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온 글]
종묘의 영녕전 동협제6실에 있는 신위는
文仁武莊至孝明暉懿愍皇太子(문인무장효명휘의민황태자)
顯德貞穆溫靖慈行懿愍皇太子妃李氏(현덕정목온정저행의민황태자비이씨)
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바로 황태자비 이씨는 이방자여사임으로 이에 관련된 인물들의 내용들을 조사해 보았습니다. 그러나 저자들의 주장들이 상이한 점들이 있었으나 그 대로 인용하였음을 밝혀둡니다.
영친왕의 어머니, 약혼녀, 이방자 여사
1. 영친왕의 어머니 엄씨
영친왕의 어머니 순헌황구비 엄씨는 1854년(철종 5년)부친 엄진삼의 장녀로 태어났고, 8살 되던 해에 입궁하여 명성왕후 민씨의 시위 상궁으로 있었다. 이것이 인연이 되어 고종(1852-1919)의 총애를 받게 된 엄씨는 민씨에 의해 궁 밖으로 쫓겨났다가, 민씨(1851-1895)가 8월 20일 죽은 후 5일만에 고종의 명으로 다시 궁궐로 들어오게 되었다.
민씨의 시해와 단발령에 분노한 양반 유학생들과 농민들의 봉기가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을미의병운동이 전국으로 확산되자 정부에서는 친위대를 보내 진압하는 한편 의병해산을 종용하기도 했으며, 전국적인 반일운동에 놀란 일본은 궁궐을 수비하고 있던 정찰대를 파견해 의병운동 진압에 나섰다.
고종은 이 틈을 타 러시아 공사 베베르와 이범진 등 친러파의 권유를 받아들여 러시아 공관으로 1896년 2월 11일 피신했으니, 이를 아관파천(俄館播遷)이라 한다. 당시 고종도 일본이 민씨를 살해했다고 생각했으나 일본군의 허울 좋은 보호 아래서 수수방관하고 있다가, 일본군이 궁궐을 비우자 러시아 공사관으로 옮긴 것이다.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옮기자 더욱 분노한 민중들은 친일내각의 김홍집과 어윤중을 타살하는 등 일본에 대한 분노를 친일 내각에 표현했다. 이 때 러시아 공사관에 고종의 수라를 맡아 들어간 여인이 바로 엄씨였다.
당시 고종의 계비(繼妃)로 정화당(貞和堂) 김씨가 초간택된 상황이었으나 민씨 시해사건의 주범이 점차 일본으로 밝혀지면서 국혼이 계속 연기되다가,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게 되자 유야무야되고 말았다. 이 빈 공간을 엄씨가 맡은 것이다.
왕비로 내정되었던 정화당 김씨는 그 후 다른 곳으로 출가하지 못하고 처녀로 지내다가 47살이 되어서야 일본의 정략에 의해 궁궐로 들어오게 되었다. 1917년 조선총독부가 고종으로 하여금 일왕에게 신하의 예를 올리도록 권했는데, 고종이 불응하자 김씨를 이용한 것이다. 조선총독부는 고종의 환심을 사기 위하여 윤덕영을 시켜 김씨에게 비빈의 예를 갖추게 한 후 입궁을 시켰다. 그러나 고종은 이 연극을 거부했다. 김씨는 일본에 의해 입궁했으나 고종이 한 번도 부르지 않아 정작 고종의 얼굴도 볼 수 없었다. 고종으로부터는 인정받지 못했으나 일본으로부터는 비빈으로 인정받은 김씨는 고종이 세상을 떠난 후 왕실로부터 당시 금액으로 300원의 생계비를 받고 한많은 일생을 살다가 죽었다.
러시아 공사관에서 고종과 함께 지내던 엄씨는 1년 후 독립협회의 주장에 따라 고종이 환궁(1897년 2월 20일)함에 따라 대궐로 돌아 왔다. 환궁 후 1897년 10월 12일 고종은 원구단에서 황제 즉위식을 갖고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왕후는 황후, 왕세자는 황태자로 승격시켰다. 고종의 호칭도 전하에서 황제의 호칭인 폐하로 바꾸었으며 전하라는 호칭은 황태자를 부르는 호칭으로 바꾸었다. 그리고 돌아오지 않는 민씨에 대해서는 명성황후로 추존하고 그해 11월에 국장을 선포했다.
엄씨는 이해(1897) 10월 아들 은(慇)을 낳아 고종에게 선영(善英)이란 이름을 하사 받고 귀인으로 책봉되었다. 그리고 3년 후인 1900년 8월, 아들이 영왕으로 봉해지자 순빈으로 책봉되었다가 다음해 10월 빈에서 비로 봉해졌으며 경선궁(慶善宮)이란 궁호를 받았다. 엄씨는 빈에서 비로 승격됨에 따라 사실상 고종의 계비가 된 것이다. 그리고 고종이 순종에게 왕위를 물려준 후에는 엄씨의 아들 영왕이 1907년 황태자로 책봉되었다. 영친왕으로 알려진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태자가 바로 그다. 엄귀비 또한 황귀비로 책봉되었다.
엄씨는 좋은 가문에서 태어나지는 못했으나 조선의 그 어느 왕비보다 여성 교육에 뜻이 많았던 선각자이기도 했다. 엄씨는 1906년에 진명여학교를 세웠으며, 명신여학교(현재 숙명여학교)를 만들 때 거액을 내놓아 사실상 이 학교의 설립자이기도 했다. 이 외에도 양정학교 설립에도 중심적인 역할을 하는 등 엄씨는 교육이 백년대계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이 지닌 영향력을 발전적인 면에 사용할 줄 아는 지혜가 있었다.
그러나 엄씨는 러일전쟁(1904)에서 일본이 승리함으로 좌절을 맛보게 되었다. 일본은 러시아와 포츠머드 조약을 체결하여 한국에 대한 우월적 지위를 보장받은 후 본격적인 침탈에 나섰다. 일본은 대한제국의 외교권은 일본에게 있으며 황제 아래 한 명의 일본인 통감을 두어 이를 감독한다는 내용의 을사조약 체결을 강요하였다. 그리고 고종이 이를 반대했음에도 불구하고 학부대신 이완용, 내부대신 이지용 등 이른바 을사오적의 주도하에 불법적으로 조약을 맺었다. 이에 고종은 1907년 헤이그 만국 평화회의에서 그 부당성과 불법성을 호소했으나 실패하고 초대통감 이등박문에 이해 퇴위 당하고 말았다.
2. 이방자여사
1. 이방자(李方子)여사의 일생
방자 여사는 행복한 결혼생활을 하도록 정해져 있던 우리의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英親王;고종과 귀비 엄씨 사이에서 태어난 李垠은 순종의 이복 동생)과 민갑완의 약혼을 강제로 깨며 결혼침략을 하는 가운데 역사의 무대에 등장한다. 말하자면 역사적으로 유례없는 악역을 맡는 비정한 여인으로서 역사의 인물로 나타난다. 인류사에 방자 여사 같은 악역으로 일생을 사는 여자도 쉽게 있을까?
방자여사는 1901년 11월 4일 동경의 나시모도(梨本)궁에서 황족 가문의 맏딸 출신으로 본명이 나시모도 마사코(梨本方子)로 태어났으며 일본의 철저한 황족교육을 받고 성장했고 일본 왕세자 히로히토(裕仁)의 비로 간택됐으나 임신불능 판단을 받아 이루어지지 못했고, 그후 히로히토는 1924년 마사코의 4촌인 나가코(良子)와 결혼한다. 방자 여사는 황태자 이은(李垠)이나 민갑완 여사 보다 4년 아래의 나이였다.
영친왕과 방자의 결혼은 3-1운동이 나던 해인 1919년 1월 28일로 정해졌었으니, 광무제가 그 잘못된 결혼을 눈앞에 두고 별안간 돌아가셔서 1년간이 연기되어 다음해 1920년 4월 28일에 정식 결혼식을 일본 도쿄에서 올리게 되었다. 그리고는 곧 첫 아들 진(晋)을 낳는다. 그런데 첫아들은 8개월이 되었을 무렵에 융희(순종)임금님을 뵈러 가서 서울에 있다가 독살된다.
진 왕자의 죽음은 의문이 많다. 그리고 그 몇 년 전에 있었던 엄귀비의 죽음도 의문이 많다. 본 논문에서 밝힌 대로 광무제와 민갑완여사의 부친 민영돈의 비극이 가혹한 독살임은 이제 공인될 만큼 분명할 정도로 밝혀진 것이다. 그러나 진 왕자와 엄귀비의 죽음, 그리고 조국 탈환 무렵 돌발된 가장 촉망받던 이우황손의 죽음 등은 너무나 의문점이 많다. 못하는 일이 없이 흉악한 일본 황실에서, 가장 촉망받았으나 반일적이었던 이우황손과 테라우찌에게 철저히 대들면서 반일적이었던 엄귀비(1)를 철저히 미워하는 가운데 항일거성이었던 그 들은 급격히 죽음을 맞았고 진왕자도 별안간 사라졌다.
영왕과 방자여사의 두 번째 아들인 구(玖 1931생)는 그 후 10년 후에 태어났다. 이구황손은 건장하게 잘 자라서 미국의 MIT공대를 졸업했을 정도로 우수했으나, 제3공화국 때에 귀국하여 국내 실정을 잘 모르는 가운데 주위의 종친이나 가까운 인사들에게 이용만 당하다가 부도를 내고 일본으로 도피하여 일본 무당과 사는 비참한 노년을 보내게 된다.
방자여사는 5-16군사혁명 후에 자유당 정권의 황실 탄압이 끝나자 박정희대통령의 배려로 귀국을 하게되나, 이미 귀국시에는 남편 영왕이 식물인간이 되어 성모병원에서 말년을 보내다 돌아가시게 되고, 계속하여 창덕궁의 낙선재에서 지내다가 노환으로 1989년 세상을 떠나고 경기도 미금시 금곡동 홍유능 내에 묻혀 있으며, 그 해 영녕전 동협 제6칸에 1970년 부묘된 영친왕 옆에 추부되었다.
2. 방자 여사의 정치적 의미
방자 여사에 대한 국내에 있어서의 평가는 생각하면 그간 너무 과분한 것이었다. 방자 여사는 제3공화국 초에 일본에서 귀국하여 영왕비라는 신분 때문에, 그리고 당시로서 일본과의 외교관계 등이 고려되어서, 생각하면 정도에 넘치는 과분한 대우가 주어졌었다고 생각된다. 그 이유에 있어서도 가장 궁극적인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당시까지도 학계를 비롯한 우리나라에 있어서 방자 여사에 대한 평가가 전혀 되어있지 않은 상태였음을 뜻하고, 이 나라를 친일흐름이 보이지 않게 내면에서 확고히 장악하고 있었다는 뜻이라고 본다. 그러나 방자 여사는 그렇게 흐릿하게 방치할 수 없는 존재로서, 예리한 시각으로 분명하게 정치적 의미가 논의되어져야 한다고 본다. 그의 정치적 의미는 무엇인가?
1)침략국모로서의 지위
방자 여사의 결혼은 한마디로 사상 유례없는 가혹한 결혼 침략이다. 거기에는 남녀간의 사랑도 전제된 것이 아니고, 이웃나라와의 선린관계라든가 하는 뜻은 전혀 있을 수도 없는 원색적 침략행위이다(2). 더군다나 약혼상태에 있던 흠잡을 데가 전혀 없는 민갑완 여인을 평생에 걸쳐 비극적 삶을 살게 만드는 극히 비인도적 국제 폭력을 통해서 강제결혼을 하는 것이니, 지구상에 이토록 못된 침략행위가 어디 있겠는가?
방자의 결혼 침략행위를 막으려고 우리의 대한황실에서는 얼마나 발버둥쳤는가? 심지어 광무황제는 결혼 날짜가 임박하자 제반 상황을 감안하며 망명까지를 결심했을 정도였고, 그것이 누설되어 결혼을 사나흘 앞둔 날짜에 급격히 독살(?)시해되고 만다. 독살은 침략자들에 의해서 시행되었으나, 광무황제는 죽음으로까지 항거하면서 결혼을 반대했다고도 생각된다(3). 그리하여 결혼식이 1년 연기된다. 도대체 있어서는 안될 잘못된 결혼식이 아닌가?
당시 우리 민족의 본 결혼에 대한 항거는 3-1만세항쟁의 와중에서 잊혀진 역사라 그렇지, 이 추악한 결혼에 대해 대단한 거부감이 있었던 모양이다. 일본에 있는 방자 여사의 집에는 수없이 협박 전화가 걸려 왔었을 정도로 우리 민족의 반발이 컸었다고 한다. 심지어 당시 영왕과 방자가 결혼식에 탔던 마차가 결혼식이 끝나고 곧 폭파되고 마는 불상사(?)까지 터지고 말았다. 생각하면 그것은 불상사가 아니라 양심적 인사에 의한 정의의폭발이 분명하다고 하겠는데, 이 잘못된 결혼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곳곳에서 내심으로는 반대하고 있었는가를 말해 주는 것이다. 그리고 당시에 신부가 탄 의장마차가 지나는 곳에 서상일이라는 경상도 청년이 숨어 있다가 폭탄을 던졌으나 불발탄이 된 사건도 있었다(4).
일본인들이 우리 국토를 강제점령하고서는 정치적으로 가장 집요하게 공격하려고 한 것은 무엇보다도 다음의 두 가지였다.
첫째는 대한 황실의 정통성 파괴였다. 그것은 대한 황실의 무능, 무력, 무책임성을 극도로 강조하여 선전하고 광무제나 융희제를 천하에 없는 바보로 만드는 일로 나타난다. 그리고 우리의 역사를 날조, 왜곡, 훼손하면서 식민지가 되어야 할 정당성을 억지로 만들어 나간다.
둘째는 우리 민족의 구심점이요, 정치생활의 핵인 황실을 흡수하고 궤멸시키는 일의 추진이었다. 그것의 제1공략 목표가 임금님이었고, 따라서 황태자를 녹여 없애는 것은 침략 일본의 최대목표였다. 방자여사의 결혼 침략은 몇 개 사단의 군대보다도 무섭고, 수만 척의 군함보다도 가증스럽고 간악한 침략이었다. 우리의 구심점인 임금님을 녹여 없애려는 침략이었으니 얼마나 무서운 침략인가?
2)이적(利敵)국모로서의 지위
방자 여사는 그의 결혼 자체가 철저히 정략적으로 강요된 만큼 철저히 침략 일본을 위한 것이었다. 결혼이라는 것을 통해 우리의 황실을 점차 오염, 소멸시키고서, 일본 황실을 살찌우려는 것이기에 특히 그러하다. 방자 여사는 그렇기에 결혼을 앞둔 1919년 1월 9일에 결혼을 하는 위대한 침략행위로 일본 궁중에서 보관장훈이등(寶冠章勳二等)훈장을 받는다. 정략에 충실하게 따라주어 일본의 침략적 국익에 최대한 헌신했다는 뜻이다(5). 훈장을 줄 정도의 위업임을 일본 황실은 분명히 알고 있는 것이다.
방자 여사의 어머니가 딸을 시집을 보내면서 해준 말. 그 말은 너무나도 깊은 뜻이 깃든 말이다. 그 말은 사실상 수없이 많은 것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얘야. 책임이 무겁다는 걸 잊지 말아라"
도대체 무슨 책임이 그렇게 무겁다는 말인가? "얘야, 행복하게 살아라"라고 말했어야 정상적인 말이 아닌가? 결혼을 해서 시집을 가면 남편이랑 행복하게 잘 살면 되는 것이 일반적인 일인데, 도대체 무슨 책임이 그렇게 무겁게 주어질 수 있는가? 대한황실의 심장부에 투입되는 여성특공대에게 주어지는 가장 적절한 당부가 바로 그것이라고 밖에 더 생각이 될 수 있는가? 침략을 해서 식민지로 짓밟는 나라에 보내면서 책임지울 일이란 당연한 것이 아닌가? 대한황실을 완전히 녹여 없애라는 것이 확실한 것이다(6).
더군다나 영왕은 황태자로서 우리나라의 28대 임금님이 되실 분이다. 그토록 지체 높은 금상의 제1인물을 정확히 옭아매는 중대한 임무가 방자에겐 주어져 있는 것이다.
3)위선국모로서의 지위
방자 여사는 민갑완 여사의 존재를 신혼 초에 이미 알고 있었다. 그리고 황태자비로 약혼을 했다가 파혼을 하면 평생을 독신으로 지내게 된다는 대한황실의 법도도 소상하게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미안하다고 자서전에 썼다. 그러나 그것이 진심이었을까?
그는 제3공화국 시대인 1963년 11월 영왕과 함께 국적을 회복하고 국내에 들어와 있을 때에 평생을 수절하며 고통 속에 지낸 민갑완여사가 국내에서 외롭게 고생하며 늙은 몸으로 비참하게 살고 있음을 알면서도 단 한번의 예의를 갖춘바가 없다. 더군다나 당시의 본인은 박대통령의 배려로 낙선재에서 나름대로 부족함이 없는 풍족한 생활을 영위하면서, 영왕기념사업회, 정신박약아 교육시설인 자혜학교, 1982년 신체장애아 교육시설인 명혜학교 등을 설립하며 자선사업을 하면서 살고 있었다.
물론 자선사업을 하는 것은 고맙고 갸륵한 일이다. 그러나 본인에 의해 극도로 피해를 입은 민갑완 여인이게 단 한 번이라도 기초적 예의를 갖추었는가? 그리고 일제침략 이후 이승만 탄압이 가중되면서 거지같이 살고 있는 황족들에게 최소한의 배려를 했는가? 그 황족은 모두가 본인의 친척이 아닌가? 그런데 아무것도 제대로 하는 것이 없이 자선사업을 한다는 것은 얼마나 위선이고 가증스러운 일인가?
자선사업은 훌륭하고 존경받을 일이다. 그러나 제 자식을 굶기고 제 할 일을 못하며 하는 사람도 있는가? 방자 여사는 두 나라의 황실관계가 갖는 특수 상황에서 강제로 정략결혼의 희생물이 되었다고 자신을 부각은 시켰어도, 가해자인 자신이 피해자에 대해 추호도 마음을 두지 않았다고 생각된다. 어쩌면 천인공노할 침략자로서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을 맞고도 원자탄을 던진 자만 나쁘고 자신들이 피해자라고 선전하는 간교한 일본인 그대로인가?
필자가 민갑완 여사의 여동생인 민만순 여사를 만나서, 이에 대해 물었을 때에 민만순 할머니는 말없이 쓴웃음을 짓고 고개를 강하게 흔들 뿐이었다(7). 단 한번의 연락도 없었다는 것이다. 위선자. 정말 위선의 침략자다운 냉혈의 인물이다. 그러고도 겉으로는 점잖은 귀부인 티를 내는 자선사업이 그 속을 아는 인사들에게 제대로 이해가 될 것인가?
필자가 의왕의 손자(이석 황손의 조카)인 이일주 황손을 만났을 때에, 방자 여사가 어린 친척들에게 어떻게 했는가를 물었을 때의 답변은 분명하게 방자 여사의 위선됨을 그림같이 드러내고 있었다(8).
"어린 저희들이 낙선재를 찾아갔을 때에 웃는 것이 전혀 없었지요. 한 두 번 세배를 갔다가 다시는 찾지 않을 수밖에 없었죠. 어른들이 세배를 가야한다고 가르치시기에 갔지만, 할머니가 자애롭게 어린 손자들에게 베푸는 따스함은 전혀 없었습니다. 냉정한 얼굴로 깔보는 듯 했을 뿐이지요. 우리 민족에 대한 애정은 전혀 없는 여인이었다고 봅니다. 우리 민족의 피를 나눈 할머니라면 어린 손자들에게 그럴 수가 있습니까? 우리의 할머니가 결코 아니었습니다."
3. 민갑완 여사
1. 민갑완의 일생
1897년(丁酉) 9월25일 출생했으며, 당시 부친은 영국공사와 북경공사를 역임했던 외교관 민영돈이었다. 그 때로서는 최고 수준의 귀족계층이고 양반가문 가운데서도 최고 수준에 있던 가문에서 출생한 민갑완은 당시의 여성으로서는 서당식이지만 정통교육을 받은 빼어나게 총명한 여인이었고, 150명의 쟁쟁한 처녀들 가운데서 뽑힌 당대 최고 수준의 여인이었다. 11세의 나이에 간택되어 황태자비로 결정될 때의 일화는 지금도 사료에 남아 있어서 우수함을 증명하고 있다.
그러나 민갑완이 황태자비로 간택되던 시대의 대한제국은 국운이 기울대로 기울어 있는 상태였고, 대한 황실이 스스로의 황실 운용에 대한 독자적 의사결정 능력도 나날이 상실해 가고 있던 때였다. 1907년 황태자로 책봉된 영친왕은 그 해 12월 11살에 해외유학이라는 명목으로 침략원흉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에 이끌려서 강제로 일본에 끌려가 인질유학을 당하게 되었고, 민갑완은 황태자비에 간택된 몸으로서 몸가짐을 함부로 할 수 없는 상황에서 10년이라는 긴 세월을 하염없이 기다리는 10대 소녀기를 보내게 된다. 민갑완은 20대 초에 이르러서는 사실상 당대 최고의 여인이요 황후가 될 여인으로 훌륭히 성장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민갑완은 일제 침략자들의 결혼 침략을 받는 제1표적이 될 수밖에 없었다. 강제파혼을 시키고는 강제로 다른 곳으로 결혼시키려는 침략자들의 가혹한 조치에 혹독히 시달리는 몸이 되었고, 가문 전체가 폐문 지경에 이르도록 가혹한 침략을 받는다.
첫째로 부친 민영돈이 파혼 충격으로 병석에 누워서 중병을 앓게 되고, 이어서 궁중 전의가 치료약이라고 보낸 것을 의심 없이 먹고는 피를 토하고 독살 당하는 처참한 피해를 입는다.
둘째로 당시의 법도로는 파혼되면 결혼을 못하는 것이고, 역혼(逆婚)을 못하는 풍습이라 동생들도 결혼을 못하게 되는 상황을 맞은 충격으로 조모님이 돌아가시는 비극을 겪는다.
셋째로 가족 전체가 사회적으로 고립되며 일제 경찰과 끄나풀들이 수시로 감시하는 가운데 강제로 아무데나 민갑완을 결혼시키려고 하여 초상집 같은 울음의 나날을 잇게 된다. 오죽 심각하면 무서운 사냥개를 민갑완 옆에 두고 지켜야 할 정도로, 성폭행을 하려는 등의 공포의 나날이 계속되었겠는가?
그러다가 민갑완은 상해로의 망명 결단을 내린다. 상해 망명은 당시의 황실에 있어서는 유일한 성공사례이다.
첫째로 고종의 망명시도가 가장 크고 중요한 시도가 있었으나, 이완용 일당에게 감지되고 발각되면서 실패하고 만다. 이회영의 주도로 비밀리에 수행된 망명시도가 일본 황실에 알려지고, 그 들의 사주를 받은 이완용에 의해 독살 시해(9)가 되는 비극이 발생한다.
둘째로 의왕[(義王) 고종의 2男. 귀인 장씨의 아들]이 압록강을 건너다가 강제로 끌려오고 재차 구둘장을 뚫고 탈출하려다가 일본에 잡혀가 12년을 억류되는 상황이었다.
셋째로 의왕의 2男 이우의 단호한 망명시도가 있었다. 북만주 태원주둔 일본군 대좌였던 그는 학병들을 이끌고 탈출하려다가 잡혀서 강제로 히로시마(廣島)주둔군에 전출되고 원자탄에 사라졌다.
20대초의 젊은 나이로 망명을 떠난 민갑완은 그 후 조국을 되찾게 되면서 귀국할 때까지 상해에서 대부분의 생애를 보낸다. 그러나 상해에 있어서도 편안한 삶은 결코 영위될 수가 없었다. 끊임없이 감시의 마수가 뻗쳐오고, 학교를 잠깐 다닌 것도 중도에 그만 두어야 할 정도로 가혹한 압력이 계속된다. 그리고는 시집을 가도록 권유하는 특수임무를 띤 정보원을 10여년의 오랜 기간 동안 상주시켰을 정도로 침략자들의 간교한 괴롭힘은 계속되었다.
그러다가 다 늙은 나이에 조국에 되찾아지게 되면서 독신생활을 하던 몸으로 귀국하여, 국내에서 조용히 말년을 보내다 작고했다. 귀국 후에 있어서 그에게 다가온 삶은 사실상 평범한 삶이었고, 황실이 무너진 나라에서 그에게 주어질 보답은 없고 외로운 삶을 살다가 1968年 3월19일 오전 7시에 73세로서 조용히 운명하였다.
2. 민갑완의 재평가
아무리 훌륭한 인물도 역사가 외면하면 사라지고 만다. 아무리 위대한 인물도 그 위대함을 깨닫지 못하면 평범한 인물이 된다. 어떤 보석도 땅 속에 묻혀 있을 때에는 한낱 돌멩이에 불과하듯이, 아무리 뛰어난 위인이라도 그 위인의 참된 의미를 모르면 그는 한낱 평범한 삶을 산 사람에 불과하게 된다.
그렇다. 위대한 위인 민감완은 그간 너무나 잊혀져 왔고, 너무나 외면되어 왔고, 너무나 무시되어 왔다. 이토록 위대한 항일 거목이 그간 왜 주목받지 못했을까?
첫째로 그것은 대한 황실이 일제침략자들의 역사왜곡이나 상징조작으로서 초라하고 우스운 존재로 전락하면서 외면된 흐름이 강하다. 대한 황실도 우습게 다루어지는데 그 황실의 황태자비로 간택되었다가 강제로 쫓겨난 여인이 주목될 수가 있겠는가?
둘째로 그것은 우리들이 민갑완 여사와 같은 형태의 항일의 의미를 아직 제대로 깨닫지 못했기 때문이다. 민갑완 여사의 항일은 민족사 아니 인류사에 거의 사례가 없는 것으로서 수절(守節)애국이란 독특한 유형이다. 일제침략자들은 철저히 수절하면서 끝까지 버티는 민갑완 여사 때문에 얼마나 고민하고 애를 태웠는가? 그것은 대한 황실의 모든 것이 민갑완 여사로 인해 무너질지도 모른다는 커다란 이유가 있기 때문이었음을 왜 모르는가? 변학도에 항거하며 정절을 지킨 소설 속의 성춘향 쾌거에 박수를 치는 전 민족이, 일제침략에 항거하며 철저히 일생을 걸고 처절한 고통 속에 깨끗이 정절을 지킨 위대한 실제 역사로서의 쾌거는 너무나 잔인하게 잊고 살았지 않은가?
3. 민갑완 수절애국의 재해석
지난번에 정신대 문제로 항의하는 할머니에게 돈을 받았지 않았느냐고 추궁하는 일본 국회의원을 보고서는 전 국민이 저질 일본 민족에 분노하고 치를 떨었을 것이다. 그런데 또 하나의 놀랄 일이 있다. 일본의 후꾸오까(福岡)에는 논개의 정사묘가 만들어져 있다. 그것도 초현대 시대인 오늘날에 만들어진 것이 있다(10). 의로운 여인 논개가 왜놈 장수를 사랑하여 함께 정사를 했다는 놀라운 왜곡사료를 뻔뻔스럽게 날조한 것이다. 역사 왜곡, 그것을 그렇게 할 정도로 뻔뻔한가?
그렇기에 히로시마(廣島)에 떨어진 원자탄에 최초로 희생된 민족이 자기들이라고 역선전이나 하면서 미국 욕이나, 교활하게 퍼붓고 있는데 미국이 왜 나쁜가? 얼마나 못되게 굴고 얼마나 외국인을 죽였는가는 생각하지 않고 벌받은 것만 억울하다니 일본은 아직도 벌을 더 받아야 옳지 않을까? 2차대전의 전범국 일본이 반성다운 반성을 해본 사례가 있는가?
그런데 민갑완 여사에게도 일본인의 저질공격은 끈질긴 것이었다. 우선 일제강점시대에 있어서는 민갑원을 개가하게 만들어서 "남자나 밝히고, 바람이나 피우는 여자"로 전락시키는 공작을 끈질기게 전개했다. 그러나 너무도 고고하고 기품있는 민갑완에 의해서 그것은 무산되고 만다. 우리의 진짜 국모는 너무도 훌륭하고 위대했다.
그러나 해방후 이승만 대통령시대에 대한 황실은 홀대받으니까 따라서 민갑완은 관심 밖으로 멀어진 것이다. 그렇지만 일본인들의 간교한 역사왜곡이 결코 사라진 것이 아니다. 일본 침략자들은 끈질기게 방자여사를 부각시키면서 방자여사가 대단히 의미있는 여자인 듯이 간교한 흐름을 만들어 나갔다. 끈질기게 방자여사를 일본인들이 찾아보고 언론 조작 등을 통해서 방자여사가 숭고하고 유일한 황태자비인 듯 만들어 나갔다. 그리하여 민갑완 여사의 존재를 전혀 모르는 일반인들은 까맣게 속을 수밖에 없이 되면서 시간이 흐른 것이다.
침략국모는 계속 부각되고 애국국모는 존재도 없이 되어야 하는가? 정말 역사 앞에서 고개를 들지 못할 정도로 부끄러운 일이다.
그리고 이런 왜곡 흐름 속에서 나타난 또 하나의 비극. 이구 황손의 부인이었던 "쥬리아"여사의 비극도 외면될 수는 없다. 특히 이 비극은 가장 큰 이유가 황실가문인 전주 이씨 대동종약원의 일부가 이성을 잃어서 일어난 일이다. 그 일은 이성을 잃었다는 표현이 가장 어울릴 일이다. 도대체 이해를 할 수가 없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쥬리아 여사는 영왕과 방자 여사의 아들인 이구 황손이 미국에 유학가서 살다가 만나 결혼한 미국여인이다. 그런데 순수한 사랑으로 맺어진 정상적인 부부를 귀국 후에 끈질기게 이간질시키며 사실상의 강제 이혼을 시킨 것이다. 정말 놀라운 일이다. 전주 이씨 대동종약원은 침략국모 방자여사에 대해서 문제제기는 전혀 없고서, 아니 철저히 예우하여 모시고서 사후에는 영원에 합장까지 했다. 그럼에도 아무 죄도 없는 쥬리아여사는 왜 비극적 일생을 보내게 만들었는가? 그리고 더욱 통탄할 일은 강제이혼을 획책하는 과정에서 이구 황손도 저절로 타락하고, 형편없는 생활로 전락하게 되면서 일본으로 돌아가게 된 것이다. 쥬리아여사의 일생은 누가 보답할 것인가? 미국여인이란 것이 무슨 죄가 되는가? 이에 관계자들은 엄청난 실수를 한 것이다. 어찌 민갑완 같은 위대한 국모는 외면하고, 쥬리아 같은 훌륭한 여인은 비극의 여인으로 만들고서도 고개를 들 수기 있는가?
"비극의 여인인 쥬리아 여사에게는 정말 못할 일을 한 것입니다. 복되게 사는 가정을 강제로 파괴시킨 것이지요. 그렇게 만든 장본인들은 그러나 쥬리아 여사에게 위자료 한푼 도 내지 않았습니다."(11)
인용문헌
(1)엄귀비의 죽음이 특히 의심스러운 것은, 엄귀비가 나라가 병탄되고 1년뒤에 별안간 열병으로 세상을 떠난 것인데, 무엇보다도 의심스러운 것은 누구에게도 장티푸스라면서 접근을 금했습니다. 급히 귀국한 영왕에게도 보여주질 않았다. 정도 이상의 격리는 너무나 부자연스럽다.
김명길, 낙선재 주변(서울; 중앙일보사, 1977) p.23.
(2)방자여사도 당시의 정략결혼은 사랑이 전제된 것이 아님을 분명히 실토하고 있다.
이방자,op.cit,p.211.
(3)당시의 김명길 상궁은 광무황제가 "원수나라의 황족여자를 어찌 며느리로 삼겠는냐? 짐이 생존해 있는 한 이 혼사는 성립될 수 없다."고 철저히 반대하다 돌아가셨다고 회고하고 있다. 광무제의 시해는 방자비 강제결혼이 직접 원인이란 얘기다.
김명길, op.cit,p.41
(4)기을한, 인간 이은(서울;한국일보사,1971)p.115-121.
(5)당시의 정략결혼은 일본을 위한 헌신, 일본인으로서의 그 나라를 위한 것이었다.
김을한,인간 이은(서울;한국일보사,1971)p.4.
(6)안천, 황실은 살아있다(서울;인간사랑,1994)p.143-152
(7)1994.8월 안천, 응암동 자택 방문
(8)1994.8월 안천, 이일주 면담(창덕궁 앞에서)
(9)방자여사는 1974년에 쓴 글에서 고종 시해를 일본인에 의한 암살로 분명히 밝히고 있다. 그리고 그 죽음을 "시해"라고 확인하고 있다. 그는 보다 깊은 비밀역사를 알고 썼다고 생각된다. 방자여사는 당시에 일본 궁내에서 고종이 돌아가신 며칠 후에 그것을 이미 들었을 정도였다.
이방자. 지나온 세월(서울;남영문화사, 1974)서문 및 p61
(10)1996.4월 안천, 정신문화연구원 박성수 교수와 현장 답사
(11)안천, 잊혀진 황후 쥬리아, 민족문화사, 단군할머니론, 1995
참고문헌
일월오악도(1)안천 2003. 교육과학사
조선왕조실록, 박영규, 2000. 들녁
우리궁궐 이야기, 홍순민, 2002, 청년사
공개강좌, 종묘와 창경궁, 이강근, 1999.6/12
조선의 왕비, 윤종란, 1999 차림
고종시대의 재조명, 이태진, 2000, 태학사
왕릉풍수와 조선의 역사, 장영훈, 2002, 대원사
조선일보 2003. 4/28 역사속의 오늘
2004. 5/12 일-왕족 종묘제례 참석 논란
<고종의 계보>
26대 고종 1852-1919(67)
| 재위기간 1863.12-1907.07(43년 7개월)
| 부인 7명. 6남 1녀
|
명성황후 민씨--------제27대 순종
| 1851-1895(45) 순명효황후---자식 없음
| 순정효황후---자식 없음
|
귀비 엄씨-------영왕 1897-1970(74)------- 진 1921-1921
| 1854-?? 이방자 1901-1989(89) 구 1931-
| 쥬리아
|
귀인 이씨-------완왕
| 육
|
귀인 장씨-------의왕 1877-1955(79)------ 12남 9녀
|
소인 이씨-------자식 없음
|
귀인 정씨-------우
|
귀인 양씨-------덕혜옹주 1912-1989-----마사에
대마도 종(宗)씨에게 시집
의왕의 자녀
이름 아명 生-死
1男 건 용길 1909-死 1女 영 길순 1915-死
2男 우 성길 1912-死 2女 진 길운 1919-LA거주
3男 빙 흥길 1914-死 3女 찬 길연 1920-서울 거주
4男 창 창길 1915-死 4女 숙 길영 1920-死
5男 주 수길 1918-死 5女 공 길상 1930-뉴욕 거주
6男 곤 명길 1920-死 6女 장 희자 1940-캘리포니아 거주
7男 광 형길 1921-死 7女 용 숙기 1944-아르헨티나 거주
8男 현 경길 1923-死 8女 현 숙향 1950-서울 거주
9男 갑 충길 1938-뉴욕 거주 9女 민 창희 1953-캘리포니아 거주
10男 석 영길 1941-서울 거주(가수 활동 중)
11男 환 문길 1944-캘리포니아 거주
12男 정 정길 1947-LA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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