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큼추억여행

[스크랩] 해안절경이 아름다운 섬(島). / 백령도(白翎島)

오늘행복스마일 2018. 12. 27. 15:34

해안절경이 아름다운 섬(島).
백령도(白翎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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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령도(白翎島)
인천광역시 옹진군 백령면에 속한 섬.
인천에서 북서쪽으로 191.4km 떨어진
서해 최북단의 섬으로, 북한과 가장 가까운 위치에 있다.
섬의 위치는 동경 124도 53분, 북위 37도 52분에 위치한다.
북한의 장여군에서 약 10km, 장산곶에서 15km떨어져 있다.
섬의 최고봉은 해발 184m의 업죽산이며
동쪽에 145m의 남산이 있고 서쪽에는 해발 162m의 망골산이 있다.
섬의 남부에는 동쪽에 해발 130m의 이랑구미산,
중앙에 해발 114m의 매막골산,
서쪽에 해발 176m의 삼각산이 있다.
섬의 모양은 동쪽을 바라보는 ㄷ자이다.
상승하면서 평원에 돌출되어 있던 부분이 수면 위에 남아 형성되었다.
1월 평균기온 -4.5℃, 8월 평균기온 25℃, 연강우량은 755.8mm이다.
면적 45.83㎢, 인구는 약 4,800명이다.
본래 황해도 장연군(長淵郡)에 속했으나 광복후 옹진군에 편입되었다.
원래의 이름은 곡도인데,
따오기가 흰 날개를 펼치고 공중을 날으는 모습처럼 생겼다 하여
백령도라고 부르게 되었다.
진촌리 조개무지(말등패총)에서
신석기시대의 유물이 다량으로 출토되어
일찍부터 이곳에 사람이 살았던 흔적을 볼 수 있다.
삼국시대에 백령도를 곡도(鵠島)라고 하였으며
신라 진성여왕 때 당나라로 가던 사신이 풍랑을 만나
곡도에서 10여 일을 머물렀다고 한다.
후삼국시대에는
당나라로 통하는 중요한 해상교통의 요지였기에
백령도를 차지하기 위한 치열한 해전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고려 태조 때 명장이었던
유금필 장군이 무고를 당해 곡도로 유배를 당했다.
조선 세종 때 편찬된
《고려사》에 의하면 고려는 곡도를 백령(白翎)으로 개명하고
진을 설치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역사적으로 백령도는 고려시대부터 유배지로 이용되었다.
심청이 몸을 던졌다는 인당수가 있으며
1999년 10월에는 2층 규모의 심청각 전시관이 준공되어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찾아 심청이의 효심을 배워가기도 한다.
까나리액젓·참다래(키위)·흑염소엑기스·전복·
해삼·멸치· 약쑥·가리비·농어·우럭·놀래미 등의특산물이 있다.
더 이상 북상할 수 없는 군사분계선을 머리에 인 채
서해5도 중 최북단에 홀로 떠 있는 백령도. 이곳은 현재 바다의 종착역이다.
수정 같이 맑은 바닷물과 고운 모래,
형형색색의 자갈들로 펼쳐진 해안은 백령도의 자랑이다.
비록 남북 분단의 아픔을 고스란히 안고 있어
군사적으로는 긴장의 끈을 한 치도 놓을 수 없는 지정학적 위치에 자리잡고 있으나
동북아 정세에 따라 백령도는 또 다른 평화체제의 기반으로 자리잡을 수 있다.
서해의 해금강이라 불리는 두무진과
세계에서 두 곳뿐인 사곶천연비행장으로 유명하다.
관광지로도 유명하여 섬 북서쪽의 두무진은
고려시대의 충신 이대기가《백령지》에 '늙은 신의 마지막 작품'이라 표현했을 만큼
기묘한 절경을 자랑한다.
※ 대표적인 관광코스는 백령도 선착장 → 사곶천연비행장 →
심청각 → 물개바위 → 담수호 관광 → 두무진 관광 → 콩돌해안 → 백령도 선착장이다.
▲서해안 최북단 백령도
서해 5도 중에 최북단에 홀로 떠 있는 섬, 백령도
이곳이 서해를 징검다리처럼 연결한 섬들의 종착역이라 불리우는 곳입니다.
백령도의 용기포 선착장에 내리면 제일 먼저 여행자를 맞이해 주는 것은
귀엽게 생긴 탱크
북한과 가장 가깝게 있는 넓이 46.28 평방킬로미터의 섬으로
국내에서 14번째로 큰 섬이었나, 최근 화동과 사곶 사이를 막는 간석지 매립으로
약 100만 평이 불어나 8번째로 큰 섬이 되었다.
이곳은 군사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곳이기 때문에,
들어가려면 절차를 거쳐야 하지만,
일단 들어가보면 자연 그대로의 섬의 매력에 빠져들고 만다.
심청이 몸을 던진 인당수가 보이며, 해삼,전복등 어종도 풍부하다.
또 섬 서쪽 두무진 아래 선대바위는
고려 충신 이대기가 <백령지>에 "늙은 신의 마지막 작품"이라 표현 했을 만큼
기기묘묘함을 자랑한다.
더욱이 지상 2층 규모의 심청각을 건립하였으며 사곶천연비행장,
두무진 등과 연결되는 백령도 일대를 관광코스로 조성하였다.
그리고 진촌리 북쪽 해안에는
국내 유일의 물범 서식지인 물개바위가, 용기 포구 옆에는
세계에서 두 곳밖에 없는 규조토 해변(일명 사곶해안)이 있다.
길이는 자그마치 3km, 썰물 때에는 3백m이상의 단단한 도로가 생겨
차도로 사용되고 군수송기의 이/착륙이 가능하다.
백령도에는 육지와 멀리 떨어져 있어 색다른 점이 있다.
주민은 대략 4800여명(군인제외)이고
섬 크기는 서울 여의도의 다섯배 정도로 결코 작지 않다.
인천항에서는 직선거리가 190km가량이지만 뱃길은 228km이다.
북한땅이 아닌 북한바다를 돌아서 가야하기 때문이다.
100년의 역사가 넘는 교회 3곳이 이곳 섬에 위치한 것도 흥미롭다.
1898년에 세워졌다는 중화동교회가 제일 먼저 세워져
한국 교회의 역사를 웅변해주고 있다.
백령도가 중국쪽으로도 100여km정도밖에 안돼
기독교 전파의 교두보가 되었다고 한다.
백령도에는 또한 집에 담은 있어도 대문이 없다.
또 길에 신호등이 있을 필요도 없다.
아파트는 4층 높이의 군인아파트가 유일하며 노래방은 10여 곳 정도 있다
. ‘있을 것도 있고 없는 것은 없는’ 섬이다.
멀리 도심에서 떨어져
몸과 마음의 휴식을 취하며 자연에 자신을 맡기고 싶다면
우리가 잠시 잊었던 백령도 기행을 추천한다.
백령도는 여전히 그 본래의 매력을 간직하고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백령도의 전설
○추방된 선비가 사랑을 이룬 백령도
옛날 황해도 어느 마을에
열심히 글공부를 하며 지내는 선비가 있었다.
매우 가난하게 사는 선비의 집가까이 사또의 거처가 있었다.
사또는 딸하나를 두었는데 그 선비가 사또의 하나 밖에 없는 딸을 사랑했다.
그래서 선비는 밤이면 몰래 담을 넘어 들어가
사또의 딸과 깊은 정을 나누곤 하였다.
이러한 사실을 안 사또가 가난한 선비를 미워하여
그 고을에서 쫒아내면서 배를 타고 멀리 떠나라고 했다.
그 선비는 헤어지는 마당에 사또의 딸과 만나서
"우리가 헤어지더라도 다시 만날때가 있을 것이다.
꼭 만날 날이올것이다.
그 때를 기다리자 그런날이 머지않아 올것이니 참고 기다리자."고
단단히 약속을 하고 배를 타고 멀리 떠났다.
그 선비는 어느 섬에 도착하여 역시 글공부를 계속하면
서 사또의 딸을 그리워하고 만나게 될날을 기다리며 지냈다.
하루는 하얀 학이 울안에 종이 한 장을 떨어뜨렸다.
얼른 그 종이를 주워 읽어보니 그 아가씨의 사랑의 고백을 담은 연서었다.
그래서 다른 종이에 "여기가 어느 지점이다"라고 적어서 그 학에게 주었다.
그학은 길이 잘든 학이었던지 다시 그것을 물고 사또가 사는 집으로 가서
그 딸에게 전해 주었다.
학이 전해준 쪽지를 받은 사또의 딸은
그 선비가 있는 곳으로 찾아와 함께 잘살았다.
그 때부터 사람들이 그 섬을 "흰 백자, 날령 자를 써서 백령도라 불렀다."
○비단에 싸여 살아난 심청
심청이 아버지 심봉사의 눈을 뜨게 하기 위해
공양미 삼백석에 몸을 던진 인당수와 심청이 환생했다는 연봉바위 등
백령도가 심청전의 무대였던 사실을 기리기 위
해 인당수와 연봉바위가 동시에 내려다보이는 곳에 심청각을 건립하여
전통문화를 발굴.계승함과 아울러 "孝"사상을 함양하고,
망향의 아픔을 가진 실향민에게 고향을 그리는 마음을 달래주며,
심청전에 관련된 판소리,영화,고서 등과
심청전의 내용을 극화한 모형물도 전시하고 있다.
우리가 흔히 알고있는 심청전과 내용은 흡사하다.
그러나 심청이가 연꽃으로 환생한 것이 아니고
심청을 바다에 빠뜨릴 때 중국상인들은 배에 있던 비단으로
심청의 온몸을 꽁꽁싸서 빠뜨렸고 심청이는 비단덕분에 바다속으로 들어가지 않고
조류에 의해 황해도 덕돔포라는 포구에 떠밀려가서
임금이 아니라 그마을 원님에게 불려가 원님의 아들과 혼인을 하고
맹인잔치도 임금이 아니라 그마을 원님이 열어 아버지를 만난다는 이야기이다.
▲선대암.
“늙은 신의 마지막 작품'이다”
섬여행은 가는 것이
쉽지 않은 만큼 도심에서 벗어난 한적함을 안겨준다.
좀더 거리가 멀리 떨어진 섬이라면 한결 그 기분은 더할 것 같다.
인천항에서 뱃길로 4시간 30여분이 걸리는 백령도.
천안함 사건이 터진 이후 외지인들의 발길이 많이 줄어들어
어느 때보다 호젓한 섬여행을 선사한다.
최근 섬을 찾아 만난 현지 여행사의 한 직원은 지금까지 5개여월 동안
여행객 9개팀만 받을 정도로 외지인들의 발길이 현격하게 줄었다며 울상이다.
한때 태풍때문에 강원도 해안지역이 크게 훼손됐을 때
오히려 강원도로 여행을 가 관광업을 주로 하는 현지 주민들에 힘과 용기를 주었듯이
많은 외지인이 백령도를 찾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백령도는 이런 이유 말고 섬 자체가 품고 있는
멋진 볼거리 등이 있어 언제 찾아도 매력적인 투어를 보장한단다.
◆두무진(명승 8호)
두무진은 약 12억 년 전 원생대에 형성된
350~400m 층후의 규암층이 오랜 침식과 풍화를 받아 형성된 것 으로
지층에서 화석은 발견되지 않고 있으나 퇴적 당시의 환경이
얕은 바다였음을 알려 주는 물결 흔적인 연흔을 곳곳에서 볼 수 있다.
또한 백령도 두무진의 규암층은 황해도와 연결돼 있어
북한의 지질을 추정할 수 있는 지표로서 학술적 가치가 크다.
이 외에도 인당수가 내려다보이는 두무진 통일기원비,
바위 가운데가 창 같이 뚫려 있는 창바위,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로 오래된 중화동 교회,
백령도 유일의 천일염전인 화동염전,
세계적으로 드문 진촌리의 감람암포획 현무암 분포지,
그리고 조국의 통일을 기원하기 위해 용기포 광장에 세운 용기포 통일기념탑 등
나열할 수 없을 정도로 볼거리 가득한 보석 같은 섬.
이곳이 바로 백령도다.
바위들의 모습이 마치 용맹한 장군들이 머리를 맞대고 회의를 하는 것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 두무진.
백령도만의 원시비경을 자랑하는 해안 절벽이다.
마치 장군들이 머리를 맞대고 회의를 하는 것 같다고 해서 붙여진 두무진(頭武津)은
서해의 해금강이라 불릴 정도로 웅장미가 뛰어나다.
다양하고 기묘한 기암괴석들이 펼쳐져 있어 백령도 자연풍광의 백미라 할 수 있다.
백령도와 북한땅인 장산곶 사이와는 불과 10여km로
서해바다에서 밀려오는 큰 바닷물의 흐름이 무척 셀 수밖에 없다.
오랜 세월 힘찬 물살을 받은 백령도의 절벽이 일부 떨어져 나와
기묘한 자연 비경을 연출해 낸 것이다.
절벽의 높이는 100m에 가까운 아찔한 곳도 있으며
조선시대 광해군이
‘늙은 신의 마지막 작품’이라고 극찬한 바위들인 ‘선대암’을 비롯해
코끼리가 물을 마시고 있는 모습인 ‘코끼리바위’,
비슷한 모양의 두 바위가 껴안고 있는 ‘형제바위’ 등
다양한 이름을 얻은 비경 포인트가 관광객들의 입을 턱 벌어지게 만든다.
백령도의 두무진 절벽 비경은 규모는 비록 작지만
파도가 만든 호주 최고의 절경으로 꼽히는 빅토리아주
그레이트오션로드의 12사도 바위섬을 연상케 한다.
아마 웅장함은 덜해도 그 형성된 역사의 길이는 결코 짧지 않을 듯하다.
백령도 섬 북서쪽 두무진 포구에서 배를 타고
절벽 비경을 따라 약 한 시간 가량 감상할 수 있다.
서해의 해금강!
제2의 해금강 또는 금강산의 총석정을 옮겨 놓았다고 할 만큼
기암절벽이 많은 두무진은 백령면 연화3리 해안지대이다.
신선대, 형제바위, 장군바위, 코끼리바위 등이
푸른 바닷물과 어울려 아름다운 비경을 이룬다.
장군들이 모여 회의하는 모습처럼 보인다고 해서 이름 지어진 두무진,
이 일대를 해상관광 하는 관광객들은 숨은 해안 비경에 눈을 떼지 못한다.
두무진을 등진 바다 건너편에는
북녘땅 장산곶과 몽금포해안이 가깝게 보여 실향민들이
두고 온 고향을 그리며 애환을 달랠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명승제8호)
두무진을 둘러보다 운이 좋으면
물개바위 위에 천연기념물로 지정 보호받고 있는 물범이
수면에 잠길 듯 말 듯 옹기종이 모여 있는 모습도 볼 수 있다.
○콩돌해변, 사곶해변
천연기념물 제392호로
백령도 남포리 오군포 남쪽 해안을 따라 약 1km 정도 형성되어 있는 곳
콩돌해변은 말 그대로 콩알을 뿌려놓은 듯한 독특한 해변이다. 해변의 길이는 1km 정도
콩돌해안은 백령도의 지형과 지질 특색이 잘 드러나 있는 곳으로,
해안은 둥근 자갈로 구성된 퇴적물이 단구상 미지형으로 발달해 있다.
해변의 전 자갈들은 석영으로 이루어진 규암이 파쇄되어
해안의 파식작용에 의해 마모를 거듭하여 생겼으며
콩과 같은 모양을 하고 있어 콩돌로 불린다.
콩돌이 만들어지기까지는 약 1만 5천 년이란 긴 세월이 걸린다.
백색, 갈색, 회색, 적갈색, 청회색 등 다양한 색깔과 모양을 띠고 있으며,
파도가 칠 때 들리는 자갈 구르는 소리가 더 없이 청량하다고 한다
콩돌해안은 백령도 남포리 오군포 남쪽해안을 따라
약 1km 정도 형성되어 있는
백령도의 지형과 지질의 특색을 나타내고 있는 곳 중의 하나로
해변에 둥근 자갈들로 구성된 해안이다.
둥근자갈들은 백령도의 모암인 규암이
해안의 파식작용에 의하여 마모를 거듭해 형성된 잔자갈들로
콩과 같이 작은 모양을 지니고 있어 콩돌이라 하고,
색상이 백색, 갈색, 회색, 적갈색, 청회색 등으로 형형색색을 이루고 있어
해안경관을 아름답게 하고 있다.
(천연기념물 제392호)
콩알만한 크기의 작고 둥근 자갈들이
해안에 지천으로 깔린 화동의 콩돌해수욕장은
그 돌을 밟는 것만으로도 신비한 경험이며
맑고 푸른바다와 조화를 이룬 이색 적인 해변으로 잘 알려지지 않는 해변으로
여름이면 이곳에서 누워서 찜질아닌 찜질을 경험하기도 한다.
콩돌해변은 우리나라 천연기념물 391호,
그리고 사곶해변은 천연기념물 392호로 지정될 정도로
국가적으로 자랑스런 비경이다.
둥근 자갈의 이름은 콩돌이라 하고,
색상이 백색, 갈색, 회색, 적갈색, 청회색 등으로
형형색색을 이루고 있습니다.
파도가 세기때문에 수영을 하는 것은 힘들지만
맨발로 백사장이 아닌 콩돌밭을 걷노라면 발마사지가 절로 된다.
온몸을 콩돌로 덮고 하는 자갈찜질 등은 피부염 치료에 매우 효과가 있다고 한다.
파도가 밀려올 때마다 수많은 콩돌이 쓸려오면서 콩돌끼리 부딪히며 내는 소리는
‘콩돌해변만의 교향악’이라 할 수 있다.
콩알처럼 작고 동그란 자갈을 보며 파도에 휩쓸려 밀려온
"억겁의 세월"을 읽을 수 있다.
사곶해변 또한 백령도만이 내세울 만한 독특한 해변이다.
규조토 해변으로 비행기 이착륙이 가능한
전세계에서 두 곳밖에 없다는 천연 비행장이다.
실제로 한때 군 비행장으로 쓰였을 정도로 부드럽고 단단하며
오히려 물을 머금을수록 더 단단해지는 성질이 있다.
실제 관광객을 태운 버스가 포장도로를 달리듯
빠른 속도로 달리는 체험을 할 수 있다.
맨발로 사곶해변을 걷는 기분 또한 색다르다.
○백령대교,백령호
아주 작은 다리이지만 백령도의 유일한 교량으로써
사곶해수욕장과 이어진 해안에 방파제를 세우면서 생성된다리와 호수이다.
이곳 방파제에서는 사곶해변을 한눈에 볼 수 있다.
담수호라 불리우기도 하며, 서해 최북단비가 서 있다
○사곶해수욕장 겸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천연기념물 제391호)
전 세계적에서 자연적으로
활주로가 생긴 해변은 백령도를 포함하여 두 곳 밖에 없다.
길이 3km 너비 100m의 가는 아주 고운 모래사장으로 되어 있으며
모래사장 또한 거의 수평을 이루어 해변으로 물이 빠지면
비행기가 이착륙할 수 있을만큼 바닥이 단단하고
수심 또한 매우 낮아 물놀이에 그만이다.
주변에 크고 작은 기암절벽으로 둘러싸여 절경을 이루고,
해변 후면에는 0.2 평방km가량의 검푸른 해송지대와 해당화 나무가 어우러져
시원한 휴식공간을 제공한다.
▲사곶해수욕장의 일몰
천연기념물 제391호로 시정된 사곶해수욕장은
전세계에 2곳밖에 없는 천연비행장으로 나폴리에 버금가는 아름다운 곳이다.
한때 군부대 비행장으로 사용하기도 했던 이곳은
고운 모래 알맹이들이 넓이 300m 길이 3km의 넓은 백사장을 이루고 있어
피서지로서 세계최고를 자랑한다.
주변에는 돌들이 콩알만하다 하여 이름붙여진 콩돌해안,
서해의 해금강이라 일컫는 두무진이 있고,
심청이가 몸을 던진 인당수, 심청각, 연봉바위 등은 백령면의
자랑거리이기도 하다.
또한 백령면 주변에서는 어느곳에서 낚시를 해도
우럭, 놀래미, 광어, 농어등이 잡히고 있고
서해의 해금강이라 불리는 두무진을 배를 타고 관광하다 보면
어느덧 상념과 잡념들은 없어지고 감탄사만이 관광객들을 사로잡게 된다.
○현무암분포지
마을주민들은 이곳을 "하늬바다"라고 부른다.
진촌마을을 중심으로 분포하며 면적은 약 4㎢이며
용암류의 두께는 최대 10m정도의 단일층으로 산출되며
해안가에서는 5∼10m 두께의 단일 용암단위가 고토양층을 경계로
상부에 분포한다.
현무암이 분포하는 해안의 길이는 약 1㎢가 되며
앞바다에 현무암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바다가 보인다.
(천연기념물 제393호)
○창바위
위치는 사곶해변 끝쪽에 위치하며 백령대교 앞에 홀로 서있다.
바위 가운데 창모습 같이 뚫려있어 창바위라 부르며, 7∼8월에 학꽁치 낚시를 즐길 수 있다.
○사자바위
만조시각에 보는 것이 가장 좋으며,
마치 사자 얼굴를 바로 옆 모습에서 보는 듯한 형상을 닯았다고 하여
사자바위라 불리운다.관창동 고봉포 앞바다에 있다.
○코끼리바위
두무진 절경중에 하나로
코끼리가 물을 마시고 있는 모습과 흡사하여 코끼리바위라 불리우며
이곳은 해안유람선을 타고 나가야 볼 수 있는 장소이다.
코끼리바위 주변으로 선대암, 장군바위, 형제바위등 기암괴석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코끼리바위.
웅장한 절벽이 보는 이를 압도한다
코끼리가 물을 마시고 있는 모습과 흡사하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합니다.
○형제바위
선대암 주변에 형성된 기암괴석으로
통일기원비에서 볼 수 있으며 해안에서도 볼 수 있다.
○연화정사/흑룡사
인천 옹진군 백령면 진촌리에 위치한 연화정사는 법당과 요사채,
2003년에 법당 뒤편 언덕에 해수관세음보살상을 세우며
여법한 사찰로 자리매김했다.
주민의 90% 이상이 타종교를 믿는,
연등조차 달지 못하던 불교의 불모지라 불리는 백령에서
제1회 심청효축제를 개최하면서 이룬 성과로 더욱 주목받고 있다.
때문에 백령도 연화정사는 ‘도서(島嶼)포교’의 모범이자 1번지로 손꼽히고 있다.
○호국 흑룡사
북한의 장산곶과 10km 밖에 떨어지지 않은
안보접경지역 백령도에 연등을 달고 북녘 하늘을 환하게 비추는
자비의 통일 등이 되어 줄 것을 염원한다.
○패총
진촌리 패총은
구릉지대에서 해안쪽으로 유수가 흐르는
경사진 곳인 밭뚝 밑이 깍아져 내린 단에 중간부위에서 밑부분에 걸쳐
패각총의 단면을 뚜렷이 드어내고 있으며
패각총은 주로 굴과 섭조개 껍질로 이루어져 있고
그 주변에는 패각편과 도끼, 토기편들이 산재해 있다.
옹기포 선착장에서 진리 방향으로
도로변에 전시된 백령도 해병대의 흑룡전차를 볼 수 있다.
○해안유람선
유일한 백령도 해안 절경과 비경을 볼 수 있는 장소이며,
이곳에서 해안유람선을 타고 두무진과 코끼리바위, 선대암 주변,
물개바위 및 서식지를 볼 수 있으며 기암괴석으로 형성된 백령도의 해안 절경을
바다와 함께 즐길 수 있는 곳이다.
○백령도 천주교회
교회 내부는 시골의 여늬 교회와 다를 바 없는 평범하고 소박한 모습이다
참으로 오랜만에 보는 종(鐘)이다.
중화동교회 뜰에 놓여져 있는데
아마도 교회 초창기부터 사용하던 게 아니었나 짐작된다.
요즘은 종소리를 거의 들을 수가 없다.
'소음'으로 간주되어 교회와 이웃간 분쟁의 씨앗이되기 때문이다.
추억의 소리로 기억되는 내게 종소리는 밀레의 '만종'을 떠올리게 한다.
들에서 종일 일하던 농부와 그 아내가 멀리서 울리는 종소리에
모자를 벗고 두 손 가지런히 모아 기도하는 모습은,
우리에게 끝없는 평화의 세계로 안내한다.
백령천주교회 역시 중요한 의미를 지닌 성당이다.
한국 천주교회의 초기에
몇몇 선교사들이 중국의 변문과 의주의 관문을 통해 조선에 입국했다.
그러나 쇄국정책으로 인한 경계강화로 육로 입국이 불가능해지자
김대건 신부는 백령도를 거점으로 하는 밀입국로를 택했고,
선교사들은 중국어선으로 백령도 근해를 통해 입국하게 되고
프랑스 선교사 17명이 입국했다.
이들 중 6명과 김대건 신부는
1984년 서울 여의도에서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집전한
한국 천주교 창립 200주년 기념 미사 중에 성인품에 올랐다.
※ 한국 천주교회 순교사
○신유박해
"사학은 어버이도 임금도 없어서 인륜을 무너뜨리고
교화에 배치돼 저절로 오랑캐와 짐승의 지경에 떨어지니…
감사와 수령은 사학을 하는 자들의 마음을 돌이키게 하고,
개전하지 않는 무리에게는 역률로 다스려 진멸함으로써
따르는 무리가 없도록 하라."
1801년(신유년) 음력 1월10일
정순왕후 김씨가 내린 천주교 금교령이다.
이 금교령으로 시작된 신유박해는 그해 12월22일(음)
'척사윤음' 반포때까지 계속됐다.
정순왕후 김씨(1745~1805)는
영조의 계비로 정조 서거 후 11살의 순조를 대신해
1800년 6월부터 1803년까지 수렴청정을 했다.
정순왕후는 이 시기 동안 친정 경주 김씨 집안의 친인척을
요직에 앉혀 정권을 노론 벽파에 넘겨주고,
정치적 반대 세력인 남인 시파를 제거하려고 천주교 박해를 일으켰다.
당시 조선천주교회는 정조의 온건 정책으로
중국인 주문모(야고보) 신부가 1794년 입국해 활동하고,
전국 신자 수가 1만명이 넘을 만큼 널리 확산돼 있었다.
조선 천주교회에 가해진 첫번째 전면 박해인 신유박해
△1월 정약종 책 궤짝 사건
△4월 주문모 신부 자수 사건
△8월 황사영 백서 사건 등이 연이어 터지면서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참수형에 처하는 등 잔혹하게 전개돼 교회를 빈사상태에 빠지게 했다.
신유박해 대표적 순교자로는 주문모 신부,
정약종(아우구스티노), 윤유일(바오로), 강완숙(골룸바),
유항검(아우구스티노), 동정부부 유중성(마태오)과 이순이(루갈다) 등이 있다.
신유박해는 천주교 신자들을 '매국노' '불효자
' '풍속문란자' 등으로 규정한 척사윤음을 마련,
언제라도 천주교를 박해할 법적 근거를 남겼다.
신유박해는 일시적으로 교회에 큰 타격을 주었으나,
궁극적으로는 신자들이 박해를 피해 전국으로 흩어져 교우촌을 형성하고
산간오지에 복음을 전하는 계기가 돼 오히려 교회 성장의 밑거름이 됐다.
또 신유박해를 계기로
교회 지도층 양반 신자 대부분이 순교하거나 배교로
교회를 떠나 중인 이하 신분층이 교회 구성원 대부분을 차지해
민중교회로 탈바꿈하게 했다.
가위주리는 두 무릎과 팔을 묶은 후
두 개의 장대를 정강이 사이에 끼워 양끝을 엇갈리게 틀면서 휘게하는 형태로
이 형을 받는 이들 대부분은 팔다리가 부러진다.
○기해박해
기해박해는 1839년(헌종 5년) 4월부터 11월까지 전국적으로 일어난 박해다
1839년 순원황후
'사학 토치령'으로 전국 박해 앵베르 주교 등 119면 순교...
1984년 70위 시성
대왕대비 정순왕후 김씨를 등에 업고
정적인 남인 시파를 몰아내려고 1801년 신유박해를 주도한 노론 벽파는
1805년 1월 정순왕후가 죽자 곧 몰락했다.
순조 비 순원왕후의 친정인 시파의
안동 김씨 집안이 노론 벽파의 자리를 대신했다.
순원왕후는 1834년 11월 순조가 서거하자
그의 손자인 8살의 헌종을 대신해 수렴청정을 했고,
오빠 김유근으로 하여금 정사를 보필하게 했다.
김유근은 1836년 중풍에 걸려 말조차 제대로 못하게 되자
절친했던 유진길(아우구스티노)에게 대세를 받기도 했다.
이 시기 조선 천주교회는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을 중심으로 교회를 재정비,
신자 수가 1만명이 넘을 만큼 성장했다.
그러나 김유근의 은퇴로
천주교를 적대시하던 우의정
이지연이 정권을 잡으면서 상황은 급변했다.
이지연은 헌종 모
효유왕후의 풍양 조씨와 손잡고 안동 김씨의 세도를 빼앗고자
천주교 박해를 정치적으로 이용했다.
순원왕후는 1839년 4월18일 이지연의 상소를 받아들여
'사학 토치령'을 반포하고 기해박해를 공식적으로 재가했다.
박해의 불길은 서울뿐 아니라
경기도, 충청도, 전라도, 강원도, 경상도 등 전국적으로 번졌다.
배교자 김순성(일명 김여상)은 제2대 조선교구장 앵베르 주교와 모방ㆍ
샤스탕 신부의 입국 사실을 밀고했을 뿐 아니라
앞장서 교우촌을 찾아다니며 신자들을 색출했다.
김순성의 밀고로 체포돼 순교한 대표적 인물로는 정하상(바오로),
현석문(가롤로), 조신철(가롤로), 유진길(아우구스티노),
그리고 최양업 신부의 부모인 최경환(프란치스코)과 이성례(마리아) 등이다.
또 김대건 신부의 아버지 김제준(이냐시오)도
사위의 밀고로 순교했다.
박해가 거세지자 앵베르 주교와 모방ㆍ
샤스탕 신부는 신자들 희생을 막으려고 자수, 새남터에서 순교했다.
또 정하상은 조정의 천주교 박해에 대해 부당함을 밝히는
「상재상서」를 올려 천주교를 변호했다.
또 현석문은 순교자들의 행적을 일일이 기록한「기해일기」를 저술했다.
헌종실록」에 따르면 기해박해 동안
사형된 이가 118명, 옥사 1명, 배교로 석방된 이가 48명이었다.
기해박해 순교자 중 정하상을 비롯한 70위가 1984년 성인품에 올랐다.
기해박해 당시 조선 교회를 이끌던
제2대 조선교구장 앵베르 주교와 모방ㆍ샤스탕 신부가 순교하셨다.
○병오박해
병오박해는 1846년 6월5일
김대건 신부 체포를 계기로 시작돼 9월20일 김 신부 순교 직후 종결됐다.
김 신부는 수감중 6차례에 걸쳐 40번의 문초를 받았지만
자기 신상에 대해서만 발설했을 뿐 교회 내부 사정을 실토하지 않았다.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신부 등 선교사들이 활동 중이었는데도
김 신부의 용기있는 행동으로 조선 천주교회는
큰 희생없이 박해를 피해갈 수 있었다.
3개월여 박해 기간동안 순교한 신자는 김대건 신부를 비롯해
모두 9명에 불과했다.
1839년 기해박해 이후 1840년대 중반까지
조선 천주교회는 비교적 평온한 상태에서 교회를 재건할 수 있었다.
기해박해 이후 국경 수비대의 강화로 육로를 통해 국경을 통과하는 것이 어려워지자
김대건 신부는 제3대 조선교구장 페레올 주교 지시로
부제시절부터 해상 입국로 개척에 힘썼다.
김 신부가 1845년 8월 사제품을 받은 후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신부와 함께 해상으로 입국한 이유도 이 때문이다.
페레올 주교는 1846년 봄이 오자
김 신부에게 최양업 신부와 매스트르 신부가 입국할 수 있는
새로운 해상 입국로 개척을 지시했다.
김 신부는 교구장 지시에 따라 배를 빌려 한강 마포나루에서 부터
서해안 연평도, 백령도를 항해하면서 해상도를 작성했다.
그리고 중국 어선과 접촉, 상해에 있는 매스트로 신부에게 지도를 전하려 했다.
김 신부는 이 와중에 1846년 6월5일
순위도 등산진에서 배를 징발하려는 포졸들에게 일행과 함께 체포돼
해주 감영을 거쳐 한양 포도청으로 압송됐다.
또 포졸들은 김 신부 은신처 한양 돌우물골 가옥과
김 신부가 성장했던
용인 은이 교우촌을 덮쳐 현석문(가롤로)를 비롯한
신자 다수를 체포했다.
김대건 신부 체포는 조정에서 큰 문제가 됐다.
김 신부는 체포된 직후
조선 땅에 몰래 들어온 중국인으로 행세했을 뿐 아니라
그가 중국인 어부에게 전해준
서해 연안 지도와 편지가 압수돼 조정이 발칵 뒤집혔다.
때마침 세실 함장이 이끄는 3척의 프랑스 함대가 8월 초
충청도 외연도 인근에 들어와 기해박해 때 앵베르 주교와 모방ㆍ
샤스탕 신부를 처형한 것에 대해 항의하면서 회담을 요청하는 소동이 벌어졌다.
이에 헌종과 대신들은
9월5일 묘당회의와 15일 어전회의를 잇따라 열고
김 신부 처리 문제를 논의했다.
이 자리에서 김 신부와 체포된 일행은 서양 선박을
국내로 불러들인 역적으로 간주돼 사형이 선고됐다.
김대건은 9월16일 새남터에서
'군문효수형'을 받고 25살 나이로 순교했다.
이어 김 신부 순교 3일 뒤인 9월19일 현석문(49)도 군문효수형을 받고 치명했다.
또 포도청에 갇혀있던 임치백(요셉)ㆍ남경문(세바스티아노)ㆍ
한이형(라우렌시오)ㆍ이간난(아가다)ㆍ우술임(수산나)ㆍ김임이(데레사)ㆍ
정철염(가타리나)도 같은 날 곤장을 맞고 순교했다.
페레올 주교는 이들 순교자들 행적을 철저히 조사해
「병오일기」를 작성, 홍콩으로 보냈고,
마침 홍콩에 머물고 있던 최양업 부제가 이를 라틴어로 번역해
기해박해 순교자 행적과 함께 1847년 교황청 예부성성으로 보냈다.
김대건 신부를 비롯한 병오박해 순교자 9명은
1925년 7월5일 기해박해 순교자 70위와 함께 시복됐고,
1984년 5월6일 성인품에 올랐다.
※병오박해 순교자 9위 중
김대건 신부와 현석문을 제외한 7명은 포도청에서 곤장형을 받고 순교했다.
○병인박해
병인박해는 한국 천주교
4대 박해 가운데 가장 오랫동안 지속된 전국 규모 박해다.
학계에서 일반적으로 병인박해 기간을 1866년 초부터
1873년 흥선대원군이 실각할 때까지로 설정하고 있지만
박해로 인한 순교자들은 1879년까지 탄생했다.
병인박해는 서양 세력의
조선 침입에 대한 위정자들 위기의식에서 발단됐다.
당시 조선 주변 정세를 보면, 영ㆍ불 연합군이 북경을 함락했고,
러시아가 남하정책에 따라 두만강 국경지대를 수시로 침범할 만큼 혼란스러웠다.
때마침 조정 대신들은
1865년 11월 북경에 간 사신으로부터 10년 넘게
천주교 신자들과
서양인들을 살육해온 '태평천국의 난' 소식을 전해듣고 자극을 받아
대원군을 압박, 박해령에 서명하도록 했다.
병인박해는 1866년 봄과 가을,
1868년 덕산굴총사건,
1871년 신미양요 등 크게 4단계로 전개과정을 구분할 수 있다.
병인박해는 1866년 2월말과 3월초
제4대 조선교구장
베르뇌 주교와 브르트니에르ㆍ볼뢰외ㆍ도리 신부,
홍봉주ㆍ정의배ㆍ전장운ㆍ최형 등이 잇따라 체포되면서 시작됐다.
이때 체포된 성직자는 새남터에서, 평신도들은 서소문에서 순교했다.
3월 중순에는 제5대 조선교구장 다블뤼 주교와 위앵ㆍ오매트르 신부,
황석두ㆍ장주기 등 5명이 체포돼 충남 보령 갈매못에서 순교했다.
1866년부터 15년간 지속...
전국에 1만여명 순교 대부분 무명 순교자로 이름 알 수 있는 24명만 시성
그러던 중 4월과 8월 두차례에 걸쳐 독일 상인 오페르트가,
9월에는 미국 상선 제너럴 셔먼호가 통상을 요구했다.
또 프랑스 함대가 강화도에 상륙해 약탈을 자행한 '병인양요' 사건이 9월 발발했다.
프랑스 함대가 철군한 후 천주교 신자에 대한 박해가 전국으로 확산됐다.
대원군은 "프랑스 함대가 양화진까지 침입한 것은 천주교 때문이고,
조선의 강역이 서양 오랑캐들에 의해 더렵혀졌기에
양화진을 천주교 신자들의 피로 깨끗이 씻어라"며
선참후계(先斬後啓)의 명을 내렸다.
이후 수많은 순교자들이 양화진에서 참수형을 당해
'절두산'(切頭山)이라 불리게 됐다.
1868년 5월 충청도 덕산에서
오페르트와 페롱 신부, 미국인 젠킨스 등이
흥선대원군 선친인 남연군 묘를 도굴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한동안 잠잠했던 박해 불길은 다시 타올라 천주교 신자들을
나라를 배신한 역적으로 참수형뿐 아니라
생매장, 백지사형 등 잔혹 형으로 처단했고,
배교자까지도 유배형에 처했다.
박해는 다시 잠잠해졌다가 1871년 미 함대가
강화도까지 와서 통상을 요구한 '신미양요' 사건으로 재개됐다.
흥선대원군은 서울 종로를 비롯한
전국 8도 각 지역에
"서양 오랑캐가 침범해 오면 싸우거나 화친해야 하는데,
화친을 주장함은 나라를 파는 것이다"는 내용의 척화비를 세웠다.
교회는 병인박해 순교자를 대략 8000명에서 1만명으로 추산한다.
이들 중 대부분이 무명 순교자들이다.
이름을 알 수 있는 순교자 중 24명만이 1968년 시복된 이후
1984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로부터 성인품에 올랐다.
※병인박해는 이전의 신유ㆍ기해ㆍ병오박해때와 달리
생매장ㆍ백지사형 등과 같은 잔혹한 처형 방법이 전국에서 남발돼
1만여명의 순교자들을 탄생시켰다.
○천암함 46용사 위령탑
위령탑은 천안함 피격 당시
해병대 초병이 물 기둥을 관측한 지점에 세워졌으며,
폭침 지점과는 불과 2.5km 떨어진 곳이다.
46용사가 혼이 되어서도 서해 바다를 수호하겠다는 굳은 의지를 담고 있다.
높이 8.7m 규모의 주탑은 대리석 으로 만든
세 개의 기둥이 하늘로 향하며 한 곳으로 모아진다.
세개의 기둥은각각 대한민국의 영해와 영토·국민을
굳건히 지킨다는 정신을 형상화한 것이란다.
한해전의 온국민의 애절한 염원을 담은 귀대명령은
아직도 나의 귓전을 때리는듯 하다.
“작전지역에 남아있는 772함 수병은 즉시 귀환하라”
“전선의 초계는 이제 전우들에게 맡기고 오로지 살아서 귀환하라”
“이것이 그대들에게 대한민국이 부여한 마지막 명령”이다.
772함 수병은 귀환하라! 772 함 나와라!
온 국민이 애타게 기다린다. 칠흑의 어두움도
서해의 그 어떤 급류도, 당신들의 귀환을 막을 수 없다
작전지역에 남아있는 772함 수병은 즉시 귀환하라 !
772 함 나와라. 가스터어빈실 서승원 하사 대답하라 !
디젤엔진실 장진선 하사 응답하라.
그 대 임무는 이미 종료되었으니이 밤이 다가기 전에 반드시 귀대하라 !
772함 나와라. 유도조정실 안경환 중사 나오라
보수공작실 박경수 중사 대답하라. 후타실 이용상 병장 응답하라
거치른 물살 헤치고 바다위로 부상(浮上)하라
온 힘을 다하며 우리 곁으로 돌아오라.
772함 나와라
기관조정실 장철희 이병 대답하라.!~
사병식당 이창기 원사 응답하라 !~
우리가 내려간다. SSU팀이 내려 갈 때 까지 버티고 견디어라.
772함 수병은 응답하라. 호명하는 수병은 즉시 대답하기 바란다.
남기훈 상사, 신선준 중사, 김종헌 중사, 박보람 하사, 이상민 병장,
김선명 상병, 강태민 일병, 심영빈 하사, 조정규 하사, 정태준 이병,
박정훈 상병, 임재엽 하사, 조지훈 일병, 김동진 하사, 정종율 중사,
김태석 중사, 최한권 상사, 박성균 하사, 서대호 하사, 방일민 하사,
박석원 중사, 이상민 병장, 차균석 하사, 정범구 상병, 이상준 하사,
강현구 병장, 이상희 병장, 이재민 병장, 안동엽 상병, 나현민 일병,
조진영 하사, 문영욱 하사, 손수민 하사, 김선호 일병, 민평기 중사,
강 준 중사, 최정환 중사, 김경수 중사, 문규석 중사.
이상 호명된 수병은 즉시 귀환하라.
전선의 초계는 이제 전우들에게 맡기고,
오로지 살아서 귀환하라 이것이 그대들에게 대한민국이 부여한
마지막 명령(命令)이다.
대한민국을 보우(保佑)하시는 하느님이시여,
아직도 작전지역에 남아 있는우리 772함 수병을 구원(救援)하소서
우리 마흔 여섯 명의 대한(大韓)의 아들들을 차가운 해저(海底)에
외롭게 두지 마시고 온 국민이 기다리는 따듯한 집으로 생환(生還)
시켜 주소서.. 부디 그렇게 해 주소서.....
천안함 용사들이여!~~
서해바다를 지키다 장렬하게 전사한 천안함 46 용사가 있었다.
이재 그 고귀한 희생정신을 기려 여기 위령탑을 세우나니 비록 육신은 죽었다 하나
그 영혼, 역사로 다시 부활하고 국민의 가슴속에 영원히 살아
자유대한의 수호신이 되리라....
2010년 3월 26일 21시 22분,
우리의 용맹스러운 용사들과 함께 서해를 지키던
한국 최정예 전투함,천안함(PCC-772)은 서해의 백령도 서남방 2.5km 해역에서
경비작전을 수행중 갑자기 엄청난 수중폭발로 큰 충격을 받았다.
그 충격으로 선체는 함수와 함미로 절단되었고 함미 함체는 곧바로 침몰하였다.
함수함체는 오른쪽이 90도 기운 상태에서 부력을 잃었다.
침몰직전의 함수 함체에서104명의 승조원중 58명은
해군 고속정과 해경함에 의해 구조 되었으나,
46 용사들은 그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위치한 보조탑에는
천안함 46용사의 얼굴이 새겨진 동판 부조를 부착했다.
또 보조탑 양 옆에는 “비록 육신은 죽었다 하나 그 영혼,
역사로 다시 부활하고 국민의 가슴속에 영원히 살아
자유대한의 수호신이 되리라”는 해군참모총장의 비문과
‘해군 문인클럽’ 회장 이근배 시인의
‘불멸의 성좌여, 바다의 수호신이여’라는 추모시가 음각돼 있다.
그렇게 무서운 밤을 해처나오지 못한 천암함 46 용사는
이렇게 또 다시 원혼이 되어 이곳에서 사랑하는 조국을 지키고 있었다 .
순간까지 그토록 지키려 애썼던 서해의 푸른바다를 가슴에 품고
고이잠든 천안함 46 용사들이여!
그 어느 누구보다도 용맹스러웠던 바다의 전사들이여!
채 꽃피지 못한재 산화한 그대들의 숭고한 애국심과희생정신은
이재 우리들의 가슴속에 영원히 살아숨쉴 것이다.
이 곳 백령도 앞 바다에서
우리 영토를 지키다 전사한 천안함 46용사 위령탑이
2012.3.26. 현장인 이 곳에 세워졌습니다.
삼가 호국영령들의 명복을 빕니다!!!
○중화동교회
십구세기 초(1816년) 백령도와 그 주변지역에서 전개된
기독교의 선교역사를 모아 그 기록을 정리하고 전시한
서북해안 유일의 역사기념관이 바로 이곳 중화동교회에 있다.
이 지역의 기독교 역사는
한국 기독교의 초기단계 역사로 영국에 의해서 시도되었고,
전개된 선교의 중심지가 백령도였다.
당시의 백령도는 대청 및 소청도와 함께 한, 중 해상 방어의
군사기지 역할을 수행하기도 했었다.
이처럼 중국과 가까운 위치에 있다보니
서해상을 통해 들어오는 문화, 경제교류의 중요한 통로가 되었기 때문에
기독교의 전파 역시 백령도에서부터 자연스레 이뤄졌던 것.
이 무렵 기독교를 한국에 최초로 전한 나라는 영국이었다.
우리나라에서 두번째로 세워진 장로교회라는 중화동교회
1896년에 세워진 교회로 교회 옆에 자리한 기독교 역사관에서는
한국 기독교 역사를 만나볼 수 있습니다.
중화동교회는
마을을 굽어볼 수 있는 곳에 위치해 있는데,
교회로 오르는 계단 입구에 큰 나무가 한 그루 있다.
150년 된 팽나무인데,
백령도의 생태학적, 학술적 보존 가치가 높은
이 고장의 귀중한 산림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어,
이 나무를 훼손하면 500만 원 이하의 과태료를 물어야 한다.
○용트림 바위
용트림 바위는
전망대 절벽 아래 바닷가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용이 하늘로 승천하는 듯한 모습이라 하여 용트림 바위로 불리며
바위 스스로 하늘을 향해 나선처럼 꼬며 오르는 형상이 매우 인상적입니다.
○창바위 해변
창바위 해변의 또 다른 바위
○하늬해변..
기기묘묘한 현무암들이 해안이 늘어서 있는 곳입니다.
○물범서식지
두무진 주변 선대암과 코끼리 바위를 지나면
천연기념물 지정, 보호받고 있는 물범이
수면에 잠길 듯 말 듯한 바위에 옹기종기 집단서식하고 있다.
해상일주 관광을 하다보면 물범들의 노는 모습을 가까이서 볼 수도 있다.
점박이물범은 1982년 천연기념물 제331호로 지정됐고
2005년부터 시행된 야생동식물보호법상의
멸종위기 야생동물 2급으로 지정돼 있으며
은회색 바탕에 타원형 점무늬가 있으며 몸 길이는 160∼170cm,
체중은 80∼120㎏ 정도 달한다.
○대피소
▲연평도 포격 이후에 만들어 놓은 대피소
백령도의 또 다른 자랑거리
○통일기원비
조국의 통일을 기원하기 위해 세워진 것으로
두무진 포구 왼쪽 능선 위에 서 있다.
멀리 북녘땅을 바라볼 수 있어 실향민들의 발길을 머물게 한다.
○통일기원탑
조국의 통일을 기원하기 위해
객선부두인 용기포선착장 진입로에 세운 탑으로 백령도 여행시
가장 먼저 손님들을 반겨주는 광장으로써
대부분 이곳에서 백령도 여행이 시작된다.
이곳에서 남포리쪽으로 지는 석양이 일품이다.
백령도 특산물
○까나리 액젓
무공해 토속 식품으로
타 제품에 비해 액젓의 가치 척도인 칼슘,단백질,회분이 풍부하며,
7가지의 필수아미노산이 고루 들어있고,
맛을 내는 성분인 글루탄산글리신 함유량이 높아 단백한 맛이 있으며,
젓갈류가 숙성됨에 따라 비린내가 없어지고 독특한 향미를 갖추고 있어
김장철에 없어서는 안될 조미료이다.
까나리는 멸치와 비슷한데
낚시미끼로 쓰거나 말려서 졸여 먹기도 하지만 주로 액젓을 담근다.
맛이 담백학 숙성됨에 따라 비린내가 없어져 독특한 맛을 느낄 수 있다.
○백령도 약숙
백령도 약숙은 은은하고
감미로운 쑥향기가 깊게 배어있으며 특히 위산을 억제 시키는
"플라보노 이드"라는 성분이 들어있어 위장병에 효음이 있음이 널리 알려져 있다.
백령도 특유의 토종에서만 자라는 백령도 약쑥은 쑥 가운데 잎이하얀 것이 특징이다.
○자연산 전복
맑고 깨끗한 해저자갈 등에 서식하는 무공해 패류로서
국민 기호도가 높은 고가품종으로 판매되어
소화흡수력이 좋은 단백질15%를 함유하고 있으며
특히 전복죽은 환자회복식품으로 각광을 받고 있다.
○자연산 돌미역
서해안 무공해 청정해역에서 생산되는
순수한 자연산 돌미역으로 프크스테롤을 25% 함유하고 있어
항암제로 기대가 되는 식물이며, 특히 산모조리에 없어서는 안될 식품이다.
○꽃게
매년 2월초순부터 6월 하순,
9월중순부터 11월 하순까지 꽃게잡이를 하며 씨알이 굵고
맛이 담백하여 최고의 상품으로 친다.
[해삼]
관내 청정해역에서 생산되며 강장에 좋을 뿐 아니라
기호도가 높은 연체동물로 이뇨작용을 촉진시키는 성분을 함유하고 있다.
[참다래]
백령도에서 생산되는 참다래는
기후, 풍토가 좋아 타 지역에서 생산되는 것 보다 월등하다. 비타민C가
다른 과일보다 25배나 들어있는 미용건강식품이다.
선박 운항시간표
인천항연안여객터미널에서 (인천항 → 백령도)
출발지 출발시간 선사명 선박제원 비고
선박명 정원
인천항 08 : 00 (주)청해진해운 데모크라시5호

358

선박보기
08 : 50 제이에이치페리 하모니플라워
우리고속훼리(주) 프린세스호 362 선박보기
일 자

선 명

인 천 발

기항지

백령발

비 고

~ 12.18 프린세스호 13 : 00 소청, 대청 08 : 00 편도운항
12.19~12.25 프린세스호 13 : 00 소청, 대청 08 : 00 왕복운항
※ 본 시간표는 기상 조석 및 선박사정에 의하여 운항시간이 변경될 수 있습니다.
12.26 ~
2013.2.28
프린세스호 13 : 00 소청, 대청 08 : 00 편도운항

백령 용기포선착장에서 (백령도→ 인천항)
출발지 출발시간 선사명 선박제원 비고
선박명 정원
백령도 08 : 00 우리고속훼리(주) 프린세스호 362 선박보기
13 : 00 (주)청해진해운 데모크라시5호

358

선박보기
14 : 00 제이에이치페리 하모니플라워

[선박 여객운임]

백령도 일 반 인 인천시민
대인 중고생 경로 소아 대인 중고생 경로 소아
출항 62,500 56,400 50,300 31,250 32,000 28,950 25,900 16,000
입항 61,000 54,900 48,800 30,500 30,500 27,450 24,400 15,250
왕복요금 123,500 111,300 99,100 61,750 62,500 56,400 50,300 31,250
※ 출항요금에 터미널 이용료 포함한 금액임 (대인,중고생,경로 : 1,500원 / 소아 : 750원)
※ 요금 적용일시 : 2012년 5월 7일부터 시행
※ 성수기 기간 : 여객운임의 10% 할증 적용 됩니다.

◈찾아 가는 길

○인천항 오시는 길(자가용 이용시)

경인고속도로(종착점)

인천항사거리(좌회전) → 롯데마트 사거리(우회전) → 해양경찰청(좌회전) →

인천항연안여객터미널

제2경인고속도로(종착점)

(서해안고속도로)→ 롯데마트 사거리(직전) → 해양경찰청 사거리(좌회전) →

인천항연안여객터미널

백령도 여행은 어떻게 가야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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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사를 통해 다녀오는 것이 제일 편안하고 저렴한 여행방법중 하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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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라면식탁에 평화를...
글쓴이 : 이안드레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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