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7년 10월 12일 대한제국을 건국한 고조 광무제(高祖光武帝=고종)는 1900년 황자(皇子)였던 의친왕(義親王)과 영친왕(英親王)에게 친왕(親王)을 책봉(冊封)하였다. 대한국 1대 고조 광무제는 명성황후 민씨, 귀인 장씨, 귀비 엄씨, 귀인 이씨, 소의 이씨, 귀인 정씨, 귀인 양씨 등 총 7명의 황후, 후궁과의 사이에 많은 황자들이 있었고 고조 광무제와 귀인 양씨와의 사이에 경운궁에서 태어난 덕혜옹주는 1919년에 김장한과 약혼했다.
제정의 대한제국은 1919년 1월 고조 광무제의 붕어로 4월 민주공화정의 대한민국으로 전환되었으며, 대한국 고조 광무제의 직계 후손은 황위 승계 1순위 의친왕의 후손인데 의친왕과 10여명의 후궁 사이에 13황자 9옹주가 있으며 공주는 없었다. 의친왕은 1893년 12월 6일 의친왕비 김수덕(金修德)과 혼인하였으며 1900년 8월 의친왕에 책봉되었으며 대한국 육군 부장이 되었고 대한적십자사 총재에 취임하였으며 대한국 최고의 훈장인 금척대훈장(金尺大勳章)을 수여받았다.
대한국 황태제 의친왕은 2대 순종 융희제의 다음 서열로 황위 승계 1순위이었으나 1895년 일본 정부의 명성황후(明成皇后) 시해와 1905년 일본이 러일전쟁에서 승리하여 친일파가 득세하여 일제 통감부의 방해로 황태제 책봉이 되지 못하였고 1910년 8월 경술늑약 불법 늑결 이후에는 일제의 삼엄한 감시를 피하여 대한광복운동가들과 끊임없이 접촉, 교신하며 대한광복운동을 지원하였다. 일제 총독부는 대한제국 황족에 왕,공의 작위를 주어 일본 왕실에 강제 편입하였다.
1911년 11월 33인의 민족지도자들과 함께 독립선언서에 서명하였고 의친왕을 망명하게 하여 대한광복운동을 활성화하고자 한 대동단(大同團)의 김가진(金嘉鎭),전협(全協)과 망명을 모의하였으나 간도의 안동에서 일제 경찰에 발각되었지만 일본에 저항하여 배일 정신을 지켜내었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사동궁에서 임어하다가 1955년 8월 서울시 종로구 안동궁에서 붕어하였다. 대한 황실 황위 승계 1순위 황태제 의친왕을 3대 황제로 추숭하여 태묘에 부묘(祔廟)하고 대한시대 대한광복운동기에 민족자결의 국제정세를 인식하고도 일제에 저항하지 않은 영친왕 신주를 천위(遷位)해야 한다.
대한제국 고조 광무제는 1897년 명성황후를 추책하였으며 1907년 민갑완(閔甲完)을 영친왕비(英親王妃)로 간택하였으며 1910년 8월 일제의 불법 침략에 의한 경술늑약(庚戌勒約) 늑결은 무효이고 1919년 1월 고조 광무제의 붕어(崩御)로 9월 상해에 민주공화제의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됐다.
영친왕(英親王)은 대한국 1대 고조 광무제의 일곱째 황자이며, 어머니는 1895년 일본 정부의 명성황후 시해 후 득세한 명성황후를 모시는 시위상궁(侍衛尙宮)이었던 후궁 엄씨이고 1900년(광무4) 8월 영친왕에 책봉되었으며 1907년 영친왕비 민갑완은 영친왕비로 간택되고 택일하여 가례를 올릴 예정이었으나 이토 일제 통감이 영친왕을 대한국 강제 병합의 볼모로 일본에 데려갔고 영친왕은 일제에 저항하지 않았으며 영친왕비로 간택된 민갑완은 영친왕과의 가례를 기다렸으나 일제의 방해로 영친왕비로 책봉되지 못하였다.
1912년 동제사(同濟社) 조직, 1915년 신한혁명당(新韓革命黨) 결성, 대한광복회(大韓光復會) 조직, 1918년 신한청년당 결성 등 대한광복운동이 조직화되고 파리강화회의에 대한국의 독립(獨立)을 청원하자 일제 총독부가 고조 광무제를 독살했다. 전제군주제의 대한제국은 1919년 1월 고조 광무제의 붕어로 4월 민주공화제의 대한민국으로 전환되었으며 대한국 황족의 책봉권자인 고조 광무제는 1907년 민갑완을 영친왕비로 간택하였고 영친왕비(민갑완) 9등 적의는 1907년 영친왕과의 가례를 위해 다른 황족의 적의와 함께 궁내부 직조과(宮內府 織造課)에서 제작되었다.
1910년 8월 일제의 침략에 의한 경술늑약(庚戌勒約) 늑결은 불법 무효이고 1919년 4월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으로 민주공화정으로 전환되어 대한제국 황제의 치세는 1919년 4월에 끝났으며, 심청색 이화문 적의(翟衣)는 대한국 황후, 황태자비와 의친왕비가 착용한 대례복이며 대한 황실 의례를 폐지하고 궁궐, 황단을 철거한 일제는 조직적인 대한광복운동에 위기의식을 느껴 마사코에게 착용시킨 후 정치선전용 영상을 촬영한 적의는 고조 광무제의 붕어로 대한국이 국상(國喪)중인 1919년 고조 광무제 붕어(崩御) 직후 일본 교토에서 제작한 것이다.
문화재청은 대한제국 황족이 아닌 일본 왕족 마사코를 일본으로 송환하고, 영친왕비 민갑완)을 영친왕릉에 합장해야 하며 고궁박물관은 대한제국 황실 연표에 1대 고조 광무제(1897-1919.1), 2대 순종 융희제(1919.1-4), 황태제(皇太弟) 의친왕, 영친왕비 민갑완으로 바로 기술하여야 하며 영친왕비 사진을 민갑완으로 교체하고 심청색 자두꽃(오얏꽃) 문양, 이화문(李花紋) 9등 적의(翟衣)를 대한제국 황태자비(순명황후)와 의친왕비가 착용한 대례복으로 바로 전시 설명하여야 한다.
▲ 영친왕과 약혼했으나 일제의 강압으로 파혼 당하고 평생을 홀로 산 민갑완 | |
훗날 영친왕으로 우리에게 더욱 친숙한 황태자 이은은 민갑완과 약혼지환을 주고받은 사이였으나 일본에 볼모로 잡혀가는 수모를 당하게 된다. 이은의 일본행은 유학이라는 명목을 띄었으나 조선의 정신을 말살하고자 하는 음모가 숨겨져있었다.
일제는 영친왕을 일본여인과 혼인시켜 조선 왕실의 맥을 끊고자 했지만 이은에게는 민갑완이 있었다. 통감부는 민갑완의 집안 민갑완을 다른 사람과 결혼하도록 재촉했지만, 민갑완의 아버지는 "그렇게는 못하겠다. 민갑완은 이 나라의 황태자비다"라면서 약혼을 깨지 않았다.
민갑완과 이은이 성인이 됐을 때도 일본의 협박을 이기지 못한 황실은 민갑완의 집에 약혼지환을 돌려달라며 하소연을 하기도 했다. 고민하던 민갑완은 약혼지환을 황실에 내줬다. 11년 간 지켜온 약혼지환을 내놓게된 연유는 무엇일까. 일제의 계속되는 압박에 집안은 풍비박산나고 아버지가 병상에 눕자 민갑완은 낭떠러지 앞에서 결국 자신의 증표를 내놨던 것이다.
이후 이은은 일본의 계략대로 일본 왕족 여인과 결혼했음에도 일제는 민갑완에게 결혼을 하라며 계속 협박했다. 민갑완은 상해로 망명했고 1945년 광복이 되자 다시 한반도로 돌아왔다. 1963년 영친왕의 귀국이 다가왔고 민갑완은 "그저 행복하시기만을 바랄 뿐이다. 이제와서 만나면 무엇하느냐. 어릴 때는 원망도 했지만 지금은 그런 감정도 없다"며 이은과의 만남을 거절했다. 결국 11년 간 황태자비로 살았던 민갑완은 평생 혼자의 몸으로 살다가 1968년 생을 마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