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산엔 명찰(名刹)이 있습니다.
멋진 계곡을 따라가도 그렇습니다.
내설악 수렴동 계곡에는 오세암과 백담사가, 봉화~울진 간 36번 국도 변의 불영 계곡엔 불영사가, 동해시 두타산 무릉계곡에는 삼화사가, 장장 70리 무주 덕유산 구천동 계곡엔 백련사가 있습니다. 가야산 홍류동 계곡에는 해인사가 있습니다.
홍류동 계곡,,,구름다리 넘어에 농산정,최치원의 題 詩 石이 있습니다.
홍류동(紅流洞),,, 紅이 흐르는 계곡입니다. 봄에는 진달래와 철축이,가을에는 단풍이 계곡물을 향해 나르키소스 합니다. 홍류동 계곡은 1년 중 두번 지금이 적기입니다.
10리 길,계곡 따라 해인사에 이르는 길은 멋집니다. 길 옆으로 급격한 경사를 이루며 길을 감싸 안은 산세가 그렇습니다. 길 따라 흐르는 계곡 물은 명징(明澄)합니다.
금방 신선,선녀라도 오를듯합니다.
옛길은 거의가 계곡을,하천을,강을 따릅니다. 대동여지도 등 옛 지도에는 길이 표시되어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지도를 놓고 강을 따라 그으면 바로 옛 선인들의 길이 됩니다. 그 길은 흐르는 물과 함께 하기에 낭만이 있고 여유가 있습니다. 해인사 가는 길도 바로 그런 길입니다. 계곡 따라,전지현 같은 금강 소나무들이 열병합니다. 금강소나무의 다른 이름은 美人松입니다.
심산 유곡 바위들의 공통된 특성이 하나 있습니다. 유별나게 희고 회색빛입니다. 흰색의 바위들이 소(沼)라도 만날지라면 물빛은 에머랄드입니다.. 푸른 하늘을 담아내서 일까,보는 이의 마음이 푸르러서 일까? 가을날, 계곡 물은 푸르름의 절정입니다. 바위들,수천만년 동안 우당탕탕! 물에 부대끼다 보니 희게 탈색되었나 봅니다.
우리가 계곡서 아름다움을 느끼는 건,비단 자연적인 美 때문만은 아닙니다. 감성의 촉수를 건들이는 뭔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 3대 계곡의 하나가 설악산 천불동 계곡입니다. 그런 천불동 계곡이, 맞은 편 백담사 계곡 보다 이목을 끌지 못하는 건 인문(人文)의 2% 부족 때문입니다.
백담사 계곡엔 백담사,오세암,봉점암이 있습니다. 백담사의 이전 이름 한계사에는 마이태자의 신라 부흥 의지가 서려있습니다 만해 한용운은 <님의 침묵>을 백담사에서 썼습니다.전두환이라는 현대사의 질곡도 있습니다. 오세암을 지나노라면 다섯살 아이의 성불 전설이 행인의 맘에 파문을 던집니다. 조선조 최고 아웃사이더 김시습이 머리를 깎았고,한용운이 수도했습니다.
홍류동 계곡도 그런 곳입니다. 김종직이,강희맹이,정구가,이중환이,우담 정시한이,우암 송시열이,목은 이색이,,,,, 많은 시인 묵객이 홍류동서 자연을,인생을 노래했습니다. 하얀 반석 위에 다양한 흔적도 남겼습니다. 차창으로 스치는 홍류동은 그냥 자연의 경의이지만 내려서면 갤러리요,음악회입니다. 문기(文氣)가 넘치는 백일장입니다.
홍류동 계곡을 일찍이 선점한 인물이 고운 최치원(857~?)입니다. 고려 건국 직전의 격동기를 살았습니다. 12세에 당나라로 간 조기유학생입니다. 그는 귀국 후 견훤의 책사로 이름을 떨친 최승우와 함께 당나라로 유학합니다. 전남 영암서 배를 탔습니다.장안 까지 3개월 거리입니다. 당시 해마다 약 200여명이 당나라로 갔습니다.
당시 중국 행은 서해를 건넜습니다. 의상은 당진군 당성서 배를 탔습니다. 원효는 당성 인근 옛 무덤서 잠들다 해골 물을 마신 후 유학을 포기했습니다. 나당연합군 소정방은 지금의 대호방조제인 당진 삼길포로 들어왔습니다. 대원군은 대부도 화성 마산포서 청나라로 끌려갔습니다.
당시 장안의 국립대학 국자감에는 8000천명 정도의 학생이 수학했습니다. 절반이 유학생이였습니다.8년 코스로,최치원은 7년만에 졸업합니다. 전 해에는 발해 출신 유학생이 1등 했나봅니다. "지난해 발해에 빼았긴 장원을 되찾아 수치를 씻었다" 장원 급제 후 최치원의 mbc 인터뷰입니다. 시문에 뛰어나 시인 묵객과 교류합니다.
대적광전 앞 3층 석탑과,,,해인사는 팔만대장경,성철로 인해 과대포장된 측면이 있습니다.
사찰은 생각 보다 작다.외국이들이 가장 인상을 남기고 간 사찰은 구례 화엄사다.
율수라는 곳에서 공직을 시작합니다. 지금 율수에는 최치원 동상도 있습니다. 기념품으로 그의 시,영정등도 판매합니다. 황소의 난 때 그가 쓴 격문은 고금의 명문으로 남아 있습니다. 당나라 정사(正史)인 당서,신당서엔 외국인으로는 유일하게 이름과 문집인 계원필경이 들어있습니다.
요즘 미국서 인정 받는 학자들은 귀국을 꺼려합니다. 그때도 마찬 가지였습니다.그러나 그는 귀국합니다. 신라 사회에 대한 변혁의 의지를 품어서입니다. 그는 성골,진골 다음의 6두품 출신입니다.신분의 한계가 분명했습니다. 그래서 떠난 유학이였습니다. 귀국 후 진성여왕에 사회개혁안인 <시무10 여조>를 올립니다. 개혁은 혁명 보다 힘드는 법입니다. 뿌리 깊은 기득 세력의 저항에 중앙정치를 떠납니다.
그의 첯 지방 근무는 함양 태수직입니다.지금의 함양 군수입니다. 경상 좌도에 안동이요,우도에 함양이라 했습니다.그 함양입니다. 백성 위한 실질적인 사업에 힘씁니다. 당시 함양은 지리산 자락이라 갑작스런 소나기 등으로 하천의 범람이 잦았을 겁니다. 둑을 쌓고, 물길을 돌리고,방수림을 심었습니다. 이렇게 하여 유명한 함양 상림(上林)이 생겨납니다. 함양 상림은 우리나라 최고의 제방,치수,녹화사업입니다. 지금 일대 상림은 천연기념물로 전국적으로 유명한 휴식처가 되었습니다.
당시 불교는 교종 천하입니다. 왕즉불(王卽佛)입니다.세상엔 이상 세계의 부처와 현실의 왕만이 존재합니다. 의상을 필두로 한 화엄종은 신라사회의 정치적 이데올로기였습니다. 조선조에선 성리학으로 무장한 사대부들이 왕권의 정치적 기반이였듯이. 화엄승려들은 이데올로그입니다.
당시 종교는 요즘 종교와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불교는 종교,정치,행정,문화 심지여는 군사 조직이였습니다. 지금 처럼 주지 임명을 종단서 하는게 아니라 왕이 임명했습니다. 권력은 대를 이을 태자를 제외하고,후궁서 난 왕자들은 죄다 승려로 보냅니다. 손쉬운 혈연 통치를 위해서 입니다. 고려 문종의 네째 아들인 대각국사 의천도 그런 경우입니다.
한마디로 사찰은 신라 정치 조직의 핵심이였습니다. 삼국통일 후 의상과 그의 제자들이 전국에 화엄 10찰을 세운 이유도 이런 정치적 이유에서 입니다. 정복지에 대한 백성들의 원활한 통치를 위해서 입니다. 해인사,화엄사,부석사,낙산사,범어사,모악산 국신사(現귀신사)등이 그렇습니다. 해인사도 이렇게 하여 번성합니다. 해인사 개창조인 순응(順應)은 의상의 손제자(孫第子)입니다.
꽃도 피면 집니다.신라 사회도 하향곡선을 긋습니다. 변혁기엔 늘 새로운 사상이 유입됩니다. 달마를 종조로 하는 선종(禪宗)입니다. 선종은 상대적으로 평등하고 인본적인 데가 있습니다. 누구나 노력하면 부처가 될수있다 했습니다.전엔 왕만이 부처였기에 획기적입니다.
변혁의 사상이기에,선종은 중앙권력 경주서 떨어진 산간오지서 부터 뿌리를 내립니다. 첫 출발지가 설악산 진전사 입니다.지금은 부도,석탑 등 터만 있습니다. 이어 곡성 태안사,남원 실상사,보령 성주사 등으로 이어져 소위 구산(九山)선문(禪門)을 형성합니다. 왕권 위한 화엄종 중심의 교종 對 호족 중심의 선종의 구도가 만들어집니다. 진전사는 이렇게 우리나라 사상사에 있어 기념비적인 곳입니다.
누구나 부처가 될수 있음은 지방 호족들도 왕이 될수 있다는 논리가 됩니다. 신라말 호족들의 발호도 선종과 연관이 있습니다. 그들은 경제적인 부를 선종 사찰 건립에 사용합니다. 자신의 모습을 한 불상도 제작합니다.강인한 인상의 철불들입니다. 그래서 이 시기 불상은 종교적인 엄숙미 보단 투박하고 사람의 냄새가 납니다.
왕건도 개경의 지방호족 출신으로 선종 세력과 관계합니다. 고려는 호족들의 권력입니다. 고려 건국은 사상사적으로 선종의,사회 경제적으로는 호족들의 승리입니다.
이런 와중에 최치원도 존재합니다.선종 승려들과 교류합니다. 현존하는 그의 4대 비문(碑文)은 모두가 선종의 승려를 추모하는 글입니다. 하동 쌍계사 진감선사,보령 성주사 낭혜화상,문경 봉암사 등등,,,
유학 동기 최승우는 견훤의 책사가 돼 현실로 뛰어듭니다. 그러나 그는 사회적인 벽에 부딛치고 은둔에 들어갑니다. 둘다 경주 최씨입니다.후대는 최치원을 시조로 모십니다. 은둔지가 바로 해인사의 가야산입니다. 흔적들이 가야산 일대에 인근 청량사에도,묘길상탑에도 있습니다.
특히 그가 유유자적했을 홍류동 계곡에도 있습니다. 반석에 음각으로 소회를 새겼습니다. 원글은 지워졌고 후대에 쓴 것이라는 설도 있지만 지금도 그 제시석(題詩石)을 볼수있습니다. 단숨에 내려간듯 힘있는 28개 글자입니다.
최치원의 체취가 있는 제시석.뒤가 농산정으로 벽면엔 書閣이 빼곡합니다.
최치원,홍류동 계곡을 중심으로 노닐었겠지만 자세한 행적은 모릅니다. 형이 해인사 승려로 있었습니다. 최치원의 호는 고운(孤雲)입니다.외로운 구름입니다. 현실서 좌절, 외로움으로 살다 구름 타고 신선이 되었는지도 모릅니다. 신선된 노자(老子)는 200년을 더 살았답니다. 그 처럼요. 그래서 그의 영정은 역사 인물 중 가장 다양하답니다. 30여 종류. 정치인,학자,신선의 모습으로.
대문장가로 팔만대장경 제작 책임자였던 이규보는 "학자들은 모두 최치원을 조종(祖宗)으로 생각한다"라 했습니다. 유학의 조종이 이곳서 말년을 보냈으니 후학들이 가만있을리가요. 송시열,정구,김종직,조식 등등이 제시석 주변의 너럭 바위에 소회들을 풀어 놓았습니다. 제시석 뒤쪽에 농산정이 있습니다.
차를 세우고 구름다리를 건너 농월정으로 갔습니다. 농산정 벽에는 서각(書閣)으로 빼곡합니다. 농산정 아래로 내려가 제시석을 보고 만져도 보았습니다.감회는 별로입니다. 그냥 신발벗고,양말 벗고 탁족(濯足)했습니다.
탁족,,, 계곡서 발을 담구며 더위를 물리치는 선인들의 풍속입니다. 옛사람들은 오뉴월 무더위에는 계곡서,하천서 천렵에 탁족으로 더위를 넘겼습니다. 승경의 계곡에 정자를 세우고 탁족함은 선비들의 특권이였습니다.
이경윤의 고산탁족도,작자 미상의 삼복탁족도가 유명합니다. 삼복탁족도는 속화(俗畵)로 선비들의 탁족하는 옆에서 세여인의 목욕 누드가 나옵니다.
노자(老子)가 속세를 버리고, 소등에 걸터앉아 은둔을 떠납니다. 중원과 서방을 연결하는 함곡관을 지날 때입니다. 이 지역 벼슬아치인 윤회가 나서 가르침을 청합니다. 老子,윤회의 인품에 반했는지 5천 자를 적어두고 사라졌습니다. 바로 유명한 <도덕경>입니다.
도덕경은 성경 다음으로 베스트 셀러요,롱 셀러입니다. 노자,장자 사상의 핵심이 여기 5천자에 있습니다. 공자,맹자의 유가는 성리학으로 이어져 지배층 논리가 됩니다. 노자,장자의 도가는 민초들의 생활 속으로 파고듭니다. 유유자적,외유내강.신선 등은 노자 사상에서 유래합니다. "물을 배우고" "물을 닮고" "물 처럼 살라"는 사상입니다.
톨스토이도 노자에 쉼취했습니다. 동 시대 공자도 노자를 찾아 스승의 예로 대하였습니다. 80세 까지 어머니 배속에서 자라다 태어났기에 老子입니다. 노자 처럼 될수는 없지만 노자를 알아보는 윤회 같은 사람은 되었으면,,,,,, 언감생심입니다.
유교는 초기에는 당위성의 도덕 법규에 불과했습니다. 도가,불가 처럼 웅온한 세계관이 없었습니다. 유교의 역사는 곧 이론의 보완사입니다. 수세기를 거쳐 도가,불가의 철학을 차용하며 발전합니다. 주희가 집대성하는데 이게 바로 성리학입니다.
이론의 발전사에 퇴계 이황도 한목했습니다. 유가는 성리학에서야 비로서 자신의 세계관을 갖습니다.
도교의 신선 사상이 차용되다 보니 조선의 사대부들도 도교적 삶을 추구합니다. 성리학에 밀착된 중앙 정치서 소외되면 낙향,심산유곡에 정자를 짖고 음풍농월합니다. 도교적 삶입니다.노자 처럼,최치원 처럼,,,, 조선조 사대부들은 성리학적 삶과 도교적 삶 사이의 시계 추 인생이였습니다.
시 짓고,거문고 타고,음주가무하다 보니 흔적을 남기고 싶었나 봅니다. 이들이 지나는 곳엔 늘 글이 있습니다. 정자 네 귀퉁에 서각을 다는 것만으로는 부족했는지 단단한 화강암에 음각으로 새겨놓습니다.
그래서 유명 계곡의 반석에는 예외없이 이들의 자취가 남아있습니다. 동해 무릉계곡에도,괴산 화양동 계곡에도,홍류동 계곡에도,설악산 와선대,비선대에도,함양 농월정에도,,,,,,,,,,, 사대부들이 그러하니 백성들도 따라합니다. 이렇게 주변 바위가 온통 글자 판입니다. 아마 수백년전,외국인이 이곳에 왔었다면 외계인의 對지구 메시지로 여겼을 겁니다.
낙서문화는 사대부 문화이다.세로 바위가 제시석입니다.
승경의 계곡 너럭바위는 이미 사대부들의 낙서장으로 변한지 오래다.
낙서하면 심적인 혼탁이 ,정신적인 미숙이 떠오릅니다. 그러나 낙서는 이렇게 사대부 문화입니다.
왼편으로 명징한 계곡을 끼고 오르면 오른편 길가에 사적비,송덕비,부도비들이 보입니다. 바로 옆에 천덕꾸러기 같은 왜소한 3층 탑이 있습니다. 묘길상탑(妙吉祥塔)입니다.비록 작지만 큰 의미의 탑입니다.
탑은 부처님의 무덤입니다.석가의 사리를 안치합니다. 부도는 스님의 무덤입니다.부도는 최치원 시대에 등장한 조형물입니다. 전엔 부처만이 지존이였지만 선종이 들어오면서 달라집니다. 선종선 노력하면 누구나 부처가 될수있다 했으니, 고승들도 죽으면 다비후 석조 조형물에 사리을 안치합니다. 부도가 이렇게 탄생합니다.
탑은 보통 불국사 3층 석탑,정림사지 5층석탑 등으로 이름이 붙습니다. 길상탑은 그냥 길상탑입니다. 탑을 받치고있는 지석(地石)에는 최치원이 쓴, "진성여왕 때 세웠고,전쟁서 사망한 영혼의 명복을 빌기위해서"라는 글귀가 있습니다. 요즘 말로 전몰장병 위령탑입니다
묘길상탑,,,농민과 해인사 승병간의 싸움서 사망한
승병을 위한 전몰위령탑으로 여겨집니다.
숙부인 각간 金위홍과의 사랑으로 유명한 진성여왕,,,,, 이 시기는 천년사직에 낙조가 드리우기 시작합니다. 중앙 권력,지방 권력,대형사찰의 지방민들에 대한 수탈이 극에 달하던 시기입니다. 사찰은 어떤 형태로든 중앙,지방 권력과 밀착되어 있었습니다. 인근 지방민들의 봉기가 해인사로 향했을 것으로 여겨집니다. 전몰장병은 사망한 승병일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합니다.
학명(學名)은 korean bell,우리나라의 범종(梵鐘)은 우수합니다. 음관(音管)의 존재 등 다향한 기능에,디자인에도 탁월합니다. 우리나라 3대 종은? 선덕대왕신종(771),상원사종(725),선림원터 출토 범종(804)입니다.
선림원터 범종은 기막힌 사연이 있습니다. 해방 직전 설악산 인근 미천골 선림원터에서 발굴되었습니다. 산사태로 절 전체가 수백년 동안 묻혀있었습니다. 발굴 이후 오대산 월정사로 옮겨졌습니다. 한국전쟁 때 월정사가 전소되었고 범종도 녹았습니다.잔재가 국립박물관에 있습니다. 수백년을 뭍여있었으니,몇년만 더 있다 나올 것이지,,,,,,,, 조선 성종 때 만든 아름다운 범종이 해인사 박물관에 있습니다.
고승이 죽으면 부도를,부도비를 만들고 진영(眞影)을 그려 응진전에 걸어 추모합니다. 대웅전에 부처를 모시듯,응진전은 고승을 모시는 곳입니다. 서양에서는 흉상, 전신상을 제작합니다. 우리네 전통은 아니지만 고승의 전신상이 해인사에 있습니다. 10세기 전후 作으로 목조희랑대사상(木造希朗大師像)입니다. 사실적입니다.가슴에는 조그마한 구멍이 있습니다. 모기에 피를 보시하는 구멍이랍니다.
희랑대사의 생존 시기는 후삼국의 시기입니다. 정치적 변혁기엔 정치하는 자이든,경제하는 자이든 권력의 향방에 촉수를 세웁니다. 종교도 마찬가지입니다.
해인사도 두파로 나뉩니다. 남악파는 견훤에,북악파는 왕건에 줄을 섭니다. 결국 북악파의 종장인 희랑대사가 승리합니다. 이렇게 고려 건국 후 해인사는 또한번 번창합니다. 김제 금산사,속리산 법주사,팔공산 동화사가 대표적인 親견훤 사찰입니다.
천안~논산간 고속도로를 타고 가다보면 논산 인근서 푯말 하나가 시선을 끕니다. '견훤왕 묘'라는 이정표입니다. 패자인 견훤,그냥 견훤이였는데 이렇게 복권되어 있었습니다. 궁예 묘도 발견 된다면 궁예왕 묘일겁니다.
수행자의 벗 석가가 80세로 입멸(入滅)합니다. 한 젊은 수행자가 외칩니다. " 자,해방이다.늙은 잔소리꾼은 우리 곁은 떠났다." 당시 장로들은 충격이 컸습니다.서둘러 세존의 가르침을 결집하는 회의가 소집됩니다. 세존의 가르침을 정리하기 위해서 입니다.
그해 중인도 마가다국의 한 바위굴에 500여 장로가 모였습니다. 주재자는 마하가섭입니다. 세존으로 부터 들은 가르침을 모으고 토론 거쳐 통일된 교설을 확정하기 위해서 입니다. 20년간 수행비서였던 아난존자의 역할이 컸습니다. 당시는 글자가 없던 시절입니다. 아난이 듣던 바를 송출(誦出)하면,장로들이 검토한 뒤 500여명이 한 목소리로 합창합니다. 장엄한 광경이였을 겁니다.
생활 규범,즉 계율은 우바리존자가 송출자였습니다. 그는 10대 제자중 계율의 1인자였습니다. 여시아문(如是我聞),,,, "나는 이같이 들었다"의 출처입니다.
내가 살던 동네에 10여년전 매년 가을이면 마당극 축제가 열렸습니다. 마당극은 지난(至難)했던 80년대 청년문화의 소산입니다. 그해 가장 인기 있던 마당극 제목이 '여시아문'이였습니다. 쌀쌀한 가을밤 외투 걸치고,애들 안고 쭈구리고 보던 당시가 새록새록합니다.
종교의 교리 형성 과정이 그렇듯,'경'과 '율'에 대한 다양한 연구가 이뤄집니다. 주로 고승들에 의해서 입니다.통칭하여 논(論)이라 합니다. 논문(論文)의 유래입니다. 이렇게 경장(經藏),율장(律藏),논장(論藏)의 삼장(三藏)이 갖춰집니다.
비단 불가의 얘기만은 아닙니다. 기독교도 이와 유사한 과정을 거칩니다. 성서는 하늘서 팩스로 도착한게 아닙니다.후대인들의 작품입니다. 격동의 시기에 인간이 만들어낸 역사적 기록입니다. 무수한 변형이 이루어집니다.성경은 결코 결정판이 아닙니다. 선대 솔로몬,다윗왕의 피를 받은 한 유대왕의 삶에 관한 따르는 자에 의한 기록입니다.
80여개가 넘는 복음서가 있었습니다.필요한 것들이 취사 선택 되었습니다. 초기 교회는 필요에 의해 예수의 인간적인 삶이 기록된 복음서는 제외시켰습니다. 성서는 이도교였던 로마 콘스탄티누스 황제에 의해 325년에 최종 버전으로 나옵니다. 당시 로마는 태양숭배였습니다.황제가 곧 사제였습니다.
기독교가 급속도로 확장됩니다. 위기를 느낀 로마 권력은 말을 바꿔탈 필요를 느낍니다. 기독교를 국교로 삼은 것입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최고의 CEO 였습니다.
그는 교파 대표들의 모임인 <니키아 공회의>를 소집합니다. 여기서 많은 기독교 사안들이 토론되고 확정됩니다. 부활절 날짜가 결정되었고 예수의 신성도 부여됩니다. 이전에는 예수도 한명의 예연자였지만 비로서 신의 아들이 됩겁니다.
주일은 일요일 sunday입니다.바로 태양의 날입니다. 로마시대 태양신을 모시는 날입니다. 당시의 이도교에 대한 흔적이 이렇게 남아있습니다. 1950년,45년에도 당시 복음서가 발견되었습니다. 바티칸은 공개를 않고있습니다.
산트크리스트 경전이 중국으로 전해지면서 번역과 대중화가 시급했습니다. 당시는 배껴쓰는 필사에서 대중화를 위한 시도가 이뤄집니다. 나무로 대장경판이 제작됩니다.최초로 983년 북송대장경판이 나옵니다. 뒤이어 대장경을 만든 나라가 고려입니다. 고려 현종(1011) <초조대장경>입니다.북송 것보다 876권이 더 많습니다. 이어 대각국사 의천에 의해 속장경이 만들어집니다.그러나 둘은 현존하지 않습니다. 경판 일부가 송광사에,일부 판본이 일본에 있습니다.
초조대장경은 팔공산 부인사에 봉안됩니다. 우린 몽고 침입으로 불탄 것으로 배웠습니다. 몽고 2차 침입은 처인성 전투서 살리타이가 승장 김윤후의 화살에 맞아 사망하고 퇴각합니다. 경상도와 강원,충청의 경계인 소백산맥을 넘지 못했으니 사실이 아닙니다. 대장경의 소재는 지역민에 많은 잡세와 노역을 낳았을 겁니다. 농민들은 부인사를 습격하고 방화한 것입니다.
대장경판전 내부.자연환경을 이용한 보존과학의 극치이루고 있답니다.
대몽항쟁의 시기, 다시 대장경판이 만들어 집니다. 부처님의 힘을 빌리기 위해서 입니다. 당시 최우 무신정권은 강화도에서 안전했습니다. 백성들은 장기간 맨몸뚱이로 방치되었습니다. 부패한 권력들,백성의 불만을 종교적으로 해소하려는 정치적 고려가 컸을 겁니다. 종교적,문화적인 이벤트로 저항을 완충하려는 시도는 동서고금을 막론합니다.
작업은 벌목에서 시작합니다. 바닷물에 담궈 진을 빼고,그늘서 건조하고,판을 켜고,경전을 한지에 쓰고,판에 붙혀 판각합니다. 무슨 나무일까? 벗나무가 주종입니다.이어 돌배나무,자작나무,단풍나무입니다. 벗나무 하니 일본이 떠오를 겁니다. 아닙니다.토종 벗나무입니다.일본 벗나무 원산지가 한반도입니다.
왜 팔만대장경일까? 경판이 8만여 매입니다. 일배일각(一拜一刻)이라 합니다. 일배하고 한자 새기는 종교적 열정의 표현입니다. 글자로는 무려 5천 2백만 자입니다. 동아시아서 만들어진 20여종 중 으뜸입니다.가장 나이를 많이 먹었습니다. 오자 탈자도 거의 없습니다.지상서 사라진 경전들도 들어있습니다.
사찰 경내 직전,봉황문 앞으로 고목들이 죽 늘어서 있습니다. 봉황문,해탈문 거쳐 구광루를 통해 누하(樓下) 진입하면 석탑과 함께 중심 불전인 대적광전이 들어옵니다. 대적광전 뒤에 대장경판이 보존되어 있는 장경판전이 있습니다. 마당엔 'ㅁ'字 형태의 그림이 그려저 있습니다. 경전을 시각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미로 같은 그림을 한바퀴 돌면 경전을 읽는 것이 됩니다. 무지한 백성들을 위한 것입니다. 그래서 해인사는 미로를 걷는 대중들로 본전 앞마당은 늘 동(動)적입니다.
용문산 용문사 대장전에 윤장대(輪藏臺)있습니다. 용평 용문사가 아닙니다.경북 예천 용문사입니다. 팔각 지붕에 팔각정 형태로 경전을 넣어두고 돌릴수있는 대(臺)입니다. 손잡이가 있어 연자방아 돌리듯 한바퀴 돌리면 경전을 읽은 의미가 됩니다. 해인사 마당의 그림과 같은 이치입니다.
종교의 본질은 자기 성찰일 겁니다. 그래서 산사는 정적인 분위기가 어울립니다. 스님은 거처하지만,참선에 들어갔는지 보이지 않고 호젓한 경내서 방문객 맘은 여유롭기만 합니다. 이런 분위기에 산사를 찾을 겁니다.
2년 전입니다.봄날 어느날 순천 선암사를 찾았습니다. 꽃피는 봄날에 관한한 가장 아름다운 사찰이 선암사입니다. 홍매화 부터 시작해, 봄꽃으로 산사는 온통 꽃 세상입니다. 홍예교 지나,강선교 지나 경내에 들어섰습니다. 비구니 10여 명이 길 양끝에 서서 방문객을 인사로 맞이하는 겁니다. 얼마나 멋적던지,,,,,비구니 얼굴을 볼수없었습니다. 사찰은 사색의 공간이지 관광지가 아닙니다.
안목은 또 다른 안목으로 통합니다. 하나를 알면 열을 알수도 있습니다. 엇그제,그 선암사 종단 내 재산권 문제로 경내서 폭력 사태가 발생했습니다. 티비 화면에 비친 산사에서 각목전(戰)을 보면서 떠오르는 건 2년전 그 비구니들이 였습니다.
건물에도 격이 있습니다. 대웅전은 부처님이 상주하는 공간 입니다. 경복궁 근정전은 왕이 정사를 보는 곳 입니다. 전(展)입니다.展은 건물에 있어 가장 높은 지위입니다.
삼보(三寶)사찰이라 합니다. 승보사찰 송광사,법보사찰 해인사,불보사찰 통도사 입니다. 송광사 대웅전 뒤엔 스님들의 참선 공간 수선사가 있습니다. 통도사 본전 뒤엔 부처님 진신사리가 모셔진 금강계단이 있습니다. 해인사 본전 대적광전 뒤엔 대장경판전이 있습니다. 삼보이기 때문입니다.
길죽한 'ㅁ'字형 대장경판전이 앉은 자리는 석회,숯,소금으로 다지고 위는 황토로 마무리했습니다. 여름철 습기를 흡수하고,건조하면 내뿜어 적정 습도를 유지합니다. 건물 벽의 바람이 통하는 창을 살창이라 합니다. 판전은 각 칸마다 살창이 위 아래 두개입니다.크기도 다릅니다. 남쪽에서 불어오는 신선한 공기를 아래서 받습니다. 대류 작용으로 따스이 한 다음 뒷면의 위창으로 내보냅니다. 자연의 이치를 활용한 보존과학의 극치입니다.
낭짐승도 새도 들지않는 답니다.거미도 거미줄을 치지않는다는 데 이는 모르겠습니다.
해인사는 화재도 유달리 많았습니다.그때 마다 판전은 무사했습니다. 해인사엔 현대과학의 오만과 관료주의 병폐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건물이 하나 있습니다. 1973년 대장경판을 화재로 부터 보호한다는 취지로 경내에 판전 건물을 지었습니다. 완공 후 기술 조사를 했는데 습기가 차고 나무엔 곰팡이가 일어 결국 포기했습니다. 지금 그 건물은 스님들의 수행 공간 선원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판전은 해인사서 가장 연장자입니다. 기둥이 정확히 108 개입니다. 모나지 않은 덤벙주초에 배흘림 기둥을 세운 아주 간단한 구조의 건물입니다. 대장경판이 들어가는 집이기에 화려할 법도 한데 기능성에 충실했습니다. 장식도 기교도 없는 기능만을 최고치로 구현했습니다. 필요가 낳은 디자인입니다.정면 15칸으로 기둥과 칸의 흐름이 반복될 뿐입니다.
대장경판이 살고있는 대장경판전.건축은 기능의 최대치만 구현했습니다.
요한 요하임 빙겔만(1717~1768),,, 美學의 아버지입니다.1700년 동안 땅속에서 잠자고 있던 폼페이 발굴의 큰 공로자입니다. 저서<고대 로마 미술사>는 고전입니다.그는 그랬습니다. "그리스 미술의 본질은 위대한 단순"이라고. 단순성이 극적인 것을 이끕니다. 단순의 반복은 느낌을 강화되고 고조시킵니다.영원을 구현합니다. 서양음악을 거슬러 오르면 그레고이언 챤트를 만납니다. 클래식은 그레고리언 챤트의 확대사입니다. 우리가 그레고리언 챤트 음에 감동한 것은 기교도 없는 단순의 반복에 있습니다.
사람의 눈으로 식별할 수 있는 층수는 5층 이랍니다. 한옥으로 보자면 옆으로는 다섯 칸 정도입니다. 그 이상이면 그냥 '길다' '넓다'라는 막연한 인식만 있을 뿐입니다. 이를 인간적 척도(human scale)라 합니다. 이를 벗어난 크기를 기념비적 척도(monumental scale)라 합니다.
이렇게 사람이 인식할 수 있는 정도를 벗어나 반복이 이루어지면 인간은 무한을 느낍니다. 무한서 절대성을 느끼구요.신의 영역입니다. 판전의 건물이 기능성에 충실했지만, 이같은 단순성의 반복은 부처의 영역에 도달하고 있습니다. 대장경 판전의 같은 기둥, 칸의 반복은 종교적인 숭고함,희열을 줍니다.
관공서 건물은 거의가 단순의 반복을 구현합니다. 파르테논 신전,대학의 본관 건물들, 여의도 국회의사당의 기둥이 그렀습니다. 절대적인 권위를 위함입니다. 대장경판전은 대장경판과 함께 국보로 97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습니다.
새천년 시작 이전 일겁니다.그때도 땅거미가 경내에 깊게 드리우고 있었습니다. 서둘러 대적광전 뒤로 돌아 판전에 이르는 돌계단을 올랐습니다. 관람 마감 20여분 전입니다.정신없이 스킵핑만 했습니다. 그래도 다른 방문객이 다 빠져나간 판전 내부라 호젓함에 어둠의 침묵만 남았습니다.
그때 내가 '고귀한 단순'의 美學을 알았다면, 판전 모서리 끝에서 발을 멈추고,연속하는 기둥들의 흐름을 응시했을 겁니다. 이번에는 2년 걸친 판전 보수공사로 눈인사도 못했습니다.
백련암 입구의 계단,,,성철큰스님께서 머물던 암자입니다.가야산엔 14개 암자가 있습니다.
선승 성철큰스님의 부도,,사리탑으로도 불리이는 곳입니다.
승가의 전통 양식을 깬 현대적 조형이 흥미롭습니다.
해인사는 초입에 월광사지가 있어서 좋습니다. 시원한 눈맛을 주는 청량사가 있어서 좋습니다. 셋을 묶어 테마 여행으로 좋습니다. 인문적인 상상력을 주는 홍류동 계곡이 있어 좋습니다. 백련암 등 암자에 이르는 길은 셋이면 좋고,둘이면 더 좋고,혼자면 가장 좋은 그런 길입니다. 대장경판의 역사성에 판전의 오묘함이 좋습니다. 해인사는 여기 까지입니다.
해인사는 역사적 의미가 큰 사찰입니다.외형에 있어서도 우리나라 최고입니다. 직위에는 힘이 있습니다.그러나 책무도 함께 주어집니다. 노블리스 오브라제입니다. 사회적 지위가 높을수록 그 책무는 커집니다.
해인사도 그렇습니다. 요즘 해인사 이미지는 속세의 모습입니다. 수십억원을 들여 세계 최대 청동좌상을 건립하겠다해 세간의 눈총을 받았습니다. 최근엔 대장경판을 청동으로 제작하겠답니다. 천박한 역사 인식에 실소를 자아냅니다. 대장경판이 세계문화유산으로 대접받는 건 순전히 역사성 때문이지 경전의 내용에 있지 않습니다. 금으로 만든들 무슨 가치가 있을까요. 대적광전 앞 마당은 기복종교의 행렬만 있습니다. 방문자에 성찰의 계기를 주는 사색의 공간이 아니라 소음의 공간입니다.
누더기 승복 차림의 선승 성철을 기억합니다. 산은 산이요,물은 물입니다.
몇년전 세계 100 대 대학에 한국의 대학은 없었습니다. 올해는 하나가 끼였습니다. 세계 50대 대형 교회 중 한국의 교회는 몇개나? 절반 25개 랍니다. 해 마다 소형 교회는 3000개씩 문을닺는 답니다. 대형교회 문턱은 문지방이 닳고요.
해인사(海印寺),,, 직역하면,고요한 바다가 찍히는 절입니다. 파도 잔잔한 바다에 우주의 만가지 모습이 홀연이 드러나는 경지입니다. 달이 호수에 천개의 모습으로 비치는 그런 고요의 월인천강(月印千江)처럼,,,,, 중생이 그리는 해인사는 그런 모습일 겁니다.
산은 산이요,물은 물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