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염 속 가파른 산길 700M는 만만하지 않았다. 울창한 소나무 숲이 만든 그늘이 깊다 해도도 흐르는 땀은 막무가내였고, 지천으로 피어 있는 붉은 싸리나무 꽃도 가쁘게 몰아쉬는 숨소리를 다독여주지 못했다. “이 더위에 어떻게 거길 가겠느냐!”고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던 한 할머니의 말이 괜한 걱정이 아니었음을 실감했다. 숨이 턱까지 차올라 무거운 발길을 간신히 옮길 무렵 나뭇가지 사이로 은은한 빛깔의 화강암 성벽이 그 날선 모습을 드러내었다.
그래 그것은 ‘날선’ 모습이었다. 칼로 잘 다듬은 얼음조각 같은, 대패로 반듯하게 깎은 목재 같은, 사람의 손으로 쌓아올린 것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정교하고 고졸했다. 해발 541M 장바위산 마루를 지키는 견훤산성의 날선 모습은 더위에 이완된 마음을 문득 추슬러주었다. 모서리는 손을 베일 듯 날카로왔고, 몸체는 미끌어질 듯 반듯했고, 낭떠러지에 서 있는 모습은 너무 가팔라 내려다보기에도 오금이 저렸다.
한결같은 크기의 이 많은 직사각형 화강암들은 도대체 어디서, 어떻게 여기까지 왔을까? 자로 잰 듯 성벽을 쌓아올린 사람들은 도대체 어떻게 여기까지 와서 천만년을 견디는 역사의 흔적을 남기고 갔을까? 고른 치아처럼 가지런한 돌멩이 하나하나에 박혀있을 아픈 이야기들은 또 얼마일까? 산성 축조와 관련된 전설이 하나 있다.
견훤에게는 아들과 딸이 있었다. 견훤은 딸을 사랑했고 어머니는 아들을 사랑했다. 견훤은 성 쌓기의 총책임을 딸에게 맡긴다. 아들에게는 송아지를 몰고 나막신을 신고 서울을 다녀오되 성이 완성되기 전에 돌아와야 한다. 성이 완성되기 전에 돌아오기 어렵다는 계산을 미리한 지시였다. 시합에 진 사람은 목을 내놓게 한 생사를 다툰 경기였다. 남문만 달면 성 쌓기가 끝나게 되자 어머니는 오지 않는 아들을 기다리며 초조해 진다. 초조해진 어머니는 술과 음식을 장만하여 딸과 일꾼들에게 잔치를 베풀어 하루를 번다. 진창 먹고 마신 일꾼들이 기운을 돋우어 남문을 달려고 할 때 지친 아들이 송아지를 몰고 성문을 들어선다. 어머니의 기지로 아들은 살게 되었으나 딸은 약속대로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딸이 죽은 후 그 원귀가 저승으로 가지 못하고 이승을 떠돌며 수시로 풍악을 울리며 마을에 나타난다. 풍악소리가 있고나면 나라와 마을에 좋지 못한 변고가 생긴다.
꼼꼼하게 읽지 않는다 하더라도 믿어지지 않는 현실성 없는 이야기이다. 송아지를 몰고 나막신을 신고 오가는 서울 나들이가 제 아무리 힘든다 하더라도 성쌓기보다 어렵고 더디겠는가? 그러나 그것이 아무리 허황한 이야기라 하더라도 그 이야기를 만들고 향유하고 전승한 민중들의 의식 속에는 산성 쌓기에 얽힌 역사적 사실의 일단이 자리잡고 있을 터. 생사를 건 피나는 역사(役事)였다는 것, 원귀가 될 만큼 원한 맺힌 이야기가 헤아릴 수 없이 스며있다는 것이 그것이다.
성벽을 한 바퀴 돌아본다. 중간 중간 자연석에 돌을 덧붙인 곳이 눈에 뜨인다. 자연지형을 그대로 이용한 흔적이 역력하다. 산의 정상에 돌출되어 있는 망대에 서니 속리산 능선이 일필휘지이다. 백두대간은 웅장하고 힘차게 살아서 꿈틀거린다. 그 옛날 이 곳을 차지하고 새로운 왕국을 꿈꾸었던 견훤과 그 군사들은 속리산을 보며 어떤 생각을 했을까. 견훤은 이 곳에 성을 쌓고 세력이 강성해져 근거지를 전주로 옮겼다고 한다. 속리산의 힘과 기상이 그들에게 전해졌던 것은 아닐까. 동쪽으로 눈을 돌리면 화북면의 마을들과 청화산, 도장산 등이 훤히 보인다. 마을 앞을 지나는 49번 지방도는 당시 신라가 북쪽으로 오르내리는 통로였다. 이 산성을 손에 넣은 견훤은 북쪽 지방에서 경주로 향하는 공납물을 모두 거두어 들였다고 한다. 이를 두고 누군가 “견훤은 말하자면 산적 두목이었어” 라고 했다.
잠자리가 날고 매미가 울었다. 성벽과 함께 숨져간 엣 사람들의 영혼과 그날의 처절한 아비규환이 잠자리가 되어 날고 매미가 되어 울고 있으리라는 생각이 스친다. 더러는 더 이상 기대할 게 없는 조정을 등지고 스스로 견훤을 찾아와 성쌓기에 희망을 건 자들도 없지 않았을 테지만, 더 많이는 강제로 노역에 동원된 힘없는 민초들이 성 쌓기의 주역이었을 것이다. 늙은 부모, 가난한 처자식들이 기다리는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혹은 사고로 혹은 질병으로 이 외진 산속에서 죽어간 사람들이 얼마였겠는가. 부러진 다리를 절뚝거리며 산을 내려가는 사람들의 신음소리, 움직일 수 없게 된 몸을 실어나르는 들것들의 아비규환이 손에 잡힐 듯 가까이 느껴진다.
법주사를 중창하기 위해 찾아온 진표 율사를 따라 밭을 갈던 농민들이 속세를 버리고 불가에 귀의한 산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 속리산. ‘도는 사람을 멀리하지 않는데 사람은 도를 멀리하는구나, 산은 사람을 떠나지 않는데 사람이 산을 떠나는구나.(道不遠人 人遠道, 山非離俗 俗離山)’ 라는 고운 최치원의 시에서 그 청청한 이름의 깊이를 간직한 속리산. 그러므로 속리산 한 자락, 견훤산성에서 만난 나비와 매미는 남다른 느낌을 주기에 충분했다. 속세의 아비규환과 속리산은 너무 먼 거리에 있기 때문이었다.
1984년 12월 19일 경상북도기념물 제53호로 지정된 견훤산성은 경북 상주시 화북면 장암리 산42 번지에 있다. 장바위산 정상부를 에워 싼 테뫼식 산성이다. 견훤이 쌓았다 해서 견훤산성이라 불리지만 실제로는 삼국시대인 5~6세기에 축성되었다고 한다. 이 곳뿐만 아니라 상주지역 옛 성들이 견훤과 관계를 갖게 된 것은 견훤과 그의 아버지 아자개가 가은 출신이란 ‘삼국사기’의 기록 때문이다. 가은은 지금 문경시에 속하지만 당시엔 상주 가은현이었다.
이 산성은 대체로 사각형을 이루고 있는데, 산세와 지형을 따라 암벽은 암벽대로 이용하고, 성벽을 쌓을 필요가 있는 곳에만 성을 쌓았기 때문에 천연절벽과 성벽이 조화를 이룬다. 성의 네 모서리에는 굽이지게 곡성을 쌓았는데, 동북쪽과 동남쪽으로 난 두 곳이 거의 완전하게 남아있어 상주 쪽을 시원하게 내려다 볼 수 있다. 성벽 둘레는 650m이고, 높이는 7∼15m이며, 너비는 4∼7m이다. 이 산성은 보은의 삼년산성(사적 제235호)과 쌓은 방법이 비슷한데, 정교하게 쌓은 우리나라에서 보기 드문 삼국시대 산성의 하나이다.
견훤은 누구인가? 견훤은 누구이길래 산성의 주인이 되었을까? 견훤의 어떤 남다름이 백성을 불러 모아 성을 쌓게 하고 견훤의 어떤 뛰어남이 군사들을 불러 모아 목숨을 걸게 했을까?
잘 알려진 바와 같이 견훤은 농민의 아들로 태어나 신라의 장군으로 있다가 상주지역에서 군사를 양성하여, 신라 진성여왕 6년(892)에 반기를 들고 신라의 여러 성을 침공하다가 효공왕 4년(900)에 완산주에 도읍을 정하고 후백제를 세운 인물이다. 난세가 영웅을 낳기도 하고 영웅이 역사의 물길을 바꾸기도 한다.
나말의 사회상은 말 그대로 난세였다. 삼국을 통일한 신라왕조는 봉건왕족의 제도상의 모순으로 인하여 번영의 극에서 급격히 쇠망의 길로 치달았다. 진성여왕이 등장하자 모든 모순이 한꺼번에 불거지기 시작했다. 진성여왕은 연인 각간 위홍이 세상을 떠나자 미소년들을 불러들여 음란을 즐기고 이들에게 정사를 맡겼다. 당연히 국가 기강은 붕괴되고 부정부패가 극에 달했다. 한발이 극심하여 민생은 기아에 허덕였고, 호족과 조정의 이중 착취에 시달린 농민은 결사적인 유리(流離)와 반란으로 기울어져 갔다. 이런 와중에 유력한 호족과 야심찬 인물에 의한 반란군의 영도로 전국은 농민대란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되었는데 이와 같은 난세에 궐기한 군웅들 중 한 사람이 견훤이었다.
새 세상, 새 역사의 장을 연 인물들이 다 그렇듯이 견훤 또한 남다른 이야기를 기지고 태어난다. 남다른 이야기란 주인공의 역사적 정체성을 확보하기 위한 픽션이겠지만 그것을 공감하고 공유한 민중의 정서 속에서는 실재하는 현실이며 역사적으로 형성되고 누적되어 온 시대의 무의식 속에서는 엄연한 진실로 존재하는 법이다. 남다른 이야기의 힘이 견훤을 산성의 주역으로 자리 잡게 했을 것이고, 난세의 민심을 모으는데 힘을 보태었을 것이다. 견훤의 탄생설화를 삼국유사는 이렇게 전한다.
광주(光州) 북촌(北村)에 사는 한 부자에게 아름다운 딸이 하나 있었다. 어느 날 딸은 밤마다 보랏빛 옷을 입은 사나이가 찾아와 자고 간다는 사실을 아버지에게 고했다. 아버지는 딸에게 그 사나이의 옷자락에 긴 실이 달린 바늘을 꽂아 두라고 일렀다. 딸은 아버지의 말대로 하였다. 이튿날 아침에 그 실을 따라가 보니 북쪽 담 아래 실이 있고 바늘은 큰 지렁이에 꽂혀 있었다. 딸이 잉태하여 한 남자 아이를 낳으니 나이 15세에 이르러 스스로 견훤이라 칭했다.
견훤이 나서 포대기에 쌓였을 때 아버지는 들에서 밭을 갈고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밥을 갖다 주려고 아이를 수풀 아래 놓아두었더니 호랑이가 와서 젖을 먹였다. 마을 사람들은 이 말을 듣고 이상하게 여겼다. 아이가 성장하자 몸과 모양이 웅장하고 기이했으며 뜻이 커서 남에게 얽매이지 않고 비범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용마를 달리게 하고 활을 쏘아 용마가 활보다 늦게 도착했다고 용마를 죽이고 나니 그제서야 화살이 도착하여 견훤이 탄식하기를 ‘아차, 내 실수로구나’ 했다는 데서 유래한 ‘아차’ 마을 구전설화는 그의 무장으로서의 남다른 용맹과 신비를 극대화 하고 있다. 이와 같은 전설에 힘입어 견훤은 산성의 주인이 되고 후백제를 세우는 역사적 인물이 된다.
견훤이 서쪽을 순행하여 완산주에 이르니 고울 백성들이 열렬하게 그를 맞는다. 민심을 얻은 것이 기쁜 나머지 “백제가 나라를 세운지 600여년에 당나라 고종은 신라의 요청으로 소정방을 보내어 수군 13만명이 바다를 건너오고, 신라의 김유신은 있는 군사를 거느리고 황산을 거쳐 당나라 군사와 합세하여 백제를 쳐서 멸망시켰으니 어찌 감히 도읍을 세워 옛날의 분함을 씻지 않겠는가” 큰 소리로 외친다. 견훤은 스스로 후백제왕이라고 일컫고 벼슬과 직책을 나누어 설치한다. 신라 효공왕 4년(900)이었다. 그러나 권력이란 얼마나 무상한 것인가. 권세란 또 얼마나 잔혹한 것인가. 아들 신검에 의해 금산사에 유폐되었던 견훤은 고려로 탈출하여 목숨을 도모하다가 천복(天福) 원년(936) 9월 8일, 황산 불사(黃山 佛寺)에서 작고한다. 나이 70이었다.
산을 내려오며 견훤산성을 다시 생각한다. 견훤산성의 밝은 빛과 어두운 그늘을 생각한다. 빛과 그늘을 함께 드리운, 화강암 빛깔의 의미를 생각한다. 그것은 한 장군의 찬란한 기상과 역사의 뒤안길을 이름 없이 살다간 민초들의 눈물이 뒤섞인 빛깔이었다.
명암 없는 삶, 빛과 그늘 없는 역사가 어디 있으랴. 예나 지금이나 민초들은 선해서 자식에게 쫓겨난 견훤의 처지를 부모 잃은 자식처럼 슬퍼하지만,
견훤이 잠자리에서 일어나기 전에 멀리 대궐 뜰에서 고함치는 소리가 들리므로 이게 무슨 소리냐고 묻자 신검이 아버지에게 아뢰었다. “왕께서는 늙어시어 군국(軍國)의 정사에 어두우시므로 장자 신검이 부왕의 자리를 대신하데 되었다고 해서 여러 장수들이 기뻐하는 소리입니다.” 조금 후에 아버지를 금산사 불당으로 옮기고 30여명의 장사를 시켜서 지키게 하니, 동요에 이렇게 말했다. “가엾은 完山 아이/아비를 잃어 울고 있네”
역사는 늘 이긴 자의 편이어서 견훤의 폐위가 자업자득임을 고려조의 사관은 이렇게 기록한다.
사신(史臣)이 논하여 가로되, 신라는 운수가 궁하고 도(道)가 쇠하니, 하늘이 돕지 않고 백성은 귀의할 곳이 없었다. 이에 여러 도적들이 틈을 타서 고슴도치털과 같이 일어났는데, 그 중에서도 심한 자가 궁예, 견훤 두 사람이었다. 견훤은 신라를 배경으로 일어나서 신라의 녹(祿)을 먹고 살았는데, 속으로 회심(禍心)을 품고 나라가 위태로움을 다행으로 여기어 도읍을 침략하고 군신을 살육하기를 금수 죽이듯, 풀 베듯 하였으니, 신로 원악이요 대죄이다. 그러므로 화가 아들에게 일어났으니 모두 자취(自取)한 것이다. 누구를 허물하리요.(삼국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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