 법호와 성씨는 잘 알 수 없다. 신라 헌덕왕 4년(812) 스님의 세납 15세에 연허율사의 문하에서 출가하였다. 희강왕 1년(836) 동원경의 복천사에서 윤법대덕에게 구족계를 받았다. 그후 설악산에서 홍척국사를 만나 지리산에 들어와 법을 전수받고 실상산 제2대 조사가 되었다. 그의 탑비에 의하면 “□□新羅國良州深源寺 □國師秀澈和尙楞伽寶月塔碑銘幷序”로 되어 있어 그가 양주(양산) 심원사에서 실상사로 옮겨와 개산 2대조가 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홍척국사 문하에서 선승이 된 수철화상은 선수행뿐만 아니라 ‘화엄경’을 공부하였고 지실사(실상사)에서 대장경을 열람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에는 수철화상이 선종과 교종을 대립적으로 이해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수철화상은 893년(진성여왕 7)에 돌아가셨는데 그 때 세납 79세, 법납 58세였다. 진성여왕은 시호를 수철이라 하고 탑호를 능가보월이라 하여 그를 기렸다.
(3) 편운화상
편운화상의 행적은 잘 알 수 없으나 홍척국사의 제자로 수철화상과 같은 시대에 살았던 인물로 알려져 있다. 현재 조계암 옛터에 그의 부도가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당시에 활발하게 활동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편운화상 부도의 정면에 ‘倉祖洪陟弟子安峯倉祖片雲和尙浮屠’와 ‘正開十年庚午歲建’ 이라는 명문이 있다. 이것은 탑 이름과 탑을 세운 시기를 알 수 있는 연호이다. 이 기록에 의하면 편운화상은 실상사의 개산조인 남악 홍척국사의 제자로서 성주 안봉사의 개창조임을 알 수 있다. ‘정개십오년경오세건’에서 정개는 신라와 중국, 발해에도 없던 연호로 김포광 스님은 후백제 견훤의 연호로 추정하고 있다.
(4) 침허조사
법명은 율계, 법호는 침허당으로 1605년(선조38)에 태어났다. 17세에 출가하여 벽암선사의 법맥을 이었으며 백장사에 두 차례 불이 나자 지계, 지열, 수안 등의 간청으로 실상사 옛터를 복원하였다. 즉 1468년(세조 14)에 화재로 인해 200여년 동안 폐허로 남아있던 것을 1690년(숙종 16) 침허대사를 중심으로 여러 스님들이 절의 중창을 조정에 상소해 1700년(숙종 26)에 36동의 건물을 세웠다.
(5) 설파대사
법명은 상언, 호는 설파, 성은 완산 이씨로 효녕대군의 11세 자손이다. 1707년(숙종 33)에 무장군 장사현에서 출생하여 19세에 선운사 희섬에게 출가하였다. 회암대사에게 계를 받고 호암대사의 법을 이었다. 청허대사의 6세 손이고 환성대사의 법손이다.
대사는 화엄경에 정통하였으며 그의 문인인 경파, 혜암 등과 함께 화엄소초 80권을 간행하여 함양 영부사에 소장하게 하였다. 실상사 보명암에서 활동하다가 만년에는 영원사에서 10여 년동안 수행하였다. 1791년(정조 15)에 열반에 드시니 세수는 85세이고 법납은 66세였다. 저서에는 구현기가 있다.
(6) 의암대사
법명은 이주, 법호는 의암, 성은 김씨이다. 1755년(영조 31)에 함양군 안위에서 출생했다. 17세에 김천 직지사로 출가하였으며, 경파대사의 법제자이고 설파대사의 법손이다. 직지사 능여암에서 십지경을 강론하다가 1821년(순조 21) 실상사로 옮겨왔다. 실상사의 쇠락함을 안타깝게 여긴 의암대사는 중창할 방책을 생각하던 중 실상사불량동참계, 삼법당등촉창호계, 약사전불량계, 약사전등촉계, 부도전불량계 등의 계를 만들어 이에 보충할 자원을 확보하였다.
한편으로 교화를 펼쳐 승풍을 바로 세웠으며, 현재의 명부전도 장육전 동쪽에 있던 것을 의암대사가 옮겨 세운 것이다. 1833년(순조 33)에 단정히 앉아서 열반에 드셨는데, 세납 80세이고 승납 63세였다.
(7) 월송대사
법명은 의홍, 당호는 월송이다. 성은 김해 김씨로 고성군 김순개의 아들이다. 1830년(순조 30)에 출생하였고 18세에 문수암 금파대사에게 출가하였다. 용호, 대연, 금명 등에게 경을 배웠으며 금계 윤우대사의 법을 이었다. 1864년부터 실상사에서 가르침을 베풀기 시작하였고, 1883년에 이르러 양재묵 등 유생들의 방화로 보광전, 승당이 불타자 이것을 다시 세웠다. 1888년(고종 25)에 돌아가시니, 세납 59세이고 승납 40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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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몇일 쪽발이 개쉐이덜 독도가 저거덜 꺼라꼬 지랄발광을 하는데 위의 글을 읽고나니 속이 다 후련하네...
그래요~ 스님네들요! 범종 치실때 죄송한 말씀인지 모르지만 설렁탕이라도 한 그릇 자시고 아주 팡팡 때려주이소 마!
에이 쪽발이 쉬발쉐이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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