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흐는다

[스크랩] 핵무기와 38도선 ~~

오늘행복스마일 2019. 2. 11. 09:19

    ◈ 핵무기와 38도선 ◈

    핵무기는 우리 한반도와 참 인연이 깊어요 핵무기를 최초로 만든 나라는 미국인데 제2차 대전 당시 미국이 주도하고 영국과 캐나다가 공동으로 참여한 "맨하탄 프로젝트"에 의해 만들어진것이 핵무기 이지요 이 맨하탄 프로잭트는 독일 나치의 핵개발에 대한 대응으로 시작되었는데 아인슈타인을 비롯한 저명한 과학자들이 나치의 세계 지배를 막기 위해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청원하여 시작되었다 하지요 그런데 이 핵무기와 한반도는 남다른 인연을 가지고 있어요 한두번도 아니고 세번씩이나 직접이든 간접이든 한반도의 운명을 바꾸었지요 첫번째는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을 투하 했지만 그래도 일본이 항복하지 않자 8월9일에 또다시 '나가사키'에 또 한방을 투하 했어요 이 덕분에 8월 15일 36년간의 일제의 압제에서 벗어나 해방이 되었지요 그리고 두번째는 1949년 소련이 핵개발에 성공하므로서 미국에 대응할수 있게 되자 김일성을 앞세워 6.25 전쟁을 일으켰지요 이 전쟁으로 인해 우리민족은 200여만명의 인명피해를 입게 되었어요 세번째는 북한이 1980년대 부터 시작한 핵개발이 지금은 완성되어 우리를 위협하고 있지요 그래서 이 핵무기는 첫번째는 우리에게 기쁨을 주었고 두번째는 우리에게 아픔을 주었는데 세번째는 우리에게 무얼 안겨 줄까요? 이렇듯 핵무기는 우리에게 필연이든 악연이든 세번에 걸친 인연이 되고 있지요 그런데 지금도 남북이 대치하고 있는 한반도의 "38도선"도 이 핵무기와 무관하지 않아요 1945년 당시 미국을 포함한 연합군은 제2차 세계대전을 끝내기 위하여 일본의 본토를 점령하기로 작전 계획을 세웠지요 그러기 위해선 우선 오키나와 섬을 먼저 점령하는것이 수순이었어요 그래서 1945년 4월 1일부터 6월 23일까지 83일에 걸쳐 치른 오키나와 전투는 이오지마 전투에 이어 일본 영토 내에서 벌어진 미군과 일본군의 전면전으로 일본인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지요 이 전투로 일본군 12만명이 결사항전을 벌여 전사했으며 미군 역시 사망자와 행방불명자 1만2520명 부상자 7만2000명으로 피해가 적지 않았지요 그래서 더 이상의 인명피해가 발생하는것을 막기위하여 1945년 7월 26일 미국, 영국, 중화민국, 소련이 독일의 포츠담에서 회의를 갖고 포츠담 선언을 하였어요 이 포츠담 선언의 요지는 "일본이 항복하지 않는다면 즉각적이고 완전한 파멸"에 직면하게 될 것을 경고한 것이며 "일본의 무조건적인 항복"을 권유한 것이지요 그러나 일본은 선언 발표 이틀 뒤인 7월28일 이를 묵살키로 결정하였어요 결국 8월6일 세계최초로 히로시마에 원폭이 투하되었는데 이때도 항복하지 않자 9일엔 나가사키에 또 한방의 원폭이 투하됐지요 그러자 일본은 8월10일 항복하겠다고 연합군에 통보 했는데 '천황제 유지'를 항복조건으로 내 걸었어요 모두가 다 죽어도 일본의 천황만은 살려야 한다는 것이었지요 이때 소련은 8월8일에 일-소 중립(불가침)조약을 일방적으로 파기하고 대일본 선전포고를 한 뒤 8월9일 부터 참전하여 156만명의 대군을 만주 북한 지역으로 내려 보냈지요 일본의 항복 통보를 받은 트루먼 대통령은 긴급 각료회의를 소집하여 항복을 받아주느냐 안받아 주느냐를 가지고 격론이 벌어졌는데 헨리 스팀슨(Henry Lewis Stimson·1867~1950) 육군부장관은 일본에 대한 호감도가 높아 천황을 살려주더라도 항복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어요 (스팀슨은 젊어서 신혼여행을 교토로 갔는데 고풍어린 교토의 아름다움을 잊지 못하고 있다가 1차로 원폭투하 도시가 교토로 결정되자 교토는 안된다며 교토를 살려준 사람이지요) 그렇지만 미 국무장관이었던 제임스 번스(James F. Byrnes, 1897~1972)장관은 반대를 했어요 반드시 일본천황에게 전쟁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것이었지요 그러나 해군성 포레스탈 장관이 스팀슨 장관의 편을 드는바람에 천황제 유지로 항복을 받아 들이기로 결정 하였지요 이때부터 미국은 바빠지기 시작 했어요 항복을 받아들이면 그때 당시 일본군이 만주를 비롯하여 인도네시아 중국 ,한반도 등지에 7~800만이 있었는데 이들에 대한 무장해제를 어떻게 시키느냐가 큰문제로 대두 되었지요 그때 한반도에도 23만명의 일본군이 있었어요 이 많은 인원을 어느나라가 어느곳을 맡아서 무장해제를 시키느냐가 중요했지요 당시 전쟁지역이 유럽지역보다도 넓게 분포되어 있어 더욱 힘이 들었어요 서둘러서 지침을 정해야 되는데 격동기때에는 아주 작은 일이었지만 훗날에는 이 작은일이 어마어마한 사건이 된다는것을 모르고 있었지요 8월10일 저녁에 육군부 차관보 존 메클로이( John J. McC l oy )는 육군부에 파견나와 있던 두 사람을 불렀어요 딘 러스크 보좌관과 찰스 본스틸 대령이었지요 이들에게 한반도에서 일본군의 무장해제를 시키려 하는데 현재 소련군이 한반도에 진주해 있으니 소련과 미국의 경계선을 빨리 마련하라고 지시 하였어요 시간이 없으니 오늘밤 안으로 결정하라 했지요 지시를 받은 두 사람은 훗날 우리나라와 깊은 관계를 맺게되는 사람들이었는데 딘 러스크 보좌관은 케네디 ,존슨 대통령때 국무장관을 지내며 대한정책에 깊이 관여한 존경받는 인물이 되었고 찰스 본스틸 대령은 육군 대장까지 진급하여 1960년대에 주한미군 사령관을 하였어요 이때 메클로이 차관보가 지침을 줄때는 가능한한 넓은 지역을 미군이 무장해제 하도록 하라고 했는데 당시 미군은 오끼나와에 있었으므로 거리를 감안하여 경계선을 그었다고 하지요 이 두사람은 명령을 하달받고 옆방으로 자리를 옮겨 지도를 찾았는데 한반도의 지도가 없자 '내셔널지오그래픽사'의 벽걸이 지도를 보고 한반도 중간선을 그었는데 그것이 오늘날의 38도선이 되었지요 두사람은 다행히 서울이 남쪽에 있고 또 당시 군대가 왕래 할려면 항구가 있어야 하는데 인천항과 부산항이 있으니 이 38도선이 좋겠다고 하였어요 두사람이 이 운명적인 38도선을 긋는데 사용된 시간은 불과 30분 밖에 걸리지 않았지요 지금까지 한민족의 운명에 결정적 역활을 하고 있는 38도선을 긋는데 불과 30분밖에 걸리지 않았다는 것은 참으로 아이러니 하지요 나중에 알아보니까 이 38도선은 일본의 조선군 사령부와 만주 관동부 사령부의 관리 경계선이기도 하였어요 이렇게 하여 한반도에 운명적인 38도선이 그어 졌는데 메클로이 차관보는 두 사람이 만든 한반도 점령안을 8월12일에 개최된 미 국무부, 전쟁부, 해군부 합동 조정위원회에 이 38도선 안을 제출하였지요 이때 해군부는 39도선을 주장하며 더 북쪽으로 올리자고 했어요 그러자 여기에 합참소속의 전략정책 담당관인 링컨 준장이 반대를 하였는데 현재 소련군이 함경북도에 진군하여 남쪽으로 내려오고 있는데 39도선은 받아 들이지 않을것이니 그냥 38도선으로 하자고 하였지요 그래서 38도선이 최종 결정 되었어요 이 링컨준장이라는 사람은 포츠담 회담시에도 참석했던 사람으로 소련의 전략구상을 잘 아는 사람이었지요 그리고 8월14일날 스팀슨 육군부 장관과 포레스탈 해군부 장관이 일치된 의견으로 38도선을 경계로 북쪽은 소련군이 일본군의 항복을 받고 남쪽은 미군이 항복을 받는것으로 당분간 38도선을 경계로 양국이 점령하는 안을 투루먼 대통령에게 건의하여 재가를 받았어요 이로서 한반도의 허리가 잘리는 38도선이 확정되게 되었지요 그렇지만 이 건의안은 두나라가 영구점령이 아니고 일본군의 무장해제에 필요한 임시조치에 불과한 군사분계선에 지나지 않았어요 이 경계선이 금단의 국경선으로 고착되게 된것은 바로 소련의 스탈린 때문이었다는 것이 훗날 밝혀졌지요 우린 여기서 미군이 38도선을 그은것은 사실이지만 출입이 완전히 통제되는 "금단의 선"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아야 하지요 이렇게 하여 트루먼 대통령은 8월15일날 소련군에게 한반도 분할 점령안을 통보 하였어요 그리고 동시에 오끼나와에 주둔하고 있는 맥아더 사랑관 에게 24군단을 지휘하고 있던 하지 소장을 한국에 파견하라고 명령을 내렸지요 그때 소련군은 8월10일부터 만주지역을 넘어 나진, 웅기, 청진에 이르는 함경북도를 점령하고 있었으나 미군은 저멀리 오끼나와에 주둔하고 있었어요 이때 만일 소련이 미군은 멀리 있으니 한번도는 우리가 부산까지 모두 점령하겠다고 한반도 분할 점령안을 거부 했다면 한반도의 운명은 또 달라졌을지도 모른다고 하지요 그런데 다행히도 8월16일 스탈린은 미군의 분할점령안을 모두 수락하였어요 다만 일본의 쿠린 열도은 이미 소련군이 점령하고 있으니 홋카이도 북반부를 소련군이 점령하게 해 달라고 하였지요 이 이야기는 당시 소련군은 일본군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었어요 무슨뜻이냐 하면 1905년 러일전쟁 패배가 소련의 붕괴로 이어져 볼세비키 혁명까지 불러오게 한 복수심도 있었지만 이번 기회에 일본 본토를 독일처럼 분할 점령하는데 소련도 그 속에 끼겠다는 의도 였지요 소련의 속셈은 한반도 보다는 일본 본토 분할점령에 더 큰 목표를 두고 있었기 때문에 미군의 한반도 분할 점령안을 쉽게 수락했던 것이지요 그 저의를 모르고 있던 미국은 소련이 한반도 분할 점령안을 쉽게 받아 들이자 놀라워 했다고 했어요 당시 소련은 히틀러 독일군에게 당한 경험이 있고 러일전쟁때 일본에게 당한 분풀이로 이 두나라를 꼭 점령하려는 의도가 심하였지요 나중에서야 소련의 속셈을 알게된 미국은 '소련의 일본 점령안'을 거부해 버렸지요 그래서 지금도 일본의 쿠린열도는 러시아의 지배하에 있지요 이렇게 하여 소련군은 8월20일 까지 북한지역을 모두 점령하였으나 남한은 미군의 입성이 늦어져 일본군의 통치가 계속되고 있었어요 미군은 9월8일에 인천항에 들어왔는데 그때까지 20여일간 패잔병(일본군)이 남한을 통치하는 웃지못할일이 벌어졌지요 그런데 스탈린은 일본의 분할점령안이 거부되자 미국한테 당했다는 의심을 품고 한반도 전략을 수정하였어요 일본 본토 분할점령이 안된다면 한반도라도 영구분할 점령 하겠다는 것이었지요 1945년 9월20일 스탈린은 소련군 최고 사령관 자격으로 안드로프 육군참모총장과 공동명의로 연해주 군관구및 북조선 주둔군 사령부에 지령을 내렸는데 그 지령의 핵심은 38도선 이북지역에 친소 북한정권을 수립하라는 것이었지요 이 지령문은 그동안 비밀로 있다가 소련이 붕괴된후 공개되었는데 1993년 2월 26일자 일본 "마이니찌 신문"이 특종보도를 했어요 이 신문에 지령문 전문이 공개 되었지요 이 문서의 핵심은 소련군의 지휘하에 있는 북한지역에 '브루조아 민주적 정권'을 수립하라는 것이었는데 이 부르조아 민주적 정권이란 공산당과 공산당이 아닌 사람이 합작정부를 만드는 것이었지요 일종의 좌우 합작정부를 만들라는 것이었어요 그러니까 겉으로는 좌우합작 연립정부처럼 보이나 속으로는 소련의 지령을 받는 공산당 정권을 말하는 것이었지요 그러니까 이때 벌써 소련은 북한지역을 영구 점령 하겠다는 속셈을 들어낸 것이지요 이 지령문으로 인해 한반도 38도선은 남북 분단선으로 고착화되는 계기가 되었어요 당시 미국의 계획은 한반도에 통일정부를 수립한다는 계획은 있었으나 남쪽에만 정부를 수립한다는 계획자체가 없었지요 다시말해 미국의 계획은 일본군의 무장 해제후 소련군과 상의하여 한반도 전체에 민족자결 주의에 입각한 통일정부를 수립한다는 것이었지요 한국 공산주의 연구에 대가인 이정식 교수는 1945년 9월20일 스탈린의 지령은 "한반도 분단을 고착시키는 것이었다 남북의 재통합이나 민족 재통일을 위한 모든 논쟁과 노력을 허구적인 것으로 만들었다"고 말하였지요 이 지령문이 1993년 공개됨으로 해서 그 당시 미소 공동위원회가 만들어지고 김구와 김규식의 남북 좌우합작 정부 수립을 위한 노력은 모두가 허구적인 노력으로 끝날수 밖에 없었다는 것을 알수 있지요 이미 공산세계의 마왕인 스탈린이 미리 지령을 내렸기 때문에 모든것은 그들의 흉계대로 흘러갔을뿐 많은 노력은 허구에 지나지 않았어요 이 지령문서는 1945년 부터 1950년 6.25전쟁이 일어날때 까지 5동동안 한반도 상황을 알게하는 결정적 문서라 아니할수 없지요 물론 그때 그 시절을 살았던 사람들은 열심히 소신있게 통일 운동을 했겠지만 세계의 반쪽을 지배하던 스탈린이 이미 결정을 내렸으므로 그 누구도 한반도의 운명을 뒤집을수는 없었던 것이었어요 스탈린은 지령문 하달에 앞서 1945년 9월2일 극동의 바실레프스키 사령부로부터 88여단의 김일성 부대 80명에 대한 입북 명령이 공식적으로 떨어지고 김일성 부대는 이 명령이 떨어진지 16일후인 그 해 9월18일 원산항을 통해 입북하여 소련군정의 지시대로 각 도시로 분산돼 지역 위수사령부 부사령관을 맡게 되지요 참고로 소련군 제88정찰 여단은 1942년 6월 스탈린의 특별지령으로 하바로프스크 인근에 창설되었는데 중국인 373명, 조선인 103명, 나나이족 316명 로시안인 462명, 기타 100명 등 총 1,354명 으로 장교 149명, 하사관 358명, 병사 847명으로 구성돼 있었지요 이때 김일성은 소련군 대위 계급장을 달고 88여단 장교단에 있었지요 스탈린은 김일성이 입북하기 전인 1945년 9월 초순 김일성을 비밀리에 모스크바로 불러 면담한후 그를 북한의 최고 지도자로 낙점하였으며 김일성은 입북후 스탈린의 음흉한 흉계를 차근차근 실행하였지요 이런 흉계를 모르고 있던 남한 주둔 하지 중장은 1945년 10월 북한 소련측에 38도선 자유왕래를 논의하자고 제의 하였는데 소련군은 즉각 거부 하였고 38도선에 있던 연락사무소 마져 폐쇄 하더니 드디어 교통과 통신까지 차단 하였지요 그길로 38도선은 지금까지 영구 금단의 선이 되고 말았어요 이 책임은 전적으로 스탈린과 북한 정권에 있는 것이지요 여기서 우리가 살펴볼것은 철새는 넘을수 있으나 인간은 넘을수 없는 무시무시한 철선을 만든 것은 과연 누구인가요? 그는 바로 스탈린과 그를 추종하는 김일성 정부 아닌가요? 그뒤 1946년 2월 북한에 실질적 정부인 북조선 임시위원회가 들어섰지요 이때 벌써 남북 통일정부 수립은 이미 ‘루비콘 강’을 건넜어요 그러자 넉달 뒤인 6월 3일 이승만은 정읍에서 남한 과도정부 수립을 제안했지요 그해 12월 이승만은 미국으로 건너가 자신의 지론을 알리는데 온 힘을 다했어요 유엔을 통한 한국 문제 해결로 정책을 바꾼 때는 1947년 9월 이었지요 두달 뒤인 11월 14일 제2차 유엔총회는 남북한 동시 선거 결의안을 채택했어요 그러나 1948년 1월 소련은 유엔 한국임시위원단의 방북을 막았지요 그러면서 북한에서는 2월 8일 조선인민군이 창군되었으며 이틀 뒤에는 ‘조선임시헌법 초안’이 발표되는 등 북한 단독정부 수립 준비가 계획대로 끝나가고 있었어요 그러자 2월 26일 유엔 소총회에서는 남한만의 총선 실시를 결의했지요 이에따라 대한민국 역사이래 처음으로 실시된 직접비밀 투표가 5월10일 실시 되었어요 이때 200명의 국회의원을 뽑았지요 5·10 총선으로 구성된 제헌국회에서 7월20일 대통령으로 이승만을 선출하였으며 대통령은 8월 11일 장면이 이끄는 제3차 유엔총회 파견 대표단을 임명했어요 대한민국 정부수립이 선포되기 4일 전이었지요 드디어 1948년 8월15일 대한민국 건국이 선포 되었어요 남은것은 남한만의 단독정부를 유엔에서 승인받는 절차가 남아 있었는데 이승만 대통령의 유엔 승인 획득 전략은 치밀했어요 공산주의 팽창을 막는다는 점에서 이해가 일치하는 우방을 설득하는데 주력했지요 가톨릭 교단을 대표해 정계에 진출한 장면을 수석대표로 보내 세계 외교가의 ‘보이지 않는 손’ 로마 교황청의 지원을 얻게 했어요 각국 대표를 설득하는데 여성의 역할이 크다고 판단해 모윤숙·김활란 두 여성 대표도 포함시켰지요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제3차 유엔총회는 한반도의 운명이 걸린 아주 중요한 회의 였어요 1948년 12일 12일 일요일 오후 5시 15분 대한민국 승인과 신(新)유엔한국위원단을 파송해 통일을 도모할것을 결의하는 미국·중화민국·호주의 공동 동의안이 48대6(기권1)으로 가결되었지요 반면 이에 대항해 소련이 상정한 5·10 총선 결과 폐기와 유엔한국위원단의 해체 동의안은 46대6(기권3)으로 부결됐어요 이로서 유엔이 승인한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정부가 들어서게 되어 오늘날 자랑스런 대한민국이 되었지요 -* 언제나 변함없는 녹림처사:조동렬(일송) *-



    ▲ 나가사키 원폭 ...



    ▲ 히로시마 원폭기념 공원 ...



    ▲ 한반도 금단의 선, 38선 ...


    ▲ 김일성과 스탈린 ...


    ▲ 6.25전쟁의 원흉 스탈린과 김일성 모택동 ...


    ▲ 김구와 김규식이 자주통일을 위하여 38선을 넘는 장면 ...


    ▲ 이승만과 김구...


     

     

     

     

     

    출처 : 언제나 그자리에서
    글쓴이 : 유니코 원글보기
    메모 :