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심양 고궁
연암은 심양성에 들어가 곧바로 심양행궁(오늘날의 심양고궁)을 구경한다. 연암이 심양에 들어간 1780년은 청나라 황실이 북경으로 천도한지 이미 140 여년의 세월이 흐른 후였기 때문에 심양의 궁궐은 행궁(行宮)으로 관리되고 있었다. 그래서 상대적으로 경비가 느슨하고 출입이 용이한 상황이었다. 연암이 수완 좋은 하인 광록(光祿)을 내세워 심양행궁을 구경하는 장면이 열하일기에 실감나게 소개되어 있다. 열하일기를 읽어본다.
<행궁 앞에서 짧은 채찍을 들고 바삐 걸어가는 관리를 만났다. 박래원의 마두 광록이란 놈은 중국말을 아주 잘하며 수완이 좋았다. 그가 관리에게 달려가 철퍼덕 소리가 나도록 한쪽 무릎을 꿇고 절을 했다. 관리가 당황하여 광록을 붙들어 일으키며, “아이구, 형님. 편하게 하세요.” 라고 한다. 광록이 머리를 조아리며, “소인은 조선의 하인인데 우리 주인어른이 황제의 도읍지를 구경하려고 하니, 가까이 가 보도록 허락해 주실 수 있겠는지요?” 했다. 관리가 웃으며 “그 정도야 무방합니다. 따라오시지요.”라고 한다.
나는 그 관리를 쫓아가서 인사라도 하려 했지만, 걸음걸이가 날아가는 듯 빨라서 따라잡을 수가 없었다. 주홍빛 목책이 설치된 막다른 길에 이르자, 그 관리가 목책 안으로 들어가서 “여기서 볼 수 있습니다.” 하고는 몸을 획 돌려 가 버렸다. 박래원은 “어차피 안으로 들어가 볼 수 없다면 오래 서 있을 필요가 없네. 한 번 보면 되었다.” 하고는 변계함을 데리고 술집에 가 버렸다. 나는 혼자 떨어져 광록과 함께 목책 안으로 들어갔다. 태청문(太淸門)이라는 정문을 걸어 들어가니 광록이, “아까 만난 관리는 문을 지키는 장경(章京) 같습니다. 몇 년 전에 하은군(河恩君, 정조 원년인 1777년에 정사로 북경을 다녀온 왕족 이광(李垙)을 말함)을 모시고 심양에 왔을 때 이 행궁을 샅샅이 구경했는데 막거나 마주친 사람이 없었습니다. 마음 놓고 구경하십시오. 설령 사람을 만나더라도 쫓겨나기밖에 더 하겠습니까?” 했다.
나는 “네 말이 옳다.”라고 말하고 궁전으로 나아갔다. 궁전에는 편액이 숭정전(崇政殿)으로 되어 있으며, 정대광명전(正大光明殿)이라는 편액도 있었다. 숭정전 왼쪽에 비룡각(飛龍閣), 오른쪽에 상봉각(翔鳳閣)이 있고, 뒤편에는 3층 처마의 높은 누각인 봉황루(鳳凰樓)와 그 좌우에 곁문이 있다. 곁문 안에는 군관 수십 명이 길을 막고 있었다. 그래서 문밖에서 멀리 바라보니, 오색 유리기와를 이은 전각과 회랑이 있다. 이층 팔각형 집은 태정전(太政殿)이다. 태청문 동쪽의 신우궁(神祐宫)에는 도교에서 받드는 세 신선을 모셔 놓았는데 강희제가 쓴 ‘소격(昭格)’과 옹정제가 쓴 ‘옥허진제 (玉虛眞帝)’라는 글씨가 붙어 있었다.(열하일기 성경잡지 7월 10일)>
우리는 연암을 떠올리며 고궁 안으로 들어갔다. 그가 음력 7월 10일 이곳을 찾았으니 훨씬 더운 때 이곳을 찾은 것이다. 그는 이곳을 찾을 때 박래원 변계함 그리고 하인 광록을 데리고 왔다. 네 명이 졸래졸래 이곳을 찾은 거다. 박래원은 연암의 팔촌 동생으로 상방비장의 명함을 갖고 변계함은 의사였는데 그 셋은 열하일기에 자주 등장한다. 그러니까 삼종형 박명원은 정사이고 그 자체군관으로 박지원이 쫓아간 것이고 박래원도 비장 격으로 한 집안이 같이 간 것이다. 지금에서는 한 집안사람에게 특혜를 주었다고 지탄을 받을 수도 있다. 아무튼 그들은 가는 내내 술친구로 자주 어울렸다.
그런데 이상한 것이 연암은 자기 하인, 장복 창대는 놔두고 박래원의 마부인 광록을 앞세웠다. 그가 중국어에 능통했기 때문인데 연암은 그렇다면 초짜를 데리고 갔더란 말인가. 맞다. 당시 마부들은 선천지역 사람들이 많이 했는데 중국 다녀온 경험에 따라 값이 달랐다. 연암은 돈이 없으니 당연 그럴 수밖에는 없었다. 내용을 봐서도 알겠지만 양반들이 나서서 하는 일은 별로 없다. 당시 실무를 담당한 사람들 이외에 양반들이 직접 중국에 찾아가는 건 그들 일평생에 겨우 한두 번 있을까말까 한 일이었다.
사리에 어둡고, 더구나 중국어까지 서툴렀기 때문에, 그들은 결코 혼자서는 마음대로 나다닐 수가 없었다. 이런 자들을 안내하고 도와준 이들이 바로 하례(천출)였다. 열하일기에 나오는 천출들 몇몇을 들추어 보자면 , 시대는 순안 사는 종으로 상방(정사)의 마두로 전체 마두의 우두머리 격이었다. 홍대용의 마두 '세팔'이 28번을 다녀왔다 하니 , 시대 또한 수십 번 연행 길을 오갔을 것이다. 그 시대에 40번 오간 마두도 있었다. 대종은 선천의 관노출신으로 변관해의 마두인데 연암의 중국어 선생노릇도 해냈다.
춘택은 열하에서 북경으로 오던 중 사찰에서 말리는 오미자 두어 알을 집어먹던 연암이 중에게 큰소리로 봉변을 당할 뻔 할 때 춘택이 더욱 강하게 중을 패대기치고 연암을 구해준다. 상대의 야료에는 야료로, 폭력에는 폭력으로 험난한 여정에서 이들은 기선제압으로 위기를 극복하곤 했다. 천출들은 생존방식을 터득하고 있었던 것이다.
초짜 장복의 순박함이나, 창대의 충성스러움은 또 어떠한가. 그는 발을 다쳐 밀운 성 부근에서 은화 200닢에 청심환 다섯 알을 주인인 연암에게 받고 뒤처진다. 천출들의 빈곤함으로 볼 때 엄청나게 큰 돈 인데 연암의 마음 씀씀이도 그러하지만 그는 주인을 쫓아 기어코 달려온다. 돈보다 정과 충성심이 밴 사람 사는 방식이 달가워 나는 그 글에서 그저 흐뭇했다.
득룡은 상판사의 마두로 연행의 공식 업무에서도 두각을 나타낸다. 봉성에서 관례에 따라 청 관리에게 주는 예단을 나누던 마두 '상삼'에게 청인들이 더 달라고 요구하며 행패를 부리자 득룡이 나타나 청인을 내동이치며 상황을 평정 한다.천출들의 활동에 양반들도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득룡은 14살 때부터 40여 년간 약 30여회에 걸쳐 북경을 오가던 천출로 '중군'. '가선'이라는 벼슬을 받았다는 기록도 있다. 황제를 알현하기위해 피서산장에서 대기하던 연암일행은 득룡이 늙은 몽고 왕과 손을 마주잡고 인사하는 광경을 목도한다. 천출이지만, 수십 년간 연행에 참여한 그는 유창한 언어와 몸에 베인 사교력으로 조선의 양반을 경악케 한다. 득룡은 이미 조선의 천출이 아닌, 어쩌면 국제적 사교 면모를 갖춘 외교가가 아니었을까.
조선에선 천출이지만 연행 길에선 그들이 선각자요 국제 인이었다. 조선후기, 연행을 통해 조선 지식사회에 북학이 논의되고, 서학에 눈 뜰 때 지식인의 글(연행록, 열하일기)로 전파되던 이국체험과 세계인식보다 어쩌면 마두들이 입에서 입으로 전했던 연행체험의 무용담이 훨씬 더 조선 사회를 사회 밑바닥부터서 변화의 길로 유도하였던 기제가 아니었을까 나는 그렇게 또 생각을 해본다.
아무튼 연암은 눈치 살피며 심양고궁에 들어섰지만 우리는 돈을 내고 떳떳이 활보를 한다. 그런데 70세 이상은 무료, 60세 이상은 반값으로 생각지 않게 굳은 돈이 꽤 된다. 이런 식이라면 점심 때 지출을 꽤 한 돼지갈비 값하고 생각보다 많이 나온 고속 기차 비가 상쇄될 판이다. 우리의 돈 관리인 부사 얼굴에 금세 화색이 돈다. 하지만 그 순간상황 같은 미소지만 역관은 술, 정사는 시원한 수박 한 덩이, 나는 양꼬치 등등 뜻하는 바가 따로 있을 테다.
입구에서 제일 가까운 정중앙에 숭정전이 있다. 연암 글에 나오는 대로 지금도 숭정전에는 지금도 정대광명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생각해보면 경로우대는 정대광명의 한 실천이다. 자금성에도 이 글자가 걸려 있다. 백 만 명밖에 안 되는 만주족이 중국을 거느릴 수 있었던 것은 종족의 차별은 물론 상하의 차등을 부여하지 않고 공평하였기 때문 가능했다.
중국의 궁전은 황제가 거주하는 '궁(宮)'과 황제가 정무를 처리하는 '전(殿)'이 합쳐진 것이다. 그중 '전'은 전면의 높은 곳에 배치하고 후면에 '궁'을 배치한다. 그런데 심양 궁전은 '궁'이 '전'보다 더 높은 뒤쪽에 위치하고 있다. 봉황루는 심양고궁에서 제일 높은 대표적인 건물이다. 만주족 한족 몽골족 장족 등 여러 민족의 건축예술이 집약된 특이한 느낌이 드는 건물이다. 봉황루 앞에 선 솟대가 이채롭다. 북방민족의 전통적인 조형물 솟대, 사슴을 나타낸 것도 있다는데 그 옛날 고구려인들도 북방민족으로서 저 멀리 몽고인처럼 아마 이 솟대를 어루만졌을 것이다. 이곳에서 청 태종은 연회를 열고 성대한 의식을 치렀다.
심양고궁 입구
옆 담을 끼고서는 대정전과 시왕정이 있다. 정사를 의논하고 8기의 대표들이 자리하던 곳이 큰 뜨락에 양 옆으로 포진하여 위엄을 부린다. 대정전은 팔각형으로 청나라 군대인 ‘팔기군’을 의미하고 있다. 이 건물 또한 여러 문화가 혼합하여 만들어진 모습으로 실제 세계건축학적으로 중요하다고 한다. 필시 병자호란 직후 통원보에서의 국서폐기 사건과 관련된 조선의 사신 나덕헌, 이곽이 청의 정병들로부터 구타당하던 장소가 바로 이곳일 것이다. 문소각이 보였다. 이 건물은 다른 건물과 달리 지붕에 검은 색 기와를 올렸다.
건륭제는 대단한 황제였다. 1782년 사고전서를 완성하고 필사본까지 여섯 부를 베껴서 그중 두 번 째 필사본을 이곳 문소각에 보관했다고 했다. 이 문소각본은 1931년 만주사태 때 약탈당했다가 일본이 패망한 후 러시아로 넘어갔다. 이후 반환되어 지금은 심양 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다고 한다. 심양고궁은 청 태종이 청(淸)을 세우고 황제로 등극한 곳이다. 1626년 누루하치가 영원성 전투의 후유증으로 사망하자 그의 8째 아들인 홍타이지가 그 뒤를 이어 등극한다.
우리에게는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의 치욕을 안겨주고 탁월한 군사적 재능과 정치적 수완으로 8기군을 조직하고 홍의포를 개발하여 드디어 1636년 4월 심양고궁에서 황제 즉위식을 올리고 국호를 청, 연호를 숭덕으로 고치고 공식적인 청나라 황제가 된 인물이다. 편액에 한자와 만주어가 같이 쓰여 있는 것에서 보듯이 그는 한족을 등용하고 한자를 무마책인지 교화 술인지 두루 활용하며 중앙집권 기초를 쌓는다. 그런 그는 1643년 이곳 심양에서 52세의 나이로 급사함으로서 그의 아들 순치제가 황제가 되어 북경에 입성한다.
*자금성 교태전에도 정대광명이 있다.
실승사라는 절, 우리 연행사들이 고궁을 보고 그 다음 찾은 코스가 바로 이 절이었는데 당시는 말로 한 번 내달으면 바로 닿았는지 모르겠지만 지금은 고층건물에 거리가 꽉 막혀 오히려 그때보다 더 멀지 싶다. 지금 황스광장 옆에 있다는데 가 볼 시간이 날지나 모르겠다. 1638년 청 태종이 자신의 사후를 빌어달라고 지은 절이다. 연암 일행은 심양에서 7월 12일 떠난다. 그 며칠사이 연암은 골동품가게에 들러 젊은 친구들과 필담을 나눈다. 그곳이 바로 이 서문 일대 어느 곳이다.
그 시절 도시의 화려함에 기가 질린 연암인데 우리 눈엔 한낱 관광지 소품만 득실한 10위안짜리 싼 티 나는 물건들만 눈에 들어온다. 격세지감인가. 아니면 세월 무상인가. 삼전도 굴욕 후 심양으로 끌려 온 소현세자는 심양관이라 불린 숙소를 짓고 1637년 5월부터 1644년까지 그곳에 머물렀다. ‘백두에서 열하까지’의 저자 이보근 선생은 그곳이 지금의 심양시립 아동도서관 자리라고 말한다.
요즘은 심양까지 직항로가 개통되어 당일치기 여행도 하는 이웃사촌이 되었지만 심양은 두 번 다시 입에 오르고 싶지도 않은 치욕의 장소가 아니었던가. 병자호란의 포로로 잡혀 온 수 많은 조선 사람을 매매하던 '인간시장'이 있었던 가슴 아픈 역사의 현장이 바로 심양이다. 듣기로 당시 노예대금을 내지 못하여 조선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어쩔 수없이 타관에서 터를 잡고 산 조선인들도 수없이 많았다고 들었다. 나만갑이 <병자록>에서 ‘청군이 철수하는 동안 매번 수백 명의 조선인들을 열을 지어 세운 뒤 감시인을 붙여 끌고 가는 것이 하루 종일 지속되었다’거나 ‘이어지는 시기 심양 인구 60만 가운데 상당수가 조선사람’이라고 서술했던 사실이 이를 입증한다.
심양 남 탑, 그 일대가 바로 노예시장 장소다. 또한 그 근처에 있는 중산공원 안에 있는 어린이 체육장이 삼학사가 처형된 곳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1790년 서호수의 연행기에 의하면 '외양문 밖에서 서관문 안까지의 통로는 좌우가 다 시전이다. 이곳은 홍익한, 윤집, 오달제 학사가 정축년(1637년)에 절사한 곳이다. 수레의 가르새를 잡고 고개를 숙이며 지나가니 공경하는 마음이 일어난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묘한 일이 있다. 요녕 발해대학은 1992년 중국에 사는 조선족 동포 핵물리학자인 천문갑 교수와 한국한 중앙연구원의 허창무 교수가 설립한 대학인데 바로 그곳에 삼한 산두비가 세워져 있다. 굴복하지 않은 삼학사를 비록 처형은 하였지만 청 태종은 삼한 산두 휘호를 내리고 비와 사당을 세워 삼학사를 기리게 하였다는 것이다. 여기서 삼한은 조선을 가리키며 산두는 이들 삼학사의 정신이 태산처럼 크고 북두칠성처럼 변함없이 빛난다는 뜻을 의미한다고 한다. 어렵게 이 비를 다시 구하여 진열을 한 것이라는 데 그 악랄한 태종이 그랬을까 싶고 역사적 고증에 의문이 있어 보다 면밀한 연구가 필요하다고 한다.
아무튼 여러 곡절을 삼킨 심양에는 옛 풍속 그대로를 유지하며 조선인이 몰려서 사는 곳도 있고 변함없는 우리의 먹거리, 냉면집이나 개고기집도 많다, 왜정시대 때 봉천이라고도 부른 그곳 심양은 고구려의 본거지였음은 또한 누구도 부인 못한다. 최근에 상영한 '최종병기 활'이란 영화를 본 사람들이 있는지 모르겠다. 그 영화의 장면이 압록강을 건너 심양으로 끌려가는 조선인을 대상으로 삼은 영화다.
홍대용의 연행록을 보면 심양에서 나무로 만든 큰 활을 보며 작지만 멀리 나가는 조선 활만 못하다고 하는 대목이 나온다. 왠지 나는 그 말에 무척 마음이 끌린다. 무용총의 활이 다시 떠오른다. 열하일기에는 동이족이라 부르는 내용도 들어 있다. 동이는 그들 말로는 오랑캐를 의미한다고 하지만 활 쏘는 사람들이다. 조상을 섬기며 대대손손 사는 사람들, 동이족 이라고 말한 그들도 진터가 물러지도록 산 사람들로 그 옛날에는 모두 예맥족 동이족이 아니었을까.
연암은 글에 " 심양은 본래 조선의 땅이다. 혹자는 한나라가 한사군을 설치했을 때 낙랑군의 군청이 있던 곳이라고 하는데 후위와 수당 시절에는 고구려 땅에 속했다.' 그렇게 적어 놓았다. 나는 이 말에 큰 의미를 부여한다. 이민을 간 오랜 친구가 비록 말은 잃었지만 김치 맛을 잊지 못하는 습성처럼 행위나 먹는 습성 등 어딘가 모르게 북경 쪽과는 다르다. 생파를 된장에 우두둑 찍어먹는 사람들, 우리의 고유 냄새가 난다. 한마디로 심양은 우리 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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