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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남연군 묘..대원군의 아버지

오늘행복스마일 2019. 1. 3. 13:42

 

 

 

   

남연군(南延君)의 묘 .. 흥선 대원군의 아버지. 二代天子之地.... 2명의 王이 탄생하는 명당

                                           

    

 

                                                                                                                              흥선대원군 이하응(1820~1898)이 젊었을 때, 한량 비슷하게 거들먹거리면서 추사 김정희 주변의 예인(藝人)들과 어울려 난초나 치면서 세월을 보낸 것은 당시 세도정치의 핵심이었던 안동 김씨의 눈에 드러나지 않게 하기 위한 고도의 위장술이었다는 해석이 많다.

 

 

 

 

 

 

 

 

 

 

 

 

 

                                       萬代榮華之地    二代天子之地

 

 

 

 

 

흥선 대원군 주위에 또한 여러 한량이 모여 들었는데 정만인(鄭萬仁)이라는 지관(地官)이 찾아 와 말하기를 ...충청도 덕산땅에 " 만대에 영화를 누리는 자리 (만대영화지지.萬代榮華之地) "가 있고,

또 가야산 동쪽 덕산에  " 2대에 걸쳐 두명의 황제가 나올 자리 (이대천자지지. 二代天子之地) "가 있으니 둘 중 한 곳에 선친의 묘를 쓰라는 것이었다. 흥선군은 물론 후자를 택하였다.

 

 

 

그리하여 흥선군은 경기도 연천 (또는 수원)에 있던 부친 남연군(南延君)의 묘를 이 곳으로 이장하게 된다. 그리고 드디어 흥선군의  아들과 그 손자가 실제로 황제가 된다. 고종과 마직막 王인 순종이다.

  

 

 

 

 

 

 

 

 

 

 

 

아들인 고종이 즉위하고, 대원군이 된 흥선 이하응은 강력한 쇄국정책을 펼쳐, 서양 열강들의 개방요구를 거부한다.

 

 

 

 

 

                                               남연군묘의 도굴

 

 

 

 

 

 1868년 이미 두차례에 걸쳐 개방요구가 거부 당한 독일 상인 오페르트는 두 척의 배에 백인 8명, 조선인 천주교도 약간명,말레시아인 20명 등 약 100여명을 태우고 서산 앞바다 행담도에 정박하고는 스스로 러시아군이라 칭하며 이 곳 가야산의 남연군묘를 파헤치기 시작하였다.  

 

 

 묘지기  몇 명이 당해 낼 수 없는 급습이었는데 날이 밝아 동민들이 모여 들고, 서해 바닷물이 빠지는 시각이 다가오자 이들은 황급히 퇴각하였다.

 

 

 

 

 

 

 

 

 

 

 

 

그들의 도굴은 실패로 끝났다. 대원군은 이 곳으로 부친의 묘를 이장, 매장을 마친 후 철(鐵) 수만斤을 녹여 부어 다졌다고 한다. 밤새 도굴하였으나 실패한 원인이다. 

 

 

 

서구 제국주의자들이 값싼 원료와 넓은 시장을 찾아 우리와 같은 후진국에 와서는 개방이라는 명목의 압력과 침략을 자행할 때, 처음에는 상인을, 두번째는 기독교 선교사, 마지막에는 대포와 총칼로 들어 왔던 그 표본의 현장이 이 곳인 것이다.

 

 

 

독일상인 오페르트는 남연군묘를 파헤치며 흥선대원군을 자극하여 개방 협상의 테이불로 끌어 내기 위한 일종의 전주곡이었으며, 이는 바로 조선의 천주교 신자들이 그아이디어를 주었다.이후 대원군을 천주교를 박해하며, 결과적으로 많은 천주교신자들이 죽음으로  내몰린 천주교 성지(聖地)가 우리 나라 곳곳에 남아 있다.

 

 

 

 

 

 

 

 

 

그런데 황제가 나올 자리란 곳이 평범한 산비탈이 아니라 가야산의 유서깊은 거찰(巨刹) 가야사(伽倻寺)의 보웅전 앞에 있는 금탑(金塔)이 위치한 곳이라는 것이다.

 

 

  흥선군을 이 절을 폐사시켜서라도 꼭 그 자리에 묘를 쓸 요량으로 먼저 가야산 아래쪽, 예산군 덕산면 상가리 절골에 임시 묘자리를 정하고 이장한다.  이 곳은 英祖 때 판서를 지낸 윤봉구(尹鳳九)의 사패지(賜牌地)로 흥선군은 그 후손으로부터 이 땅을 빌린 것이다.

 

 

 

그 후 흥선군은  가야사의 중들을 내?아 빈집을 만든 다음 불을 질러 폐사시켜 버리는데,"매천야록"에서는 흥선군이 재산을 처분한 2만냥의 半을 주지에게 주어 불을 지르게 했다고 기록되어 있고, 다른 기록에는 흥선군이 가보로 내려오는 단계(端溪)벼루를 충청감사에게 뇌물로 주어 중들을 내 ?은 다음 불을 질렀다고 한다.

 

 

 

 

 

 

 

 

 

 

 과연 이 곳이 두명의 황제를 만들 수 있는 명당인가?

전문가에 의하면 왼편의 그림처럼 名堂에 해당하는 조건들이 거의 모범답안처럼 펼쳐져 조산(祖山),주산(主山),안산(安山), 좌청룡,우백호가 이처럼 완벽하게 드러나는 곳을 보기 쉽지가 않다고 얘기한다.

 

얼핏 보기에도 좌청룡 쪽 (五洋峰) 산세가 너무 험악하다는 인상을 주는데, 그 때문에 계곡 아래쪽에는 석조 보살상을 세워 그 기세를 누그려뜨렸다고 한다.

 

 

오직 흠이 있다면 주산에서 명당을 흐르는 지맥이 생각보다 짧다고 한다. 그래서 地官 정만인은 만대(萬代)가 아닌 2대(二代)의 황제가 나온다고 예언했나보다.

 

이런 풍수설이 아니라도 우리나라 절집의 자리는 하나같이 기막히게 좋은 곳에 자리잡고 있다.  트이면 시원스러운 눈맛이 좋고, 막히면 아늑한 운치가 좋다.

 

 

 

 

 

 

 

 

절집에서도 가장 좋은 곳은 부처님이 앉아서 내다 보는 경관이다. 어느 절을 가든 대웅전 기둥을 등에 대고, 또는 댓돌에 앉아서 앞에 있는 탑과 함께 주변을 살펴보는 것이 황당한 찬사로 씌어진 문화재 안내문을 읽는 것보다 가치있는 일이다. 바로 그런 가야사(伽倻寺) 보웅전 금탑자리이었으니 명당이 아니겠는가!

 

 

 

 

 

 

 

 

 

 

 

한 인간의 야망이 얼마나 끔찍한 일을 벌이는가를 여기서 보게 된다. 그것은 문화재가 소실된 아쉬움같은 것이 아니라 조선 말기의 사회 구조와 도덕이 얼마만큼 황폐화하였는지 그리고 흥선군이라는 인간의 살기 넘치는 야심..그런 것도 기개라면 기개가 어떻했는가를 보게 되는 것이다.

 

 

 

 

 

 

 

 

 

 이 때  사용된 상여는 마을 사람들에게 선사되어 오랫동안 이 마을 상여로 쓰이다가 1974년 중요민속자료로 지정되어 보호각 안에 보호해 두고 있다.

 

 

 

 

 

 

 

 

 

 

 

 

 

출처 : 김규봉 ... 사는 이야기
글쓴이 : 非山非野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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