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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의 야망이 묻힌 남연군묘(南延君墓)

오늘행복스마일 2019. 1. 3. 13:39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의 야망이 묻힌 남연군묘(南延君墓)

 

2014.  5.  3

 

 

남연군 묘의 위치도

 

충청남도 지도

 

 

조선말 야심가였던 흥선군(興宣君) 이하응(李昰應)은 조선시대 세도정치 하에서 기인(奇人)으로 행세하며 풍수설(風水說)을 믿고서 아버지를 명당(明堂)을 찾아 장사지내고, 묘(墓)의 발복(發福)을 통해 실추된 왕권을 되찾고 싶어 했다. 그는 당대의 풍수사 정만인(鄭萬仁)에게 명당자리를 물었다. 그러자 그는 차령산맥(車嶺山脈) 중에서도 명당이 많은 가야산(伽倻山)을 가리키며 말했다. “덕산(德山) 땅에 만대(萬代)를 거쳐 영화를 누릴 곳과 2대에 걸쳐 황제(皇帝)가 나올 자리가 있는데, 부친의 묘를 그곳으로 이장(移葬)하시오.”

남연군 묘역의 산세

 

남연군 묘로 올라가는 계단길

 

남연군 묘의 안내문

 

이하응은 정만인의 말을 듣고 2대에 걸쳐 황제가 나올 자리를 서슴없이 선택해서 부친인 남연군(南延君)의 묘를 이장하려고 생각했다. 그러나 묘를 쓸 명당에는 이미 가야사(伽倻寺)라는 절이 들어서 있었고, 봉분(封墳)을 모셔야 할 자리에는 석탑(石塔)이 있었다. 야심(野心)에 사로잡힌 이하응은 권세를 이용해 1840년 가야사를 불태우고 석탑을 부순 뒤 경기도 연천(漣川)에 있던 아버지 남연군의 묘를 이장했다.

 

옛 가야사 절터의 석탑자리에 무덤을 조성했다

 

봉분 앞 한가운데에 설치한 장명등

 

종실(宗室)의 무덤을 연천에서 가야산까지 5백리 길을 옮기는 일이었으므로 상여(喪輿)는 한 지방을 지날 때마다 지방민들을 동원하여 운구(運柩)하였는데, 상여는 맨 마지막에 운구한 <나분들(남은들;예산군 덕산면 광천리)> 사람들에게 기증되었으나 상여의 안전한 보존과 관리 및 연구를 이하여 지금은 서울국립고궁박물관의 수장고(收藏庫)에 중요민속자료 31호로 보관중이다.

남은들 상여를 보관했던 상여각

 

 

남연군 시신을 운구했던 당시의 상여

 

 

남연군 상여를 복원한 상여

 

 

상여의 세부 도해

 

그 다음으로 흥선군은 가야사를 폐(廢)하는 작업을 시작했다. 흥선군이 재산을 처분한 1만 냥을 주지(住持)에게 주어 중들을 쫓아내고 불을 지르게 했다. 절집을 폐허(廢墟)로 만들고 마침내 탑을 부수어 묘 자리를 마련하였다. 그 다음해인 1845년에 뒷산에 임시로 모셨던 곳에서 묘를 이곳으로 옮겼다.

 

남연군의 묘와 묘역

 

실제로 남연군 무덤 앞에 와보니 풍수지리에서 말하는 좌청룡(左靑龍), 우백호(右白虎), 남주작(南朱雀), 북현무(北玄武)의 지세가 예사롭지 않다. 문화해설사의 말에 의하면 주산(主山)이 석문봉(石門峰)인데 이 봉이 좀 거만한 자태라서 오른쪽에 있는 옥양봉을 차주(借主)해서 주산으로 했다고 한다. 좌청룡은 완벽한 산세이나 우백호는 산세가 중간에 끊어져서 조금 부족하다고 하며 남주작은 동남향으로 평야를 지나 멀리 60리 떨어진 곳에 있는 봉수산(鳳首山)이 안산이 된다고 한다. 말을 들어보니 지세를 나름대로 잘 설명하고 있다.

 

남연군 묘역의 산세도

 

 

차주한 옥양봉이 보인다

 

 

좌청룡, 우백호, 남주작, 북현무의 산세가 나타난 영상

 

흥선군이 이 자리에 남연군 묘를 쓴지 7년만인 1852년에 그의 둘째아들 재황(載晃:아명은 命福)을 얻었고, 그로부터 11년 뒤인 1863년 뒤인 1863년에 이 아이가 고종(高宗)이 되었으며 그 아들이 순종(純宗)이 되었으니 2대 황제(皇帝)를 본 것만큼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두 임금을 끝으로 조선이라는 나라는 종말을 고하고 말았다.

 

 

대원군의 친필로 쓴  남연군묘의 비문

 

 

천하의 명당으로 묘를 이장한 덕분에 아들을 왕위에 오르게 하고 그토록 꿈에 그리던 권력을 한손에 쥐고 개혁을 주도했지만, 열강들의 통상 압력이 거세게 몰아치던 때라 쇄국정책(鎖國政策)을 펼치던 대원군은 사면초가(四面楚歌)의 위기에 몰렸다. 긴박한 상황에서 이 묘(墓)는 독일 상인 오페르트( Ernst Jacob Oppert)가 2번이나 통상을 요구하다 실패하자 미국인 자본가 젠킨스의 도움을 받고 프랑스 선교사 페롱(Stanistas Feron)을 앞세워 상해에서 <차이나(China)>호를 타고 와서 지금의 서해안 행담도(行擔島) 근처에 도착했다. 그러나 구만포(九萬浦)까지는 수심이 확보되지 않아 작은 배인 <크레타>호를 타고 와서 고덕면 구만포에 내린 그들은 천주교인 100여명을 앞세워 남연군묘를 파헤쳤다. 날이 밝아오고 간조(干潮) 때가 다가오자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퇴각(退却)해 버렸지만 외국인에 의한 도굴 사건’으로 역사적 의의를 지니게 되었다.

 

 

 

다행히 대원군의 선견지명(先見之明)으로 무덤 속에 덮은 강회(剛灰) 때문에 더 이상 파지 못하고 그들은 돌아간 것이다. 대원군은 대노(大怒)하여 “잔존하는 천주학쟁이를 가일층 엄단하라“고 지시했으니 이 땅의 천주교 신자들은 또 한 차례 탄압의 회오리바람을 맞아야 했다. 

 

남연군의 무덤 봉분

 

명당이 무엇인지?

권력이 무엇인지?

명당을 찾아 전국토를 뒤지며 음택(陰宅)을 찾는 우리네 조상들의 정신세계를 오늘날의 문화로는 이해할 수가 없고, 다만 풍수설을 믿었던 그 당시 사람들의 생활상과 내세관을 알 수 있었다. 지금은 매장 문화도 많이 바꾸어 그렇게 회자(膾炙)되었던 명당이란 말이 희미해지게 되고 있으니 다행이다.

 


 




출처 : 안동사범 11 회 동기회
글쓴이 : 에브노말(김기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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