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한국의 사찰 - 합천 가야산 해인사(海印寺)
해인사(海印寺)는 대한민국 경상남도 합천군 가야면 치인리 가야산 중턱에 있는 사찰로서 팔만대장경이 세계기록유산, 팔만대장경을 보관하는 장경판전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대한불교 조계종 제12교구 본사로 150여 개의 말사(末寺)를 거느리고 있다. 불교의 삼보사찰 중 법보(法寶) 사찰로 유명하다. 대적광전(大寂光殿)의 본존불은 석가모니이다.
남북국 시대 802년 신라 애장왕 3년에 ‘순응’과 ‘이정’이 창건했다. 그들은 가야산에 초막을 세우고 참선을 했는데 등창으로 고생하던 애장왕의 왕비의 병을 낫게 해주어 애장왕이 절을 창건하도록 했다. 순응과 이정 이후 ‘결언대덕’이란 승려가 사찰 창건을 계속했고 주지가 되었다.
918년에는 승통희랑이라는 당시 해인사 주지가 고려를 도와준 데 대한 보답으로 고려 태조가 국찰로 삼았다. 대각국사 의천이 《속장경》의 간행을 시도한 곳이다.
해인사는 5차례가 넘는 화재로 인해 여러 번 중창되었으며, 그에 따라 창건 당시의 건축은 알 수 없고, 현재의 전각은 대부분 조선 말기 때의 것이며, 3층 석탑·석등 등이 현존한다. 1481년 조선 성종 12년 이후 8년간 중건하였고, 조선 초기의 대표적인 건축물로서 국보로 지정된 장경판전(藏經板殿)에는 유명한 《고려대장경》이 보관되어 있다. 해인사는 1993년에 성철 스님이 입적한 곳이기도 하다.
한국 전쟁
해인사는 광복 후 한국전쟁 때 위기를 맞게 된다. 1951년 9월, 인천상륙작전 이후 대한민국으로 전세가 역전되면서 퇴각하지 못하고 남은 1천여 명의 북한군 잔당들이 해인사를 중심으로 게릴라 전을 전개했다. 이에 UN군에서는 폭격기 4대로 해인사를 폭격하라는 명령을 내렸으나, 당시 공군 편대장이었던 김영환 대령은 해인사와 팔만대장경이 소실될 것을 우려해 명령을 따르지 않았다. 이로써 해인사는 폭격당할 위기를 넘기게 되었다. 김영환은 그 공으로 대령에서 준장으로 진급했고, 현재 해인사 경내에는 그를 기리는 공덕비가 세워져 있다.
해인사의 문화재
1995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국보 52호 해인사 장경판전과 강화도 선원사(禪源寺)에서 조선 태조7년에 옮겨진 국보 32호 팔만대장경, 보물 제128호 반야사 원경왕사비(般若寺元景王師碑), 보물 264호 합천 해인사 석조여래입상(陜川 海印寺 石造如來立像), 보물 제518호 원당암 다층석탑 및 석등이 있다.
합천 해인사 장경판전
합천 해인사 장경판전(陜川 海印寺 藏經板殿)은 국보 제52호로, 해인사에 딸린 건물의 하나이다. 조선 초기의 건축물로 남쪽의 것을 수다라장(修多羅藏), 북쪽의 것을 법보전(法寶殿)이라 하는데 여기에 고려 대장경판을 보관하고 있다. 그 앞 두 동의 소당에는 보판(補板)과 잡판(雜板)을 소장하고 있다. 1995년 12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비로자나불상
해인사 비로자나불상은 국내 최고(最古)의 목조불상이다. 1200년 된 쌍둥이 비로자나불상으로서, 883년에 제작된 신라 목조 불상이다. 그동안 팔만대장경 전각의 법보전에 모셔져 있던 불상인데, 2005년 6월에 새로 금칠을 하던 과정에서 883년에 제작되었다는 기록이 발견되었다.
이를 보기 위해 노무현 대통령이 2005년에 방문했으며, 대통령이 약속한 특별지원금 30여억원으로 비로자나 부처님 영구보존사업을 벌여왔으며 2년여 만에 마무리됐다. 대비로전의 낙성식에 다시 노무현 대통령이 참석하였다.
김영환 대령
1951년 6.25전쟁 당시 김영환 대령은 해인사에 적군들이 숨어 있는 것을 알면서도 명령에 불복 하고 해인사 안에 숨어 있는 적군들에게 폭탄을 투하 하지 않았다. 이는 해인사를 지키기 위함이었으며 2002년에는 해인사에서는 그의 업적을 기린 공적비를 세웠다.
노무현 대통령과의 인연
평소 불심이 깊은 것으로 알려진 권양숙 여사는 2002년 10월 1일 당시 대선을 앞두고 합천 해인사에 머물고 있는 조계종 종정인 법전(法傳) 스님으로부터 보살계와 '대덕화(大德花)'라는 법명을 받았다. 고(故) 육영수 여사와 같은 법명이다. 이러한 법명 수계는 불교계의 민심이 실린 것으로 볼 수 있으며, 불교계의 기대를 받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이후 노무현 후보는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노무현 대통령은 재임기간 동안 3회 해인사를 방문, 현직 대통령으로서는 최다 방문을 하였다.
2003년 12월 22일 노무현 대통령이 부인 권양숙 여사와 함께 경남 합천 해인사를 불시 방문해 조계종 종정 법전스님, 총무원장 법장스님과 환담한 뒤 오찬을 함께 했다. 사패산 터널 문제에 대한 공약을 못 지키게 되었다면서 양해를 구했다.
노무현 대통령은 2005년 8월 30일 T-50 골든이글 양산 1호기 출고식에 참석했다. 그리고 해인사에 들러 비행기 사고 없이 잘 날아다니고 잘 팔아달라고 부처님께 기도를 했다. 취임 이래 두 번째 해인사 방문이다. 2007년 11월 24일 노무현 대통령은 해인사 대비로전(大毘盧殿) 낙성 대법회에 참석, 축사를 하였다. 세 번째 해인사 방문이다. 2009년 5월 24일 해인사 승려 300여명이 분향소를 찾아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를 애도했다. 하안거를 깨고 나와 조문을 한 것으로서,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합천 해인사 경판전
해인사 장경판전은 13세기에 만들어진 세계적 문화유산인 고려 대장경판 8만여 장을 보존하는 보고로서 해인사의 현존 건물 중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장경판전은 정면 15칸이나 되는 큰 규모의 두 건물을 남북으로 나란히 배치하였다. 장경판전 남쪽의 건물을 수다라장, 북쪽의 건물을 법보전이라 하며 동쪽과 서쪽에 작은 규모의 동·서사간판전이 있다.
건물을 간결한 방식으로 처리하여 판전으로서 필요로 하는 기능만을 충족시켰을 뿐 장식적 의장을 하지 않았으며, 전·후면 창호의 위치와 크기가 서로 다르다. 통풍의 원활, 방습의 효과, 실내 적정 온도의 유지, 판가의 진열 장치 등이 매우 과학적이며, 합리적으로 되어 있는 점은 대장경판이 지금까지 온전하게 보존되어 있는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라고 평가받고 있다.
장경판전의 정확한 창건연대는 알려져 있지 않으나 조선 세조 3년(1457) 어명으로 판전 40여 칸을 중창하였고 성종 19년(1488) 학조대사가 왕실의 후원으로 30칸의 대장경 경각을 중건한 뒤 보안당이라 했다는 기록이 있다. 광해군 14년(1622)에 수다라장, 인조 2년(1624)에는 법보전을 중수하였다. 장경판전은 가야산 중턱의 해인사에 위치한 관계로 서기 1488년 조선 초기에 건립된 후 한번도 화재나 전란 등의 피해를 입지 않았으며, 보존 가치가 탁월한 팔만대장경이 고스란히 간직되어 있는 것은 매우 다행스러운 일이다. 장경판전은 세계유일의 대장경판 보관용 건물이며, 해인사의 건축기법은 조선 초기의 전통적인 목조건축 양식을 보이는데 건물 자체의 아름다움은 물론, 건물 내 적당한 환기와 온도·습도조절 등의 기능을 자연적으로 해결할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
이 판전에는 81,258장의 대장경판이 보관되어 있다. 글자 수는 무려 5천2백만 자로 추정되는데 이들 글자 하나하나가 오자·탈자 없이 모두 고르고 정밀하다는 점에서 그 보존가치가 매우 크며, 현존 대장경 중에서도 가장 오랜 역사와 내용의 완벽함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지니고 있는 문화재이다.
대장경판은 고려 고종 때 대장도감에서 새긴 목판이다. 대장경은 경(經)·율(律)·논(論)의 삼장(三藏)으로서 불교경전의 총서를 가리키는 말이다. 일반적으로 해인사 대장경판은 고려시대에 판각되었기 때문에 고려대장경이라 하며 또한 판수가 8만여 판에 이르고 8만4천 법문을 수록했다 하여 8만대장경이라고도 한다.
고려 현종(1009~1031) 때 새긴 초조대장경은 몽고의 침입에 불타버려 다시 새겼다하여 재조대장경이라 일컫기도 한다. 초조대장경이 불타버리자 고려 고종 19년(1232)에 몽고의 침입을 불력으로 막기위하여 강화도로 수도를 옮기고 국가적인 차원에서 대장도감을 설치하여 대장경판을 다시 조각하기 시작하였다.
대장경판은 당초 경상남도 남해에서 판각하여 강화도 대장경판당으로 옮기고 보관하였으나 고려 말 왜구의 빈번한 침범으로 조선 태조 때인 1398년 현재의 해인사 장경판전에 옮겨 보관 중이다. 이 대장경판은 개태사의 승통인 수기(守其)가 북송관판과 거란본 및 우리의 초조대장경을 대조하여 오류를 바로잡은 대장경이다.
이규보가 지은 <대장각판군신기고문>에 보면 현종 2년(1011)에 거란병의 침입 때 대장경을 새겨 거란병이 물러갔음을 상고하고, 몽고의 침입으로 이 대장경판이 불타버려 다시 새기니 몽고의 침입을 불력으로 물리치게 하여 달라는 염원을 기록하고 있다. 대장경판은 고종 24년(1237)부터 35년(1248)까지 12년 동안 판각하였는데 준비기간을 합치면 모두 16년이란 기간이 걸려 완성 된 것이다.
해인사 동·서사간판전에 봉안되어 있는 불교 경전은 국가에서 새긴 고려대장경판과는 달리, 고려시대에 사찰에서 새긴 고려각판이다. 팔만대장경은 불교의 경·율·논 삼장을 집대성하였기에 세계불교연구의 귀중한 문헌으로, 이 대장경은 일본이 신수대장경을 만들 때 표준으로 삼았으며, 중국에도 역수입되고, 영국·미국·프랑스·독일 등 서구 선진국에도 전해져 세계불교 연구에 매우 커다란 영향을 끼치고 있다.
해인사 장경판전은 국보 제52호로 지정 관리되고 있으며, 소장 문화재로서는 대장경판 81,258판(국보 제32호), 고려각판 2,725판(국보 제206호), 고려각판 110판(보물 제734호)이 있다. 이 중 해인사 장경판전은 1995년 12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문화 유산적 가치
해인사 팔만대장경은 오랜 역사와 내용의 완벽함, 그리고 고도로 정교한 인쇄술의 극치를 엿볼 수 있는 세계 불교경전 중 가장 중요하고 완벽한 경전이며, 장경판전은 대장경의 부식을 방지하고 온전한 보관을 위해 15세기경에 건축된 건축물로 자연환경을 최대한 이용한 보존과학 소산물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
우리나라 3대 사찰의 하나로 신라 애장왕 3년(802)에 순응,이정 두 스님이 창건하였으며, 화엄경의 해인삼매에서 연유되어 법보종찰로도 유명하다. 고려 태조는 이 절에 머물렀던 희랑이 후백제 견훤을 뿌리치고 도와준 것에 대한 보답으로, 이 절을 고려의 국찰로 삼고 전지 500결을 하사했다.
해인사는 법보종찰이요, 화엄십찰의 하나이다. 최치원의 가야산 해인사선안주원벽기에 의하면 해인사는 순응, 이정 스님에 의하여 신라 애장왕 3년(802)에 창건되었는데, 그때 왕의 조대비 성목태후가 대시주였다고 한다. '해인'이란 화엄경의 '해인삼매'에서 유래된 것으로 해인사는 화엄사상을 천명하고자 이루어진 도장이다. 해인사를 우리나라 삼보사찰의 하나인 법보사찰이라 부르는 것은 해인사 대장경판전에 고려대장경판인 법보가 보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해인사에는 대장경판전, 대적광전, 명부전, 독성각, 응진전, 응향각, 퇴설당, 해행당, 심검당, 궁현당, 경학원, 적묵당, 관음전, 구광루, 보경당, 대장경보전연구소, 명월당. 사운당, 청화당, 범종각, 우화당, 해탈문, 천왕문, 일주문 등 많은 전당이 있다. 부속암자로서는 원당암을 비롯하여 홍제암, 용탑선원, 백련암, 지족암, 희랑대, 삼선암, 금선암, 약수암, 국일암, 보현암, 금강굴, 길상암, 고운암, 간월암, 청량사 등이 있다.
해인사 문화재
대적광전(大寂光殿)-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56호
대적광전은 비로자나불을 본존불로 모시는 화엄종 사찰의 중심 법당이다. 부처가 설법한 진리가 태양처럼 우주에 가득 비추는 것을 형상화한 비로자나불은 불교의 진리자체를 상징하는 불상이다. 비로자나불을 모신 전각은 대적광전 이외에도 화엄전과 비로전이 있다. 이곳은 대적광전은 802년(애장왕 3)에 순응,이정 두 스님이 창건하였다. 창건 당시의 명칭은 비로전이었으나, 1488년(성종 19)에 왕실의 지원에 의해 학조대사가 중창하면서 대적광전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현재의 건물은 1817년(순조17)에 불타버려 이듬해 중건한 것을 1971년에 지관스님이 다시 중수한 것이다. 큰 절의 중심 불전에 걸맞게 정면5칸, 측면 4칸의 다포계 팔작지붕을 한 우람한 모습이다. 정선이 그린 해인사 그림에는 대적광전이 2층으로 그려졌는데,1817년의 화재 이전에는 지금보다 더 큰 건물이었을 것이다. 지금 이 모습은 조선 후기의 전형적인 다포계 팔작집으로서 중수과정에서 많이 변형되었음을 알 수 있다. 법당 안에는 용기사에서 옮겨온 중앙의 큰 비로자나불을 비롯해 법단의 좌에서 우측으로 법기보살, 보현보살, 지장보살, 비로자나불(대), 비로자나불(소), 문수보살, 관세음보살 순으로 일곱분의 불보살님이 봉안되어 있는데 비로자나불과 지장보살이 함께 모셔진 것은 매우 이례적이다. 이는 주변지역의 불타버린 법당에 있던 지장보살을 옮겨 놓았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해인사(海印寺) 석등-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55호
석등은 부처님이 계신 사찰에 어둠을 밝히기 위해 만든 것이다. 부처님에 대한 등 공양과 관계된 것이므로 부처님을 상징하는 탑과 함께 법당 앞에 설치된다. 이 석등 역시 원래 석탑 앞에 있었지만 현재 위치로 옮겨놓았다. 옮겨진 이유와 시기에 대해서는 잘 알 수가 없다. 석등은 받침돌과 기둥돌, 등불을 놓는 화사석, 지붕돌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기둥돌이 원래의 모습이 아니기 때문에 전체의 크기는 알 수 없다. 맨 아래 네모난 받침대에는 코끼리 눈 모양의 무늬를 새겨 넣었으며, 8각형의 아래 위 받침대에는 8장의 연꽃잎을 각각 따고 하늘을 향하도록 새겨 넣었다. 화사석에는 4개의 창을 두었는데, 창 사이의 모서리 4면에 각각 사천왕상을 돋을 새김한 것이 이채롭다. 지붕돌은 역시 8각으로 처리하여 전체적인 조화를 이루었으며 맨 위에는 둥근 구슬을 올렸다. 새겨진 눈 모양과 연꽃무늬의 우아한 조각수법, 그리고 전체적인 양식으로 보아 통일신라시대의 석등으로 볼 수 있다. 한편 1398년 조선 태조 7년에 강화 선원사에 있던 팔만대장경을 지천사로 옮겼다가 이듬해 이곳으로 옮겨왔다. 팔만대장경판전은 1995년 12월에 세계문화 유산으로 공식지정 되었다. 경내에는 일주문, 대적광전,구광루 등 문화재 및 암자들이 즐비하여 찾는 이의 발길이 끊이질 않고 있다.
해인사 3층석탑-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54호
이 탑은 2중 기단과 3층의 탑신 및 지붕돌로 이루어진 통일신라 후기의 전형적인 석탑 양식이다. 원래 이 탑의 받침은 신라 석탑 양식인 2중이었으나, 1926년에 탑을 수리하면서 받침을 확장하고 한 층을 더 올려, 본래 지니고 있던 조화미를 상당 부분 상실하고 말았다. 4면의 각 모서리에 기중을 새긴 것 외에는 별다른 조각이 없다. 지붕돌받침은 신라 석탑의 전형인 5층으로 되어 있고, 지붕돌 추녀 끝은 살짝 들어올려져 완만하게 처리되었다.지붕돌의 각 모서리에는 작은 종이 달려있는데, 본래의 것은 없어지고 나중에 다시 매단 것이다. 탑의 꼭대기 역시 일부가 소실되어 꼭대기를 떠받치는 받침대와 위로 핀 연꽃, 바퀴만 남아있다. 1926년 6월에 이 탑을 수리하는 과정에서 상층 받침의 돌 함 속에서 9개의 작은 불상이 발견되었는데, 석탑을 수리하고 나서 이들 불상을 다시 탑 안에 봉안하였다. 또 이 석탑 앞에는 코끼리의 눈모양을 형상화했다는 안상과 연꽃무늬가 조각된 배례석이 있었으나 수리하는 과정에서 석등 앞으로 옮겨졌다. [조선불교통사] 에는 태조가 즉위하여 이 탑을 수리할 때, 대장경을 탑 안에 봉안하면서 나라의 번영과 백성의 평안을 빌었다는 기록이 전하고 있다. 그러나 1926년에 탑을 수리할때 대장경이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에 태조가 수리한 탑이 이 탑인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더욱이 근래의 사찰 보수 때 경학원 근처에서 신라 석탑의 재료가 발견된 것으로 미루어 또 다른 석탑이 있었을 가능성도 크다고 하겠다.
가야산(伽倻山)
가야산은 법보종찰 해인사의 주산이며 해발 1,430로서 소백산맥의 한 지맥으로 우리나라 팔경중의 하나인 영산일 뿐 아니라 조선조 세조대왕은 가야산은 천하명산이며, 생불주처라 하였고, 초대 주한 프랑스대사를 역임한 로제샹바르씨는 가야산의 승경과 고려팔만대장경판에 감복되어 마지막 유언에 나의 유해를 분말하여 해인사에 뿌려달라 하였으므로 1978년 1월 1일에 임종하고 그달 22일 해인사 천불동에 뿌려졌다. 무릉교에서 시작하여 홍류동 계곡은 홍송이 울창한 장장 10리여의 수석과 송림으로 이어져 다른 어떤 사찰과 명산에서도 보기 어려운 경관을 지니고 있다.
합천 학사대 전나무-경상남도 기념물 제 215호
이 전나무는 높이 약30m, 둘레 5.1m 쯤 되는 수령이 1,000년 이상 된 고목이다. 나무의 줄기가 지상 10m 높이에서 두 개로 벌어져 있으며, 나뭇가지가 아래로 향해 뻗어 있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이곳은 고운 최치원 선생이 만년에 벼슬을 버리고 가야산에 은거할 때 찾았던 곳이다. 학사대라는 이름은 고운 선생이 헌강왕때 29세의 나이로 한림학사 벼슬을 하였는데 그 벼슬이름을 따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고운 최치원 선생은 말년에 제자들 앞에서 이 곳에 지팡이를 꽂으며 "내가 살아 있다면 이 지팡이도 또한, 살아 있을 것이니 학문에 열중하라" 는 유언을 남기고 지금의 홍제암 뒤 진대밭골로 유유히 홀로 들어가신 전설로 유명하다. 그래서 이 전나무를 일러 고운 선생의 "지팡이 나무"라고 불리운다.
고려팔만대장경판 (국보 제32호), 대장경판전 (국보 제52호), 반야사원경왕사비(보물 제128호), 월광사지삼층석탑(보물 제265호), 합천군 가야면 치인리 마애불입상(보물 제222호), 청량사석조석가여래좌상 (보물 제265호), 청량사삼층석탑(보물 제266호), 지방문화재 제253호 길상탑 등이 있다. 중요민속자료 제3호인 광해군내외 및 상궁 옷들과 100여 종의 국보적 가치를 지니고 있는 귀중한 문화재이다.
고사목의 유래
이 나무는 신라 제40대 애장왕 3년(서기 802년) 순응과 이정 두 스님의 기도로 애장왕후의 난치병이 완치되자 왕이 이 은덕에 보답코자 법당과 승료 등 많은 가람을 헌공하여 해인사를 창건하였고, 이를 기념하여 식수한 나무라고 전해지고 있으며, 이 느티나무는 1,200여 년의 장구한 세월 동안 해인사와 더불어 성장하여 오다가 1945년에 수령을 다해 고사하고, 지금은 둥치만 남아 해인사의 장구한 역사를 말해주고 있다.
해인사의 통일신라의 전형적인 석탑, 해인사 길상탑
길상탑은 통일신라시대의 전형 석탑양식을 갖춘 탑으로 2층의 기단을 지니고 있으며, 특이한 점은 상층 기단이 하나의 돌로 조성되어 있다. 전체적으로 보아 탑신부에 비해 기단부가 낮고 넓어서 상당히 안정된 느낌을 준다. 옥개받침은 각각 5단으로 구성되어 있고 상륜부는 노반(露盤)이상이 결실되었으나 노반에 지름 5.2㎝ 정도의 찰주(刹柱)를 꽂았던 원형 구멍이 남아 있다.
이 탑에서 발견된 유물들은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그 중 소탑이 157개가 있으나 완전한 수량이 아니다. 이는 이 탑의 건립이 탑지(塔誌)의 기록에서도 알 수 있듯이 통일신라시대에 유행한 조탑경(造塔經)인 무구정광대다라니경에 의거했음을 보여 주고 있으며, 소탑은 원래 99개, 77개가 안치되는 것이 원칙이므로 19개는 망실된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4매의 탑지는 23㎝의 정방형으로 두께 2.4㎝의 검은 전판(塼板)으로 만들어졌는데 명문은 신라 말기의 대문장가인 최치원이 찬(撰)한 것으로서 유명하다. 즉 건령(乾寧) 2년(신라 진성여왕 8년, 서기 895)을 전후한 7년에 걸친 통일신라 말기의 혼란 속에서 창궐한 도적떼로부터 사보(寺寶)를 지키기 위해 힘쓰다 희생된 승속(僧俗)의 영혼을 달래기 위해 이 탑을 건립했다는 사실과 함께 탑의 높이, 공장승(工匠僧), 탑 안에 납입한 법보(法寶)의 내용 및 탑을 건립하는데 소용된 비용 등을 기록하고 있음이 주목된다.
특히 탑의 높이를 일장삼척(一丈三尺)으로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비록 상륜부가 결실되었으나 현재 탑의 높이를 3m로 볼 때 이 탑의 조성에 당척(唐尺)이 적용되었음을 보여주고 있어 당시 도량형을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가 된다. 뿐만 아니라 탑지의 기록에 따라 석탑건립에 소요된 비용과 물품 등은 당시의 사원 경제연구에 도움이 된다. 아울러 탑을 건립하게 된 배경 및 소요된 비용 등의 기록을 통해 통일신라 말기 혼란된 사회상을 비롯하여, 경제상을 밝히는 중요한 단서를 전해주고 있다.
대한불교조계종 제12교구의 본사이다.
의상의 화엄10찰 중 하나이고, 팔만대장경판을 봉안한 법보사찰이며, 대한불교조계종의 종합수도도량이다. 이 절은 신라 애장왕 때 순응과 이정이 창건하였다. 신림의 제자 순응은 766년(혜공왕 2) 중국으로 구도의 길을 떠났다가 수년 뒤 귀국하여 가야산에서 정진하였으며, 802년(애장왕 3) 해인사 창건에 착수하였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성목태후가 불사를 도와 전지 2,500결을 하사하였다. 갑자기 순응이 죽자 이정이 그의 뒤를 이어 절을 완성하였다. 해인사의 해인은 <화엄경>중에 나오는 ‘해인삼매’에서 유래한 것이다. 따라서, 해인사는 화엄의 철학, 화엄의 사상을 천명하고자 하는 뜻으로 이루어진 화엄의 대도량이다. 창건주인 순응은 의상의 법손으로서, 해인삼매에 근거를 두고 해인사라 명명하였던 사실에서 그의 창사의 이념을 짐작할 수 있다. 그는 화엄의 철학, 화엄의 사상을 널리 펴고자 하였다. 이러한 창사의 정신은 뒷날에도 오래오래 받들어져, 고려 태조의 복전이었던 의랑이 이곳에서 화엄의 사상을 펼쳤다.
현재 해인사의 사간장경 중에 화엄의 문헌이 많은 분량을 차지하고 있는 것 등도 이를 입증하는 자료가 된다. 특히, 고려의 태조는 희랑이 후백제 견훤을 뿌리치고 도와준 데 대한 보답으로 이 절을 고려의 국찰로 삼고 해동 제일의 도량으로 만들었다. 즉, 희랑이 후백제와의 전쟁에서 태조를 도와 승전하게 하였으므로, 태조는 전지 500결을 헌납하여 사우를 중건하게 하였다. 1398년(태조 7)에는 강화도 선원사에 있던 팔만대장경판을 지천사로 옮겼다가 이듬해 이곳으로 옮겨옴으로써 해인사는 호국신앙의 요람이 되었다. 그뒤 세조는 장경각을 확장학 개수하였으며, 1483년(성종 14) 세조의 비 정희왕후가 해인사 중건의 뜻을 이루지못하자, 1488년 인수왕비와 인혜왕비가 학조에게 공사를 감독할 것을 명하고 대장경판당을 중건하였다. 또한, 3년 동안의 공사 끝에 대적광전을 비롯하여 법당과 요사 160칸을 신축하였다. 그러나 1695년(숙종 21)에 실화하여 여러 요사와 만월당ㆍ원음루가 불탔고, 그 이듬해 봄에 또 불이 나서 서쪽 여러 요사와 무설전이 불타버리자 뇌음이 중건하였다. 1743년(영조 19)에 또 실화하여 큰 축대 아래 수백칸이 불타버렸지만, 당시 경상도관찰사 김상성의 도움으로 능운이 중건하였다. 또, 1763년에 실화하였으나, 관찰사 김상철의 협조로 설파가 중건하였으며, 1780년(정조 4)에 불이 나자 5년 만에 성파가 중건하였다. 1817년(순조 17)에 다시 큰불이 나서 수천칸이 모두 불타버렸는데, 관찰사 김노경의 도움으로 영월ㆍ연월 등이 소규모로 중건하였으며, 1871년(고종 8)에 법성료가 다시 실화되었다. 이 절은 창건 이래 수많은 화재를 겪었으나 장경각만은 온전히 보전되어왔다. 조선시대의 불교탄압시에 36개의 사찰만을 남겨둔 적이 있었는데, 그때에 해인사는 교종 18개의 사찰 중의 하나로 남아 전답 200결과 승려 100명을 지정받았다. 또, 1902년에 원흥사를 전국의 수사찰로 정하고 전국에 16개 중법산을 두었을 때 이 절은 영남중법산으로 수사찰이 되었으며, 1911년에 전국을 31본산으로 나누었을 때 16개 말사를 관장하는 본산이 되었다.
현재는 말사 75개와 부속암자 14개를 거느리고 있으며, 대법보사찰로서 선원ㆍ강원ㆍ율원 등을 갖춘 총림으로서 한국불교의 큰 맥을 이루고 있다. 이 절의 당우로는 대적광전을 비롯하여 명부전ㆍ삼성각ㆍ응진전ㆍ조사전ㆍ퇴설당ㆍ응향각ㆍ관음전ㆍ궁현당ㆍ구광루ㆍ경학원ㆍ명월당ㆍ사운당ㆍ해탈문ㆍ국사단ㆍ봉황문ㆍ일주문 등이 있고, 중요문화재로는 국보 제32호인 팔만대장경과 국보 제53호인 장경각, 보물 제264호인 석조여래좌상, 보물 제518호인 원당암다층석탑 및 석등, 보물 제128호인 반야사원경대사비, 사간장경 중의 보물 다수 등이 있다. 이 중 대적광전은 법보사찰 해인사의 중심법당이다. 창건 이후 건물의 내력에 대하여는 알 수 없으나, 현 건물은 1817년(순조 17) 제월과 성안이 건립한 것이다. 내부에 봉안된 비로자나불과 문수보살상ㆍ보현보살상은 본래 성주군 금당사에 봉안되어 있었으나 이 절이 폐사될 때에 용기사로 옮겨졌다가 1897년 범운에 의하여 현재의 위치에 봉안되었으며, 원래부터 있던 비로자나불과 문수보살ㆍ지장보살ㆍ보현보살도 함께 봉암되어 있다.
장격각은 법보사찰 해인사의 기본 정신을 대변해주는 건물이다. 민족의 지보 고려대장경판을 봉안해둔 2개의 판전으로서, 경판의 보관을 위한 가장 과학적이고 완전무결한 걸작으로 인정받은 건물이다. 명부전은 지장전이라고도 하며, 목조지장보살 및 시왕상이 봉안되어 있다. 크기는 19평으로 1873년(고종 10)에 담화대사가 옛금찹전 자리에 신축하고, 경상남도 웅천의 성흥사에서 옮겨온 시왕상을 봉안하였다. 응진전은 나한전이라고도 하며, 소조 석가여래 및 16나한상이 봉안되어 있다. 크기는 23평으로 본래는 해행당이며, 1488년(성종 19) 학조대사가 초창하여 역대선사의 영정을 봉안하였던 곳이다. 현건물은 1817년 성안대사가 중건하였고, 내부의 나한상은 1918년 판전 서재에서 옮겨 봉안하였다. 응향각은 노전이라도 하며 크기는 74평으로 1936년에 고경이 건립하고, 현재는 선원으로 사용하고 있다. 퇴설당은 70평으로 1817년 제월대사가 건립하였고, 현재 선원으로 쓰이고 있다. 행해당은 조사전이라고도 하며 순응ㆍ이정 등 50여 조사의 영정이 봉안되어 있다. 크기는 14평으로 1899년 범운대사에 의하여 건립되었고, 본래는 희랑조사상이 봉안되어 있었으나, 지금은 보장전으로 이안되었다. 심검전은 관음전이라고도 하며, 목조관음보살상이 봉안되어 있다. 크기는 3동 80칸으로 창건연대는 미상이고, 현건물은 1908년 회광이 천상궁의 시주로 중건하였으며, 현재 요사로 사용되고 있다. 궁현당에는 관세음보살상이 봉안되어 있다. 3동 80칸으로 1407년 학조대사가 중건하였고, 1963년 해붕이 삼창하였으며, 1908년 회광이 관음전과 함께 중건하였다.
현재는 불교전문강원으로 사용되고 있다. 경학원은 경홍전이라고도 하며 크기는 34칸이다. 1892년 민형탁의 뜻에 의하여 범운대사가 건립하였다. 처음 왕ㆍ왕후ㆍ태자의 삼전위축소로 건립되어 경홍전이라 불렸다. 구광루는 크기는 67평으로 1818년 감사 김이재의 주선으로 건립되었다. 본래는 재식시 법요를 집행하던 곳이었으나 현재는 사중의 유물전시관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동쪽 한칸은 종고루로 사용되었다. 명월당은 크기는 146평으로 창건연대는 미상이고, 현건물은 1940년 설호대사가 중건하였다. 예전에는 승정을 행하였고, 지금은 종무소로 사용되고 있다. 해탈문의 창건연대는 미상이며 1817년 중건하였고, 1899년 범운대사가, 1940년 사중에서 중수하였다. 국사단은 6평으로 현건물은 1855년에 건립하였으며, 1899년 범운대사가 중수하여 국내를 맡은 신을 안치하였다. 봉황문은 1817년 건립하였으며, 사천왕탱이 안치되어 있다. 일주문은 1940년에 건립되었다.
그밖의 해인사의 성보로는 정중탑ㆍ묘길상탑ㆍ가야산 석불ㆍ원경왕사비ㆍ오백나한도ㆍ금은자사경ㆍ희랑조사상ㆍ세조영정ㆍ상탑향로ㆍ무공수정ㆍ옥등잔ㆍ진주등ㆍ순은화병ㆍ관욕소관ㆍ오동향로ㆍ순은다기ㆍ순은향료ㆍ순은방향로ㆍ향로개ㆍ요령ㆍ감로병ㆍ일영의ㆍ봉촉대ㆍ귀형촉대ㆍ관복ㆍ오조어필첩ㆍ법라ㆍ옥제조화ㆍ금강저ㆍ각사인ㆍ헌종어필ㆍ삼보인ㆍ계첩석판ㆍ팔상병ㆍ33조사영병ㆍ복수수병ㆍ숙종어필ㆍ화초수병ㆍ화조오채병ㆍ흑판복수병ㆍ복수채병ㆍ대화로ㆍ금산첩ㆍ방울ㆍ대종ㆍ소종ㆍ경허친필ㆍ명문와ㆍ향합 등이 있다. 해인사를 도량으로 삼고 머물렀던 고승들 가운데 불교사를 통하여 뚜렷한 위치를 차지하였던 이들로는 사명대사ㆍ선수ㆍ희언ㆍ각성 등이 있다. 그리고 사상적인 맥을 따질 때, 이 절이 화엄사찰이므로 의상대사를 비롯하여 신림ㆍ희랑 등 신라시대의 화엄의 대가들과도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고 있다. 고려시대에 와서는 의천ㆍ경남 등이 있고, 조선시대에는 학조ㆍ체정ㆍ유기ㆍ유일ㆍ상언ㆍ유안ㆍ성여 등 유명한 승려들이 이 절에 머물렀다. 또한, 역대 명인들과도 깊은 인연을 맺고 있는 것이 다른 사찰들에 비하여 두드러진 점이다. 말년에 가야산에 들어와 생애를 마친 최치원이라든가 대장경 조성에 있어 전설적인 이야기를 남긴 이거인, 김정희, 그리고 홍길동으로 알려져 있는 정인홍 등은 모두 이 절과 떼어놓을 수 없는 인물들이다. 산내 암자중 유서가 깊거나 규모가 큰 것은 신라왕실의 원찰로 전해지는 원다암을 비롯하여, 백련암ㆍ지족암ㆍ희랑대ㆍ국일암ㆍ약수암ㆍ용탑암ㆍ삼선암ㆍ금선암 등이 있다.
'상큼추억여행'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약산과 홍은사 (0) | 2018.12.27 |
---|---|
[스크랩] 합천 (가야산 해인사) (0) | 2018.12.27 |
[스크랩] 실상사 (0) | 2018.12.27 |
[스크랩] 하동 쌍계사 진감선사탑비(河東 雙磎寺 眞鑑禪師塔碑) (0) | 2018.12.27 |
[스크랩] 지리산 산행기(1)-지리산의 문화적 배경 (0) | 2018.12.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